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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회화 繪畵 painting(영)

어떤 지지재(支持材)나 장소 위에 각종 안료를 써서 형상을 표현한 미술. 자기 표현이나 장식적 목적을 위해서 행해진다. 표현되는 장소, 지지재에 따라서 동굴화, 암벽화*, 벽화*, 제단화*, 타블로화* 등으로 분류된다. 표현 재료와 기법에 따라서는 프레스코*, 템페라*, 유화*, 모자이크*, 스테인드 글라스*, 수채*, 소묘*, 판화*, 콜라주*, 수피화(樹皮畵) 등으로 분류된다. 주제의 선택에 따라서는 구상*, 추상 및 역사화*, 신화화(神話畵), 종교화, 풍속화*, 정물화*, 그리고 추상화의 경우에도 서정적 추상*과 표현주의적 추상 등으로 나뉘어진다. 이런 기법, 양식*, 장식 대상, 장르*는 각 시대의 요청에 따라서 변화하며,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최대의 상형표현미술(象形表現美術)인 회화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

회화의 보존 및 수복

회화의 보존 및 수복 conservation and restoration(영)

영구적인 미술작품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작품의 변질을 억제하는 보존 및 수복(修復)이 중요한 사안으로 되었다. 보존작업은 정교한 기술과 재료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미적 감수성과 미술사 지식을 아울러 요구한다. 작품을 부패시키는 원인은 물리적인 손상과는 달리 항상 그림과 기저재(基底材, support)의 재료에 내재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원인 중 많은 부분은 적당한 조치, 또는 대기의 습도 등을 비롯한 환경상태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예방할 수 있다. 따라서 보존의 가장 중요한 일부분은 환경 요인에 대한 정기적 검사와 노후화의 진단이 가능한 적절한 환경에서 그림을 전시하고 안전하게 소장하는 일들이 포함된다.
그림의 기법, 재료, 상태에 관한 최대한의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 검사해 볼 수 있고, X선이나 방사선을 이용해 검사할 수도 있다. 보존 과정에서는 작품의 다양한 기술적 특징이나 병리학적 특징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그림의 물질적 구조는 기저재(벽, 패널*, 캔버스*, 종이, 동판, 상아 등), 밑칠 도료(塗料, ground;제소, 백묵, 적갈색 점토, 색소 등), 안료층, 표면 도장재(塗裝材), 바니시*, 납(蠟)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은 각각의 기능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층에서 생기는 다양한 형태의 부패를 상쇄시키는 것이 보완의 목적이다.
대부분 부패의 원인이 처음의 재료에 내재해 있으므로 재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실제로 임상적인 관심을 가장 흔하게 요구하는 것이 기저재와 표면이다. 이상적인 기저재는 그 기계적인 기능 외에도 물질적으로나 화학적으로 견고하고 화학작용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재료들 가운데서 이 점을 완전히 충족시키는 것은 거의 없다. 벽화나 프레스코*는 벽의 습기 때문에 부패한다. 패널화에서는 비교적 습기가 있는 대기의 변화가 목재의 수분 내용물을 변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목재의 크기를 변화시킨다.
안료와 도장재는 가변성이 높은 목재에서는 쉽게 부서져 떨어지기 쉬운데, 적절한 조치가 없으면 손상된다. 캔버스와 그 위에 입힌 바니시도 습기를 흡수하여 동일한 결과가 나타난다. 그 외에도 균규(菌類)가 침해하는 경우라든지, 캔버스가 약해서 찢어지고 부패하는 현상도 생길 수 있다. 수채화*, 소묘*, 그리고 판화*도 노후화가 일어나는데, 기저재에서 흔히 기인하는 것이다. 바니시로 표면을 입힌 최종층은 바니시가 마치 필름처럼 깨끗하고 색채가 눈에 띄지 않게 연속적으로 입혀져야 하기 때문에 복원작업에서 가장 섬세하고 어려운 부분이다. 바니시와 안료는 콜로이드이기 때문에 그 물질적 화학적 성질에 대한 전문가적인 지식이 있어야 작업 중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회화적

회화적 繪畵的 painterly(영) malerisch(독)

일반적으로 회화에 관한 사항을 형용사적으로 표현할 때 쓰는 수도 있으나, 미술사학 분야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즉 독일의 미술사학자 뵐플린Heinrich Wölfflin(1864~1945)에 의해 일반화된 표현으로서, 선적*(線的, 또는 조각적)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뵐플린에 따르면, 작품에서 선적이라 하면, 마치 손으로 만져질 듯이 윤곽이 강조되며, 조각적인 명확함을 지니고 표현되는데 반해, 회화적인 경우에는 그런 뚜렷한 구별과 윤곽은 없어지고 단지 명암, 색채 반점, 운동의 현상 만이 표현된다고 한다. 이 개념은 선화(線畵)나 조각, 건축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라파엘로Rafaello Sanzio(1483~1520) 작품에 비해 렘브란트Rembrandt(1475~1564)의 작품은 회화적이며 또 헬레니즘*의 조각, 로댕의 조각, 바로크*의 건축 등도 일반적으로 회화적이라 칭해진다.
근세 미술의 발전에 있어서 16세기의 르네상스*는 선적 양식이었던데 반해 17세기의 바로크는 회화적 양식이었다. 인상주의* 작품에서는 회화적 양식의 극단적 경우를 볼 수 있다. 한편 시대 양식으로서가 아닌 민족양식으로서 남유럽 미술은 선적, 북유럽 미술은 회화적이라 할 수 있다. 뵐플린에 따르면, 모든 미술에는 선적인 상태에서 출발하여 회화적인 상태로 옮겨가는 정신물리학적 발전법칙이 있다고 한다.

회화주의 사진

회화주의 사진 繪畵主義寫眞
pictorial photography(영)

사진* 표현의 목표를 미학적, 감정적, 지적인 효과에 두는 방법. 회화주의 사진가들은 사진의 주제보다는 그림 자체에 중점을 둔다. 회화주의는 이미지를 창조하는 물체, 즉 카메라와 사진이라는 도구를 사용한 자기표현의 한 형태로 정의될 수 있다. ‘회화주의’라는 용어는 비판적인 의미에서 사진 매체에 대한 이해 부족과 사진에 대한 ‘감상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사실상 회화주의는 1850년대 중반 발명된 사진이 예술을 생산할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었고 당시에는 ‘고급미술(high-art) 사진’이라고 불렸다. 여기서 회화적(pictorial)이라는 말은 곧 예술적(artistic)인 것의 동의어였다. 1890년대와 1900년대 초의 회화적 사진들이 인상주의 시대의 회화, 드로잉, 인그레이빙과 흡사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회화주의 사진은 기계적 사실성을 추구하기보다는 고무 인화법이나 합성 사진 같은 작위적인 암실기법을 사용하여 당시의 회화와 유사한 사진을 만들었다.
유럽에서는 제1차세계대전까지, 그리고 미국에서는 1930년대까지도 유행했었다. 회화주의 사진가로는 드마시Robert Demachy, 레일랜더Oscar G. Rejlander, 피치 로빈슨Henry Peach Robinson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현재의 회화주의 사진은 회화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완벽함, 신중한 구도, 예술적 표현에 대한 의식적 추구를 특징으로 하는 유미주의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사진을 의미한다.

획화기법

획화기법 劃花技法

중국 도자기 장식법 중 하나. 태토(胎土)로 모양을 빚은 뒤 유약을 바르기 전에 표면에 선을 새겨 문양을 표현하는 기법. 당말(唐末) 오대(五代)의 월주요*(越州窯)의 청자*에는 획화에 의한 모란당초문, 파도문이나 용*(龍), 새, 인물 등을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횡피

횡피 橫披 heng-pi(중)

동양화의 표구방법으로 좌우로 길게 표구된 족자형식을 말한다. 좌우 양 끝에 축대를 붙여서 가로로 긴 화면을 펼쳐 사용한다. 문련(門聯)의 일종으로, 상서로운 말 등을 문미(門楣)에 옆으로 길게 쓸 때 이 형식을 사용한다.

효경도

효경도 孝經圖

동양 고사인물화의 한 화제(畵題). 《효경》의 각 장면을 삽화로서 그린 것이다. 《효경》은 경서(經書)의 하나로, 공자孔子가 증자曾子를 위해서 효도(孝道)에 관하여 한 말을 기록한 책이다. 총 1권 18장(十八章)으로 이루어졌다. 효경도는 《효경》 18장의 경문에 의거하여 18개의 각 장면을 설명한 글과 그림을 그린 것으로 두루마리* 또는 책자본으로 되어 있다. 권선징악과 충효사상 등 유교적 내용을 그린 것을 권계화*(勸戒畵)라고 하
는데, 효자의 전기를 그리는 것도 권계화에 속한다.
한대(漢代)에는 권계적 내용을 지닌 인물화가 성행하였는데, 후한後漢 이래 화상석*(畵像石) 등에 많이 그려졌다. 그런데 효경도와 같이 권자(卷子) 또는 책자인 《효경》의 각 장(章) 글 뒤에 그림을 삽도하는 것은 북송北宋의 이공린李公麟(리꽁린, 1040~1106) 때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공린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것(프린스턴 대학) 외에, 원元의 문징명文徵明(원 즈엉밍, 1470~1559)의 글과 구영仇英(처우 잉)이 그림을 그려 합작한 작품(모두 대북 고궁박물원 소장)이 있다. 뒤의 것들은 모두 이공린의 수법에 따른 것이다. 또한 여성의 효행을 다룬 <여효경도女孝經圖>가 따로 있는데, 송의 고종高宗이 글을 쓰고 마화지馬和之(마 흐찌)가 그림을 그린 것(대북 고궁박물원)이 있다.

효제도

효제도 孝悌圖

민화*의 화제(畵題).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비롯하여 유교적 윤리관을 나타내는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의 여덟 글자를 시각적으로 도회한 그림으로 문자도(文字圖)라고도 한다. 글자획 속에 각 자에 해당되는 고사(故事)의 내용을 도시(圖示)하여 문자와 그림의 조합적 구성을 이룬다.

후광

후광 後光 glory(영) gloride(프)

‘할로(halo)’ 또는 ‘님부스(nimbus)’라고도 한다. 성인이나 사람의 머리를 원형으로 에워싸고 있는 신성한 빛 님부스는 아티카의 많은 꽃병에서 그리스의 신들, 특히 태양의 신인 헬리오스의 머리에서 화환 모양의 빛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이 빛으로 된 왕관으로 변형되어 이집트의 프톨레미우스 왕조의 왕들이 처음으로 신성의 상징으로 채용하였고 후에 로마의 황제들이 1세기경의 동전과 화폐에서 사용했다.
기독교 미술의 화가들이 사용한 단순한 원형 후광은 아마도 로마의 초상화*에서 유래된 것 같다. 폼페이의 프레스코*에서 이러한 단순한 후광이 몇몇 신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기독교의 황제들은 이교도 황제 숭배와 연관된 이러한 왕관을 용도를 바꾸어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4세기 중반부터 황제에게나 쓰이던 이러한 상징이 그리스도에게 쓰여졌고, 4세기 말부터는 신의 어린양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후광으로 장식되었다. 5세기경에는 천사들에게도 쓰여졌고 6세기에는 동정녀, 사도, 그리고 다른 성인들에게도 관습적인 상징으로 쓰여졌다. 이집트에서는 사각형의 님부스가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후광은 성자와 같은 등급의 사람만이 아니라 생존 인물에게도 쓰여졌으며, 그것은 그가 고매한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광은 중세 회화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는데, 장식성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성한 신분임을 나타내려는 목적에서 사용되었다. 15세기의 화가들은 이것을 크게 중요시하지는 않았는데,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을 원근법*상에서 보여지는 하나의 견고한 물체로 취급하였다. 이후에는 구성에 있어서 그 중요성이 훨씬 감소되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와 티치아노Tiziano(1485~1576)는 후광을 완전히 배격하였는데, 후에 반종교개혁 화가들이 다시 도입하였다. 1~2세기에 헬레니즘 미술*의 영향을 받던 간다라* 조각에서도 이러한 원형의 후광이 불상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인도와 극동지방도 이것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후기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後期印象主義
Post-Impressionism(영)

영국의 미술평론가 프라이Roger Fry(1866~1934)가 1910~1911년 겨울에 런던의 그래프론 화랑에서 기획, 개최한 전시회인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전>이란 표제에서 유래한 명칭. 그러나 특정한 예술운동, 단일한 경향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모네Claude Monet(1840~1926), 피사로Camille Pissaro(1830~1903), 시슬리Alfred Sisley(1839~1899) 등의 인상주의*와 단순한 점묘주의*로서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전개된, 보다 견고한 화면 구성을 구하려 했던 경향과 표현내용을 중요시했던 경향을 말한다. 여기에는 만년의 르누아르Auguste Renoire(1841~1919), 루소Henri Rousseau(1577~1640) 등의 화가도 포함되나,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고갱Paul Gauguin(1904~1948) 세 명만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3인 모두 초기에는 인상주의에 참가했으나, 세잔느는 인상주의 작품이 물체의 형태가 불꽃 속에 용해되어 공간 표현이 애매해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물체의 실제감과 고전적 작품의 견고한 화면 구성을 구해서 입체주의*로의 길을 열었고, 반 고흐는 정열적인 감정의 표현을 강하게 하여 표현주의*의 선구가 되었다. 고갱도 상징주의*적 색채를 짙게 써 인간의 생과 사, 영적인 것 등의 표현을 통하여 인상주의를 탈피, 그 순색의 넓은 색면에 의한 기법을 개발하여 야수주의*로의 길을 마련했다. 인상주의에서 일단 발전하여 그 개성적인 표현 방법을 확립하고 다음의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한 이 화가들을 일괄한다는 점에서 ‘후기인상주의’라는 용어의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