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백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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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Ode to Music 1402 말러 교향곡 제1번 D장조 ‘거인’ 〉(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50×270cm 2014 아래 고려대학교박물관 기획전시실 1층 전시장 전경

영혼의 울림, 베토벤과의 대화

음색은 색(色)으로, 선율은 선(線)으로, 음률은 형상으로 표현한 전시가 막을 올렸다. 작가 백순실의 〈영혼의 울림, 베토벤과의 대화〉가 바로 그것. 이번에 전시된 신작 14점 중 베토벤을 주제로 한 작품은 10점에 달한다. 작가는 베토벤의 음악을 ‘휴머니티’란 한 단어로 정의한다. 백 작가가 만들어낸 미술과 음악의 앙상블은 8월 28일까지 고려대학교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

인상의 기보(記譜)

김겸 |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 대표, 건국대 겸임교수

백순실의 작품은 기사에서 먼저 이미지를 접했다. 조그맣고 평평한 도판 속의 작품들은 작곡가와 작품명이 제목인 탓에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색면추상화의 일종이려니 하는 생각으로 전시장을 찾았다. 그러나 입구에서 ‘음악에의 헌정(Ode to music)-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61’과 마주한 순간,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도판 상에서 밝고 명랑하기만 했던 색면들은 모든 감각을 순식간에 깊은 심연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복원가라는 직업병 탓에 작품 표면을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단순한 평면 작품이 아니었다. 오돌토돌한 돌기들을 비롯하여 몇 차례 올린 색층은 어스름하게 밑층을 드러내거나 단단하게 쌓여 올라와 깊이감이 느껴졌다. 어떤 색면은 무광택의 단단한 질감을 가지고 있어 얼핏 파스텔이 두텁게 덮인 것 같았는데 오일스틱이라는 크레용 같은 유화구를 사용한 결과이다. 작가는 어느 때인가부터 유화의 첨가제, 희석제들이 풍기는 기름 냄새를 받아들이기 힘든 체질이 되었고 그 대체물로 유화스틱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작품의 커다란 주제인 클래식 음악과 차(茶)는 작가 아버지의 취미였던 동시에 20대에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충격을 벗어나게끔 도와준 오래된 벗이라고 한다.
모두 다른 곡명의 작품은 대지에 흙을 고르고 씨를 뿌리고 보살피며 몇 달을 기다려 무성해진 풍요의 땅이며 정성스럽게 가꾼 음악의 정원이다. 실제로 작가가 200호 캔버스를 바닥에 뉘어 놓고 적게는 3번에서 10번까지 색면을 올리고 문질러내고 다양한 입자의 퍼미스 젤(pumice gel)을 섞어 넓은 평붓으로 펴 발라 만들어 낸 돌기는 드넓은 대지를 연상시킨다. 임옥상이나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흙과 대지가 치열한 삶의 현장이자 어머니의 그을리고 주름진 손등이라면 백순실의 땅은 정성스럽게 일구고 가꾼 기름진 옥토와도 같다. 이 풍요의 땅 위에 작가는 담고 싶은 작곡가와 음악의 인상을 색면이나 색의 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바탕층을 올리는 행위의 즐거움과 결과를 기다리는 설렘은 의도와 우연성이 뒤섞이며 형태에 경쾌함을 더해주고 있다.
각각의 작품에 붙여진 음악과 이미지와의 인과성을 유추하기란 쉽지 않았다. 왜 이 작품은 베토벤 교향곡 1번이며 또 다른 작품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일까? 전시 제목이나 미리 접한 리뷰가 주는 오해를 없애고자 머릿속에서 제목을 비우고 무념의 상태로 바라보니 작품에서 음향이 들리기 시작했다. 표면의 작은 돌기들은 마치 오르골처럼 공간을 튕기며 잔향을 만들고 있었다. 수많은 돌기는 음표가 되어 선율과 리듬을 만들었고 쌓아올린 색의 단층은 음들이 쌓여 만들어내는 화성 같았다. 색상과 펄의 반짝임은 음색, 옅은 붓놀림 자국은 꾸밈음이나 즉흥적 악상을 연상시킨다. 백순실은 한때 모든 자신의 작품을 무제로 두었으나 감상자들과 좀 더 친밀한 소통을 위해 제목을 붙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작가의 본래 작품 창작의 태도가 서사적이라기보다 창작 동기나 개념을 은유와 함축으로 깊게 숨겨놓고 재구성하는 추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한다.

〈 Ode to Music 1404 베토벤 교향곡 제7번 A장조 Op.92 〉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50×270cm 2014

〈 Ode to Music 1404 베토벤 교향곡 제7번 A장조 Op.92 〉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50×270cm 2014

미술과 음악의 협연
예술사에서 인상주의만큼 미술과 음악이 잘 어울리는 시대는 없었다. 음악과 미술이라는 서로 다른 장르에서 동질성이 느껴진다는 것은 이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목적이 같았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는 소리를 통해 모네의 그림과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표현했다. 분명히 선율은 존재하지만 하나하나의 음색에 녹아들어 투명함을 만들어내고 있다. 드뷔시의 음악은 소리로 그린 그림과도 같다. 감각을 합리적이고 분석적으로 대상화했던 인상주의 화가는 영롱하고 찰나의 시간성을 지닌 빛의 물질성을 탐구하고 표현하려 했다. 모네의 수련 시리즈를 보면 점차 수련이나 수면을 암시하는 형태들이 사라지고 화면 전체로 퍼지는 빛의 느낌만이 남게 된다. 형태가 대부분 사라진 후기의 수련시리즈는 현상 저 너머의 세계를 찬미하는 상징주의나 표현주의를 지나 추상으로까지 나아간 듯 보인다. 클로드 드뷔시의 인상주의 화풍을 닮은 음악도 아주 흡사한 궤적을 그리며 전개되었다. 그의 초기 피아노 모음곡 ‘베르가마스크’(1890)는 명확한 선율을 통해 구체적인 대상성을 드러낸 반면, 후기의 모음곡 ‘영상’(1905)에서는 선율은 모호해지고 빠른 음들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찰나의 인상을 표현하고 있다.
상징주의 시인으로 모더니즘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보들레르의 ‘조응’ 혹은 ‘교감’이란 개념은 우주만물에 대한 인간의 정신적, 감각적 관계를 ‘교감하는 관계’로 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감 속에서 인간의 오감 역시 하나의 공감각으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미술사 서술방법에서 인상주의를 추상미술의 선구자적 위치에 두는 것이나, 음악사에서 현대음악의 출발점을 드뷔시의 관현악곡법으로 보는 이유는 조형예술의 형상과 음악의 명확한 선율이 사라짐과 연관이 있다.
재현과 서사의 수단으로서 예술이 표현과 추상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인상주의 음악이 조형예술의 시각적 감각을 모방하는 것에서 출발했으나 이후엔 오히려 조형예술이 음악의 추상성을 닮아갔다. 괴테가 건축을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표현한 이래 19세기 영국의 평론가 월터 페이터는 ‘모든 예술은 음악적 상태를 갈망한다’고 할 만큼 점차 음악과 다른 예술장르간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칸딘스키의 ‘구성’, ‘즉흥’, ‘인상’ 시리즈에서도 음악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03년 멘델스존의 피아노 모음곡을 연상시키는 ‘무언가’라는 타이틀로 122개의 목판화 연작을 발표하기도 했다.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개최된 칸딘스키 추상화전 카탈로그에서 독일 화가 브루노 하스는 ‘칸딘스키의 색은 서로 공명하여 시각적 화성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표현했다. 선율을 없애기 위해 조성자체를 해체한 추상음악의 선구자 아놀드 쇤베르크와 칸딘스키가 친구이자 예술적 조력자가 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던 파울 클레의 선율과 음색을 색면의 흐름으로 표현한 작품은 무반주 바이올린 모음곡을 연상하게 한다. 클레는 악보 자체에서 조형미를 발견하여 오선지와 음표의 이미지를 차용했으며, 존 케이지는 적극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악보와 조형예술로서의 이미지를 융합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흥미롭게도 작곡가 야니스 크네나키스나 피에르 불레즈의 악보는 조형예술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백순실의 작품은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조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캔버스 안에 선율, 음색, 리듬, 화성과 악장 구조를 모두 넣어 굳힌 3차원의 풀 스코어와도 같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악보만 보아서는 어떤 곡인지 알기 힘든 것처럼 백순실이 캔버스 위에 기보(記譜)한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곡들 또한 쉽게 이해하긴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작가의 의식 안에서 재해석되고 조형화된 거대한 음향의 인상들이 바탕칠을 올리고 문지르며 색면을 구획하거나 빠르게 올리는 행위를 통해 복기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번 전시작품 가운데 말러의 교향곡 1번과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은 개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말러 교향곡 1번’의 경우 밝고 때때로 경쾌한 선율을 가지고 있지만 이따금씩 들려오는 불안한 화성과 곡의 부제인 ‘거인’을 연상시키는 3, 4 악장의 거대한 울림이 크게 분할된 화면 속에 보였다. 춤의 교향곡이라고도 알려진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의 경쾌함이 넓은 화면에 역동적으로 펼쳐진 가운데 2악장의 조용한 장중함이 화면 가운데에 놓여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작품은 각 제목의 작곡가나 곡의 인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진 않고 있다. 예를 들면,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는 내게 ‘황제’로 보이지 않는다. 내 마음 속 ‘황제’ 협주곡의 ‘격정’이나 특히 좋아하는 3악장의 ‘승리, 환희’ 같은 인상이 강렬한 색상의 상승하는 이미지가 되어 느린 2악장을 배경으로 치고 올라오는 형상이었다면 금세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익숙한 곡을 익숙한 방법으로 연주한 레코드를 듣는 경험 같은 것이리라. 그러나 예상치 못한 해석과 파격적인 연주를 접했을 때의 충격과 설렘이야말로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운 연주가와 새 음반을 기다리는 이유이자 감상의 즐거움이 아닐까.
예술가의 삶이 모두 다른 경험을 바탕으로 하듯이 모든 예술작품은 다르고 새로울 수 있다. 이론을 공부하며 딴에는 귀명창이 되어 물든 나쁜 버릇이 예술작품을 범주화하여 설명하고 서구의 이론에 끼워 맞추어 재단하는 것이다. 다행히 오랜 시간 복원일을 하며 작가의 붓 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작품 표면을 마주하다 보니 평면 속에 감추어진 물감의 깊이와 함께 창작의 시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백순실은 음악과 차를 즐기며 그리고 창작하는 삶을 살고 있다. 지나치게 애쓰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자연스레 담아내고 있으므로 우리가 바라보는 베토벤은 화가 백순실의 베토벤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