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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 인물 (2)

2014년 5월호에 첫 연재를 시작한 〈이태호 교수의 진경산수화 톺아보기〉가 이번 호를 맞아 일단락된다. 때마침 이태호 교수가 기획한 〈한국미술사의 절정展〉이 2월 15일부터 28일까지 노화랑에서 열렸다. 전시를 통해 우리 미술사의 절정을 톺아보는 그를 만났다. 인터뷰에서 그는 작품성에 비해 저평가된 옛 유물과 과거 민주화운동, 현 시국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진심 어린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좋은 그림 실컷 보며 나름대로 인생을 즐겼습니다. 너무나 행복했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태호의 ‘절정’은 지금 이 순간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미술사 인생 이모저모를 들어보자.

변곡점을 맞은 한국미술사가 이태호의 절정

2004년 노화랑에서 연 〈20세기 7인의 화가들〉 이후 13년여 만에 갖는 기획전입니다. 우선 전시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네. 〈20세기 7인의 화가들〉을 기획한 때가 2004년이었어요. 그때부터 노승진 노화랑 대표와 이와 유사한 전시를 꼭 다시 하자는 논의를 꾸준히 해왔고, 드디어 이번 2월에 〈한국미술사의 절정〉을 개최하게 됐습니다.

지금 시기에 〈한국미술사의 절정展〉을 연 이유가 특별히 있는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지속적으로 논의는 해왔지만 우리 둘 다 적절한 타이밍을 잡지 못했어요. 그러다 지난 2016년 6, 7월 무렵 ‘한국미술사의 절정’을 얘기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그 아이디어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좀 말씀해주세요.
그동안 연구해온 자료를 정리해서 그걸 토대로 최근 몇 차례 강의를 진행했어요. 그중 이번 전시의 기틀이 된 건 2012년 8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한 ‘한국미술사의 라이벌’ 강좌입니다.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 대향 이중섭과 미석 박수근, 그리고 연암 박지원, 고암 이응로, 수화 김환기를 더해 조선 후기 도공부터 김환기까지 12명의 작가를 통해 우리 미술의 지난 300년을 되짚어 보는 내용이었습니다. 총 5차례 진행한 그 강의는 제게 조선시대와 근현대의 경계가 해체된, ‘우리’의 미를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 보는 계기가 되어줬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많은 혼란기와 식민지시대를 겪으면서 우리의 문화유산과 예술작품이 턱없이 저평가되었죠. 그렇게 안 좋은 상황을 다시 회복시켜 놓은 사람이 바로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입니다. 무척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과 중국만 봐도 이 세 작가의 스타일을 찾을 수 없어요. 우리 고유의 현대 형식을 그들이 일궈낸 셈이죠.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추구한 근본적인 아름다움은 다름 아닌 ‘조선미(美)’라는 겁니다. 저의 이러한 깨달음을 좀 더 구체화할 수 있었던 계기는 2016년 K옥션 아카데미에서 ‘한국미술사의 거장, 조선과 근대 12인의 화가’를 주제로 진행한 강의와 현장답사 수업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이 두 경우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절정’을 키워드로 그에 맞는 작가를 찾아보자고 제안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전시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한국미술사의 절정展〉에 참여한 작가 모두 한국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들이더군요. 교수님과 노 대표님 두 분의 노고가 컸을 듯합니다.
얼마 전 전시장을 다녀간 분이 인터넷 사이트에 이런 평을 남겨 주셨어요. “미술사가와 화상과 소장가의 콜라보레이션이 잘된 전시”라고. 40여 년간 미술사가로서 개인 소장가의 작품을 발굴하며 논문을 쓰고 발표해왔어요. 그리고 노 대표는 40년 동안 화랑을 운영하며 두터운 인연과 신뢰, 경험 등을 쌓아왔고요. 우리 두 사람의 연륜을 조합한 결과물이 이번 전시로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노화랑이 올해로 창설 4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40주년을 내세우자고 제안했지만 노 대표가 극구 반대했어요. 본인 때문에 전시의 의미가 퇴색되는 걸 원치 않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370억 원이 넘는 보험가액과 야간 경비 비용 지출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전시기간 동안 전시장에서 함께 작품을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득도하는 모습에서 단지 그림을 사고파는 화상이 아닌 ‘문화사업’으로써 미술계에 보답하고 싶다고 한 그의 깊은 뜻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고 전하고 싶네요.

전시 제목에서 유독 ‘절정’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미술의 절정은 언제였는지 고민해본 적은 없었거든요. 교수님께서 보시는 한국미술의 절정은 언제인가요.
도록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데요. 우리의 역사에서 ‘절정’의 위업은 그 어느 때보다 변동의 시기를 겪으며 이룩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조선 후기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거치고 조선이 몰락한 후엔 식민지와 분단 시대를 연이어 겪었습니다. 분단 상황이 여전한 가운데 남한은 근대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격변을 또 한 차례 겪어야 했어요. 그러한 시대를 지나오며 우리는 승리와 좌절을 맛보고 패배감과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이 300년이란 시간 동안 한국미술사에서는 가장 조선적인 것 또는 한국적인 것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가들이 배출됐어요. 그야말로 ‘절정’이 창출된 시기인 셈이죠.

지난 300년이 한국미술의 절정이라고 보신다면. 지금 우리의 미술은 어떤 위치에 있다고 보시나요.
그렇지 않아도 ‘절정 그 이후’에 대해 생각을 했어요. 한국미술의 과거를 돌아보면, 1960~1970년대에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을 수용하면서 앵포르멜과 단색화 물결이 이어졌고,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을 계기로 민중미술이 운동처럼 떠올랐죠. 광화문광장에서 펼쳐지는 촛불집회의 정신이 그때부터 이어져온 게 아닐까 싶네요. 저도 그 열기에 함께 호흡하며 “과연 우리가 지금의 하강기를 딛고 또 하나의 절정기를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린 절정을 찍고 난 후 하강하는 지점 어딘가에 위치하는 것 같습니다. 단색화, 민중미술에 이어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디지털아트까지. 하강기이면서 혼란기인 것 같아요. 현재 한국 사회가 퇴행 몰락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잖아요? 이번 전시를 통해 앞서 말한 저의 의구심이 실현될 수 있기를,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지금 이 같은 ‘절정’의 작품들을 톺아보며 민주주의 사회가 성숙하고 문화의 격조가 상승하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리홀아트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미술사가들이 사랑한 질그릇과 무낙관 그림전〉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전시에 참여한 윤용이, 유홍준, 그리고 저, 이렇게 우리 세 사람은 미술사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친했습니다. 윤용이 교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함께 근무했었고 유홍준 교수는 《월간미술》의 전신 《계간미술》 기자로 일하면서 알게 됐죠. 저흰 유독 사람들이 눈길을 잘 주지 않는 토기나 질그릇, 민화, 무낙관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미술사적 감동에 관심을 뒀어요. 유 교수는 “사람들이 사지 않는 게 화가 나서 샀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것을 볼 때마다 눈물겨워 구입하게 됐어요. 근대 수묵화의 작품성이 뛰어남에도 대다수가 서구 미술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안타까웠죠. 마침 명지대 미술사학과를 졸업한 제자 리우식이 성북동에 갤러리를 개관하는데 개관 기념전으로 저희 세 사람이 소장한 유물들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어요. 처음엔 잠시 망설였지만 학문적 도반으로 한 생을 같이하며 명지대 미술사학과를 세운 보람을 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생각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오전에 전시장을 방문했는데 관객이 정말 많았습니다.
제작한 도록이 다 떨어졌다고 하니 반응이 좋은 게 아닐까요? 사실 예상하지 못햇습니다.

작품을 구입할 때 교수님만의 특정한 기준이나 취향이 있나요?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것 위주로 보는 편입니다. 토기의 경우 평범하지만 굉장히 아름다운 게 많아요. 신라 이전 토기, 질그릇을 보면 한국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고려 청자, 조선 백자도 작품성 면에서 좋긴 합니다만,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태나 제작방식 등이 변형된 부분이 있죠. 그래서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백제 시대의 항아리도 백자 달항아리 못지않게 매우 아름답습니다.

이제 교수님 개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네요. 저희 《월간미술》과는 2015년 5월호부터 오는 3월호까지 12번의 연재를 하셨는데요. 교수님 인터뷰를 앞두고 첫 회를 읽어보았습니다. 본문글에 앞서 “이 연재는 나로서는 조금 부담스럽고 색다른 시도”라는 말이 쓰여 있더군요. 그동안 《월간미술》 독자들과 만나온 소감을 짤막하게 말씀해주세요.
지난 연말에 정년 기념강연을 준비하며 그 동안 쓴 글을 세어 본 적이 있어요. 무려 583편이나 되더군요. 논문만 보면 180여 편 정도 될 것 같아요. 글 목록을 죽 훑어보니 대체로 청탁을 받고 쓴 글이었어요. 그런데 《월간미술》에 연재한 글들은 제가 ‘쓰고 싶은’ 글이에요. 미술사를 연구해온 40년의 시간을 되돌아보고 정년을 앞둔 나 스스로에게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 제가 먼저 제안했죠. 12편의 〈진경산수화 톺아보기〉 연재를 통해 서울 전체를 아울러 봤어요. 서촌 필운대에서 시작해서 인왕제색도, 한강, 그다음에 북한강, 동대문파, 도봉산, 북한산, 이번 3월호에 실리는 서대문파까지. 한편으론 2010년에 쓴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2011년 우현 고유섭 학술상 수상)를 좀 더 세부적으로 다룬 겁니다. 처음으로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원 없이 글로써 담아내고 수묵스케치를 해봤네요. 주변 지인들의 반응도 좋았던 것 같아요. 연락도 많이 받았거든요.

연재 글을 모아 책을 출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계획하고 있어요. 퇴임 후엔 ‘서울산수연구소’ 설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 동경, 북경, 파리, 베를린, 뉴욕 등으로 진출하고 싶어요(웃음). 사실 연재를 계속하고 싶긴 했습니다. 그러나 정년과 함께 백수가 되고 주변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았어요. 5~6개월 정도. 정리가 끝나면 다시 서울 연재를 시작하고 싶어요. 그땐 서울 전체가 아닌 ‘서울의 속살보기’를 콘셉트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생각해두신 얘깃거리가 있다면요?
서촌의 옥류동 계곡 등지에 아름다운 풍경이 굉장히 많아요. 또 북한산도 전체만 봤지 면밀히 들여다보면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긴 숨은 명소가 많습니다. 그러한 곳들을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어요. 나도 그렇지만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온 자연 풍경이 알고 보면 작품 속에서만 봐온 인왕산, 보현봉, 문수봉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 좋잖아요? 서울의 이야기를 보다 지엽적으로 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 부탁드려요.
그동안 좋은 그림 실컷 보며 행복했습니다. 나름대로 인생을 즐겼다고나 할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겠지요.

진행 ㆍ정리 = 곽세원 기자

이 태 호 Lee Taeho
1952년 전라북도 옥구읍에서 출생했다. 1974년 홍익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8년 홍익대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8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로 근무했다. 1982년부터 전남대학교 교수, 2003년부터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2016년 2학기에 정년퇴임했다. 전남대박물관장, 명지대박물관장, 문화재위원, 홍성 고암이응로생가기념관 명예관장, 한국은행화폐도안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까지 ‘고구려고분벽화’ ‘진경산수화’ ‘초상화’ ‘근대미술’ ‘민중미술 관련 논문 평론 등 600여 꼭지의 글과 저서 25권(공저 포함)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