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People]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 최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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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이 뿌리라면 예술은 꽃입니다”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을 처음 만든 사람은 간송 전형필이다. 그리고 지금의 간송미술관이 있게끔 이끌어온 주인공은 가헌 최완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송미술관의 학예연구실 격인 한국민족연구소 최완수 소장은 겸재로 대표되는 진경시대를 세상에 널리 알린 학자이자 추사 김정희 연구의 최고 권위자다. 최 소장은 간송 전형필만큼이나 세상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않는 인물이다. 최근 《추사집》 개정본을 내고, 10월 12일부터 26일까지 2014년 가을 정기 전시로 <추사정화전(秋史精華展)>을 개최한 최 소장을 간송미술관 보화각 2층 연구실에서 만났다.

1976년 5월 초판이 나온 이래 38년 만에 《추사집》 을 다시 펴내셨습니다.  제 욕심이 한정 없이 발동해서 이렇게 오래 걸렸나 봅니다. 그래도 너무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순서를 정해놓고 일정에 맞추느라 아주 혼이 났지요. 교정과 편집이 쉽지 않았지만 출판사(현암사) 직원들이 잘 대처해줬어요. 내가 까다로운 사람인데, 내 안목에 찰 만큼 능력 있게 해줬어요. 38년 전과 비교도 안될 만큼 지금은 제작환경이 좋아졌지만, 의외의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어요. 요즘 젊은 세대(편집자)가 한자를 너무 모른다는 거였죠.
언제부터 개정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하셨나요?  초판이 나온 직후부터, 그러니 38년 동안 내내 수정을 하고 있었다고 봐야죠. 그때는 책이 뭔지도 모르고 번역하는 데 급급해서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던 것 같아요. 추사의 문장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아서 오류가 눈에 띄는 대로 계속 고쳐왔어요.
선생님과 간송(澗松) 전형필 선생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혜곡(兮谷) 최순우(1916~1984) 선생의 주선으로 맺은 간송가(家)와의 인연은 그야말로 운명적입니다. 그럼에도 간송선생과는 직접 만나신 적이 없는데?  간송선생이 돌아가신 건 1962년이고, 나는 1966년 4월, 스무다섯 살 때 간송미술관에 처음 왔어요. 당시 이 일대는 모두 포도밭이었고, 성북동에서 가장 높은 최신식 건물이던 보화각(寶華閣)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었죠. 사실 간송선생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는 간송이 누군지도 잘 몰랐어요. 그분은 광복 직후 보성고등학교 교장 잠깐 맡은 거 외엔 평생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니까요. 간송은 일절 소문내거나 드러내지 않으셨어요. 옛말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그러니까 지금껏 간송의 유산이 지켜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에서 사학(史學)을 전공하셨어요?  역사 공부를 안 하면 미술사를 할 수 없어요. 요즘 서양미술사는 물건만 봐요. 식물학도 표본만 보고는 알 수 없잖아요. 미술사 자료 가운데 역사자료는 기록으로 남긴 자료라서 기록자의 시각이 투영돼 있죠. 여차하면 흑(黑)이 백(白)이 될 수 있는 자료란 얘기죠. 개인의 일기조차 자기한테 불리한 얘기는 안 써요. 그러니 역사기록이라는 건 그렇다는 전제를 하고 공부해야 하죠. 이렇듯 미술자료라는 건 한 시대 문화역량의 총아입니다. 내가 늘 하는 얘기지만, ‘이념이 뿌리라면 예술은 꽃’입니다. 그중에서도 미술, 즉 조형예술은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으니, 보고도 믿지 못하면 어쩔 수 없어요. 제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미추(美醜)를 판단 못하면 미술사를 공부할 수 없어요. 그 능력이 있어야 예술사, 미술사를 할 수 있어요. 결국 역사를 알아야 미술사를 알 수 있고 미술사를 알아야 진정한 역사를 알 수 있는 법입니다.
선생님과 일군의 후학을 일컬어 간송학파라고 칭합니다. 간송학파의 학풍은 무엇인가요?  간송학파란 앞서 얘기한 사관(史觀)에 입각해,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우리의 역사를 긍정적인 사관으로 평가하자는 겁니다. 일제 식민사관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기술해놨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슬픈 민족이고, 비참한 민족이고, 정체된 민족이라고 기술해놨어요. 그렇다고 일본사람들이 사료 자체를 날조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여태껏 그 논리에 꼼짝 못하고 끌려 다닌 거죠. 사료를 날조했으면 날조했다고 따질 텐데 그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세요. 좋은 시기일수록 자신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냉철하게 자기를 반성하는 기록을 남겨놓습니다. 개인도 그렇잖아요. 건전할 때 자기에게 스스로 비판을 가해요. 하지만 망조(亡兆)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태평성대라고 해요. 망조를 이끄는 주역들이 만든 기록이니까, 이때가 좋은 시대라고 기록을 남겨요. 그래서 사실은 양당(兩黨) 이상이 존재할 때가 이상정치 시대예요. 내가 주장하는 진경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였죠. 치열한 당쟁이 전개되던 시기란 말이에요. 그런데 실제로 그때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당쟁 당사자들이 기록해놨어요. 그러니까 그걸 보고, 일제가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조선은 당쟁 하다가 당쟁 때문에 망했다고. 하지만 정작 당쟁 때문에 망한게 아니라 오히려 당쟁 때문에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절정기를 맞은 거죠. 이건 현재도 아주 간단한 상식이에요. 양당 이상의 당이 존재하며 서로 견제하면서 이상정치가 이뤄진단 말입니다. 일당 독재를 할 때는 견제세력이 없으니 자화자찬을 합니다. 일당 독재는 망하는 길이에요. 조선도 척족 세도가가 등장해 독재를 하면서 태평성대라고 기록돼있지만, 실제로는 백성은 한정 없이 도탄에 빠져 힘들었어요. 이런 잘못된 역사관을, 그걸 밝히는 게 간송학파의 학맥이고 경향입니다.
그럼 간송학파에 속한 학자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누구누구가 간송학파라고 얘길 할 수 없어요. 내 학풍에 공감하고 내가 인정하는 제자들이 모여서 묵묵히 공부 할뿐이죠. 봄 가을 정기 전시 기간 외에 연구자는 계속해서 공부합니다. 각자 여러 분야를 연구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기 공부를 하는 거죠. 요즘 세태가 마치 홍수처럼 한쪽으로 휩쓸려가는데 거기에 안 쓸려가고 우리의 독자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매번 정기 전시에 맞추어 발행되는 《간송문화(澗松文華)》가 간송학파의 실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1971년부터 시작해서 이번에 87호에 이르기까지 여태껏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지속됐죠. 어떤 국가기관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간송문화(澗松文華)》야말로 간송학파, 학풍의 결정체로 봐야죠.
어떻게 변함없이 이렇게 오랜 세월 한결같이 한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을까요? 기본적으로 간송의 정신과 내 생각이 일치해서입니다. 그분과 내가 지향하고 지향하려 했던 방향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서로 대타협을 이뤘다고 봐요. 나의 학문적 지향점을 실현하고 유지하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가 이곳이고, 적합한 선구자가 간송이라는 걸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간송이 일제강점기에 전력을 기울여 문화재를 수집하고 지킨 것은 우리 문화의 독자성과 우수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였습니다. 나 또한 그것을 평생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간송의 뜻을 이어온 겁니다.
얼마 전 DDP에서 전시가 열리기도 했지만, 과거 간송미술관은 관람객에게 친절하지 않았던게 사실입니다. 불평불만과 요구사항도 많았는데요?  모든 층이 다 만족하고, 만족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간송미술관은 애당초 입장료도 안 받았고, 돈과 상관없이 시작한 전시니 관람객이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기부터 그랬으니까요. 삼성미술관 리움은 쾌적한 공간에 전시물을 오래 걸어놔도 견딜 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해요. 각기 형편이 다른거죠. 리움은 리움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이번 <추사정화>전에 처음으로 예약제를 시행했는데, 경험해보고, 실험해보고 개선할 것은 개선해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간송문화재단 쪽 일은 내가 잘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공부하시는 시간 외에 휴일이나 여가활동 등 소소한 일상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휴일이 있을 새가 없이 살았으니까. 공부 안 할 때가 있어야지(웃음) 그저 꽃 기르고 기이한 새 기르고…, 지금은 힘이 부쳐서 다 나눠주고 없어요. 미술사 하는 사람은 당연한 거지요. 취향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아름다운 것을 보면 거기에 취해서 다른 건 안보이니까. 가끔씩 여행이나 고적 답사 가서도 평소 못 보던 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주인을 찾아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꼭 분양 받아오곤 했답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운전도 안하시죠?  난 평생 손목시계도 안 차본 사람입니다.(웃음) 그만큼 늘 곁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얘기고, 지금은 완전히 제자들 도움으로 살고 있는 거라고 봐야죠.
완전히 인간문화재시네요?  인간문화재라, 그 이름이 천박해서.(웃음)
후학들 외에 평소 주로 어떤 분들과 교류하시는지요?  많지는 않지만 고등학교시절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고 함께하는 친구가 예닐곱 명 됩니다. 공부하는 일이 외롭고 적적하고 힘들지만, 그때마다 물심양면으로 후원 격려해주는 옹위세력이죠.(웃음) 전시 열어놓고 누가 와도 내려가서 설명하지 않지만 그 친구들한테만은 꼭 설명해준답니다.
외람되고 무식한 질문입니다. 겸재와 추사(의 시대)를 우열(優劣)로 견주어 평가한다면 어떤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겸재와 추사 모두 조선후기 문화절정기를 장식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추사는 조선후기 사회가 멸망기로 접어드는 내리막길이었던 시대를 살았죠. 다시 말해 새 시대를 열어야 할 시기, 즉 진경문화를 일으켰던 조선 성리학 시대를 청산하고 새 사회를 열어야 하는 시기, 새로운 이념의 시대를 열어야 할 당대의 기수 역할을 한 인물이란 말입니다. 반면 겸재는 진경문화를 절정을 열어간 주인공이고요. 진경시대는 청나라를 완전히 라이벌로, 심지어 오랑캐로 여겼어요. 그러면서 조선이 중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진경산수와 풍속화를 창안했습니다. 그런데 추사는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면서, (여기서 추사에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진경사회를 부정해야 하는, 부정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겸재(1676~1759) 사후 약 30년 후에 추사(1786~1856)가 태어납니다. 그토록 단기간에 문화적으로 이렇게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합니다.  겸재는 추사의 고조부 세대 사람입니다. 충분히 바뀔만 할 시간이죠. 문화란 파도와 같이 늘 변합니다. 문화가 발전했다고 끝없이 지속되는 건 아닌 것처럼, 왕조가 바뀌는 것 역시 문화가 기멸(起滅)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죠. 늘 하는 얘기지만, 내가 역사를 통괄해 보니까 그 기간이 대체로 250년 정도 되더군요. 중국이나 일본은 그 기간에 딱딱 맞게 왕조가 바뀌었는데 우리 조선만 500년 동안 유지됐어요. 우리 선조가 중국문화에 현명히 대처하고 대응, 대항하면서 우리 문화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지켜온 거죠. 조선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중국이 문화적으로 앞선 선진이니까,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받아들인 상태로 충분히 소화하면서 250년을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동화되거나 따라가지 않고 심화 발전시켜 우리 것을 만들었지요. 이렇게 조선은 중국 것을 우리 것으로 완성시켜 다시 250년을 살아온 거죠. 성공적인 후기 문화란 항상 ‘고유성’, ‘독자성’, ‘완결성’을 보여줍니다. 조선후기 완결성의 대표적인 결과가 바로 진경산수와 풍속화고, 서예에서도 그 완결판을 보여주는 게 바로 추사의 추사체입니다. 물론 진경시대에 ‘동국진체(東國眞體)’가 있었고, 그것이 있었기에 추사체라는 세계적인 서체를 완성시킨 거지만, 중국 역대 서법의 특징과 장점을 융합해 추사체를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더 주목해야 합니다. 이렇듯 추사는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서 우리 독립성을 처음부터 이뤘지요.
결국 추사 쪽으로 조금 기우시는 군요.(웃음) 추사를 연구할 때는 안타까워요. 겸재를 연구할 때는 갈수록 신바람이 나는데 말입니다. 겸재는 우리문화가 절정기 독자성 발현할 때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추사는 아쉬워요. 자꾸 망조로 들어가니까 공부하며 아주 힘들어요. 추사 개인사적인 입장에서도 비참해서 참 안타깝고 마음 아파요. 반면 겸재는 시대를 정말 잘 만난 사람이죠. 겸재는 기세가 하늘로 뻗는 시대를 만났고 추사는 내리막길을 만난 사람이잖아요. 새 시대의 기수를 자처하기에 딱 좋은 시기였으나, 좌절당하고 그러면서 나라는 망해가고….
요즘 화가들이나 그들의 그림을 보면 어떠신가요.  새로운 화풍을 창조한다는 것, 새로운 예술의 경향을 창조해서 이끌어가는 사람은 결국 인문학자, 선비들이에요. 생각할 능력이 있고 이념을 자기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일컫는 거죠. 선진 문물이나 전통을 자기 나름대로 제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인문학자입니다. 일반 기술자는 이념기반이 없어서 진정한 의미의 창조를 못 합니다. 단원이나 혜원 같은 사람은 창조자라기보다는 화려한 대미를 장식한 사람이죠. 화려한 기법, 기교를 부려서 마무리는 짓되, 새로운 기법을 창조하지는 못했어요. 지금 그런 분위기를 바꾸려면 인문학자인 화가가 나와야하는 데, 그건 이념기반이 확립되기 전에는 불가능해요. 앞서도 얘기했듯, ‘이념이 뿌리고 예술이 꽃’이에요. 지금은 뿌리가 형성이 안되어 있어요. 지금 세상은 완전히 미국뿌리를 옮겨 논 상태에서 미국뿌리로 살고 있어요. 요즘 화가들은 동양화 그리라면 미국 동양화를 그려요. 발상이 그렇고 사고한계가 거기 있으니까 좋은 그림이 안 나와요. 한편으론 이런 상황은 자연스러운 이치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면 미국 따라갈 수 있을까 거기 모두 매달려 있어요. 하지만 나는 그걸 무작정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지는 않아요. 이게 우리 문화 발전의 동력이에요. 이 과정을 거쳐야 우리문화의 독자성이 나오게 돼요.
아이쿠! 이번호에 함께 실릴 손동현 작가 작품 보시면 놀라시겠네요.(웃음)  지금 내가 하는 이런 주장은 욕 얻어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아요. 남보다 상당히 앞서 있으니까.(웃음)
외국 여행은 가보셨나요?  한 번도 가본 적 없어요. 불상 연구할 때도 한 번도 안 가봤어요. 그래서 내 불상 연구를 가짜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웃음) 그렇다면 할 말 없지만,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서울 얘기 더 잘해요.(웃음) 우리의 공부 경향이라는 게 외국 가서 공부해야 제대로 된 공부고 국내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안 가도 할 수 있다는 오기가 있었어요.
밤늦게까지 공부하시나요?  아니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요. 옛날 선비들도 그랬어요. 승려들이 그렇듯이 술시(戌時, 저녁 7~9시)에 자고 인시(寅時, 오전 3~5시)에 일어나요. 뭐든지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그래요.
오랜 말씀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사진 한 장 찍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은 두루마기를 입고 찍어야 하는데…. 대담할 때는 상관없지만, 이 저고리는 속옷 차림이니까.(웃음) 이준희 편집장

가헌(嘉軒) 최완수는 194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 4월부터 간송미술관에서 근무하며 연구실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제10회 일민문화상(2012), 제21회 위암장지연상 한국학부문(2010), 우현학술상 미술사분야(2010) 등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추사집》,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1, 2》,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겸재의 한양진경》, 《겸재정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