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조해영 – CINNABAR GREEN DEEP

조해영 – CINNABAR GREEN DEEP
갤러리 비케이 2.18 – 3.23

조해영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 들어서면 풍경이 연상되는 초록색(전시제목도 cinnabar green deep)을 변주한 작품들이 펼쳐져 있다. 좀 더 유심히 보면 이 초록색의 화면들은 몇 가지로 나눠지는 다른 질감과 표면을 가지고 있다. 유사한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한 작품이지만, 조금은 이질적이고 다른 분위기의 화면을 보여주는 이유에 대해 작가는 자신이 채집한 각각의 풍경을 충실히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작가가 풍경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낯선 공간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자신과 외부환경이 서로 확신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지각이나 판단이 매우 불완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분명히 거기에 있었지만, 좀처럼 확신할 수 없는 대상으로써 ‘장소’를 선택하게 되었다.
작가가 이러한 장소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일견 풍경처럼 보이지만, 어떤 장소 일부분을 절취하여 그 표면을 다루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작가가 선택한 대상이 실재하는 장소이지만 어떤 시간과 공간을 연상시키거나 인식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나 상황을 담지 못하게 하려고 선택한 방법이다. 즉 공간적 특성이 드러날 만큼 화면의 프레임이 충분히 넓지 않게 구획을 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잔디 운동장의 일부만을 잘라 내어 격자만이 보이도록 하고, 그 부분조차 도식적인 이미지로 공간이 풍기는 개성을 지워 흐릿하게 한다.
이미지의 경계면을 잘라 대상을 다루게 되면 구체성을 인식할 수 없게 되고 답답함과 낯섦으로 장소의 표면이 화면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화면은 결국 색면으로 재구성되고 표면이 강조되면서 패턴화되고 추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 어디에라도 있을 것 같지만 생경한 풍경(의 표면)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각각의 기억 속 장면으로 다시 화면을 유추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화면의 바깥으로 밀려나간 숨은 장소의 기억과 서사가 추상화된 표면을 통해 주관적인 시선을 주고받도록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임종은・아트센터 화이트 블럭 큐레이터

[Review] 이상원 – THE MULTIPLE

이상원 – THE MULTIPLE
영은미술관 3.1 – 30

이상원은 2006년부터 일상에서 사람들이 여가 생활을 즐기는 모습을 표현 대상으로 삼아왔다. 그의 작업에서는 공원에서 걷고 뛰는 사람들, 스키를 타는 사람들, 수영을 하거나 스포츠 경기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속적으로 보였다.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여가활동의 종류는 다르지만 스키나 수영, 걷고 달리는 사람들은 지역이나 시간에 관계없이 서로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상원은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여러 사람이 취하는 공통된 자세와 행동을 패턴화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모여있는 군중의 모습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의 단편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 제목인 ‘multiple’은 이런 관점에서 서로 다른 인물의 집합을 보여주는 소재적 측면과 함께 최근 이상원이 집중하는 회화 매체에 대한 다양한 시도를 의미한다. 이상원의 초기 작업에서는 여가활동이 벌어지는 장소가 화면의 큰 부분을 구성하고 여가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기 위해 주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화면을 구성하여 행위의 주체인 사람들은 아주 작게 표현되었다.
초기 작업들과 달리, 최근 작업에서는 인물의 행위 자체에 좀 더 주목해 행동양식의 공통점을 찾고 이를 회화적으로 실험하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는 1년간 프랑스, 이탈리아, 한국의 다양한 장소와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여름 휴가를 즐기는 모습을 관찰한 작업이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수채화로 그린 작은 종이 작업 100여 장이 서로 조합되어 커다란 해변을 이룬다.
이 해변의 풍경은 하나씩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서로 다른 장소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하나로 구성된다. 그리고 해군 병사들이 모여있는 <사열>은 스티로폼으로 만든 형상을 나무판 위에 찍고 모자와 손 부분만을 덧칠한 방식으로 제작됨으로써, 인물의 개별적인 특징은 사라지고 해체되어 전체적인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색과 형태로 재조합된다.
역시 인물들이 더욱 단순화되어 간략한 형태와 색채로만 표현되고 원근감 없이 화면의 모든 곳이 균일하게 채워지면서, 인물들의 모습과 행위는 회화적 실험의 구성요소로 변화하게 된다. 화면 안에서 이루어진 회화적 실험은 를 통해 보여주는 방식에 대한 실험으로 확장된다.
불꽃축제를 보기 위해 해변에 모인 사람들을 담은 이 작업은 거의 동일한 풍경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린 4개의 작업을 같이 전시되어 이상원의 다양한 시도를 비교해 볼 수 있다. 특히 전체가 균일하게 표현된 화면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도록 바닥의 낮은 좌대 위에 놓은 작업은 평면화된 화면을 그가 불꽃축제 현장에서 실제로 보았던 시점과 유사한 시점으로 보게 만들면서, 회화로 구성되기 이전에 그가 관찰했던 시점을 전시장 공간 속에 되살리고 있다.
그동안 이상원은 회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영상, 설치, 공연 등으로의 확장을 통해 다양한 회화적 가능성을 실험해왔다. 이번 전시는 이상원이 그간 지속해 왔던 다양한 회화적 실험의 양상을 보여주면서도 대상을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자기언어를 구축해가고 있음을 살펴보게 한다. 

정진우・두산갤러리 큐레이터

[Review] 센서십 – 제7회 무브 온 아시아

센서십 – 제7회 무브 온 아시아
대안공간 루프 2.13 – 3.21

아시아 12개국에서 21명이 보내 온 영상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검열이었다. 대체로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밖으로든 안으로든 ‘검열’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과 그런 현실의 이면에 도사린 권력·욕망·학살·자본·공포 또는 무관심·관음증·거리두기에 대해 다룬다. 영상이 현실을 반영하는 미디어라면, 그 내부에서 퍼포밍하는 예술가의 정체성은 고발자이거나 풍자를 다루는 광대이거나 혹은 진실 고백자들이다. 고발과 풍자, 고백의 언어는 그러므로 미디어의 이면에서 공명하는 카오스에 가깝다.
한 작가 한 작품의 언어는 오직 하나의 개념을 검열의 공명언어로 타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징후들과 1세기>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솜폿 칫께손퐁은 <질병과 100년의 세월> (2008)을 제작했는데 그는 <징후들과 1세기>에서 검열로 삭제된 6편의 장면을 모아서 다시 서사를 부여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떤 상황도 불순해 보이지 않는 영상들이 왜 검열을 받고 삭제당해야 하는지를 듣는 과정에서 관객은 소름 돋게 될 것이다. 사실 그 이유란 것들을 보면 1960~70년대 한국사회에서 벌어졌던 대중가요에 대한 검열요인들처럼 그것은 매우 가벼운 키치적 냉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강력한 (독재)권력이 행한 검열놀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 전시 <검열>이 던지는 충격은 작품들이 현실의 사건들로부터 미학적 사건을 전유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한마디로 출품작 모두 작가들이 살았던/살고 있는 그들의 현실을 미학적 리얼리티를 뿌리로 하고 있다.
예컨대 타이완 작가 두페이스의 <위산(玉山)에서의 모험>이 1947년 2・28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이라면, 캄보디아 작가 크바이 삼낭은 <뉴스페이퍼 맨>을 통해 프놈펜의 벙칵 호수 개발문제를 다루고 있다. 삼낭은 대대로 호숫가를 터전으로 삼고 살아온 4000여 가구의 삶을 내쫓고 호수를 매립한 대기업의 ‘개발 폭력성’을 이야기한다. 중국의 페이준은 게임의 인터페이스 기능을 차용해 만든 에서 소통의 공론장 문제를 공론화한다. 민주주의의 공론장을 허락하지 않는 중국 정부는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조차 검열해 온 지 오래다. 중국의 그런 현실을 인지한다면 페이준이 펼치는 게임 인터페이스 상의 ‘민주적 수다’가 무얼 뜻하는지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보여주는 루양의 개구리 춤은 더 충격적이다. 그는 해부학 실험실에서 구해 온 개구리 사체에 센서를 부착, 비트에 맞춰 마치 춤을 추는 듯한 형국을 재현한다. 뇌와 몸통의 일부가 없는 이 잔혹한 날몸뚱아리가 추는 춤이야말로 통제사회가 요구하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일본에서 온 는 후쿠시마 원전의 이야기다. 원전건물 안으로 들어간 한 사내가 CCTV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통제된 그곳으로 들어가서 카메라의 눈을 직시하며 손가락을 치켜 든 사내. 익명의 이 사내가 펼치는 행위는 검열과 통제의 위험사회에 대한 ‘맞짱’일지 모른다.

김종길・경기문화재단 기획팀 뮤지엄운영파트장

[Review] CLOSE-UP

CLOSE-UP
두산갤러리 3.5 – 4.12

‘본다’는 것은 세상과 만나는 것이다. ‘보는 방법’은 세상을 보는 방법이기도 하다. 보는 방법, 관점을 다르게 하면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보는 방법을 바꿈으로써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한다. 그럼으로써 예술은 다른 감각으로 보고 느끼게 한다.
익히 알다시피 유승호와 함진은 작품을 ‘가까이, 자세히 보게’ 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놓쳐서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다시 보게 하는 작가들이다. 지난해 두산 레지던시 뉴욕에 참여했던 이 두 작가의 전시 은 아주 작고 하찮은 것들이 만들어낸 세상, 마치 팽창하는 우주에 빨려 들어가는 지각을 경험하게 한다.
유승호와 함진은 “자세히 들여다보기”라는 유사한 보는 방법으로 큰 것과 작은 것, 밖과 안, 전체와 부분, 나와 너, 그림과 글씨처럼 상반된 것들의 조합에서 오는 메타포, 경계의 불분명함에서 오는 보는 방법과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함진은 군집된 작품들로 전시장을 원시 정글로, 또는 행성들이 생성되는 우주공간으로, 생명이 태동되는 공간으로 펼쳤다. 전시장 전체에 유기적으로 설치된 작품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작은 생명체들이 꿈틀거린다. 인간의 형상을 갖춘 것에서부터 어떤 형태인지 불분명한 것들이 존재하며 전체와 부분, 형상과 배경의 경계가 모호하다.
또한 유승호가 펼쳐내는 세상 역시 전혀 다른 것들이 공생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그림이 품고 있는 글씨, 서로 전혀 다른 언어이지만 둘이 엮어내는 세상은 하나이다. 마치 내 안에 있지만 내가 아닌 이물질인 박테리아가 나를 이룬 것처럼 말이다. 물질에서 생명체가 생겨난 것처럼 유승호의 그림들은 글씨에서 그림이 생성된다. 그림은 글씨의 의미를 형상화하여 글씨로 순환된다.
작고 하찮은 것들은 변화하고 변신하며 서로 공생하면서 지구를 생성, 변화시켰던 것처럼, 적대적 생물종들이 합쳐져서 새로운 생물종이 되었던 것처럼, 유승호, 함진의 작품은 그 작고 하찮은 것들이 공생하여 만들어내는 세상이다.
린 마굴리스가 “미생물은 우리들 속에서 생존하고 있으며 또 우리는 그들 속에 살고 있다”고 했던 것처럼, 지구 생명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미물들이다. 그래서 작고 하찮은 것들은 가장 작으면서 동시에 가장 크다. 유승호, 함진이 의도하는 바를 작고 하찮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마이크로코스모스, 다른 것들이 공생, 공서하는 세상을 가까이 자세히 보자는 것이리다.
이번 전시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전의 성격을 띠지만, 유승호, 함진이라는 기발한 두 작가의 조합이기에 꽤 많은 기대를 했다. 그렇기에 두 작가의 작품이 단순히 기계적 방식의 조합으로 전시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가 빚어낸 경이로운 세상을 다른 지각으로 경험하게 하는 마이크로코스모스는 여전히 경이롭고 아름답다.

박수진・복합문화공간 에무 디렉터

[Review] 최소한의 최대한

최소한의 최대한
아트센터 화이트 블럭  2.28 – 4.27

‘최소한’이라는 표현은 늘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단어다. 미술에 있어 특히 그렇다. 미니멀리즘과 같이 재료의 사용이나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던 움직임이나, 미시세계에 대한 관심을 작품으로 형상화한 동시대 작가들을 떠올릴 수 있다. 헤이리에 위치한 아트센터 화이트 블럭에서 열린 <최소한의 최대한>은 최소한의 표현을 통해 최대한의 의미를 이끌어내는 작가 3인의 작품세계를 조망한 기획전이다.
전시에 소개된 작업들은 기본적으로 회화의 범주 안에서 ‘최소한’이라는 개념을 나름의 조형어법 아래 진지하게 탐구한 결과로 보인다. 우선 이강욱은 세포처럼 작은 입자들이 나름의 질서아래 화면 곳곳에 집적되어 있는 모습을 통해 전체와 부분의 긴밀한 상호관계를 고찰한다.
그의 작업은 언뜻 최소한의 선과 점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보인다. 하지만 캔버스의 표면에서 느껴지는 전후의 깊이감과 시간성, 미디엄으로 마감된 표면 아래 자리한 미세한 이미지가 빛의 산란현상으로 인해 무한반복, 확장되는 모습은 그의 작업이 결코 구체적인 대상의 표현에 머물러 있지 않고, 확장된 시공간 안에서 대상화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거시적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정승운의 <공제선>은 가늘고 긴 실을 캔버스 삼아 그 위에 수차례 물감을 쌓아올린 후, 벽과 벽 사이를 가로지르도록 설치하여, 전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여러 개의 현수선을 만들어낸 작업이다. 작가는 최근 몇 년간 <공제선> 연작을 통해 서로 다른 두 개의 대상이 만나 만들어내는 경계면을 다양한 조형어법으로 노련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얇은 실 위에 얹혀진 물감층으로 최소한의 양감과 적당한 무게감을 만들어, 백색의 공간 안에서 유려한 곡선들이 중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늘어진 풍경을 연출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축적한 공제선의 추상적 이미지는 백색의 공간을 배경삼아 허공에 그린 커다란 색선의 드로잉과 같은 효과를 전달한다. 주어진 공간에 감각적으로 개입하는 그의 감각적인 면모와 회화적 표현에 대한 작가의 오랜 성찰을 다시금 환기시킨 작업이다. 이강욱과 정승운이 회화적 물성을 바탕으로 한 최소한의 표현에 집중했다면, 오윤석은 삶의 기억 속에 자리한 구체적인 형상들을 지워나가면서 결국엔 본래의 이미지를 찾아보기 힘든 단색의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의 회화에서 보는 이가 얻는 최소한의 정보는 알 수 없는 글자나 표식으로 뒤덮인 화면, 혹은 그 사이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얼룩 같은 이미지의 흔적들이지만, 그가 만든 회화의 표면은 작업과정을 역방향으로 기록한 4분33초의 영상작업에서 보듯이 삶을 성찰하기 위한 일종의 수행처럼 반복되는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획득해 나간다.
최소한 혹은 최대한이라는 표현은 그 범위와 대상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전달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전시는 3명의 작가가 경험한 세상의 모습을 각자 나름의 가장 압축되고 정제된 형식으로 시각화하여 성찰하는 방식을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대미술의 추상적 경향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황정인・독립큐레이터

[Review] 이완 – 우리에게, 그리고 저들에게

이완 – 우리에게, 그리고 저들에게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3.7 – 4.5

사루비아다방에서 개인전 <우리에게, 그리고 저들에게>가 열리기 한 달 전 이완은 다음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제 작업에 관심있거나 참여할 의향이 있는 분은 참여 의사를 제 페이스북 메세지로 보내주기 바랍니다…. 먼저 일러두어야 할 참여 조건이 있습니다. 참여자 개인당 들어가는 제작비용 20만 원 중 15만 원은 참가자 개인부담으로 책정했고, 나머지는 제가 부담하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제작된 작업은 원목 수공 의자의 형태가 될 것이며 전시 후 참여하신 모든 분께 배송해 드리겠습니다.”
이완은 페이스북을 통해 모집한 30명의 참여자에게 각자가 생각하는 1cm를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작가는 제각각 인식하는 1cm를 기준으로 1m 길이의 자를 만들고, 이 자를 이용해 ‘같은 수치’를 지닌 ‘다른 크기’의 의자를 제작했다. 또한 참여자에게 “우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며 그들의 답변을 인터뷰 영상으로 제작하였다. 이 인터뷰에는 각자가 인식하는 다른 크기의 1cm 길이만큼이나 다양한 답변이 쏟아진다. 관객은 같지만 다른 크기의 의자에 앉아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다양한 답변들을 듣는다.
<사회참여예술>은 예술이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하는 방법을 실험하는 행위예술의 하나이다. 이완의 이번 개인전은 사회참여예술이 만들어지고, 전시되며, 공유되는 규격화된 방법을 차용한다. 참여자를 페이스북이라는 가상 공간에서 모집한다. (그들에게 명확한 금전적 참여조건을 제시한다.) 참여조건에 동의한 이들은 작가가 제시하는 환경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반응의 결과물은 작가의 작품으로써 전시된다. 이들은 제각각 사적 경험에서 기인한 참여가 ‘예술작품’이 되는 과정을 정서적으로 경험한다. 또한 해당 경험에 대한 약간의 저작권을 주장하며 결과물의 일부를 소장한다.
전시장 한쪽 벽면에는 한국 근현대를 상징하는 작가의 수집품이 진열된다. 대통령의 회고록과 시계, 김정일 사망 소식이 담긴 신문 등 다양한 한국 역사의 흔적을 작가는 선별하여 전시한다. 공인의 기록물이나 언론매체가 다루는 역사라는 객관화된 시점과 그 시대상을 수집하여 진열한 작가라는 개인의 주관적 기억은 대비된다. 이완은 이번 전시를 ‘네이션(nation)’이라는 집단이 어떻게 형성되고, 형성된 집단의 개별주체들의 주관성은 그들이 동의하고 있는 객관적 기준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 알아보는 실험이라고 소개한다. 네이션이라는 단어는 국가를 의미하는 동시에 국민을 의미한다. 네이션은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인 동시에 우리 자신이다. 이번 전시는 예술계 외부에 위치한 참가자들과 협업하여 예술 밖 네이션과 예술 안 네이션의 구분과 정의를 질문한다.
이완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기억하는 객관적 관점과 주관적 관점을 대비한다. 대비의 과정에 ‘우리’를 이루는 구성원이 참여하며, 그 결과물은 공유된다. 작가는 예술 밖 개인의 예술 참여나 교류, 협업을 통해 우리가 공유하는 사회적 양식과 객관적 기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양지윤・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큐레이터

[Review] 곽남신 – 껍데기

곽남신 – 껍데기
OCI미술관 3.12 – 4.30

이번 <껍데기>전에서 곽남신은 매우 직설적인 조형언어로 관객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그의 기존 실루엣 연작이 대상의 에센스를 극적 평면성으로 농축시켜 간결하고 임팩트 있게 보여주면서도, 동적인 효과와 공간감을 창출하는 시각 장치와 회화적 효과를 가미함으로써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면,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작품들에서는 평면에서 입체로, 압축적 이미지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로의 전환이 눈에 띄며, 이러한 성향은 보다 즉각적인 관객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캔버스 천에 주름을 잡거나, 컷 아웃에 네온 혹은 LED의 병치, 이미지의 겹치기 잔상 효과 등으로 평면에 기반을 두되 지속적으로 평면성의 탈피를 모색해온 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움직이는 조각적 입체 설치작 <홍동지 와상>을 내놓았다. 홍동지는 민속인형극 꼭두각시놀음에 등장하는 남성성의 상징적 아이콘이다.
그런데 곽남신은 처참히 조각나 숨을 거둬가는 순간에조차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자신의 남근이 제대로 기능하는지를 확인하는 홍동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홍동지의 몸이 기력을 완전히 잃은 후에도 그의 남근만은 다시 일어나고자 꿈질거리는데, 이 사력을 다한 마지막 2초간의 무의미하고 타성에 젖은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남근 세우기는 권력, 외모, 부에 대한 욕망의 제어장치가 없는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또한 허무한 욕망을 끊임없이 조장하는 사회와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이자 그렇게 욕망을 좇다가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는지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 삶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다. 이는 <끄~응!>, <바디빌더>, <섹시걸>, <꿈꾸는 마초>, <비누거품 남근>, <부풀리기>, <아우라>, <아름다운 인생> 등의 작품들이 <껍데기>라는 제목하에 공통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이다.
곽남신의 예술은 재료나 소재 면에서 지속적으로 대중을 향해 손을 내밀어왔다. 그는 회화, 판화, 드로잉, 오브제, 실루엣 초상과 사진의 로키(low-key) 조명의 원리를 이용한 LED와 네온 작업에서 3차원 키네틱 설치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와 형식을 소화하면서, 대중매체 이미지를 여과 없이 사용하기까지 점점 더 거침없는 대담한 작업을 선보여왔다.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절정기에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했던 곽남신은 모더니즘 회화의 엘리티즘의 한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면서, 복잡한 담론이나 극단적 형식주의를 최소화하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예술을 추구해 온 것이다. 대중매체는 우리 시대 아이콘의 양성소이자 그 광범위한 분배를 통해 우리의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끊임없이 조장한다. 대중의 삶에 대한 그의 애정은 자연스럽게 그의 예술에 일상에 대한 직관적 성찰을 담는 팝 이미지의 차용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지는, 곽남신의 대중매체의 세속적 아이콘 전유는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추상의 절정인 하이 모더니즘의 시기를 거쳐 긴 여정을 통해 도달한 대중 친화적 조형언어에 예술가의 관조적 시선 또한 오버랩된다는 사실이 곽남신 식 팝아트의 특징이다. 헛된 욕망에 지배당하는 인간을 연민하는 인간 곽남신의 존재가, 마초 맨과 섹시 걸의 허상과 판타지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의 곳곳을 바라보는 더벅머리 곽남신의 실루엣이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 드리워져 있는 듯 느껴지기에, 그의 작품은 마치 일기처럼 진한 삶의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 

이필・미술사

[Review] 설원기 – 흑(黑).백(白)

설원기 – 흑(黑).백(白)
통인옥션갤러리 3.5 – 3.30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드로잉은 하나의 선으로 그린 그림이며, 데생은 여러 개의 선을 겹쳐서 그린 그림일 수 있다. 얼추 선으로 그린 그림과 음영으로 그린 그림으로 환원해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단박에 대상을 포획한 그림과 대상을 더듬어 찾아가는 그림의 경우를 비교해봐도 되겠다. 이처럼 드로잉은 적어도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머뭇거림 없이, 최소한 머뭇거린 흔적이 없이 사물대상을 단번에 포착해야 하는 까닭에 어렵다.
대개 드로잉이 페인팅에 비해 번잡하지가 않고 단출한 인상을 주는 것도, 적당히 심심하면서 꽉 찬 느낌을 주는 것도 알고 보면 이처럼 하나의 선으로 대상을 압축해 들인 형태 감각과 군더더기 없는 화면에 연유한다. 평소 사물을 관찰하면서 골격 내지 구조와 같은 형태적 특징을 캐치하는 과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평소 몸에 밴 과정이 밀어올린 드로잉은 한정된 화면에 대한 공간운영과 같은 작가의 감각 정도가 즉각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솔직한 그림이랄 수 있겠다. 감각에 관한 한, 가릴 데도 숨을 곳도 없는 그림이랄까.
설원기는 평소 페인팅과 함께 드로잉 작업을 한다. 페인팅이 작정하고 그린 그림이라면 드로잉은 그저 생활의 일부처럼, 일상의 기록처럼 부담이 없고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그림이다. 그래서 무슨 거창한 예술혼보다는 작가의 평소 인성이며 인격에, 생활감정이며 생활철학에 더 밀착된 그림이다.
소재도 산과 같은 스케일이 있는 그림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탁자 위에 놓인 화병과 같은 생활의 주변머리에서 취한 것들이어서 마치 작가의 일상을 들여다보듯 친근한 느낌이다.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기로 그린 그림이 주는 편안한 느낌이다. 여기로 그린 그림은 문법에 맞출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도 여기로 그린 그림만이 줄 수 있는 완성도가 있다. 아마도 드로잉이 독립된 장르로 인정받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그림은 작가의 말마따나 서재에 오랫동안 걸어 놓고 보아도 질리지 않을,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림이고, 없는 듯한 방심 속에 존재감을 숨겨놓은, 그런 그림이다. 흑과 백과 중간계조로 이루어진 그림이 삶의 계조를 닮았다고나 할까.
한지에 목탄으로, 한지에 먹으로, 때론 반투명한 폴리필름 위에 잉크로 그린 그림이 선과 면이 대비되고 흑과 백이 대비돼 보이는 목판화 같고, 선이 강조된 그림이란 점에서 전통적인 수묵화 같다. 그린 부분과 그리지 않은 부분의 안배가 안정감을 주면서 소소한 느낌이고, 부드러우면서 터실터실한 목탄 재질 특유의 질감이 감각적이고 우호적인 인상을 준다.
이처럼 목탄그림이 목탄과 한지가 일체를 이룬 물성을 강조하고 있다면, 폴리필름에 잉크로 그린 그림은 어떤 울림을 자아낸다. 폴리필름은 뒤가 막힌 반투명 재질이다. 그래서 그 위에 잉크로 그림을 그리면 잉크가 지나간 자국이 낱낱이 기록된다. 이렇게 기록된, 중첩된 잉크자국이 울림을 자아내는 것. 이렇게 작가의 그림은 생활의 주변머리를 기록하고 있었고, 일상이 자아내는 정서적 울림을 기록하고 있었다.

고충환・미술비평

[Review] 조덕현 – THE GARDEN OF SOUNDS

조덕현 – THE GARDEN OF SOUNDS
아트클럽1563   3.7 – 5.17

조덕현의 <음(音)의 정원전>은 설치 형식으로 구현된 섬세한 벽화이자 음악을 위한 간이 무대이다. 음영과 음이 어우러진 공간은 실내에 조성된 정원이기도 하다. 13×4m 크기의 무대 안쪽 4.5m 너비 안에 놓여있는 갖가지 식물들은 밀폐된 하얀 무대 막 위에 다양한 실루엣을 드리운다. 하얀 막 위에 떨궈진 그림자는 마치 수묵화 같은 농담을 펼친다. 정적인 가운데 미세한 움직임이 감지되는 이 평화로운 풍경은 도시인의 눈을 어지럽히는 전광판 같은 형식이라는 점도 잊게 한다.
그의 작품은 수묵화뿐 아니라, 한옥의 하얀 문풍지에 비친 그림자, 그림자 연극, 수묵 애니메이션, 상감된 무늬, 압화, 흑백 사진–작품 <그림자들>(1986)의 작가 볼탕스키는 ‘그리스에서 그림자라는 말에는 빛을 가지고 적는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그림자는 최초의 사진이다’고 말한 바 있다–이나 느릿한 영상도 연상된다.
여기에 음악까지 곁들였으니 작품이 갖는 감각과 형식의 공감대는 무한한 확장성을 가진다. 전시장 한 벽면을 이루는 미니멀한 무대는 하얀 백지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들이는 내포적 다양성이 있다. 이 공감각적인 설치작업은 드뷔시와 윤이상의 현대음악을 위한 배경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기획과 구상 단계부터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대화의 산물이다. 작가가 윤이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인간의 짧고 무기력한 삶에 견줄 수 없는 자연의 커다란 언어에 바탕을 둔 그의 음악철학 때문이었다고 한다.
작품의 기조를 이루는 하얀 바탕에 검은 얼룩들은 통영에 있는 윤이상의 육필 악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것은 단지 현대음악을 현대미술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양자 간의 상응이며 보다 깊은 시원에서의 조우이다. 벽 안에 배치된 각종 식물들은 그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로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지만, 거기에는 컬러사진보다 더 깊은 맛을 주는 흑백사진, 산문적 실제보다 더 운치 있는 시적 분위기가 있다.
자연과 인공 사이에 존재하는 소우주인 이 정원은 ‘살아있는 구조’(롬바흐)이다. 정원과 무대의 중첩은 이 고즈녁한 시공간이 무엇인가로 꿈틀거림을 예시한다. 그 자체로 벽면을 이루는 힘찬 구조는 동시에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에도 흔들리는 궤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민감한 표면이다. 이러한 장치는 실물의 모사가 아니라, 실물로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것은 정원술 자체가 자연과 협력하여 만들어지는 예술임을 인식하게 한다. 자연은 선택된 것이지만, 주어진 한계 안에서 강요됨 없이 스스로를 펼치고 접는다.
거대한 막을 만들기 위해 필요했을 바느질 선은 인간을 위한 길이 되었다. 거기에는 인생이라는 여로 위의 군상이 있다. 막을 가로지르는 지평선 위의 작은 인간들은 스케일의 차이 때문에 풀 같은 작은 식물들을 거대한 숲으로 변모시킨다. 인간에게 공포를 줄 수도 있는 원초적이고 무질서한 숲이 아니라, 한가운데로 길이 열려있는 유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노동 없이 행복했던 낙원으로서의 정원이다.
이미지가 펼쳐지는 방식이 그림자라는 것은 그 자신은 소극적이면서도 타자들을 품는 넉넉한 자리임을 알려준다.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그림자의 짧은 역사》에서 재현의 기원으로 그림자가 거울보다 먼저였음을 밝힌 바 있다. 예술적 재현의 탄생은 음화(陰畵)에 있다는 저자는 시각영역에서 이 두(그림자와 거울) 이미지의 근본원리가 광학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다름을 강조한다. 스토이치타에 의하면 플리니우스가 묘사한 최초의 재현 행위에 드러나는 원시적 속성은 최초의 회화적 이미지가 인간 몸에 대한 직접적 관찰의 결과물이 아니라, 몸의 그림자를 잡아낸 재현물이라는 사실이다.
르네상스 이후 대세가 된 거울의 모델은 동일자를 정면에서 비추지만, 그림자는 타자를 측면에서 비춘다. 그것은 원형을 복제한 것 즉, 미메시스가 아니라, 닮아 보이는 것 만들기 즉, 시뮬라크라(simulacra)이다. 유한한 형식 속에 떠도는 허상이 메아리치는 무대는 대체의 마술이 펼쳐지는 시공간이 된다.
막에 비춰진 자연과 인간은 그것이 모두 덧없는 그림자라는 점에서 무한한 시공간에 찍힌 작은 점 같은 덧없음의 지표(index)이다. 자연이라는 무대 위에 잠시 출연했다가 사라지는 연극배우 같은 인생 말이다. 시간 속에서 생멸하는 소리(음악) 또한 덧없다. 그러나 이러한 덧없음은 생명의 본질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전시의 중요한 요소인 음악은 윤이상의 <두 개의 비올라를 위한 명상>이 연주(연주자 전진희)된 오프닝 공연을 필두로, 전시 기간 내내 이루어진 공연에 있다.
표본처럼 있는 식물조차 진동하는 무대는 음악처럼 시간의 흐름을 탄다. 무대는 다양한 시간적 형태들이 구성되는 장이다. 이 전체적 흐름 속에서 정지나 정적 또한 의미의 일부가 된다. 벽화가 그렇듯이 음악은 배경이 아니라, 살아있는 무대를 위한 필수 요소이다. 빅토르 주어칸들은《 소리와 상징》에서 사람들이 우주를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할 때는 우주의 운동이 아니라, 그들의 하모니 즉, 함께 소리 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지적한다. 빛과 색채, 소리, 냄새, 맛, 단단함, 유동성, 거칠고 부드러운 것, 뜨겁고 찬 것, 이들 모두가 무생물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나 음은 오로지 살아있는 것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덕현의 작품에서 음은 전적으로 살아있는 생에 속하며, 미술만큼이나 세상을 내다볼 수 있게 한다. 

이선영・미술비평

[Exhibition & Theme] 2014 이응노미술관 신소장품전

대전으로 돌아온 이응노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이응노미술관에 기증된 고암의 작품 500여 점이 공개되는 전시가 대전 이응노미술관(2.25~6.1)에서 열린다. 고암의 회화, 조각, 판화 및 판화 원판과 유품 등이 공개되는 이번 전시는 그 동안 미공개되었던 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세계와 행적을 4개 섹션으로 나눠 살펴본다.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드라마틱한 생을 살았던 고암의 작품세계를 들여다 본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이응노미술관에 다녀왔다. 대전에 간다고 하니 성심당의 튀김소보로와 부추빵을 사먹어야 한단다. KTX 대전역사(驛舍)에서 요행히 성심당를 발견하고 줄을 서서 빵을 사고 택시를 타고 이응노미술관에 도착. 개막식에 맞추어 마침 박인경 여사가 한국에 와 계셨다. 그녀와 환담을 나누며 튀김소보로를 함께 먹는 순간. 그 순간이 이상하게도 내게는 거의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특별하게 다가왔다. 참 오랜 세대 차이가 나서, 내 머릿 속에는 이미 역사 속의 인물들로 자리매김되어 있는 이응노와 박인경 부부. 그중 한 분은 이미 1989년. 20세기의 질곡 많은 세계사의 한 단락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생을 마감하셨지만, 박인경 여사는 2014년 2월 바로 나의 앞자리에 앉아 1956년 개점한 성심당의 튀김소보로를 맛있게 잡수신다. 내가 그들 인생의 끝자락 어딘가에 잠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만으로, 마치 나도 역사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었다. 그저 소보로빵을 함께 먹는 장면이지만.
lee2ok어떤 예술가도 시대를 떠나 존재할 리 없다. 하지만 나는 왠지 이응노 작가를 생각하면, 특히나 한국의 역사가 그의 생애에 고스란히 겹쳐져 떠오른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난 해 충청도 홍성에서 태어나 1910년 경술국치 때 숙부가 조상의 묘 앞에서 자결했던 사건을 평생 기억하며 살았다. 김좌진과 유관순의 고향이기도 한 홍성 터에서 3·1운동을 경험했고, 20의 나이에 무작정 상경, 김규진 문하에서 열심히 대나무를 그렸다. 간판업을 해서 가세를 세우고 돈을 번 후에는 1935년 일본으로 유학 가 일본 남화와 서양화를 두루 공부했다. (일본에서 돈이 떨어졌을 때는 요미우리 신문배달소를 차려 친척들을 채용하고 그들의 유학까지 지원했다. 엄청나게 강인한 생활력을 소유한 가부장 시대의 남자.)
2차대전 종전 직전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아들을 잃었고(그는 후에 북으로 가서 살아있는 것으로 판명 났지만), 1949년경 박인경 여사를 만나 함께 한국에서의 피난생활을 거친 후 1958년 유럽으로 건너갔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며 심지어 1964년에는 동양미술을 프랑스인에게 가르치는 학교도 세웠다. 그러던 중 1967년 거의 10여 년 만에 고국을 찾았으나 냉전시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어 고국 땅을 밟자마자 감옥으로 끌려갔다. 이른바 동베를린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 대전교도소, 안양교도소를 거쳐 2년 반 만에 석방됐다. 출옥 후 고향 근처 수덕사 앞 수덕여관에 암각화를 남기고 홀연히 프랑스로 돌아가 더욱 완숙한 예술작업을 펼쳤다. 한국에서도 작품 전시를 이어가던 중 다시 1977년,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미수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면서 국내 작품 반입이 전면 금지된다. 이 사건의 정확한 경위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1979년 박정희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던 시기, 그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프랑스에서 뉴스를 접하며 대작 <군중> 연작을 탄생시켰다. 1983년 프랑스 국적을 택한 후 1987년에는 평양에 가서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1980년대 말 소련이 개방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려는 시기, 전 세계적인 화해 무드 속에서 1989년 1월 1일 서울에서 대규모의 이응노 회고전이 개막했다. 그러나 열흘 후, 그러니까 1989년 1월 10일, 그는 파리에서 돌연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이응노의 시신은 1871년 파리코뮌이 최후까지 저항하다 총살된 페르 라세즈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20세기 ‘극단의 시대’를 온몸으로 체험했던 한 예술가의 생애를 어찌 이 좁은 지면에 다 담아낼 수 있으랴.
이응노미술관 신소장품전 개막식 인사말에서 박인경 여사는 그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단 한마디로 압축했다. “이응노 선생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가셨습니다.”

형식, 주제, 소재, 그 무엇 하나 거칠것 없는
lee5ok그는 참으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신 것 같다. 85년간의 그의 생애가 그러할 뿐 아니라 그의 작품이 또한 작가의 드넓은 스펙트럼을 증명한다. 이응노는 주로 한국화를 제작했다고 할 수 있으나, 서예, 조각, 판화, 도자기, 태피스트리 등 갖가지 장르를 두루 넘나들었으며, 일본 유학기에는 서양화도 배웠고, 프랑스에서 10미터 높이의 공공 조각도 만들었다. 그는 한지에 먹을 주로 활용했지만, 다 쓴 신문지나 폐지, 나무, 돌, 천, 밥풀, 노끈, 부채, 달걀껍데기, 흙, 벼루 뚜껑, 바위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모든 재료들을 작품에 끌어들였다. 그러한 재료들로 그는 사군자도 치고, 소와 닭과 양, 산과 강과 마을도 그리고, 상형문자와 같은 추상의 세계를 드러내는가 하면, 무엇보다 사람, 사람들을 만들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다작의 작가로 쉴 새 없이 손발을 움직였던 그는, 언제나 그리고 긋고 찢고 베고 긁고 짜고 붙이고 짓이기고 지지고 뿌리고 두드리고 굽고 새겼다. 그러니 한마디로 ,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신 것이다!
그토록 다채로운 이응노의 행적을 모두 드러내 보이기에는 어떠한 미술관도 작아 보일 것이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자그마하게 설계하여 큰 욕심을 부리지 않은 이응노미술관의 건축 설계가 역설적으로 적절했는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인 건축가 로랑 보두엥(Laurent Beaudouin)은 미술관 입구의 소나무에서부터 중정의 마구 자란 풀, 후원의 대나무에 이르기까지, 우연을 가장한 채 관람자들이 이 풍경들을 자연스럽게 마주치도록 설계했다. 전시장 공간의 형태가 조금씩 달라보이게 한 것도, 건축 재료가 조금씩 다르게 끼어드는 것도, 이응노 작품의 다양성을 지극히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장치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응노미술관은 갈 때마다 볼 때마다 공간도 작품도 달라 보인다.
이번 전시가 특히나 의미 있는 것은 2007년 미술관 개관 이래 두 번째의 대규모 소장품 전시라는 점이다. 2013년 초에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주로 박인경 여사를 통해 기증된 533점의 작품을 정리하고 전시했으며 큰 도록도 함께 출간했다. 올해는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비슷한 경로로 수집된 697점의 작품을 대부분 전시했다. 다 걸 수 없는 작품들은 영상실에서 이미지로나마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응노미술관에서는 이제 총 1230점에 달하는 소장품과 많은 아카이브를 체계적으로 정리·관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 방법을 고민하는 학술 심포지엄도 함께 열었다.
지난해 전시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서예, 동물화, 사군자, 추상, 판화 원판 등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무래도 옥중화(獄中畵)일 것이다. 이응노의 출옥 장면을 담은 그 흑백사진 속에서 한쪽 팔에 끼어 있던 뭉툭한 꾸러미. 바로 그 꾸러미에 들어있던 그림들이 이제야 빛을 보게 된 것인가. 거의 반추상화되어 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형상들이 화면 위를 부유한다. 차마 그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은 작품들…. 어찌 보면 마치 분노와 환희가 공존하는 것 같다.
개막식에서 박인경 여사의 인사말은 간결했다.
“이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에는 온통 ‘대전’이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그 대전에 이렇게 작품이 와서 걸렸습니다.”
이응노는 작품 옆에 ‘대전교도소에서’라는 말 대신 그저 ‘대전에서’라고만 써두었다. 교도소에서일망정 그래도 고향 근처 대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던 것일까? 그는 실제로 후에 “감옥은 나의 학교였다”고 말했다. 밥풀이 질긴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이도, 그것으로 장기 두는 말을 만들어 쓰던 옥중의 동료들이었으니까. 무엇이든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일상의 행위가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도 그는 감옥에서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 대전교도소에서 탄생한 작품들이 프랑스 파리를 거쳐 이제 다시 대전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은 그렇게 짧은 한마디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사건일 것이다.
박인경 여사의 짧은 인사말은 이렇게 끝났다. “이제는 여러분이 주인공입니다.” 그 많은 이응노의 작품을 프랑스에 남겨두지 않고 고국으로, 대전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 들어오기 위해 여전히 그녀는 애쓰고 있다. 바로 주인공인 우리들을 위해! 전시 보러 대전에 한번 가보자. 2014년의 따사로운 봄날, 1956년 개점한 성심당의 튀김소보로와 부추빵도 사먹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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