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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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 : Stonescape, Paint it Black,

1.3~28 통인화랑, 1.18~2.21 갤러리 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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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인화랑(왼쪽 사진)과 갤러리 초이(오른쪽 사진)에서 열린 이인의 개인전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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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서 글로벌과 로컬의 상관관계가 대두되기 시작하고 미술의 종말보다 더 나아간 ‘그 이후’로 칭해지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이자 현대 한국사에 있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가장 치열했던 1970년대에서 90년대. 그 시대를 미술학도로, 젊은 작가로 살아낸 작가가 빛과 시간에 대한 하이테크놀로지가 미술의 수단과 도구로 당연시되는 2018년 현재 작가로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2018년 1월 통인화랑과 갤러리 초이에서 캔버스 작업과 드로잉 작업이라는 각기 다른 형식으로 〈Stonescape〉와 〈Paint it Black〉, 두 개의 개인전을 선보인 작가 이인은 그 삶에서 항상 존재했던 이름 없는 돌을, 그와 닮은 사람을, 사람의 사유가 시각화된 텍스트를,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한 작가의 사유를 사의(寫意)하는 작가이다. 그 사유는 작가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물상으로부터 순간순간 느끼는 각기 다른 응축된 감정의 덩어리이기도, 때로는 지나간 시간의 기억으로부터 증류된 파편들의 모음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의(寫意)는 한지 위에 휘몰아치는 드로잉으로, 캔버스 위에 겹을 더하며 깎고, 긋고, 그리고, 칠하며 수행하듯 지나는 시간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어쩌면 고루하기 짝이 없는 동양화를 하는 중견 작가의 작업에 대한 설명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의 실재성에 대하여 서로 다른 중력이 교차하는 어떤 중요한 지점에서 현실에 대한 상(像)의 의미나 현실에서 상의 지위, 그리고 상과의 관계를 읽어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미디어 미학에 대해 말하는 랄프 슈렐의 의견은 묘하게도 미디어 작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작가, 이인의 작업에 들어맞는다.

종이인지 캔버스인지 당최 알 수 없고, 동양화 같으나 그 모습은 동양화의 전형과는 사뭇 다른 그의 작업이 흑과 백 위주의 무채색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지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포스트모더니즘 시기를 젊은 작가로 치열하게 살아낸 그는 그 시기로부터 근 20년간 〈진 채 연구〉, 또는 〈색 색 풍경〉 등의 이름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동양화 안에서 색이나 미디엄을 이용해 ‘로컬과 글로벌의 경계와 융합’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 고민은 멈추지 않고 ‘시각예술 대(對) 텍스트’의 경계로, 그리고 ‘미메시스 대(對) 사의(寫意)’로 그 지경을 넓혀왔다. 그리고 그렇게 확장된 고민은 작업의 마지막 형태로 남는 가시적 작품이 대상에 대한 미메시스가 아닌 심상에 대한 사의로 남기를 원하는 작가의 작업 철학으로 자리 잡는다. 그렇기에 그는 옛 선인들이 독화(讀畫)를 하듯 감상자들이 각자의 삶의 경험으로 그의 작업을 읽어주고 공명하기를 바란다. 몇 백 년 전 우리 선인들의 그림 감상 방법인 독화로 자신의 작업이 이해되기를 염원하는 작가는 랄프 슈렐이 말하는 ‘오늘날의 실재성’과 ‘상(像)의 관계’라는 지점에 정확히 그 접점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어쩌면 “내가 신을 본 그 눈은 신이 나를 본 그 눈과 똑같다”라고 시각의 상호성을 말하던 롤랑 바르트와 비슷한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고루한 듯한 먹빛이 시크함으로 읽히고 오늘을 살아가는 감상자와 공명함으로써 현재를 살아내는 작업의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이 그 당위성을 찾는다.

작년 이맘때쯤 개인전을 준비하던 작가에게 왜 많은 물상 중 하필 돌에 관심을 갖는지, 그 이유가 어쩌면 약간은 뻔하지 않은지 물었다. 그는 주변에 널려 있는 돌들이 작위적이지 않고 검소하지만 강건한 조형적 질서로 일상과 그 너머를 아우르기 때문에 마음이 간다고 했다. 그 돌과 닮아 있는 인간의 삶, 그리고 인간. 작가는 그의 삶과 소통하고 공명하는 존재로서 돌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에게 돌은 인간의 삶이 뻔한 듯 뻔할 수 없듯이 절대로 뻔할 수 없는 대상인 것이다. 그리고 삶이나 작업에 대한 그의 모든 사유는 여기가 시작점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몇몇 돌은 약간 달라져 있었다. 투박하지만 날카롭던 사유도, 형상도 날 것 자체이던 모습과는 약간 달리, 몇몇은 조금은 편안해지고 어쩌면 무뎌진 모습으로 캔버스 위에 그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람과의 관계도 처음에는 날카롭고 어색하나 익숙함에 편안해지고, 편안함에 당연해지기에 이제는 작가가 그 돌들과 당연한 관계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약간 익숙한 편안함은 종이라는 바탕 위에 작가라는 필터를 거친 ‘독도’라는 ‘돌.섬.’으로 더 확장된 사유를 ‘사의’하며 앞으로의 이야기들을 모의하고 있었다. 그의 돌들은 바다와 부딪치며 둥글어지고 은하수 밤하늘 안에 잦아들고 있었다. 눈코입이 없는 돌과 같던 얼굴들은 캔버스 위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며 앞으로의 이야기를 잔뜩 머금은 표정을 짓고 있다. 다음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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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윤한경 | 전시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