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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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환 : 숨쉬는 섬

2017.12.20~1.27 갤러리 바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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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환 〈숨쉬는 섬〉(사진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오일 파스텔 270×880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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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를 위시해서 오노레 도미에, 제임스 엔소르 같은 19세기 후반 구상작가들은 당대의 사회상을 독자적인 우화적 공간 속에 펼쳐 보였다. 고야의 ‘블랙 페인팅’, 엔소르의 가면무도회나 도미에의 군상 속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실패를 거듭하는 혁명과 격변으로 점철된 역사적 질곡 속에서 희화화될 때까지 짓눌리고 뒤틀려버린 존재들이다. 후기 낭만주의로 불리는 이 시기의 작가들은 해결되지 않는 세계의 부조리를 때로는 염세적이고 음산한 풍경들로, 때로는 급진적일 만큼 비현실적인 연출을 통해 재해석했다. 유럽에서 회화를 공부한 적이 없는 배윤환이 ‘흑 낭만주의 (Dark Romanticism)’의 회화적 특질을 동시대의 한국에서 탁월하게 전개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재료나 기법, 물성에 이르기까지 한 작가의 내면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스타일이라고 믿겨지지 않는 작품세계가 그로부터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묵시적 풍경 속에서 각자의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는 수많은 인물의 군상을 간결하고도 정확한 필치로 보여준다. 배윤환은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면서도 완벽한 드로잉을 구사한다. 그는 종종 폭 10m에 이르는 대작을 풍부한 밀도로 수 일 만에 완성할 만큼 강력한 집중력과 에너지를 보여준다. 그의 자발적이고 직관적인 작업방식에서 일관되게 다루어지는 모티프는 바로 작가 자신의 창작을 둘러싼 주변이다. 작가의 근방역(voisinage)이라 말할 수 있는 이 공간은 작품에 투영되는 과정에서 거대한 세계관으로 변환된다.

갤러리 바톤에서 열린 전시 〈숨쉬는 섬〉은 작가의 세계관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경이로운 시각적 서사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두 개의 대작을 소개하고 있다. 전시와 동명인 〈숨쉬는 섬〉과 〈수천 길 바닷속〉이 그것이다. 이 두 점의 그림은 전시의 핵심을 이루면서 동시에 초기작인 〈기름 붙일 곳을 찾는 사나이〉 에서부터 다루어온 ‘예술가와 그가 바라보는 세계’라는 주제를 새로운 무대 위에 올린 역작이기도 하다. 배윤환은 자신이 경애해 마지않는 작가 윌리엄 켄트리지의 말처럼 국지적이고 협소한 문제에 답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가 말하는 다공질(多孔質), 다초점의 세계란 서로 다른 단절된 부분들로 이루어진 전체를 가리킨다.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수많은 상이한 장면의 연결과 배치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때로는 작은 그림들을 실제로 이어붙이거나 병치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주변적이고 분열적이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끊임없이 호흡하는 이 몸체를 작가는 ‘섬’이라고 지칭한다. 섬이란 이번 전시회 보도자료에서 언급된 이탈로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에 나오는 ‘나무’와 유사한 비유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인 코지모는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살아가다가 끝내 땅 위로 내려오지 않은 채 열기구 위로 뛰어올라 공중으로 사라져버린다. ‘현실에 발을 딛다’는 표현과는 동떨어진 이 주인공의 행적은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자신을 조건화하려는 세계로부터 관찰자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의지와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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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환 〈종이 울리면〉 나무에 아크릴릭 122×160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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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 섬〉의 거대한 캔버스 천에 오일 파스텔로 빼꼭히 그려넣은 공동(空洞)들은 환(環)공포증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수많은 문이 여기에 등장하는데, 작가에 따르면 이것들은 회화의 이면으로 향하는 각각 상이한 통로들이라고 한다. 쉬고 싶거나 이미 안식을 취하는 사람,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사람, 불안에 사로잡혀 자신의 신발을 뜯어먹는 사람,

글자가 쓰인 나무를 밀쳐내는 사람 등이 이 구멍들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오른쪽 끝에 그려져 있는 곰은 마치 섬의 회화적 완결을 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전에 그린 작품 속에서 작가의 상념을 상징하는 연어들을 뜯어먹던 곰들처럼 이번에도 곰은 작가를 회화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끌어내는 역할을 맡고 있다. 〈수천 길 바닷속〉은 그 섬 아래쪽에 세상으로부터 감추어진 무의식의 저변처럼 어두운 심해를 보여준다. 10개의 버려진 목판을 이어 붙여 아크릴로 제작한 이 그림 속에는 바닷속에 투기된 과거의 잔해들 – 카세트테이프, 축음기, 버려진 깡통 등-과 그 위로 유영하는 해저의 생물들이 등장한다. 어둡고 텅 빈 심해의 바닥에는 목구멍에 걸려있는 문장들, 확신이 서지 않는 단어들이 작가에 의해 여기저기 감추어져 있다. 전시장의 긴 벽 양쪽에 마주 걸려있는 이 작품들은 배윤환의 작품이 지향하는 세계관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한편으로 그것은 게임의 챕터들처럼 무한히 새롭게 갱신되는 장소들일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가를 둘러싼 부조리한 세계의 불연속적 변용일 것이다. 전체의 서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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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유진상 | 계원예대 융합예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