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소: 기록과 기억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2018. 7. 26. –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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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 그는 누구일까?

1985년 9월, 뉴욕 브루클린 북부에 ‘박모’씨가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라는 대안공간을 설립했다. 목적은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소수에 속하거나 연관된 주제로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 비영리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함이었다.  백인 주류의 뉴욕 문화계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공간을 설립한 박모씨는 미술계에서 소외된 이민자,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젊은 리더로서 주목 받았다.

‘박모’는 박이소가 뉴욕 유학시절 사용한 이름이다. 박이소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작가, 큐레이터, 평론가로 활동한 예술가로, 1980~9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 중 한 명이다. 뉴욕에서는 ‘박모’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돌아와서는 ‘박이소’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그는 시대를 앞선 개념과 가치관으로 한국미술의 지평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이소는 80년-90년대 당시 뉴욕의 미술담론과 전시들을 국내에 소개하는 한편 한국미술을 뉴욕에 소개하는 여러 전시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두 미술계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또한 1995년 신설된 삼성디자인교육원(SADI)의 교수직을 맡아 귀국 후에는 ‘박이소’(異素: 낯설고 소박하다)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새로운 방식의 미술교육을 정립하고자 애썼다. SADI,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서 작성한 강의계획서, 평가서 등 각종 교육 관련 아카이브는 당시 그가 고민했던 미술교육의 대안 모델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작가는 생전에 약 200여 개의 재즈 테이프를 직접 편집하고 만들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난 이제부터 남은 생애 동안 이것만 들을 생각’이라고 공공연히 밝힐 정도로 재즈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남달랐다. 특히 빌리 조엘의 ‘Honesty’를 한국어로 번안해 직접 부른 ‘정직성’은 “어떻게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서 “왜” 그리는가의 질문으로 초점을 바꾼 자신에게 던지는 답인 것처럼 그의 삶의 태도와 맞물려있다.

당시 민중미술과 모더니즘으로 양분되어 있던 국내 미술계에서 그가 보여준 ‘경계의 미술’, 예컨대 “우리는 행복해요”라는 구호처럼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순적인 반응을 통해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그의 미술세계는 이후 세대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한국현대미술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채색했다. 작가는 《광주비엔날레》(1997), 《타이베이비엔날레》(1998), 《요코하마트리엔날레》(2001), 《베니스비엔날레》(2003)등 국내외 주요 전시에 참여하였고, 2002년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을 수상하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던 중인 2004년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박이소: 기록과 기억》은 작가 사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는 그의 첫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는 2014년 작가의 유족이 대량 기증한 아카이브와 대표작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대규모 회고전이다. 당시 기증된 자료는 박이소가 뉴욕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1984년경부터 작고한 2004년까지 약 20년간의 작가노트를 포함한 드로잉, 교육자료, 전시관련 자료, 기사, 심지어 재즈 애호가였던 작가가 직접 녹음, 편집한 재즈 라이브러리에 이르기까지 수 백점에 이른다. 

작가노트 21권은 1984년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졸업에서부터 2004년 작고 직전까지 작업과정을 꼼꼼히 기록한 것으로, 뉴욕 유학 당시 소수자로서의 정체성과 문화적 이질성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후기 대표작인 <당신의 밝은 미래>(2002) 아이디어 스케치까지 엿볼 수 있다. 설치 드로잉은 1990년대 중후반 회화에서 입체와 설치로 확장전환되는 시기에 다수 제작된 것으로 각각의 드로잉은 완결된 작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다양한 전시환경에 따른 전시효과를 검토하고 개념을 다듬기 위해 꼼꼼히 적은 정보와 지시문은 마치 설계도처럼 정교하다. 이번 전시에는 《2001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에 출품한 ‘<무제>를 위한 드로잉’(2000)과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을 받은 해에 그린 ‘<바캉스>를 위한 드로잉’(2002) 도 소개된다. 이와 함께 <이그조틱-마이노리티-오리엔탈>, <쓰리 스타 쇼>, <블랙홀 의자>, <당신의 밝은 미래>, <베니스 비엔날레> 등 대표 작품 50여 점을 통하여 박이소 작품세계의 전개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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