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GHT & ISSUE 창덕궁 대조전 벽화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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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김은호 <백학도> 비단에 채색 214×578cm 1920 (등록문화재 제243호) 창덕궁 대조전 서쪽 벽에 설치된 부벽화로 현재 모사도로 대체되어 있다.
아래 오일영, 이용우 <봉황도> 비단에 채색 214×578cm 1920 (등록문화재 제242호) 창덕궁 대조전 동쪽 벽에 설치된 부벽화로 현재 모사도로 대체되어 있다.

〈창덕궁 대조전 벽화展〉국립고궁박물관 4.28~5.31

황제의 덕을 기억하라

바람처럼 스며들어야만 이를 수 있는 궁궐의 한구석을 좋아했다. 너덜너덜한 문창호 사이로 어렴풋이 방 안이 들여다보였는데, 가난한 친구 집에서처럼 벽에는 신문지가 발려져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궁궐에 신문지는 절대 맞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 그런데 창호지의 뚫린 구멍 사이로도 보이지 않는 곳이 있었다. 서울역그릴에서 언뜻 보았던 부엌 같기도 한 네모진 건물 옆의 커다란 한옥은 닫힌 문 안에 또 닫힌 문이 있었다.
세월이 지나 복도에서 복도로 신을 벗지 않고도 이를 수 있는 방들의 문틀 위 간벽에서 아름다운 벽화를 볼 수 있었다. 어느 봄날, 학생들과 함께 찾은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의 당혹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마치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경복궁 강녕전이나 교태전 내부 사진에서처럼 문틀 위에는 찬란한 벽화 대신 하얀 종이가 발린 공간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벽화가 사라진 이유에 대한 아무런 설명문조차 없던 햇빛 쏟아지는 대조전의 그 모습은 마음에 바람 한 줄 지나는 상실감의 풍경이 되었다. 2005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을 준비할 때부터 예고된 일이었지만 정작 보존처리를 위해 벽화를 걷어낸 대조전의 대청은 낯설었다. 희정당이나 경훈각의 벽화에 비해 균열과 박락이 더 심했던 대조전 벽화는 2년 동안 복원과정을 거쳤고 대체될 모사도도 제작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복원된 대조전 벽화를 조우하며 마치 사라진 명화를 되찾아 공개하는 탐정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든 것은 그때의 상실감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 진열실에 펼쳐진 벽화는 1920년 여름 덕수궁 준명당에서 완성되어 궁중표구사의 손에서 재단되었을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벽에 부착되어 있던 탓에 커튼 박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가장자리들이 실루엣을 드러냈다. ‘김은호 근사(金殷鎬謹寫)’ ‘오일영 이용우 등 근사(吳一英李用雨等謹寫)’라는 묵서는 발걸음을 얼어붙게 하였다. 잠시 궁중화사가 된 당대 재능있고 젊은 화가들의 필치는 희정당 벽화에 엄청난 크기로 써넣은 김규진의 글씨에 비해 얼마나 예의바르며 겸손한지.
1917년 원인이 의심스러운 화재가 창덕궁 내전 일곽에서 발생하였다. 1920년에 재건된 전각들은 경복궁의 주요 건물을 헐어서 자재를 댄 것으로 외양은 한식이지만 전기와 수도를 설비하고 내부에는 커튼박스와 샹들리에, 양식 가구를 배치하였으며 부벽화(付壁畵)를 설치했다. 희정당(熙政堂)에는 김규진이 그린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 경훈각(景薰閣)에는 이상범이 그린 <삼선관파도>와 노수현이 그린 <조일선관도>를 배치했다. 대조전에는 김규진을 제외한 청년 화가 중 나이가 가장 많았던 30세의 오일영과 나이가 가장 어렸지만 천재화가라 일컬어지던 16세의 이용우가 합작한 그림 <봉황도>와 김은호가 그린 <백학도>를 배접해 붙였다.
대조전 동벽, 즉 주인 좌측에는 <봉황도>가, 서벽인 우측에는 <백학도>가 배치되어 있다. <봉황도>는 가로로 봉황 10마리가 배치되고 우측에 바위와 폭포, 모란, 흐드러진 붉은 꽃을 피운 나리와 두꺼운 잎의 오동나무가 있다. 가운데에는 오동나무 가지 아래 바위와 대나무, 괴석과 나리가 있고 좌측에는 하늘을 나는 봉황과 그 아래 바닷물이 넘실대고 하늘에는 붉은 해가 떠 있다. <백학도>에는 열여섯 마리의 학이 가로로 펼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좌측에는 폭포와 소나무 그리고 모란과 대나무가 표현되었다. 가장 좌측의 학 세 마리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고 그 아래 물가와 모란 옆으로 다섯 마리가 놀고 있다. 우측의 달 가까이에서부터 학 여섯 마리는 좌측으로 날아드는 형상인데 달 아래 파도가 넘실대고 모란 가까이에는 붉은 영지가 바위 사이에 드러나 있다.
임금의 덕이 높으면 그 덕이 한갓 미물인 새와 짐승에까지 미치므로 성군(聖君)이 나타나면 봉황이 날아다닌다고 하였다. 따라서 <봉황도>는 성군과 해의 도상이 결합한 것으로 왕의 덕치를 의미한다. 민화에서는 부부 화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궁중 장식화로서 봉황도는 치세(治世)의 상징물인 것이다. 벽오동과 물은 왕의 정치에 대한 상징이다. 그런데 해와 봉황은 의미가 연결되지만 해와 나리꽃은 상관관계가 없다. 모란, 물, 해, 바위 등 상서로움을 의미하는 제재 속에서 나리꽃은 십장생과 연관이 없는 소재임에도 화면의 우측과 하단 중앙부에서 눈에 띄는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나리는 일본화에 자주 등장하는 야생초로서 병풍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결국 궁궐의 제도를 지키는 엄중한 그림에서부터 도상이 약화되고, 풍경화한 것이다.
<백학도>는 학이 장수를 의미한다고 해서 십장생과 연관되어 이해되었다. 노송, 물, 바위, 달, 구름, 영지는 그러한 의미를 증명한다. 전면의 모란은 부귀를 상징함으로써 단순 십장생도에서부터 그림의 해석에 다른 여지를 제공한다. 늙은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달밤에 춤추는 학은 고고한 선비를 의미했다. 그림에서 상징은, 게다가 여러 제재가 동반할 때는 하나의 의미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 궁중화에서는 일상적인 화제와는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데 그것이 장식화에서는 더더욱 제왕의 덕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봉황도>와 <백학도>는 부부화평과 무병장수라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서 왕의 공간에 배치되는 길상도로서 덕을 칭송하는 천보구여(天保救如)의 영역에 위치한다.
어좌 뒤에 설치되는 <일월오봉도>에서 왕의 좌측에는 해, 우측에는 달이 온다. 산과 나무와 더불어 넘실대는 파도와 폭포가 함께 나타나는 <일월오봉도>는 왕의 덕을 칭송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그림이다. 그런데 1920년 이왕직과 조선총독부의 계획에 의해 재건된 창덕궁 내전은 정치적 공간이 아닌 순종의 거주처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벽화 또한 정치적 의미를 잃었다. 그럼에도 대조전 벽화에서는 봉황과 백학을 소재로 함으로써 해와 달을 배치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의 자존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임금의 덕이 대대손손 전하리라는 천보구여의 제재는 의미로 숨어 그림을 해독하는 이들에게는 영롱한 국가 존립의 증거로 존재하였을 것이다.
이번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창덕궁 대조전 벽화展>에서는 살문을 지나 대조전의 벽화를 좌우에 두고 관람할 수 있었다. 관람자의 시각을 위한 많은 장치는 친절했다. 벽화가 전시된 공간의 중앙 열린 부분에서는 동영상을 통해 다른 전각의 벽화들도 만날 수 있었다. 벽화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생동감있게 표현한 이 장면은 말 그대로 현란한 빛으로 움직이는 ‘영상작품’이었다. 어두운 공간을 밝히며 빠르게 움직이는 작품에서 근엄한 시대의 교훈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근대기 빛나는 진채(眞彩)의 아름다운 대조전 벽화는 디지털의 위력 앞에서 어스름히 빛을 발하기 위해 힘을 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접혀져 나무상자 속에서 잠들어버릴 대조전 벽화가 안쓰러운 것은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조은정 미술사

창덕궁 (9)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창덕궁 대조전 벽화> (4.28~5.31)에서 보존 처리된 <백학도>(사진)와 <봉황도>가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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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 <금강산만물초승경도> 비단에 채색 205.1×883.0cm 1920 (등록문화재 제241호) 창덕궁 희정당 서쪽 벽에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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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수현 <조일선관도> 비단에 채색 194.9×524.5cm 1920 (등록문화재 제244호) 창덕궁 경훈각 동쪽 벽에 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