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박불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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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

<정치하는 것들한테 국민 여러분께서 주시는 선물> 1996

2016년 새해 첫 작가론으로 작가 박불똥을 소개한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박불똥을 호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김동일 교수의 말처럼, 지금 우리에게 박불똥의 작품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박불똥은 일찍이 1980년대부터 기존 화단에 팽배한 순수미술의 이념을 거부하고 극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대중매체 시대의 예술이라는 명제가 주는 실천적 의미에서 포토콜라주 작업을 비롯해 이땅의 불편한 현실과 모순을 독특한 조형어법으로 들춰냈다. 30년 넘게 그의 보여준 행보는 ‘시각이미지 생산자’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실천적 예술가의 한 표상이다.

 

박불똥, 혹은 ‘불’과 ‘똥’ 사이

김동일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박불똥은 누구일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박불똥을 호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0년대도 십수년이 지난 지금 박불똥은 사라지길 거부하는 1980년대 미술의 망령일까? 혹은 새로운 세상을 거부하는 철없는 돈키호테일까? 그것도 아니면 혹여 1980년대와 동시대미술 이론과 실천 사이의 공백을 채워줄 소중한 퍼즐의 한 조각은 아닐까? 평자에게 박불똥은 언제나 하나의 수수께끼이자 도전이었다. 박불똥이 작품에서 보여준 파격과 신화가 생산해낸 신비한 아방가르드적 인상은 의외로 박불똥을 둘러싼 사회 현실과 당대 한국 미학장의 구조, 그리고 이 두 개의 구조 사이에서 맹렬히 균열하는 박불똥 미술의 극복되지 않는 모순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치장에 불과했다. 박불똥은 미술장과 사회구조라는 서로 다른 조각들이 맞물려 들어가는 이음새에 해당한다.
박불똥은 불이다. 우리 미술사에서 여전히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타올랐던 불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 하나는 분명히 박불똥일 것이다. 그 불은 가장 먼저, 가장 화려하게 타올랐고, 또 가장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박불똥은 민중미술이 민미협으로 조직화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한국미술, 20대의 힘>전(1985, 아랍미술관)을 통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시작부터 민중미술과 함께 한 셈이다. 자신의 젊음을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미술사에 각인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미술가로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민중미술가라는 자격은 평생 그의 삶을 짓누른 멍에이기도 했다. 그는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소위 민중미술 전성기에 그 이름의 시장가치를 누리면서 적당히 민중미술가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때 그는 너무 젊었다. 그의 눈빛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위장된 민주주의 아래에서 민중미술이 이른바 풍경화라는 형태로 무장해제될 때조차 시들지 못했다. 그의 불이 가장 젊고, 강렬하게 타올랐을 때, 그의 붓은 칼이 되었다. “스스로 ‘나는 살아 있다’라고 외치며 삶에 대한 애착으로 충만한, 진정한 예술가이기를 원한다면 그는 갈고 닦은바, 무기인 붓으로 시대의 압제자들에게 달려들어 가당찮은 수염과 계급장과 발톱을, 이빨을 뽑고 떼어내고 불태우는 투혼을 발휘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붓으로 압제자들의 목을 찔러 피라도 맛보는 열사적 분노까지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1 물론 박불똥의 폭력은 미학적 은유와 풍자로 나타났다. 예컨대 박불똥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코화카염콜병라>(1988)은 당대 대한민국의 모순의 기저에 있는 미국의 존재와 미국적 자본주의의 심장에 화염병을 투척하려는 시도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 화염병이 미국과 미국적 자본주의의 시각적 상징인 성조기와 코카콜라병을 재료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상대방의 칼을 빌려 상대를 공격한다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기도하는 미학적 전복인 셈이다. 칼이 된 박불똥의 붓은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공략한다. 그가 위장된 권위와 힘을 능멸하는 데에 필요했던 것은 지퍼 사이로 내민 검지손가락 하나면 충분했던 것이다(<실수>, 1996). 박불똥이 붓을 칼 삼아 휘두를 때, 그의 미학적 실천의 주된 방법론은 이른바 포토콜라주였고, 그가 채집한 대중매체의 시각이미지를 자르고 붙일 때 칼은 붓을 대신했다(그의 작업실은 자본주의가 산출해낸 시각이미지들이 분해되고 분류되고 실험되고 재조직되는 정갈한 실험실을 닮아있다).
박불똥은 지독했다. 박불똥의 지독함은 그의 미학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성완경은 이를 정확히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박불똥의 작품에는 무언가 치열하고도 지독한 것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경이로움의 원천이다. 특히 포토콜라주 작품에서 ‘만든 자’와 ‘보는 자’를 함께 감전시키는 그 놀라운 ‘눈뜸’의 비밀은 바로 이 지독한 돌격, 치열한 장악, 공격적 이성에 의해서만 결국 획득되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신선하고도 풍요로운 충돌이라는 것을 빼놓고서는 달리 얘기될 수 없을 것이다.”2 그의 지독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1980년대 그의 지독함이 칼이 되었다면, 1990년대의 그것은 편집증적 관찰욕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윤과 자본의 논리에 흥건하게 젖어버린 욕망을 탐닉했다. 그에게 욕망은 동시대 자본주의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새롭게 포섭하는 통로였다. 자본에 의해 감전된 육체는 이윤을 생산하고 축적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자본은 육체를 통해 욕망을 부추기고, 그렇게 부추겨진 욕망은 상품의 소비를 유도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비는 달력 속의 벌거벗은 육체를 향한자위와도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가 욕망을 호출하는 이유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 결핍을 강제함으로써 더 큰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1990년대 남한 사회의 급격한 소비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분단이라는 기존의 모순과 결합했다. 그 결합 속에서 욕망의 대상으로 재구성된 여성의 육체는 지배권력에 의해 정치적 체제경쟁의 도구로 이용된다. <대북삐라>(1992)는 반라의 여배우가 “녹음의 계절, 의거월남의 가장 좋은 기회”라는 문구와 함께 등장한다. 이때 여배우의 육체는 이중적으로 재구성된다. 첫째 그것은 이윤 획득을 위해 상품으로 구성된 자본주의적 육체인 동시에 둘째 남북의 정치적 대립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또다시 재구성된 육체였다. 이처럼 박불똥이 1990년대 보여준 편집증적 관찰자로서의 지독함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상 속에서 분단과 자본이 한국사회를 재구축하는 과정을 인류학적 참여관찰과 유사한 방식으로 채집해냈다. 1980년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1990)가 거시적인 전체 속에서 재구성되는 일상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칼스호프>(1992), <개밥에 도토리>(1996), <시집간포르노테이프>(1996) 연작은 일상의 작은 편린을 통해 거시적인 사회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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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쓸-것 Road #2 > 112×300cm 2012

박불똥은 똥이다. 그의 지독함은 1980년대의 칼로도, 1990년대의 편집광적 채집으로도 충족되지 않았다. 2000년대 박불똥은 사회공간의 모순을 자신의 삶을 통해 극단적으로 체험한다. 그것이 자의건 타의건 박불똥은 참기 어려운 빈곤 속에 자신을 놓는다. 그는 기꺼이 ‘쓰레기’가 되는 삶을 선택한다. “백번이라도 부인하고 싶지만 나는 인생과 예술 양면 모두 패색이 완연한 ‘루저’이다. 신용불량자, 국세고액장기체납자, 파산자, 연이은 대인관계의 실패로 낙인된 성격파탄자, 철지난 민중미술의 갑옷을 여태 걸치고 다니는 지진아 아阿큐Q… 하여 스스로 나는 나를 가차 없이 쓰레기라 치부한다.”3 박불똥은 쓰레기가 된 삶 속에서 기꺼이 자신의 예술 또한 ‘똥’이 되는 것을 받아들인다(“그리하여 나는 완존히 똥 되야부렀다”.4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박불똥이 자신의 삶과 예술을 쓰레기-똥으로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경로는 어떠한지를 추적했다는 점이다. 그 힘이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숫자로, 돈으로, 은행계좌로, 카드를 통해 박불똥의 삶을 유린하고 있다는 점이다(<데스노트>, 2011). 우리 삶을 겁박하는 악마는 바로 “무시무시한 금융자본주의”5라는 외양으로 나타난다. 더 중요한 것은 박불똥이 자신과 자신의 삶을 쓰레기-똥으로 전락시키는 사회적 힘들에 자신의 예술을 통해 맞서고 있다는 점이다. 박불똥은 최근 작업에 예술의 이름으로 자신의 주변에서 쓰레기가 된 것들 하나하나를 호명해내고 있다. 박불똥의 2000년 이후 작업들은 쓰레기가 된 자신의 삶과 효용을 잃어버린 사물들을 보듬어 안고자 하는 시도였다.
불과 똥 사이. 그러나 박불똥은 맹목적인 불도, 자폐적 똥도 아니었다. 이 점은 박불똥을 정말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점이기도 하다. 그토록 맹렬했던 불은 어느새 똥이 되어 있고, 그 똥은 또다시 맹렬하게 화염을 내뿜는 불로 변해 있다.6 그는 불과 똥 사이를 왕복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박불똥은 미학적 방식으로 불과 똥을 변환한다. 박불똥을 이해한다는 것은 박불똥이라는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는 불과 똥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불과 똥 사이의 미학적 변환을 탐지해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변환 과정에서 오히려 똥은 불보다 더 맹렬하게 타오른다. 실제로 <된장1>(2006)은 자신의 똥을 칼로 삼아, 독재자와 지도자를 구별할 줄 모르는 우리 자신의 우둔한 분별력을 난도(亂刀)한다. 분명한 것은 박불똥은 그 자신이 민중의 한 사람이자 예술가로서 이 사회의 ‘더러운’ 시절들을 헤쳐나가고 있다는 점이며, 나아가 박불똥이 세상과 그의 삶을 헤쳐나가는 방식은 잔혹하리만큼 치열한 현실 문제의식과 미학적 실천이라는 점이다. 이때 박불똥의 ‘불’과 ‘똥’은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미학적 방법론의 두 극점을 보여준다.●

1 박불똥, “칼이 필요한 현실과 칼이 되어야 하는 붓.”(1987) 『민족미술 영인본 1986~1994.』 민족미술협의회 편, 도서출판 발언. 1994. 87쪽
2 성완경(1986). “탁월한 형상화 이미지와 이미지의 신선하고도 풍요로운 충돌.” 서울미술관 ’85 문제작가전 추천평론
3 박불똥 <못-쓸-것>(2012, 트렁크갤러리) 작업노트 중에서
4 박불똥은 <일상의 연금술전>(국립현대미술관, 2004) 전시장에서 실수로 무너지고 으깨진 연탄을 그대로 전시하면서(<파고다-작품에 손대지 마시오-b>) 그 상황을 유쾌하고도 풍자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비유했다. “아무튼, 화단 활동 20년 만에 처음 발 들여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리하여 나는 ‘완존히 똥 되야부렀다.’ 미필적 고의로?.” 박불똥 외. (2014.) 《박불똥 모순 속에서 살아남기》 현실문화연구. 209쪽
5 박불똥, <시>의 일부. 박불똥 외. (2014.) 『박불똥 모순 속에서 살아남기.』 현실문화연구. 337쪽
6 대체로 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눈빛>(관훈갤러리, 1985), <졸작>(그림마당 민, 1987), <결사반대>(그림마당 민, 1989),
<관능의 불구에 대한 자백>(금호미술관, 1992), <박불똥의 좔>(갤러리자인제노, 2011), 최근 <퀑, Bang!>(나무화랑, 2014)이 불에 해당한다면 <사유재산>(사비나 미술관, 2001), <토끼와 거북>(갤러리아츠윌, 2011), <박불똥의 형이하 악>(관훈갤러리, 2011), <못-쓸-것>(트렁크갤러리, 2012)은 똥에 해당한다.

박 불 똥 Park Bulddong
1956년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85년 첫 개인전 <눈빛>(관훈미술관)을 시작으로 <졸작>(그림마당 민, 1987) <결사반대>(그림마당 민, 1989) <관능의 불구에 대한 자백>(금호미술관, 1992) <사유재산>(사비나갤러리, 1999) 등 11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민족예술인총연합회, 민족미술협회 회원이며, 경기도 남양주 마석에서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