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청산되지 못한 식민주의, 좌절되는 우리미술의 정체성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비평
식민지를 거쳐 6·25전쟁을 막 치러낸 1954년은 전쟁의 상흔과 공포, 가난 그리고 분단 속에서 신음하던 시기였다. 당시 남한의 미술계는 식민미술의 청산, 민족미술의 수립, 전통미술의 계승, 그리고 서구미술의 수용이라는 여러 과제를 동시에 껴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우선 광복 이후 정권을 잡은 이승만 정부는 친일 청산과는 거리가 멀다. 이후 분단과 전쟁, 쿠데타를 통해 반민족, 친일세력들이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왜곡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이는 그 이전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현재 한국 미술계에도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전쟁 후의 한국 화단에는 일제강점기의 화풍과 영향이 변함없이 온존해 있었고 한편으로 젊은 세대들은 서구미술에 급속히 경도되었다. 우리는 한 번도 서구를 (직접적으로)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세계의 다른 피식민지 국가의 민중과 달리 서구를 대립과 투쟁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구원과 동경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 매우 특이한 점이다. 서구가 어떤 나라인지 분별할 수도 없었으며 당연히 서구미술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검증 절차도 없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저 서구에 대한 열렬한 추종만이 있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일제강점기 동안은 일본미술 혹은 일본화 된 서구미술의 어법을 충실히 모방했다가 광복과 전쟁 이후에는 다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미술 어법을 추종해왔다는 얘기다. 이렇듯 식민지 청산에 실패함으로써 우리의 독자적인 미술문화를 일구는 일은 무척이나 지난했으며 끊임없이 좌절되었다.
친일세력을 등에 업고 집권한 이승만 정권은 4·19혁명으로 마감되었다. 독재정권이 시민의 힘으로, 민중의 이름으로 꺾인 것이다. 1960년대는 이렇게 4·19혁명 정신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4·19를 주도한 젊은 학생들은 일제 식민지의 유산과 단절된 세대였으며 가장 민감한 10대 때 4·19혁명이라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민중적 에너지’를 직접 보고 경험했다. 그러나 이내 박정희의 집권과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통해 이른바 굴욕적인 한일 외교 관계의 정상화 역시 접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두 개의 가치를 본능적으로 가슴에 품고 자란 이들”(강헌)이 후에 1970년대 청년문화를 태동시키는 주체가 된다. 그리고 이 영향이 바로 1980년대 미술을 만들어낸다. 나로서는 오윤이 그 대표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마치 대중음악에서 신중현과 김민기의 존재처럼 말이다.
한국의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보다도 4·19혁명이었다. 단 한 번도 공화주의 공화제의 가치를 경험한 적이 없었던 한국인에게 4·19혁명은 민주주의의 교과서였던 것이다. 한편 4·19혁명을 시작으로 열린 1960년대는 전후의 폐허와 허무를 딛고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근대적 가치에 대한 열망이 확산된 시기이자 곧바로 이어진 5·16군사정변으로 인한 굴절과 좌절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는 제 1·2·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시대이자 정치적으로는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시대였다. 재벌 대기업과 수출 중심 경제구조의 원형이 바로 이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에 탄생했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1960년과 1961년에 연달아 일어난 그 시기, 연간 한국 총수출액은 100만 달러를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산업적 기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 즉 제3공화국의 어젠다는 ‘조국 근대화’였고, 그가 지은 노랫말처럼 ‘잘살아보세’였다. 박정희 체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친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시대를 일컫는다. 이념적으로는 반공이데올로기가 지속되면서 조국 근대화와 민족주의 이념이 강화된 시기다. 박정희는 문화를 집권 연장과 독재 강화 그리고 경제 성장의 도구로 인식하였기에 문화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시간이 지날수록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문화정책도 확대되고 강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문화예술 전반에 광범위하게 개입했으며 정치적 통제와 활용방법 매우 구체화했다. 그에 따라 작품의 창의성이나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 및 진보적 성향의 예술이 싹을 틔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문화산업은 철저히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표현의 자유는 극도로 제약당했다. 정권 역시 예술작품이 정권의 홍보물에 머물 것을 요구했으며 정권의 이데올로기인 반공과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차원에서만 기능하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했다. 대다수 미술작품이 그에 순응해서 제작되었다.
1969년 9월 14일 국회는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의결한다. 이후 11년을 규정짓는 불행한 정치적 사건이자 이로 인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어둡고 불행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는 그렇게 저물어갔으며 1970년대는 또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참혹한 시대에 단색주의라는 화풍이 발아했던 것이다. ●


분열, 잃어버린 기회

조은정 미술사
광복 이후부터 6·25전쟁이 휴전으로 종식되기까지의 시기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맥락에서 선택적 이데올로기의 공간이었다. 친일(親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맞은 광복은 친일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기 전 반공이데올로기에 편입되었다.
광복을 기념하기 위한 ‘해방기념예술대축전’에 당시 남쪽에 거주하던 미술인 대다수가 포함되어 있던 조선미술건설본부는 <해방기념미술전>을 열였다. 전시를 마친 1945년 11월에 미술인들은 ‘조선미술가협회’를 창설하고 고희동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정치에 대한 절대 불간섭과 엄정 중립, 미술문화의 독립적 향상을 꾀함, 민족미술을 창조하여 건국에 이바지함’ 등이 강령이었다. 하지만 고희동이 회원의 의사에 관계없이 정치적 성향이 강한 비상국민회의에 참가하고, 1947년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맞선 우익단체인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 협회를 가입시키자, 탈퇴한 몇몇 회원은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조형예술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진보적 미술인들은 다시 단체를 통합하여 조선미술동맹을 결성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조선미술가협회’는 협회명을 ‘대한미술협회’로 변경함으로써 대표성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광복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구태를 벗고 새로운 화단을 설계하려던 미술계는 당시 사회 전반이 그러하였듯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친일의 상대편에 선 반제국주의적 성격의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강력한 반공정책을 편 미군정에 의해 억압되었던 것이다. 반공은 친일의 면죄부가 될 수 있었고, 이것은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구축된 화단의 헤게모니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정부는 정권 유지를 위하여 강조된 반공이념의 실현처로서, 미술가들의 좌익 참여 금지 방편으로 〈국전〉을 이용했다. 작가들이 좌익에 경도되는 경로를 차단하고, 정치적 혼란에 따른 미술·문화정책의 공백을 메우는 동시에 이른바 민주진영이라 일컬을 수 있는 미술가들에게 합법적인 활동무대를 제공하는 데 〈국전〉 설치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친일미술인으로 낙인찍혔던 김인승, 윤효중, 이상범 등이 전후 재개된 <국전>의 심사위원으로 부각된 것은 그러한 실상을 드러낸다.
6·25전쟁은 광복 이후 남과 북이 만난 유일한 지점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였다. 미술인은 동시에 남과 북 두 체제를 모두 경험했고, 두 권력 아래 미술작품을 생산하였다. 이념전이었던 6·25전쟁의 특성상 선전화(宣傳畵)가 많이 제작되었으며, 국가 동원체제 아래 미술은 어느 때보다 국가의 부름에 강하게 응답한 시기이기도 했다.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미술인들은 동원되었고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서울이 수복되자 대한미협은 ‘화단 수습과 전시하의 국가정책에 호응할 것’을 천명하였고 인민군 점령기간에 인민군에 협조한 미술인들에 대해 부역자 심사도 하였다. 서울에 잔류하던 미술인을 임의로 정한 원칙에 따라 부역 정도를 구분해서 법적인 제재를 받을 것이 뻔한 조사위원회에 회부하였다는 사실은, 이들 도강(渡江)파에게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미술동맹에서 이 미술가들을 조직하고 지도하던 미술인들은 이미 모두 월북한 뒤였기 때문이다. 6·25전쟁은 국가가 미술을 통제할 수 있고 동원할 수 있으며 그 힘에 반할 때는 처단할 권력을 부여하였다. 전쟁에서 미술인은 종군화가로 국가에 봉사하였고 국가가 요구하는 미술작품을 생산하였다. 전쟁의 경험과 공산주의적 양식은 리얼리즘, 자유주의 양식은 자유주의 국가의 미술, 즉 추상주의라고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파악되었다. 민족미술에 대한 합의와 이념적 결집을 이루지 못한 광복 이후 화단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열로 인해 새로운 민족적 미술양식은 산화되었다. 국가 통제의 반공주의 앞에서 미술의 사조나 도덕적 명분은 생존의 법칙을 넘어설 수 없었다. 반도덕적 기회주의의 산물인 미술계 내부의 권력은 자본의 논리, 즉 미술시장에서 그의 작품이 ‘상품’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는 토대를 이미 이념의 분열을 통해 배양하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