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이미지 전쟁, 누구의 것도 아닌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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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나라는 저마다 특색있는 국기(國旗)를 갖고 있다. 우리에게는 태극기가 있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다. 2017년 3월, 과거 어느 때보다 태극기의 의미가 각별히 여겨지는 요즘이다. 모든 국민이 익히 알고 있듯이, 그 이유는 올해가 3·1만세운동 98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불행한 사태로 인해 국론이 극단적으로 분열된 까닭이 더 크다. 그래서 태극기를 바라보는 시선과 감정은 복잡 미묘하고 착잡할 수밖에 없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필두로 그동안 태극기는 소용돌이치듯 급변해온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결정적이고 역사적인 현장에서 어김없이 펄럭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학생운동과 진보진영 중심으로 항쟁과 투쟁의 상징이었던 태극기는, 최근 ‘박사모’나 ‘어버이연합’ 같은 보수성향 단체세력의 상징으로 적극 활용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처럼 시대적 배경과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태극기를 해석하고 활용하는 입장은 첨예하게 대립된다. 그러나 이런 갈등 속에서도 ‘애국의 상징’이라는 공통분모로서 태극기 본연의 의미와 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배경에서 《월간미술》은 냉철한 현실 인식을 전제로 태극기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맥락을 되짚어 보고 진단하는 기획기사를 마련했다. 특정 대상을 모티프로 설정하고 그것을 시각이미지 문화연구라는 측면에서 심층 분석한 이번 특집은 2016년 12월호 ‘시대의 얼굴, 동상의 진실을 파헤치다’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후속 기사인 셈이다. 부디 이 두 특집을 통해 ‘미술과 함께’ 그리고 ‘사회와 함께’하고자 하는 《월간미술》의 의도와 진정성이 읽히고 전달되길 바란다. 기획 · 진행=이준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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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앞 세종대로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1전시장.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인 ‘데니( O.N.Denny ) 태극기’(1890년 추정)를 비롯해 김구 서명문 태극기(사진 오른쪽 위), 광복군 태극기(오른쪽 아래) 등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태극기가 전시되고 있다.

태극기의 등장부터 오늘까지

김권정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학박사

국기(國旗)가 오늘날처럼 국가를 상징하게 된 것은 근대국가 성립 이후의 일이다. 근대 시민사회와 근대국가가 형성됨에 따라 국적(國籍)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국기가 발전하였다. 근대 시민사회 출발의 계기가 된 프랑스혁명 때 3색기(三色旗)가 사용된 이후 하나의 깃발이 국가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속속 등장한 유럽의 근대 시민국가들에서는 자유 · 평등 · 박애를 상징하는 프랑스 3색기를 모방해 나름의 국기를 제작 · 사용하였고, 현대 유럽 국가의 국기 대부분이 이때 제정되었다.

태극기가 대한민국 국기로 등장한 것도 이런 세계사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개항 이후 외국과 통상을 시작하며 국가 정체성을 상징할 국기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1882년(고종 19년) 5월 22일 미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때 사용된 태극기 모습이 그 해 미국 해군부 항해국이 제작한 《해상국가들의 깃발》이란 책자에 ‘Ensign’기란 이름으로 실렸다. 또한 1882년 9월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배 위에서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태극 문양과 그 둘레에 8괘 대신 건곤감리의 4괘를 그려 넣은 ‘태극 · 4괘 도안’의 기(旗)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전한다.

국기 제정의 필요성에 공감한 고종은 1883년 3월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 · 공포하였고, 이후 태극기가 공식적인 국기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883년 박정양 일행이 외교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에 갔을 때 호텔 숙소에 태극기를 공식 게양하였고, 1888년에는 미국 주재 조선공사관을 워싱턴에 개설하여 태극기를 국가의 국기로 사용하였다. 1893년 우리나라가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여했을 때도 태극기를 사용하였으며,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참여하여 한국관을 개설하고 태극기를 사용한 것이 당시 책자에 표현되었다.

그러나 당시 국기 제작 방법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고, 일반 국민에게 널리 알리지 않은 까닭에 이후 다양한 형태의 국기가 사용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1942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기 형태를 일치시키기 위해 국기제작법을 제정한 적도 있으나, 한국민에게 제대로 알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태극기 제작법 통일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49년 10월 국기 제작법 고시를 확정하여 발표하였다. 이후 여러 규정이 제정 시행되어 오다가 최근 국기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규정을 완비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태극기는 흰색 바탕 가운데 태극문양과 네 개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四卦)로 구성되어 있다. 태극기의 흰 바탕은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의 순수성을 상징하며,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이 있다. 태극문양은 우주 만물이 음과 양의 상호 작용으로 생성되고 궁극적으로 발전한다는 우주 자연의 생성원리를 표현한 것으로 붉은색은 존귀와 양을, 파란색은 희망과 음을 나타낸다. 4괘는 음양이 생성, 발전한 모습을 표현하며, 천지일월, 춘하추동, 동서남북, 인의예지 4가지를 각각 조합한 것이다. 이렇게 태극기는 우주 만물이 생겨난 근본 원리인 태극의 원리를 따라 제작된 것으로 우리 민족의 창조성과 궁극적인 발전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태극기가 단순한 상징 차원에 그치지 않고 역사 현장에서 우리의 열망을 담아내는 통합과 공존의 상징으로 오늘까지 함께 해왔다는 점이다.

국기 제정 이후 태극기는 공식 행사에 국가적 상징으로 등장하였다. 1896년 11월 독립문 기공식에 대형 태극기가 등장하였고, 독립협회 활동에 태극기가 게양되며 국기의 의미가 강조되었다. 국기가 국가의 권위 및 국가 자체를 대표한다는 의식이 국민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면서 태극기가 국권 회복과 독립의지를 나타내는 상징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일제 침략이 본격화되자, 안중근 등 12명의 동지는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단지동맹을 한 후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자 무명지를 잘라 ‘대한독립’이라고 쓰며 항전을 다짐하였다.

태극기의 의미가 독립운동사에서 폭발적으로 등장한 것은 1919년 3·1운동 때이다. 3·1운동이 곧 태극기와 함께 준비되고 진행된 것이다. 수많은 학생 및 시민들이 만세운동을 위해 각자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만세운동의 시위가 시작되면 맨 선두에는 대형 태극기가 앞장섰다. 태극기에는 독립에 대한 수많은 한국인의 열망이 글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독립선언서 및 시위 격문 등과 같이 태극기가 만들어져 전국으로 배포되었다. 이런 이유로 일제는 한국인이 태극기를 만들거나 지니고만 있어도 독립운동으로 간주하여 탄압하였다.

국권 상실 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태극기는 민족, 국권 회복 의식을 일깨우는 상징이었다. 국외 민족교육 현장에서 국기가(國旗歌)를 지어 부르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3·1운동 기념식에는 태극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였다. 상해의 한국인들은 매년 3월 1일 독립만세기념일 축하식을 거행한 후 태극기를 들고 시내를 행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설립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태극기를 큰길에 세워 놓기도 하였다. 6·10만세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때도 태극기는 독립의지를 강하게 보여주었다.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에서도 태극기는 독립운동의 얼굴이 되었다. 이봉창은 1932년 의거 이전 한인애국단 입단 때 태극기 앞에서 한인애국단 선서문을 가슴에 걸고 사진을 찍었다. 같은 해 4월 윤봉길도 거사 직전 자신의 집에서 대형 태극기를 배경으로 양손엔 폭탄을 들고 가슴에 선서문을 걸고 사진을 촬영하였다.

이처럼 태극기는 국권을 상실한 국가를 의미하며 독립사명을 고취하는 상징이 되어 독립을 외치는 이들과 함께 하였다.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각종 기념식에 태극기가 등장하였고, 태극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하였다. 태극기가 한국인이 있는 세계 곳곳의 독립운동 현장에서 휘날렸다. 독립운동을 거치며 태극기가 국가 민족 독립의 상징으로 한국인의 뇌리에 깊이 인식되었다.

광복 이후 그 역사적 의미는 더욱 깊어져갔다. 광복 직후 개최된 3·1운동 기념식에서 태극기가 가장 높이 배치되었고, 전면에 내세워졌다. 각종 모임마다 태극기는 구성원들을 통합하는 상징으로 등장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축하식에서도 태극기가 기념식장 가장 높은 곳에 전면으로 배치되었다. 국민은 태극기 밑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태극기는 6·25전쟁과 같은 민족적 비극의 현장에서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내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쟁 이후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재건하고 경제개발을 통해 땀을 흘려야 했던 그자리에도 국민과 함께 하였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중동의 근로자 등이 일터 현장에서 태극기를 보며 대한민국 국민임을 확인하고 자랑스러워하였다. 전 세계를 누비며 한국인 세일즈맨이 팔던 상품에도 태극기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열망을 담은 4·19혁명, 유신반대운동,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등에서도 태극기가 휘날리며 민주주의의 정신과 민주화에 대한 시민사회의 갈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감동적인 스포츠 현장인 올림픽에서, 2002년 한일공동 월드컵 현장에서도 태극기가 선수와 국민을 대한민국이란 울타리에서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태극기는 단순히 추상화된 국기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상징하는 존재다. 태극기에는 한국인의 고난과 영광이라는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새로운 국가와 가치를 향해 함께 달려온 역사적 경험이 그대로 들어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에 빈번히 일어나는 갈등과 충돌을 넘어 역사의 현장에서 통합과 포용의 상징이 된 태극기를 보며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새롭게 찾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남상락 자수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86호 독립기념관 소장 견직물에 자수 1919 1919년 4월 4일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사용하기 위해 독립운동가 남상락이 부인과 함께 명주천에 손바느질로 만들었다.

〈남상락 자수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86호 독립기념관 소장 견직물에 자수 1919 1919년 4월 4일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사용하기 위해 독립운동가 남상락이 부인과 함께 명주천에 손바느질로 만들었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88호 독립기념관 소장 견직물에 바느질 1941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1941년 중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는 매우사(梅雨絲, 미우스오그) 신부에게 준 태극기.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당부한 김구 선생의 친필 묵서가 쓰여 있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88호 독립기념관 소장 견직물에 바느질 1941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1941년 중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는 매우사(梅雨絲, 미우스오그) 신부에게 준 태극기.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당부한 김구 선생의 친필 묵서가 쓰여 있다.

1-003722-000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89호 독립기념관 소장 면직물에 바느질 1945 광복군 제3지대 2구대에서 활동하던 문웅명이 1945년 2월경 동료 이정수에게 선물 받은 것으로, 1946년 1월 문웅명이 다른 부대로 이임하자 동료 대원들이 독립을 염원하는 글귀와 서명을 남긴 태극기다.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94호 고영준(전남 담양) 소유 면직물에 바느질 1907 조선말 전남 구례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고광순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로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의‘不遠復’글씨가 수놓아져 있다.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94호 고영준(전남 담양) 소유 면직물에 바느질 1907 조선말 전남 구례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고광순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로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의‘不遠復’글씨가 수놓아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