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행복을 담은 색깔 그림 길상화吉祥畵 다시 보기

MM-SPC-22

윤범모 가천대 교수

‘미술계의 숙원 사업’이던 우리의 채색화를 집대성한 두꺼운 채색화 도록이 드디어 출판되었다. 《한국의 채색화》(다할미디어 발행)가 바로 그것. 우리는 이 책에 소개된 채색화 작품을 통해 우리 민족의 독창성과 감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아, 아름답다! 우리 색깔 그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우리 민족의 회화작품 가운데 이렇듯 아름답고, 멋있고, 독창적이고, 상징적인 그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진정 국제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우리의 그림이다. 그런데, 강하게 치밀어 오르는 의문 사항 하나, 그것은 바로 기존 한국미술사 관련 저술들의 한계이다.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기왕의 한국회화사 관련 저술에서는 우리 채색화 작품을 찾아볼 수 없다. 정말?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우리 색깔 그림’을 푸대접하고 무시했던가. 작가명과 제작연도를 알 수 없는 ‘민화’는 미술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에 ‘하자’가 있다는 것, 하지만 이는 궁색한 변명일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채색화를 다시 보아야 한다.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다

그동안 한국회화사 연구는 수묵 문인화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의 예술관은 한마디로 예술 천시관賤視觀이었다. 그림 그리기는 취미생활 정도의 여기餘技로 여겼지 직업적 대상이 아니었다. 예술은 완물상지玩物喪志의 애물단지 정도, 그래서 사대부가 가까이 할 대상은 아니었다. 문인 당사자들이 여기라고 주장한 수묵 문인화를 가지고 한국회화사의 골간으로 삼아 기술했으니, 이는 불구의 연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문인화는 중국풍을 기본으로 하여 전개되었으니, 민족 회화의 독창성 문제를 생각할 때 한계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의 그림, 그것은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 불화, 조선 초상화와 기록화, 불화와 무속화, 그리고 이른바 민화로 이들의 공통점은 채색화이다. ‘민화’는 채색화의 꽃이다. 따라서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이다. 회화사 연구의 시각 교정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한국의 채색화》는 이 점에 대해 절규한다. 절규!
흔히 한민족을 일컬어 백의민족이라고 한다. 어느 순간에는 그랬을지 모르겠다. 현재 한국인은 백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종로거리에서 흰옷 입은 사람 만나기란 매우 어렵다. 실제로 국가 기관에서 한국인의 색채선호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오늘날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색? 그것은 파랑색이었다. (참고로 오늘날 세계 민족의 색채 선호 역시 파랑색이 1순위라는 조사보고서가 있다.) 바닷가 출신 사람들은 완벽할 정도로 파랑색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가, 섬 출신 김환기는 파랑색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못할 정도로 파랑색을 좋아했다. 통영 출신 전혁림 역시 파랑색을 작품의 기저로 삼았다. 오방색의 단청을 보자. 여기서 바로 한국인의 색채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단청과 같은 원색의 농채濃彩를 좋아한다. 하지만 일본인은 2차색인 간색間色을 좋아한다. 일본 미인도에 보이는 간드러지는 색깔과 필선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한민족은 밝고 짙은 원색을 좋아한다. 그래서 채색화가 한민족의 심성 표현에 적합했던 것이다. ‘민화’는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민화’는 무명의 저속한 하수의 그림이 아니다

민화라는 용어를 만든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민화를 무명의 저속한 하수下手의 그림이라고 개념 정리했다.(물론 하수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민화는 아름답다고 말했다.) 아무튼 민화하면 3류의 그림, 심하게 말해서 시골 장돌뱅이의 막그림 정도로 폄하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표현은 민화의 본질을 무시한 것이다. 민화는 그렇게 무명의 하수 그림이 아니다. 더군다나 저속한 그림도 아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민화작품의 독창성과 상징성, 장식성과 해학성 등 특성은 결코 하수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 나름대로 훈련된 과정을 거친 수준급 화가가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보하여 그린 작품이다. 하여 민화는 마을 공동체의 눈높이에 맞춘 공동체 사회의 시각적 산물이다. 민화세계의 특성으로 동심童心을 들 수 있는 바, 동심의 표현은 고수가 아니면 불가능한 수준이다. 추사 김정희의 〈板殿〉(강남 봉은사 현판)이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아프리카 미술의 제작 과정처럼 익명성은 주요한 특징을 이룬다. 아프리카 미술은 마을의 공동의지를 작품에 담는 것이 특징이다. 이때 작가명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미술작품처럼 작가의 개인 브랜드를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화의 무명성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여겨진다.
기왕의 민화 걸작전은 상당부분을 왕실회화 작품으로 꾸몄다. 근래 궁화宮畵 관련 연구 성과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궁화와 민화의 구분을 요구하게 되었다. 왕실에서 사용한 궁화를 두고 백성 민民자를 붙이기에는 어폐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화나 민화는 똑같은 채색화이고 커다란 의미에서 형식과 내용이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있다. 궁화의 작가는 도화서 화원이었고, 군왕에게 진상하는 그림에 자신의 이름을 표기할 수 없는 신하의 신분이었다. 궁화에 작가명이 누락된 것은 시대적 환경의 반영이다. 이런 궁화가 민간에 퍼져 유행하면서 이른바 민화의 세계가 광역화되었다. 궁화와 민화는 재료를 비롯 표현형식 등에서 약간의 차이는 보이지만 크게 보면 같은 맥락에서 평가하게 한다. 민화의 물결은 점차 넓게 파급돼 민화의 독창성과 함께 자생력을 갖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민화라는 용어의 비과학적 부분이다. 민화는 하수의 저속한 그림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궁화와 민화의 경계선 구별 짓기에 어려움이 있다. 궁화와 민화의 완벽한 구별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수용자 중심의 이와 같은 구별이 얼마만큼의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근본적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화원이 똑같은 그림을 2장 그려 한 점은 왕실에 진상하고, 또 한 점은 민간의 친지에게 주었다면, 그것은 궁화인가, 민화인가. 더군다나 화원은 중인 출신으로 피지배계층에 속한다. 왕공사대부 계층도 아닌 중인 출신이 궁정화풍을 이룩하면서 그린 것이 궁화이다. 하지만 궁화의 광역화 현상은 민화와 대동소이한 형상을 만들게 했다. 요즘의 현상은 궁화와 민화를 한 형제로 볼 것인가, 남의 집 식구로 볼 것인가, 혼란을 자초하는 꼴이다. 무엇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점이 있다. 현재 민화 그리기 붐은 전국적으로 열광의 도가니를 만들고 있다. 10만 명 이상의 민화인구는 한국 문화현상의 아주 독특한 흐름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들이 ‘민화’라고 그리는 내용을 보면, 대다수가 궁화라는 점이다. 민화공모전 수상작은 궁화를 모본으로 삼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궁화는 민화보다 규모로 보나 내용의 품격으로 보나 고급스럽고 화려하기 때문이다. 궁화 취향은 시대적 추세의 반영이다. 그래서 민화라는 용어를 고집한다면, 궁화라는 보물창고를 잃게 된다. 굳이 민화라는 용어를 쓰고자 궁화라는 전통을 방기해야 좋을까.
이른바 민화의 내용은 대부분 행복추구이다. 가장 큰 사랑을 받은 화조화 부분,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작품이 남은 모란 그림, 이는 바로 부귀영화의 상징이다. 모란병풍 그림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또 장례식도 거행했다. 모란 사랑의 조형적 증거물이다. 책거리, 문자도, 인물화, 산수화 등 민화작품에 내재하는 기본적 심성은 바로 행복 추구이다. 산수화도 넓은 의미로 행복을 추구하는 그림이다. 그래서 한 일본인 학자는 민화라는 용어를 차라리 ‘행복화幸福畵’라 부르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용어의 신선하지 않음, 이런 점을 감안하여 나는 지난 3월 열린 ‘경주민화 포럼’에서 출전이 확실한 ‘길상’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길상화吉祥畵’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러니까 궁화와 민화를 모두 아우르면서 우리 채색화의 특성을 담아낼 용어, 무엇보다 무명의 저속한 그림이 민화라는 야나기 이론의 개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의 산물이었다. 물론 새로운 용어가 자리매김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조선말기 왕실에서부터 시골의 민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유행했던 우리 식의 그림, 그것의 형식은 채색화였고 내용은 길상화였다는 점이다.

경상북도 상주에 위치한 남장사 극락보전 벽에 그려진 물고기를 탄 인물 © 윤범모

경상북도 상주에 위치한 남장사 극락보전 벽에 그려진 물고기를 탄 인물 © 윤범모

사찰에서도 길상화를 그렸다

채색화의 전통을 온전히 지킨 곳은 사찰이었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억불숭유 정책에 의해 핍박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찰은 고려의 찬란한 불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펼쳤다. 채색의 전통을 지킨 공로, 이는 정말 박수 받을 일이다. 어째서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민화’가 대대적으로 그려지면서 유행했을까. 거꾸로 표현하면, 이 시기는 정치 경제적으로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민간의 생활은 글자 그대로 궁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렇듯 살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행복을 담은 그림을 좋아했다. 길상화를 보면서 괴로운 일상생활을 잊고 내일의 행복을 꿈꾸었다. 마치 망자亡者를 위무慰撫하기 위한 감로도甘露圖가 이 시기에 유행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역설적 표현은 세상을 훈훈하게 한다. 길상화 속의 풍자정신과 상징성은 이런 의미에서 더욱 돋보인다.
오늘날 사찰 벽화에 남아 있는 민화풍의 그림들, 사찰이 바로 민화 제작의 모태 역할을 했음을 증거하는 부분이다. 토끼가 호랑이에게 담배 물려주는 그림, 이런 내용이 왜 사찰 벽화에 그려졌는가. 산신각의 산신도는 타종교를 배려한 불교의 산물이라 볼 수 있지만, 불교와 무관한 민화풍 소재의 사원 벽화는 정말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조선시대 말기의 사원경제는 매우 열악했다. 제지업이 사찰에서 흥행했던 것도 경제난 타개책의 일환이었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불화를 그리는 화승畵僧이 민화를 그려 경제문제를 해결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찰은 채색 물감을 다루는 전문성을 지니고 있었고, 또 채색물감은 비쌌기 때문에 아무나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청 담당 가운데 소묘력을 요구하는 그림, 바로 별화別畵 담당 화가는 민간용 민화를 그릴 수 있었다. 벽에 그린 내용을 종이에 그리면 바로 ‘민화’가 됐다. 이런 민화작품에 작가 이름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까치 호랑이를 그려주면서 굳이 스님의 법명을 밝힐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증언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고암 이응노가 주인공이다. 그는 1920년대 초 상경하기 직전 고향(홍성, 예산)의 사찰에서 ‘민화’를 그렸다. 당시 사찰에서는 민화를 많이 그렸는데, 고암도 그곳에서 일당을 받고 그림을 그렸다. 건장한 남자의 하루 품삯이 20~30전 할 때 고암은 1원을 받았다. 당시 스님들이 많이 그린 내용은 까치 호랑이 그림이었다. 뒤에 고암은 일당 5원을 받게 되었는데, 그 돈을 가지고 고암은 운동화와 기차표를 사서 상경할 수 있었다. 사찰에서 민화를 그렸다는 증언, 이는 매우 흥미롭다. 화승畵僧이 민화를 그렸다는 증언은 민화작가의 위상을 제고시키면서 민화의 성격을 다시 헤아리게 한다. 사찰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채색 전통을 지켜 온 보루였기 때문이다. 채색화의 위상 재고를 요구하는 작금의 현실이다. 아름답고 독창적인 우리의 길상화를 위하여. ●

〈해학반도도〉 비단에 채색과 금박 714×227.7cm 12폭 병풍 1902년 추정 (미국 호놀룰루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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