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황현욱,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

특집_황현욱 도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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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5/128전> 창립전에 참여했던 작가들. 왼쪽부터 황태갑, 황현욱, 이묘춘, 이향미, 이명미, 강호은, 김기동, 최병소

황현욱의 대구시절 발자취를 추적하다

이준희 먼저 황현욱 선생의 기사를 준비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죠. 제가 88학번인데요, 대학로 인공갤러리에서 리처드 롱, 정병국, 차계남 등의 전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먼발치에서 황현욱 선생을 직접 뵙기도 했고, 나중엔 카페 말파에도 몇 번 드나들었고요. 당시 말파 커피 값이 무진장 비쌌던 걸로 기억해요. 아무튼 제가 2000년부터 지금까지 《월간미술》에서 일하면서 여러 작가를 만났는데 인공갤러리와 황현욱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 듣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직감적으로 황현욱이란 인물과 인공갤러리가 한국현대미술 현장에서 아주 중요한 존재이자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저는 요즘 개인적으로 일부 젊은 세대에 의해 표출되는 미술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불만이 많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등장한 이른바 ‘신생공간’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움직임과 현상, 즉 동시대 한국현대미술계의 지형 변화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그들에게 황현욱의 존재와 인공갤러리라는 역사적 공간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현대미술 현장에 존재했던 이런 역사적 인물과 전시공간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을 테니까요. 아주 오래된 과거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던 중 몇 달 전, 대구미술관에서 우연히 황현욱 선생의 미망인이자 대전 비비스페이스 대표 김춘화 선생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제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황 선생 기사 계획을 말씀드렸죠. 처음엔 선뜻 내켜 하지 않으셨지만, 대전 비비스페이스로 직접 찾아가서 다시 간곡히 부탁하고 도움을 청했죠. 그때 김춘화 대표가 그러셨어요. “만약에 황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그분 성격에 이런 기사를 100% 반대하시며 크게 호통쳤을 것이다. 황 선생은 그런 분이다. 그래서 나 역시 처음엔 황 선생의 뜻을 헤아려 내켜하지 않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제 그분이 돌아가신 지 15년도 넘었고,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그분을 재조명하는 일이 의미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취재에 협조하기로 했다”고. 이렇게 해서 이 기사를 본격적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황 선생의 대구시절 활동에 대해 미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여러분과 접촉하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황현욱 선생의 초창기 대구 활동을 빼놓을 수 없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선생님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그 이야기를 들어보려 합니다. 황 선생은 1948년 안동에서 태어나신 걸로 조사됐는데, 구체적인 가족관계나 성장 과정은 여전히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이교준 황 선생은 1남 2녀에 둘째예요. 위아래로 누님과 여동생이 계시죠. 제가 듣기로는 6.25 때 부친이 황 선생을 이웃에 맡기고 북으로 가셨다고 해요. 이후로 소식이 끊기고 끝내 아버지를 못 뵌 거죠. 당시 황 선생이 3살 때였는데 자전거 뒤에 실려서 도산서원 쪽으로 피난가는 중에 마을 사람에게 맡긴 것을 기억한대요. 이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가 혼자서 황 선생을 키웠고요.

이준희 이명미 선생님은 황 선생의 초기 활동에 대해 알고 계시죠?

이명미 1973년 <非오브제전>이라는 제목으로 황현욱의 개인전이 서울 명동화랑에서 열렸는데, 그 전시가 끝나는 날 황현욱을 처음 봤어요. 첫 만남이었던 그날 황현욱과 대판 싸웠어요.(웃음) 싸우면서 서로를 알게 된 거죠. 황현욱 전시가 끝나고 바로 다음 날 저하고 여자 작가 2명이 함께 <시점 73>이라는 전시를 열었거든요. 그런데 황현욱이 <非오브제전>에 출품했던 울퉁불퉁한 자연석을 명동화랑 바닥에 그대로 던져놓았어요. 저보다 먼저 도착한 친구가 그 돌이 황현욱의 작품인줄 모르고 그 위에 자기 작품을 올려놓았어요. 그런데 황현욱이 자기 작품 위에 물건을 올려놨다고 버럭 화를 내서 싸움이 났고 제 친구가 울면서 밖으로 나왔죠. 그래서 봤더니 그 뒤로 못되게 생긴 남자가 나오더라고.(웃음) 우리가 들어가서 삿대질하면서 같이 싸우면서 서로 알게 됐어요. 싸우면서 만난 것이 첫 인연이라 제가 정확히 기억하죠.

이교준 그 이후 황 선생은 1973년 <제2회 S.T그룹전>에 참여했는데, 당시 S.T그룹은 서울대, 홍익대 출신으로 구성된 작가 그룹이죠. 주변에서는 황 선생이 S.T에 들어간 것을 참 이례적이라 생각했어요.

이명미 그리고 1974년부터 <대구현대미술제>에 함께 참여했고, 1975년엔 대구시립도서관화랑에서 열린 <35/128전> 창립전에도 같이 참여했어요. 그때 서문을 이일 선생이 쓰셨고요. 그때 우리는 전시만 한 게 아니라 같이 책 읽고 토론도 하고 그랬어요. 황 선생은 나중에 제 남편이 운영한 대구 수화랑에서 아트디렉터로 일했는데, 한국 최초의 ‘아트디렉터’라고 《매일신문》에 기사가 실리기도 했어요.

이준희 그럼 수화랑 아트디렉터를 하시게 되면서 작업 활동은 그만두신건가요?

이교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1978~79년 즈음 일거예요. 그때 황 선생은 작가가 작업하면서 동시에 제대로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본인이 직접 작가를 종합적으로 학습시키고 지원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 무렵부터 황 선생은 지금은 아파트가 된 옛 효성여대 뒷산 골목 안 작은 집 골방에서 머리 깎고 영어공부를 하셨어요. 한국에는 변변한 현대미술 서적이 없으니까, 외국 책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죠. 그러던 중에 작가 박현기 선생의 설득으로 수화랑 디렉터를 맡게 됐어요. 저는 그때 군대를 제대하고 20대 후반이었는데, 그런 황 선생을 존경하고 따라다닌 후배 가운데 한 사람이었죠. 그전에 황 선생은 서울에서 활동하다 대구에 이강소 최병소 이명미 같은 작가들이 계시니까 대구로 내려오신 것 같아요.

정병국 아마도 황 선생 누님이 대구에서 결혼해서 산 연고도 있었을 겁니다. 그 무렵 저 역시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1980년에 영남대 교수로 발령을 받아 대구로 내려왔죠.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황 선생은 대구에서 큐레이팅을 시작하고 대구미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서 대구지역 미술대학 출신 젊은 작가에 관심을 갖게 됐죠. 미협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요, 제가 영남대에 새로 온 젊은 선생이니까 저한테 기대를 많이 했죠. 그 당시만 해도 현대미술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황 선생이 영어를 해독해서 공부했다는 것은 정보를 적극적으로 획득하려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죠.

이준희 그때 주로 어떤 책을 보셨나요?

이교준 그 당시는 해외여행도 마음대로 못할 때고, 외국 잡지나 책도 검열이 심해서 잘 들어오지도 못했어요. 그나마 미국문화원에 가면 《아트 인 아메리카》 같은 전문지를 볼 수는 있었죠. 황 선생은 수화랑 디렉터로 들어가기 전에 본인이 공부했던 것을 후배들에게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권부문, 박현기, 신용덕을 비롯해 8~10명이 조그마한 2층 방에서 공부하는 스터디모임을 만들었어요. 황 선생이 일주일에 3번 정도 산에서 버스 타고 와서 영어강독을 했죠. 주로 뉴욕스쿨, 비트겐슈타인, 과학혁명의 구조, 토마스 쿤, 박이문, 현상학…, 이런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 쓰고 또 숙제 내주고….

정병국 여러 사람이 같이 번역한 책을 저한테도 몇 권 가져다주고 했어요.

이교준 예. 그 당시에 신용덕 씨도 영문과를 나왔고 황 선생도 번역을 해서 그 모임에서 미술에 관한 어휘를 서로 맞춰가면서 번역을 했었죠. 책 한 권을 다 번역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중에 읽을 만한 거리들을 끄집어내서 번역하고 서로 돌려보곤 했죠.

정병국 책을 한사람이 완역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모여서 토론을 하고 번역을 한다는 것이 고무적인 일이었죠. 미술에 관한 것, 철학에 관한 것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미술의 흐름을 짚고 했던 것을 나도 받아봤어요.

이준희 권오봉 선생님은 황 선생을 언제 처음 만나신거죠?

권오봉 저는 여기 계신 분들보다 좀 뒤에 만났어요. 1982년 수화랑 신축 개관 기념전 <28인의 이미지>에 참여하면서 황 선생을 처음 만났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제 그림을 보고 “왜 이런 식으로 그리냐”고 막 뭐라고 하시더라고. 전시에 작가를 초대해놓고 초대한 작가의 그림가지고 막 뭐라고 하시더라고.(웃음) 저도 그렇게 황 선생에 대한 첫인상이 매우 강했죠.(웃음)

이교준 그 당시 황현욱 선생이 학생의 작품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제가 늦은 나이에 복학해서 학교 실기실에 있었는데 누가 와서 휙 돌아보고 가고 그러더라고. 나는 그때 그 분이 누군지 잘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황현욱 선생이더라고요. 수화랑 디렉터로 있을 때 학교 실기실에서 학생들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도 많이 하고 괜찮은 친구들을 끄집어내기도 하셨지요. 그리고 당시 수화랑에서는 곽인식, 이우환, 스가 기시오 등의 전시를 열었죠. 당시 이우환 선생은 서울에서도 익히 알려진 작가는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명미 서울 메이저 화랑에서도 1990년대까지 이우환 선생의 작품을 안 샀어요. 나중에 1990년대 지나서 진화랑에서 일본을 오가면서 이우환 선생 판화작업을 사면서 불이 붙기 시작했고 그전에는 서울에서 홀대를 받으셨어요.

정병국 직접 이우환 선생에게 들어봐야 알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우환 선생에게 대구가 갖는 정서적인 면은 특별한 거 같아요. 서울은 이우환의 가치를 화랑에서 뜨고, 돈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서 알게 됐지만, 대구에 있던 황현욱 씨는 그전에 작가로서 이우환의 가치를 알고, 공감했던 거죠.

이명미 이우환의 가치를 알고 먼저 이우환 전시를 한 사람이 이강소 선생이었어요. 대구 대봉동에 리화랑이 있었는데 전시 한 서너 번하고 1년도 안돼 문 닫았죠.

이교준 맞습니다. 이강소 선생 부친이 소유하고 있던 신축 건물 1, 2층에 화랑을 꾸몄죠. 1979년 <대구현대미술제>를 분산 개최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하면서 화랑을 연 것으로로 압니다. 여하튼 수화랑에서는 서울에서도 개인전을 한 적이 없는 곽인식 작가 같은 분들의 전시를 일찍이 했었죠. 그 이후 이우환, 박석원, 이건용 등 많은 전시가 이루어졌죠. 1985년대 당시 스가 기시오 등 일본과 교류하기 시작했어요. 서울에서도 없던 일이죠. 당시 리플릿을 보면 한국과 일본의 교류 관점에 관해 황 선생이 써놓은 글이 있어요.

이준희 황 선생이 당시 남보다 앞선 시기에 현대미술에 관한 독자적인 시각을 확보하게 된 계기랄까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이교준 황 선생은 그전부터 철학 사상 이런 쪽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어요. 《사상계》 등 문학비평에 관한 서적을 즐겨보셨죠. 당시는 문학비평이 미술 쪽보다 관점이 확실하다고 황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이명미 황현욱이라는 인간이 즐겨먹던 음식이라든지 행동의 패턴을 보면 취향 자체가 군더더기가 없었어요. 옷 입는 감각도 아주 깔끔하고 전시 오프닝 때 상 차림도 굉장히 심플했어요. 물론 돈도 없었지만 그 자체가 간결하고 깔끔했어요. 서울에서도 현대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화랑이 1990년대 이후에 나오기 시작하는데 수화랑, 인공갤러리, 갤러리 댓(That) 등 황 선생과 관계있는 화랑을 보면 현대미술 전문 화랑을 지향했어요. 민중미술은 약간 복합적인 측면이 있는데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죠.

이교준 그 당시에 오프닝 상 차림을 보면 수입 주류가 유통되던 시기도 아닌데 미군 부대에서 구한 보드카에 하얀 무, 배추, 채소 썰어놓고 그게 끝이에요. 나중에 서울 인공갤러리 오픈 때 그렇게 하니까 서울사람들이 다 놀라더라고. 어디서 보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성향 자체가 그런거죠.

정병국 저는 황 선생의 디테일한 면을 접할 기회는 많이 없었습니다. 《사상계》는 우리나라 근대사에 접하는 책이라 민중미술하고 연관을 많이 짓는데 황 선생은 사상과 민중미술은 전혀 별개로 생각했습니다. 황 선생은 민중미술은 미술을 이용한 것이지, 미술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것은 본인의 지적 사유에 기반을 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준희 완전 자생적 모더니스트군요.

이명미 그렇지. 그게 맞아요. 그리고 황 선생님이 현대미술, 특히 대구지역 현대미술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1980년대 초에 《공간》에 쓴 글을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이교준 1985년에 수화랑을 그만두고, 그해에 갤러리 댓(That)을 바로 열었어요. 그리고 1986년에 대구 인공갤러리를 열고 백남준으로 오픈 전시를 했어요.

이준희 인공갤러리 이름은 어떻게 지은 건가요?

권오봉 인공갤러리 이름을 지을 때 제가 옆에 있었어요. 주변에 몇 명이 있었는데 황 선생이 잘 생각해보라고 하더라고. 그때 박현기 선생도 있었는데 박 선생이 그때 제안한 이름이 ‘컨테이너’였어요. 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를 잘 듣고 있다가 황 선생이 순간적으로 “‘인공’ 어때!” 하시더라고. 그런데 그때 ‘인공’이라는 단어 자체가 굉장히 거부감을 주더라고. 북한 국기를 인공기라고 하잖아요.(웃음) 그래서 거부감을 표시했는데 그래도 황 선생은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을 한 것 같더라고.

이교준 맞아요. 그때 우리가 ‘인공’이라고 하면 북한하고 연관되잖아요, 그랬더니, “그러면 뭐 어때”라고 하시면서 “모든 예술은 인공적인 거야”라고 말하면서 인공을 쓰시더라고. 人(사람인)에 工(만들공)자를 써서 인공이 되었죠.

권오봉 황 선생은 감성, 로맨틱한 거 싫어하시니까. 미술도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든, 인공이라는 이름을 생각하신 거 같아요.

이교준 당시는 컴퓨터가 없을 때여서 수화랑, 인공갤러리 로고타입도 직접 디자인했어요. 손수 식자 뜯어 붙여가며 본인이 직접 제작한 겁니다.

이준희 1986년에 대구 인공갤러리를 오픈하고 1988년에 서울에 인공갤러리를 오픈하셨어요.

이명미 처음 4~5년 정도는 서울과 대구 갤러리를 같이 운영했죠. 그때 대구 인공은 이교준 선생이 같이 하셨죠?

이교준 저는 관리를 맡아서 한 정도지 운영한 것은 아니고요. 대구 인공갤러리를 오픈한지 2년 만에 서울에 왜 오픈하셨는지 확실한 계기는 잘 모르겠어요.

정병국 제가 봤을 때, 황 선생은 대구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본인이 조금씩 갤러리스트가 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갤러리스트로서 자신의 꿈, 입지를 확장하고, 이 확장이라는 것은 공간 크기의 확장이 아닌 서울이라는 곳의 의미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윤형근 선생 등 도움으로 서울에 진출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서울 인공은 기초공사 할 때 제가 가봤어요. 모자 쓰고 까만 티셔츠 입고 담배 피면서 줄자 하나 들고 이리저리 혼자서 궁리하고 있는데, 내가 가니까 무척 반가워하더라고요.

이명미 인공갤러리는 당시 진짜 근사했어요. 최고로 근사했던 것 같아. 그 당시에 서울에 테이트모던 사람들이 왔었는데 서울시내 갤러리를 다 둘러보고 인공갤러리가 최고라고 했다는 소문이 일본 도쿄에까지 났었어요. 나중에 갤러리를 접고 커피숍 하면서는 벽에 그림 한 점도 안 걸었어요. 그림, 꼴도 보기 싫다고.(웃음)

이교준 아무튼 황 선생은 자기 주관과 입장이 너무 뚜렷하다보니 늘 주변 사람과 부딪쳤죠. 그 양반이 평소에 하시던 이야기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이 세상에 미술작가가 뭐 그렇게 많이 필요하냐! 좋은 작가 100명, 좋은 작품 100점만 있으면 세계 미술 다 이야기할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요.

권오봉 황 선생은 한국 작가 중에 아주 소수 몇 명만 좋아하시고 나머지 작가들한테는 작업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작업을 될 수 있으면 못하게 하셨어요. “아직도 모르겠냐?” 하시면서요.(웃음)

정병국 취재하시다 보면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들어서 아시겠죠.(웃음)

이준희 1988년부터 서울 인공갤러리에 집중하면서 대구 활동에 공백이 생기게 됐는데요. 그때 대구 작가들이 섭섭했겠어요?

권오봉 서울에 인공갤러리를 오픈하면서 황 선생 자신이 대구 인공갤러리에 집중할 수 없으니까 대구는 거의 관여하지 않고 이교준 선생에게 맡겼죠. 그렇다고 대구 작가들이 섭섭할 이유는 전혀 없었죠. 서울에 화랑이 있으니 오히려 희망으로 생각했어요.

이교준 대구 인공은 저에게 맡기고 갤러리 댓은 졸업한 후배들에게 너희가 직접 운영해보라고 맡기시고는 서울에만 집중하셨어요. 그래서 대구시대와 서울시대로 크게 나눌 수 있어요.

정병국 맞아요. 일종의 서울 진출이니까. 그리고 저희도 서울 인공에 자주 갔어요.

이명미 인공갤러리 말기에 시공갤러리도 생기고 신라갤러리도 생기면서 대구에서도 나름대로 갤러리들이 돌아갔죠.

이준희 작업을 하시던 황 선생이 본인은 더 이상 작업을 않고 작가를 발굴하고 전시를 하게 된 시점이 언제부터인가요?

이명미 제가 황현욱의 마지막 작품을 기억하는 게 <35/128전>에서 본 건대 송판을 바닥에 놓고 나무톱밥을 그 주위에 뿌려놨어요. 그걸 뿌려놓으니까 사람들 신발에 톱밥이 묻어서 화랑 밖에까지 옮겨지게 되었죠.

이교준 <대구현대미술제> 2회때인지 3회때인지, 제가 군대 있어서 직접 보지는 못하고 이야기만 들었는데, 흐르는 물속에 있는 돌을 끄집어내서 수성페인트로 글씨를 쓰고 다시 집어넣고, 이런 행위를 반복하는 작업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권오봉 두 분은 같이 작업하면서 만나서 그런 걸 기억하시지만, 저는 황 선생을 처음 만날 때부터 기획자였기 때문에 나중에 친해져서도 별의별 이야기 다해도 정작 본인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저는 그게 그분의 속성인가보다 생각했어요. 그래도 기억나는 건 서울 인공갤러리 시작할 무렵 김용익 선생 등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모여서 열띤 토론을 했던거죠.

이교준 그래요 만날 토론했어요. 밤에 술집에 모여서도 했고, 굳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했어요. 그럴 때마다 직접 뭘 써가지고 와서 토론을 했어요.

이준희 그러고 보면 황 선생은 작가 못지않게 당시 평론가나 이론가들에게도 불만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권오봉 그렇죠. 작가에게 불만이 많은 만큼 평론가에게도 불만이 많았어요. 독일에 있던 류병학 씨를 불러들이게 된 계기가 그거죠.

이교준 그래도 이일 선생은 존경하셨죠.

정병국 특히 이론에 대해서 한국이 약하다는 점에서 불만이 좀 있었어요. 윤형근, 이강소 같은 선생들에 대한 책을 잘 만들고 싶어 했어요.

이교준 평소에는 말수가 없는 사람인데 자기가 관심 갖고 호기심 가는 부분에서는 대단히 관심을 많이 가지셨어요. 저희가 스터디그룹 할 때 한번은 서울에서 작가 장경호 선생과 다른 분이 왔는데 그분들도 자기 분야에서는 입이 쎈 분들인데 그분들하고 밤새도록 토론하고 했죠. 우리가 그때 진짜 질렸지.

이준희 술이나 담배를 즐기셨나요?

이교준 초기엔 술도 많이 하셨는데 나중에는 뭐 별로….

권오봉 그래도 웬만한 사람보다는 많이 드셨죠.

이교준 특히 아주 독한 담배를 많이 피우셨죠.

이준희 서울 인공갤러리도 그렇고 대전 비비스페이스도 그렇고 건물 자체가 아주 심플하잖아요. 그런 특징 말고도, 최근 활성화된 미술시장 측면에서 볼 때, 화랑 주인으로서 황 선생은 어떤 분으로 기억될까요?

이명미 화랑 주인으로는 빵점이지. 아주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지금 미술시장에서 봤을 때는 원류나 마찬가지 같은 인물인데도 말입니다. 도널드 저드 개인전 할 때도 홍보를 제대로 하지 않았어요. 그냥 엽서만 보내고. 미술 기자들이 도널드 저드를 모르는 데도 홍보도 안하고 그랬죠.

권오봉 제가 생각할 때 황 선생은 갤러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예술가였던 분인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 자기가 생각할 때 웬만한 작가들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리처드 롱이나 도널드 저드 같은 작가만 눈에 들어오고, 한국 작가 중에는 윤형근, 이우환 정도의 작가를 좋아하는데, 그 작가들 전시만 할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다른 작가 전시도 하는데 속으로 부글부글 화가 나고…,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들어서 괜히 작가들한테 작업 하지 말라고 하고…. 저는 그분이 진짜 예술을 했다고 생각해요.

이교준 그러고 보니 황 선생이 ‘아닐 비(非)’자를 좋아했던 것 같네요. 첫 개인전 <非오브제>의 비도 아닐 비고, 대전에 비비스페이스도 ‘非非’니까요.

이명미 황 선생은 갤러리스트지만 안동의 유교적인 선비정신이 배어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쪽이 문기(文氣)가 강한 동네인데, 안동 선비의 마지막 세대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물질과 야합하지 않고 배가 고프더라도 때를 안 묻히겠다 그런 면에서 말이에요.

정병국 안동에 대한 긍지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지요.

권오봉 제 생각에는 대전에서 화랑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고, 나중에 안동에 화랑을 하고 싶어 하셨어요. 특히 안동에 이우환미술관을 짓고 싶어 하셨어요. 안동 가서 하려다가 그렇게 끝이 난 것이지요.

이준희 대전 비비스페이스 건물을 짓는 사이에 병을 알게 되신거죠?

이교 2001년 5월 윤형근 전으로 개관을 했는데 건물을 지을 때, 감독 한다고 텐트를 치고 생활하면서 건강을 많이 잃었죠. 공사 중이던 건물 옥상에 올라가다 갑자기 의식을 잃어 사다리에서 떨어져 다쳤어요. 그때 병원에서 간암 판정을 받고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요. 사실 그전에 황 선생이 대구에 있을 때 C형 간염으로 황달 증상을 앓은 적이 있는데 제대로 관리를 안하시다 보니 그렇게 됐지요. 술 드시면 찬송가를 부르시고, 어머니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데 농담처럼 “나는 예수님이 태어난 날 죽을 거야!” 그러셨는데 결국 12월 24일 돌아가셨죠.

정병국 가족 측은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싶다고 하셨는데, 황 선생이 생전에 화장해서 병산서원 앞 강물에 뿌려달라고 해서 평소에 고인이 뜻한 방식으로 장례를 치렀죠.

이준희 이제 좌담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해주시죠.

권오봉 황 선생은 평소에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자료를 남기는 사람도 아니고, 자기 사생활 얘기하는 사람도 아니고, 평소에 사진 찍으려고 카메라 들이대면 획 고개를 돌려버리고….

이명미 황현욱 씨가 대구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점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현재 세계미술시장에서 뜨고 있는 한국 단색화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황현욱 씨였습니다. 그리고 타협을 잘 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갤러리스트로서는 실패자였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경제관념으로만 화랑을 보지만 황현욱은 경제관념 이전에 예술로 봤던 사람입니다.

이교준 전 황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요즘 어떤 생각을 하실지 궁금합니다.

정병국 일단 지금 같은 상태의 화랑 경영은 안하셨을 거예요. 안동에서 화랑을 하셨더라도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전시만 1년에 한 번 정도, 누가 오든 말든 신경 안 쓰고 하셨겠지요.

이교준 찾아보니까 전시 오프닝 뒷자리 같은 데에서 황 선생과 같이 술 마시던 사진이 좀 있더라고요. 이상하게 평소 말이 많지 않으셨는데도, 황 선생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였던 것 같아요.

권오봉 보스 기질이 있어요. 주위에 사람들이 저절로 잘 모였어요. 묘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죠.

이명미 수화랑 디렉터였을 때 대구 문인들과도 친분이 두터웠어요. 그들하고 공동의 대화를 이끌어낼 만큼 지적인 분이셨죠.

정병국 기자와는 싸움을 많이 했어요.(웃음)

이명미 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일간지 기자한테는 말도 안되는 소리 쓴다며, 아예 기사를 못 쓰게 했지요. 그만큼 사람이 좀 별났죠.

권오봉 약자한테 잘 대해줬고, 강자하고는 무조건 싸웠어.(웃음)

정병국 일종의 순혈주의가 있었죠.

이명미 그 사람, 꽃도 싫어했어요. 성격은 별난데 근본적으로 마음은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시들어가는 꽃을 옆에 두면, 신경이 쓰이고 마음을 안 쓸 수 없으니까 아예 옆에 두지를 않았던 거죠. 내가 기억하는 황현욱은 마음이 따뜻하고 선비정신이 남아있는 사람이었어요. ●

좌담일시 2016년 1월 8일 금요일
장소 대구 약전식당
참석자 이교준 작가, 이명미 작가, 권오봉 작가, 정병국 작가
진행·정리 이준희 편집장, 이슬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