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this is being art-4

최북  비단에 채색 24×18.3cm 고려대박물관 소장

창작 본질은 아름답다

방귀희  한국장애예술인협회 회장

다르다는 것이 잘못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장애를 가진 예술인의 창작 본질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식상한 얘기지만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양성을 뜻한다. 따라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다양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다양성 가운데 장애인이 있는데 장애의 다름을 틀림으로 보아 편견이 생겼고 그로 인해 차별이 자행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 문제는 너무나 복잡하고 이중적이어서 다 언급할 수는 없고 다만 여기에서는 장애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예술 분야에 존재하는 차별 문제에 국한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장애인의 예술 활동과 예술 활동을 하는 장애인에 대한 정의부터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장애인의 예술 활동을 장애인예술이라고 하고 예술 활동을 하는 장애인을 장애예술인으로 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인데 현재는 장애인예술을 ‘에이블아트’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에이블아트는 일본에서 시작하였는데 장애를 불가능으로 보는 인식에 반해서 가능성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장애인예술을 VSA(very special art) 매우 특별한 예술이라고 칭한다. 우리는 한국의 정서에 맞는 용어를 만들어내야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장애인예술의 영어 명칭을 ‘Being Art’로 정하고 싶다. 왜냐하면 장애인예술이 존재감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고 장애인예술의 본질이 비장애인의 예술과 다르지 않고 예술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예술이 주류예술계에서 소외되는 것은 장애인예술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낮기 때문이다. 장애문화예술인실태조사(2007)에 따르면 우리나라 장애예술인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묻는 질문에 매우 낮다 35.3%, 다소 낮다 24.9%, 그저 그렇다 27.5%로 87.7%가 사회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애예술인의 창작 활동을 바라보는 인식이 매우 이중적이란 것을 알 수 있는 연구가 있다. 박혜신(2010)에 따르면 같은 공연을 감상하였어도 예술인이 장애인임을 알 때 더 감동을 받고 흥미롭게 본 것으로 나타났지만(73.3%) 예술인이 장애인임을 알 때 예술인의 전문성 평가 항목의 평균은 아주 낮았는데 이것은 장애예술인을 전문예술인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인식 때문에 장애예술인의 창작 활동이 예술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었고 그로 인해 장애예술인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다.
하지만 장애예술인의 창작 활동 경험에 나타난 구성요소인 ‘예술과 만남’, ‘창작 활동 몰두’, ‘고통스러운 작업’, ‘나는 예술인이다’의 본질은 매우 순수하고 열정적이기에 아름답다. 장애인예술의 아름다움은 우리 역사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역사 속의 장애미술인
옛날에는 장애인이 없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갖고 시작한 작업이 역사 속의 장애위인들을 발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물로 발간된《   한국장애인사》(정창권 외, 2014)에 조선시대에 활동했던 66명의 장애위인을 소개하고 있는데 66명을 직업별로 구분해보면 예술가가 38%를 차지해 가장 많았다. 조선시대 장애인이 예술적 감각이 더 뛰어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장애 때문에 과거시험을 치르고 벼슬을 하는 제도권 내 진입이 어렵다보니 혼자서 할 수 있는 예술을 선택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시대 장애예술가 가운데 미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사람을 소개하면 시각장애 천재 화가 최북이 있다. 최북(崔北)은 영조·정조 시대 인물로 조선후기 직업 화가였다. 중인(中人) 출신이었으며 체구가 작고 한쪽 눈을 실명한 상태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애꾸눈 화가라 불렀다. 최북은 예절이나 관습에 구속되는 인물이 아니었다. 자유스럽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그의 행동은 기행에 가깝다는 평을 받았다. 빼어난 그림 실력을 지닌 최북은 젊은 시절부터 금강산·영동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수준 높은 작품을 남겼다.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까닭에 생동감이 넘쳐 보는이로 하여금 그림 속에 빠져들게 하였다. 최북은 강한 개성을 지닌 작품으로 당대를 사로잡았다.
조선 최고의 묵죽화가 이정(李霆)은 조선중기 왕실 종친으로 오른팔에 부상을 입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대나무 그림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묵죽화의 대가이다.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명성이 높았으며, 묵죽화뿐 아니라 묵란·묵매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붓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화가에게 손놀림이 자유롭지 못하면 화가로서의 생명이 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 절단된 팔이 이어졌고, 그림 실력도 이전보다 더욱 뛰어났다고 했다.
조선의 명필 조광진(曺匡振)은 조선후기 서예가이다. 평양에 살았으며, 호가 눌인(訥人)인데 말을 더듬는다 하여 얻게 된 호로, 조광진은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언어장애인이었던 조광진은 <조눌인법첩(曺訥人法帖)> , <눌인서첩(訥人書帖)>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조광진은 큰 새끼줄로 붓을 어깨 위에 동여매고 큰 걸음으로 걸어다니며 힘 있게, 그리고 섬세하게 글씨를 썼다. 그의 열정은 글자의 신비한 조화를 이루어냈고 사람들은 이에 탄복했다. 집안이 가난하여 사방을 유학하며 서체를 배운 조광진의 열정과 노력이 이루어낸 결과였다. 그는 당대 명필가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조선 사람들과 청나라 사람에게까지 실력을 인정받고 아낌을 받았다.
조선시대에도 장애예술인이 활동을 했는데 근대와 현대에 장애예술인이 없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시기라서 장애예술인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아 장애예술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한 장애인 문예지《   솟대문학》에서 발굴한 장애예술인 가운데 고인이 된 근·현대 장애미술인 중 미술교과서를 만든 화가 구본웅(具本雄)은 1906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우연한 사고로 가슴을 다쳐 척추장애를 갖게 되었다. 구본웅은 경신학교와 일본의 단천미술학교, 태평양미술학교, 동경미술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그는 경신학교 졸업 후에 조각작품 <자화상>으로써 선전 특선을 차지했다. 동경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왔을 때는 국내 화단에 처음으로 포비즘의 화풍을 가지고 왔었다. 일제강점기의 침묵 기간 구본웅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조선미술사》의 집필이었다. 당시 문교부 편수관으로 참가하여 최초의 중등미술교과서를 그의 손으로 만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 새로운 출발을 기도했지만 피난살이에 건강을 해쳐 1953년 2월 47세를 일기로 타계하고 말았다.
침묵 속의 횃불, 화가 운보 김기창은 191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을 잃고, 17세에 승동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당화숙(以堂畵塾)에서 김은호(金殷鎬)에게 그림을 배워 6개월 만에 <판상도무(板上跳舞)-널뛰기>(1931)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후, 연 5회의 입선과 연 4회 특선을 기록했다. 1956년 국전 초대작가·심사위원·수도여자사범대학과 홍익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백양회(白陽會)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며 국내외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김기창은 산수·인물·화조·영모(翎毛)·풍속 등에 능하며 호탕하고 동적인 화풍으로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만 원권 지폐에 세종대왕 얼굴을 그렸다.
한국의 로트렉 손상기는 1949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전업작가로 활동하면서 수없이 많은 대회에서 입상하며 1981년 동덕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손상기는 세 살 때 앓은 구루병으로 척추장애를 갖게 됐다. 그는 가난과 외로움을 그림과 글로 승화시킨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은 1980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공작도시> 시리즈이다. <공작도시>는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변화하는 도시의 모습이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 노인, 아이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를 소박하지만 강한 필치로 표현한 작품이다. 1988년 심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건강 문제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최근 들어 그의 예술세계가 활발히 재조명되고 있다.

현재 장애예술의 방향
우리나라에서 장애에 대한 복지는 1981년 장애인복지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장애인미술은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이 수면으로 드러났다. 장애인미술은 두 가지 양상을 보이며 발전하였다. 하나는 한국화의 거장 운보 김기창 화백이 청각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영향을 받은 청각장애인 화가들이 1988년에 농미회를 결성하고 한국농미회전시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활발한 활동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림을 손이 아닌 다른 신체를 사용해서 그리는 구족화가들이 1991년부터 세계구족화가협회 한국지부를 만들어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는 동양의 서예에 서양의 크로키를 접목한 수묵크로키를 개발하여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구축한 의수화가 석창우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석창우는 감전사고로 두팔을 절단하고 의수를 끼고 있는데 전시회는 물론 시연 등을 하며 왕성하게 활동을 한다.  중학교 2학년 미술교과서에 그의 작품 <세종대왕>이 수록되어 화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장애인미술은 초창기에는 화가 개인이 개최하는 개인전시회가 많았는데 장애유형별로 또는 작품장르별로 소규모 활동(소울음, 그림사랑, 농미회 등)을 해오다가 1993년 한국장애인미술협회를 구성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사단법인 인가를 받은 후 활성화되어 회원이 1,000여 명에 달하고, 한중일장애인미술교류전을 개최하는 등 장애인미술을 국제화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장애예술인들은 사대부들과 소통하며 최고의 경지에 올랐고, 근현대에 활동한 장애예술인은 오로지 열정과 노력으로 예술 주류계에 진입하여 실력을 인정받아 일반 예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예술인으로 당당히 활동하였다. 이에 반해 최근 장애예술인들은 언론에 자주 모습을 보여 인지도가 높아진 것이 사실이나 그것은 예술인으로서 그들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해서가 아니라 장애인인데 예술 활동을 한다는 사실에 격려를 보내는 차원이라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장애예술인은 주류 예술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웃사이더에 머물러 소외를 당하고 있다.
라이어슨 대학교(Ryerson University)에서 제시한 장애인예술 발전의 3단계를 보면 첫 번째 단계는 장애예술인 자신이 예술인이라는 정체성을 갖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장애인 커뮤니티에서 장애예술인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고, 세 번째 단계는 장애예술인의 활동이 주류 예술에 포함되는 것인데 우리는 첫 번째 단계인 장애예술인의 정체성조차 구축하지 못한 상태에서 장애인예술의 욕구만 분출되었다. 1만 명으로 추산되는 장애예술인(방귀희, 2013)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는 장애인예술의 정책이 필요한데 그 정책방향을 다음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1800년대 중반 독일에서 활동한 헝가리 출신의 프란츠 리스트와 폴란드 출신의 프레드릭 쇼팽에 관한 일화이다. 리스트 피아노 연주회가 어둠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연주회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촛불을 켰는데 놀랍게도 연주를 한 피아니스트는 리스트가 아니라 쇼팽이었다. 당시 리스트는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지만 쇼팽은 연주회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무명의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 리스트가 친구인 쇼팽을 위해 자기 연주회에 쇼팽을 초대해서 쇼팽의 연주 실력을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리스트는 관객들을 향해 “신사 숙녀 여러분, 깜짝 놀라셨죠. 처음엔 연주를 한 사람이 제가 아니어서 놀라셨을 것이고, 나중에는 저보다 훨씬 감미로운 연주에 놀라셨을 겁니다” 라며 쇼팽을 칭찬하였다. 이 일로 리스트는 미담의 주인공이 되었고, 무명의 쇼팽은 돌풍을 일으켰다. 쇼팽은 야상곡으로 피아노 음악의 새로운 경지를 이루며 오늘의 우리들은 리스트보다 쇼팽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만약 리스트가 쇼팽을 지지하지 않았다면 쇼팽의 성공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리스트처럼 무명의 예술인을 지원하는 것이 유명예술인이 할 수 있는 특권이자 의무가 되었으면 한다.
이에 두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장애예술인이 예술계 주류사회에 편입할 수 있도록 예술인들과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기성예술인들이 재능있는 장애예술인들의 멘토로 예술 활동을 지지해주는 예술계 풍토가 마련되어야 한다. 둘째, 장애예술인에게 창작과 발표의 기회를 균등하게 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창작지원금제도로 창작 동기를 부여하고 출간이나 전시회 그리고 공연의 일정 비율을 장애예술인에게 할당하는 쿼터제도를 마련하여 장애예술인에게 발표의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이런 지원을 통해 장애예술인의 창작 활동이 활발해지면 장애예술인의 자립이 가능해지고 정부 국정 목표의 하나인 문화융성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을 것이다.  ●

위.최북 <메추라기> 비단에 채색 24×18.3cm 고려대박물관 소장

interview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 회장 김충현

“장애인미술에 관한 관심이 절실하다”

그동안 협회에서 집중한 사업은 어떤 것이 있는가?  한국장애인미술협회는 1995년 창립해 올해 햇수로 20년을 맞았다. 화가 방두영이 초대회장을 맡아 혼자서 11년이나 꾸렸고, 저는 1996년에 협회에 참여했다. 회장을 맡은 지는 8년째다.
장애미술인의 역량 강화를 위해 교육프로그램을 7년째 운영하고 있다. 5년 전부터 문광부  지원으로 2년 동안 교재를 개발했고, 3년 전부터 장애인 미술강사 파견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협회 회원이면서 미술강사 자격이 있는 경우 공모를 하면 장애를 가졌지만 강사로 활동할 수 있다. 올해에는 20명을 파견한다. 최근 2년간 중증장애미술인을 위한 전동이젤을 보급해왔다. 창작발표 기회를 위해 다양한 공모전을 진행하고 있다. <장애인 미술가의 희망 축제>, <대한민국 장애인미술대전>과 함께 5년 전부터 <한중일 장애미술교류전>도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6월 25일부터 31일까지 홍익대 현대미술관에서 열린다.
월에 .
장애미술인에게 복지와 예술의 비중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과거에 비하면 장애인 복지 수준이 향상된 편이다. 이제 장애인 스스로도 찾아 나서야 한다. 장애인의 경우 예술 지원과 복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복지 없는 예술이 어딨냐. 그러기 위해서는 운영 주체도 일원화해야 한다. 현재 장애인 관련 부서가 노동부, 안행부, 보건복지부, 문화체육부 각각에 흩어져 있는데 장애인청을 만들어 한곳에서 운영하면 좋을 것 같다. 우리나라는 장애인단체 위주로 지원금을 줘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하는데, 일본은 장애인에게 개인 연금을 주고 스스로 돈 내고 당당하게 배우라고 한다. 우리는 어렵게 행사를 벌여도 작가들이 작품을 내고 나면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전시에 못 오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만들어졌는데 재단 정관상 예술가로 인정받는 자격요건이 까다롭다. 장애인 관련 사업은 하나도 없다.
장애인미술 관련 행사가 많은데 일반 미술계와 장애인 미술계의 간극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 작가들도 먹고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비교하기 힘들다. 전체 문화예술예산 중에 비장애인 예산 대비 장애인 예산 비중은 1%도 안된다. 편견도 심하다. 회원 중에는 국전에서 입상해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 있지만 그나마도 못 낀다. 그 속에서도 완전 아웃사이더라 어울리기가 힘들다. 그런 면이 제일 안타깝다. 그래도 장애인미술 분야가 문학, 연극, 무용 등 타 분야에 비해서 굉장히 활성화된 편이다.
장애미술인에게 장애라는 딱지를 떼고 작품만 보는 것이 오히려 역차별이란 이야기를 하셨다. 작가가 장애인임을 밝히고 이 그림은 장애인 작가가 그렸다고 왜 하겠나. 그냥 예술로 순수하게 편견 없이 봐주면 그렇게 밝힐 이유가 없다. 그리고 내가 협회 회장이지만 비장애인에 비해 장애미술인들이 상상력과 초월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시야나 시각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협회를 운영하면서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 장애인 문화예술 단체들이 활동하는 데 보장돼 있는 것이 없다. 우선 전문인력이 부족하다. 정부에서 한 사업당 인건비 100만 원을 지원하지만 1년 내내 주는 것이 아니라 9~10개월에 한 번 주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보니 전문 인력이 1년 넘게 근무하기가 힘들다.
앞으로의 계획은? 매년 20여 개의 제안서를 낸다. 그중에서 3분의 1이 선정돼 진행하는 식이다. 해마다 제로에서 시작한다. 장애인 교육사업은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트페어는 국가에서 따로 지원하는게 없어 계속 갈 것이다. 올해는 처음이라서 발판을 마련하는 데 집중하고 내년에는 한층 활성화시키고 싶다. 2015년 구 예총건물 리모델링이 완료되면 그곳에 장애인문화예술센터가 개관한다. 스튜디오, 전시장, 발표 공간, 사무실, 자료실 등으로 구성된다. 내년에 사무실이 그곳에 입주할 예정이다.

이슬비 기자

서울시립 경희궁미술관에서 열린  광경

서울시립 경희궁미술관에서 열린 <2013년 한중일 장애미술 교류전>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