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광복 70주년, 한국미술 70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미술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의 시기

오세권 대진대 교수, 비술비평
1980년대는 한국 미술문화의 양상에서 크게 ‘모더니즘’ 부류와 ‘리얼리즘’ 부류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의 시기로 볼 수 있다. ‘모더니즘’ 부류는 1980년대 후반기에 형성된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한 이들을 포함시킨 것이며, ‘리얼리즘’ 부류는 ‘민족주의’와 ‘민중주의’ 미술문화를 추구한 이들을 말한다.
1980년대 전반기 한국 모더니즘 미술은 1970년대에 형성된 미니멀리즘 미술에 의존하면서 지배구조를 더욱 돈독히 하는 시기였으며 지난 약 20년간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모더니즘 미술문화의 최대 전성기였다. 그러나 세계 미술문화의 새로운 지형도는 ‘한국적 미니멀리즘 미술’에 대한 자기 합리화 논리에 한계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또한 리얼리즘 미술세력의 급속한 확장으로 위기에 직면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198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한창이던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유입함으로써 리얼리즘 미술과의 대응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미술계에서는 초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전개 과정을 정리할 때 1985년 ‘난지도’, ‘메타복스’ 등이 ‘탈모던’의 문제를 제기했고, 〈현·상전〉, 〈로고스와 파토스전〉, 〈엑소더스전〉, 〈현대미술의 최전선전〉, 〈상하전〉 등의 표현이 점차 포스트모더니즘 미술표현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주로 유학파들에 의해 1980년대 중반기에 소개되다가,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확산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어서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1980년대 말기와 1990년대 초반에 한국 미술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리얼리즘 미술은 1969년 선언문만 남기고 사라진 ‘현실’ 동인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1979년의 ‘현실과 발언’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리얼리즘 미술은 1980년대 초기에는 ‘민족·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여 점차 조직적이고 이념화했다. 그러던 것이 1985년 7월 〈20대 힘전〉을 계기로 ‘민족미술 대토론회’가 열렸으며 11월에는 ‘민족미술협의회’가 발족했다. 이로써 1980년대 전반기 난립하던 리얼리즘 미술의 양상을 정리하고, 산발적인 활동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게 되었으며, 체계적인 미술운동을 위하여 전열을 정비하는 구심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민족미술협의회’가 발족하면서 ‘민족미술’로 불리다가 후에 ‘민중미술’로 불리는 등 이미 그 개념에서 ‘민족’과 ‘민중’의 의미를 포함하는 미술문화운동이었다.
1987년은 리얼리즘 미술의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특히 총선과 대통령선거 등 사회적 상황들과 연결되면서 집회 현장에서는 깃발그림을 비롯한 벽화, 걸개그림, 만화, 전단과 각종 시각매체가 대중투쟁 현장과 같이하였고, 이것은 사회 현실에 직접 참여하는 선전·선동미술이 되어갔다. 그리하여 대중투쟁의 확산에 따라 걸개그림 등이 리얼리즘 미술표현의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집회 현장에서 열기를 돋우는 미술운동이 되었다. 특히 리얼리즘 미술은 비평의 적극적인 이론적 지원을 바탕으로 삼아 미술운동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며, 조직화·체계화하면서 대중정치 선전사업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와 88올림픽 이후 1980년대 말기에는 조직이 노선 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고 분화되면서 점차 그 힘이 흩어지게 된다.
한편 1980년대 미술문화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부류들이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 속에서 서로의 이념적 합리화를 위하여 치열한 이론 논의를 하였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작가가 중심이 되어 미술계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론가들이 앞장서서 미술문화를 제시하고 이끌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상과 같은 ‘모더니즘’ 과 ‘리얼리즘’ 미술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대립의 시기 속에서 그 변화를 보면 1980년대 초반기에는 미니멀리즘 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모더니즘 미술이 활발했으며, 1980년대 중반기에는 리얼리즘 미술이 맹위를 떨쳤고, 1980년대 말기에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정착하던 시기로 정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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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의 70년, 역동의 1970년대

박계리 미술사
지난 10년간의 미술계를 돌이켜보면, 한국현대미술의 역사 중 특히 1970년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시기가 아니었나 자문하게 된다. 단색화 다시 (평가해)보기 열풍이 촉발되었고, 이러한 공격적인 재평가 작업은 역설적인 듯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단색화전 성공과 해외미술시장의 호응을 이끌어내면서 단색화 열풍을 다시 불러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부각되는 데는 단색화의 그림자에 가려 있던 1970년대의 다양한 실험적 미술에 대한 관심이 기폭제가 됐다. 학계의 관심에 화답이라도 하듯, 김구림, 박현기 작가의 대대적인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루어지면서 이 시대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국전이 거의 유일한 등용문이던 시대를 마감하고 민전 시대가 열린 것이 1970년대이다. <한국미술대상전>,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이 민전 시대를 이끌었다. 신인 등용문의 확장은 미술계의 역동성을 추동해내는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 말 청년작가연합회전과 회화68, 한국아방가르드협회(약칭 A.G.)가 창립되면서 추상표현주의의 강력한 흐름에서 벗어나 미술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활기차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신체제, S.T. 에스프리 등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젊은 세대들이 잇따라 등장했고, 1972년 한국미술협회가 <앙데팡당전>을 신설해서 젊은 세대에게 실험 무대를 제공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물질과 상황에 대한 실험을 지속해왔던 일련의 움직임들과 흐름을 같이하던 A.G.와 S.T. 등 젊은 세대들은 미술 개념에 대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1970년대는 1975년 ‘에꼴 드 서울’의 등장을 중심으로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되곤 한다. 전반기는 A.G., 신체제, S.T., 에스프리 등에게 무대를 제공한 <앙데팡당전>의 실험적인 시도가 한창이던 시기이다. 미술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질문과 물질에 대한 실험이 매재의 확대를 자극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술개념의 확대는 이전의 장르개념인 ‘회화’ 또는 ‘조소(조각)’라는 용어에서 벗어나 ‘평면’과 ‘설치’와 같은 다양한 매체를 포함할 수 있는 용어를 확산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은 탈회화화, 탈조각(조소)화의 움직임으로 확장되어갔다. 이와 더불어 장소와 환경, 공간과 시간, 상황과 예술이라는 미술의 존재론적 화두를 파고 들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퍼포먼스도 활발해지고, 대지미술과 같은 화이트 큐브 바깥에서의 미술도 시도되었다. 이렇듯 미술이 확장되던 전반기와는 달리 1970년대 후반기는 다시 회화라는 평면구조로 환원되면서 단색화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회화로의 회귀라는 측면도 있지만 그리지 않는 회화라는 점에서 드로잉의 전통적 맥락보다는 1970년대 전반기의 개념미술과의 연결선상에 있다. 단색화의 부각은, 1975년 일본 도쿄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다섯 가지 흰색전>에서 촉발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막혔던 일본과의 교류가 열리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한 일본미술시장과의 관계 속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리는 행동의 반복을 통해 그린다는 행위에 대한 본질적 물음은, 무아(無我)와 무위(無爲)의 세계를 지향하며 정신의 문제와 자연세계로 화두를 확장시켰다. 한국 단색화는 당시 국제적인 흐름이었던 개념미술, 미니멀리즘의 자장 속에서 국제미술계와 공존할 수 있는 소통력을 지니면서 화단에 강력한 자장을 형상해냈다.
이렇듯이 1970년대는 국제 교류의 포문이 열리면서 남관, 이성자, 이응로 등 파리를 근거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선전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1970년대 말이 되면 다시 표현의 회복이라는 새로운 기류가 싹트기 시작한다. 1978년의 ‘사실과 현실’ 그룹은 거창한 정신세계가 아닌 일상으로 눈을 돌려 극도의 사실주의 기법으로 대상을 묘사하였다. 이들의 화면은 하이퍼리얼리즘 또는 포토리얼리즘과 연계되면서도 비판적 리얼리즘과 초현실주의적 화면을 생산해내며 또 다른 세대의 등장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처럼 역동적이던 1970년대에 대한 관심이 21세기에 들어 다시 부각되면서, ‘짝퉁’인가 아닌가 하는 원형에 대한 기존 논의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와의 동시대성이 갖는 소통의 확장성에 대한 주목과, 타자적 시선이 포착해내는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환기가 1970년대에 대한 논의를 보다 풍성케 하고 있다는 점에서 1970년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