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이른바 ‘세계 미술계’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2015년 새해를 맞아 《월간미술》은 변화에 주목한다. 우리가 미술현장이 ‘변화했다’고 하는 이유는 근래 미술계와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서 변화의 물결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변화는 생각처럼 단순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작가는 그저 작업실에 처박혀 작업만 하는 이로 정의되지 않고, 비평은 미학적 언어를 쏟아내는 것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 문화, 사회, 사상 등 주변 환경은 급격한 변화의 흐름을 탔으며 따라서 미술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고정돼 있지 않다. 변화의 흐름을 추적하며 우리가 주목한 것은 국가가 아닌 도시다. 즉, 각국을 대표하는 미술계 거점 도시를 일컫는 것이다. 여기에 작가가 작품을 전시하고 비평이 그것에 대해 말하고, 그리고 시장market이 형성됐다.
아시아에서는 서울을 비롯 가장 뜨거운 미술시장으로 정의되는 중국 베이징, 상하이 그리고 홍콩을, 지긋하지만 최근 뚜렷한 변화가 감지되는 일본 도쿄 미술계의 변화 양상을 살펴본다. 또한 전통적으로 미술계 중심지를 자임하는 유럽에서는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오스트리아 빈, 그리고 독일 베를린의 동향에 주목했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세계 미술의 수도 미국 뉴욕을 살펴본다.
‘변화’와 ‘발전’이 항상 등가적 의미를 갖진 않는다. 따라서 이번 기획은 방향을 살피되 결론을 예단하지 않는다. 지금 미술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말이다.

침범侵犯당한 인사동 미술에서 글로벌화된 탈脫장소적 미술까지
심상용  동덕여대 교수

오늘날의 글로벌 현대미술은 전시를 통해 양육되지 않는다. 프랑스의 갤러리스트 조르주 필립 발루아Georges Philippe Vallois에 의하면, 이 시대는 경매의 젖꼭지를 빨며 자란 작가들의 시대다. 글로벌 단일시장화된 미술은 장소에 귀속되지도, 시간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다만 시공을 넘나드는 자본에 의해 발육이 결정된다. 도쿄에서 태어난 독일 작가 조나단 메세 Jonathan Messe의 그림은 그의 나이 32세에 24만 유로(한화 약 3억2000만 원)에 팔린다. 자본의 속도다.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김동유의 회화 1가 3억2000만 원에 낙찰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2007년 같은 경매에서 홍경택의 회화는 7억7000만 원에 낙찰되었다. 한국작가의 해외 경매 사상 최고가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2
이 경매 건들은 한국현대미술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글로벌 무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는 ‘예술적 성장’의 결정적인 신호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비유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성과없는 ‘인사동 미술’의 밖으로 빼내야만 하는 근거로 채택되었다. 2014년 10월 29일 동일한 경매사가 김동유와 홍경택을 포함하는 ‘엄선된’ 한국 작가 5인전을 제임스크리스티룸에서 열면서 “표현과 혁신의 관점에서 한국현대미술의 현주소”를 보여주겠노라 선언했다.3
2008년 홍콩 크리스티에서 임동식의 회화 두 점이 각각 4920만 원과 5720만 원에 낙찰된 사건은 고스란히 “작품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와우! 하긴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나 브뤼겔Pieter Brueghel의 작품들조차 경매회사가 키운 젊은 현대작가의 작품에 훨씬 못 미치는 값으로 팔리는 게 오늘날의 상황이다.
앞서 언급한 발루아에 의하면, 정말 놀라운 것은 “경매장에서 도출되는 결론의 힘”이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비평가나 미술관 큐레이터, 미술사가의 견해를 압도한다.” 경매에서 정해진 고가 낙찰이 예술성의 부동의 판명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경매의 낙찰가격 순위와 이론가들이 침이 마르도록 상찬하는 작가들의 순위 목록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경매장에 오르지 않은 작품이 비평가의 주목을 받는 경우는 갈수록 드문 사건이 되고 있다. 큐레이터들이라고 경매장 바깥 작품이나 작가들로 자신의 전시를 꾸미고 싶어 하랴. 비평담론도 전시공학도 고가 거래가 성사되는 곳에서 꽃핀다. 발루아는 말을 잇는다.

“비엔날레에서 보았던 작가들을 다음 달에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가 사실이다. 크리스티의 망치를 바쁘게 만들었던 작가들을 이듬해 비엔날레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 이것이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시스템이다. 상인으로서 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그 속도다.” 4

글로벌 단일체계화된 미술의 작가들은 경매의 망치소리와 함께 급속하게 성장한다. 오랜 기간에 걸친 긴 전시 목록으로 구성되곤 했던 과거의 커리어는 불필요하다. 질 프슈Gilles Fuchs에 의하면, 1960, 1970년만 해도 작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예술은 미술관이 아니라, 예술이 돈벌이의 기제로 전락하는 경매장에서 형성된다. 전시와 장소성은 더 이상 현대미술의 핵심적인 사건이 아니다. 지리적 경계는 중요한 요인이 아니다. 뉴욕 미술이라고? 순수하게 ‘미학적 정체성’으로서 그런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런던미술이나 베를린미술, 파리미술의 시대는 지나갔다. 다만, 프랑수아 피노나 베르나르 아르노의 미술이 작동할 뿐이고, 가고시안의 라벨이 붙었거나 찰스 사치의 색인을 지닌 미술이 지구촌의 도처에서 출몰할 뿐이다. 그러므로 단지 덜 속기 위해서라도 순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베니스에서 만들어진 작가를 바젤이 마케팅하는 것이 아니다. 바젤에서 급조된 예술을 베니스가 바코팅, 곧 각각의 것에 코드를 붙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침범당한 시스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에 대한 회의적 시각 또한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게다가 신화화된 고도성장으로 은폐된 글로벌 경제체계의 거품이 조만간 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 이 시스템을 비춰볼 수 있는 다른 거울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연대를 1980, 90년대쯤으로 조정하기만 하면, 이는 ‘전적으로’ 글로벌화의 롤러코스터에 몸을 맡겨온 한국미술의 상황이다. 인사동이 미술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담당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1970년대에 그 형체를 드러내면서 한때 인사동은 욕망이 들끓던 장소였다. 한국현대미술을 주도하는 흐름이 그곳을 관통해 흘렀다. 하지만 오늘날 그곳은 경유지로서의 의미조차 희미하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미술은 세계 5대 비엔날레 가운데 하나를 개최하고, 틈만 나면 아시아미술 선도론을 입에 올릴 만큼 외형적으로 커졌다. 한국미술은 중심을 잃은 적 없이 이 성공으로 간주되는 노선을 내달릴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만들어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제도화되고 경직된 인사동 미술의 미래적 대체를 선언한 이 미술은 중심이 부재하기 때문에, 집중에 대한 부담도, 상실에 대한 성찰도 원천적으로 봉쇄된, 기형적으로 경쾌하고 더욱 욕망하는 미술이다. 하지만, 안으로부터 전해오는 공복통空腹痛은 사라지는커녕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크리스티 경매가 곧 예술성의 궁극적 원천’으로 간주되는 지경이고 보니, 그 실체적 토대의 빈곤에 대한 인식을 외면하고 언제까지 도망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현재는 해석 및 담론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실상 사건 자체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장소와 함께 장소 이상의 것을 누락했기 때문이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린 것처럼.

‘인사동 미술’의 실체
일제강점기 말 일본인이 경영하는 골동품상들이 입지하면서 고미술거리가 형성된 것이 오늘날 전통문화의 거리 인사동의 시초였다. 몰락한 세도가들의 집과 골동품, 고서화와 도자기 등이 유입되면서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고미술품 상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채 반 세기가 안 된 2000년 현재 고미술 관련 화랑, 표구점, 필방업소 등의 절반 이상이 인사동을 떠났거나 사라졌다. 그 빈자리는 한류스타의 조악한 사진이나 중국산 짝퉁 민속공예품이나 잡화들로 채워졌다. 2012년 40%가 넘는 상점들이 설치한 가판대에서 판매되는 품목의 평균가격은 2.000원 내외로 양말 티셔츠, 스카프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이제라도 유무형의 역사적 자산을 정비해 한류의 밑바탕이 되었던 우리 문화의 이야기들을 찾아내자”,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문화특구이자 한류의 재생산기지로 만들자” 등의 담화가 난무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장소의 복원과 관련된 그러한 구호들에는 복원해야 할 실체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거나 왜곡돼 있다.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라는 인식은 정작 1980년대 들어서면서 관광특화구역에 대한 국가 차원의 요구로부터 비롯되었다. 국가적 이벤트 성황에 부응하려는 정치적 기획은 1983년 ‘제5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문화예술부문 계획’이나 1986년 ‘제6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 문화예술부분 계획’ 등을 통해 실행되었다. 제5공화국은 전통문화 및 민족문화 관련 사항을 헌법에 명시하고, 7년(1980~1988)의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문화에 관한 중장기 계획을 4번 발표할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 5 하지만 그것은 헌법에 문화, 특히 전통문화의 창달에 대한 조항을 편입시키는 자체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극히 이례적이라는 점 등에서 드러나듯, 문화를 통치술의 일환으로 편입시키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6 전통문화를 이용한 은폐의 정치, 곧 문화와 예술을 국민을 회유하거나 관심을 정치로부터 멀어지도록 함으로써 7 정치적 과오를 덮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의도는 예컨대 ‘국풍 81’같은 국가주도 이벤트에서 이미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냈다. 8
전통의 거리만큼이나 문화와 예술의 거리로서 인사동의 실체도 미심쩍다. 인사동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야 뒤늦게 문화예술과 결부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상업화랑 입점이 그 직접적인 계기였다.(현대화랑) 상징적 읽기가 가능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1974년 문헌화랑, 1976년의 경미화랑과 동산방화랑이 개관했으며 1977년에는 선화랑, 1983년에 가나화랑이 개점하면서 화랑가로서의 면모를 다져나갔다.9 이후로 화랑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현재 인사동에서 가장 많이 분포하는 업종이지만, 10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참담한 측면이 없지 않다. 2013년 현재 인사동에 자리한 120여 개의 크고 작은 갤러리의 65% 이상은 여전히 ‘대관貸館화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머지 가운데서도 18%는 대관과 작품 판매를 병행하고, 소위 ‘상업화랑’으로 운영되는 17%의 상당수조차 작품 판매에 비중을 두는 정도다.
예나 지금이나 ‘대관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인사동 미술의 한 실체다. 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임대 화랑들에 작가나 작품성에 근거한 선별, 미학적 신념이나 노선에 대한 존중, 전시의 실질적인 수준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상황이 더 열악하던 시절, 임대 화랑들이 젊은 작가들에게 해방구가 돼주기도 했던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고가의 대관료를 지불할 여력이 있는 소수를 그렇지 못했던 다수로부터 선별하는, 억압적인 자본의 검증을 실행해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설상가상 2002년 정부가 문화지구로 지정되면서 대관 임대료가 급격하게 상승했는데, 이는 인사동이 자본의 굴락화化로 치닫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작가에게 대관료의 벽은 창작을 접거나 현대미술 장을 떠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인사동 미술의 성황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은 높은 대관료에서 전시 카탈로그 제작비와 오프닝 세리머니 비용까지 지불할 여력이 있는 젊은 작가들이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임대 화랑을 기반으로 하는 인사동 미술의 이러한 하부구조는 오히려 한국미술 잠재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한 구조적 기반 위에서 인사동은 향후 “고급문화로서 특권화되어 갈”  또 하나의 인사동 미술, ‘한국적 미니멀리즘으’로 명명되곤 하는 제도화된 미술을 위한 요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것이 인사동 미술의 양분화된 작동 패러다임이었다.
고급주택화gentrification된 현재의 인사동에서 양극화된 두 예술의 우생학적 생존 여건은 조금도 완화되지 않았다. 고가의 대관료를 지불할 여력이 있는 아마추어 미술과 고도의 지대상승률을 앞지를 만큼의 수익률을 담보하는 ‘글로벌 블루칩 미술global bluechip art’ 또는 ‘아트스타의 아트art of art star의 양극 사이에 정작 인간을 위한 내적 토대는 여전히 찾아보기 어렵다. 인사동이 조선조 도화서가 있었던 자리라 하여 미술과 결부시키는 것은 낭만적 소설에 가깝다. 전통거리로서 인사동은 일제강점기 말기의 산물이며, 인사동 미술은 고작 1970년대의 소산물일 뿐이다. 변하지 않는 토대, 어떤 본질에 상응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문화예술의 장소로서 인사동의 실체는 미미하다. 인사동 미술은 역사 만들기와 회유와 은폐의 정치술과 초상업주의의, 침범당한 근현대사의 거울이자 우리 미술의 내적 빈곤과 마주하는 장소다. 인사동의 향수를 논하고 복원을 주장하는 담론들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대목이다. 그곳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니라, 넘어 나가야 할 곳으로서의 거울이다. ●

비엔나 (12)

빈 크리스틴 쾨니히갤러리

뉴욕 덤보의 흑백벽화

뉴욕 덤보의 흑백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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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낙찰된 작품은 <마릴린먼로 vs 마오주석>이었다.
홍경택의 작품은 2013년 홍콩 크리스티 이브닝 세일에 재등장, 663만 홍콩달러(약 9억6000만 원·이하 수수료 포함 가격)에 낙찰되며 다시 한 번 기록을 경신했다.
3  ‘홍경택·김동유 등 5인展…28일 크리스티홍콩 개막’, 이향휘 기자, 기사입력 2014.10.9
  Marie Maertens, L’Art du Marche de l’Art, ed. QUE, 2008, Espagne, p.104.
네 번의 중장기 문화정책은 다음과 같다. 1981년 : ‘새 문화 정책’ 1983년 : ‘제5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문화예술부문 계획’
1984년 : ‘지방문화중흥 5개년 계획’ 1986년 : ‘제6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문화예술부문 게획’
구광모, <우리나라 문화정책의 목표와 특성-80년대와 90년대를 중심으로>,  《중앙행정논집》, 제12권, 중앙대학교 국가정책연구소 중앙행정학 연구회, 1988
7   동아일보 1985년 2월 19일자. 참조
  장승백이 지신밟기, 풍년기원제, 민속제, 전통에술제, 국풍장사씨름판, 팔도굿, 남사동놀이 등의 행사가 ‘국풍81’의 중심에 있었다.
9  김종근, <현대미술의 메카, 인사동>, 《인사동 가고 싶은 날》, 디자인하우스, 2002, p.140.
10 전체점포수 대비 화랑의 비중은 1998년 이전 21.6%에서 2002년에는 34.3%로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