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강홍구

강홍구의 작업 장르를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작업을 설명하는데 필수적으로 함께 하는 단어는‘회화’와 ‘사진’. 사진 위에 그려진 그의 그림은 생경함보다는 독특한 감각을 자아낸다. 2015년 11월 27일부터 12월 23일까지 원앤제이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언더프린트: 참새와 짜장면〉은 이러한 두 평면의 만남이 독특하게 조화를 이룬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필자는 그의 작업이 “뷰파인더와 피사체의 포획 관계를 넘어, 형상의 구축(image constructing)과 ‘그림을 서서히 드러나게 하는 운동을 주도하는 것’으로서 ‘모티프’라는 회화 실천적 관계를 고려하도록 요청하는 작업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강홍구의 평면 각뜨기와 양생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

대부분의 사람에게 세계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실 무더기인 동시에 그 사실들이 대강대강(凡) 통속적인(俗) 상태로 지각되는 곳이다. 사실의 무차별적 집합, 흔해빠진 지각 경험이 그렇게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퍼져있는 양태, 그것이 곧 우리가 말하는 ‘일상’의 실체다. 물론 이때 무차별성과 범속함은 아이러니하지만 우리가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실생활을 평생 질리지 않고 살게 하는, 우리가 평범하다며 무시하기도 하는 현실을 상도(常度)에 어긋남 없이 이어나가게 하는 강력하고도 기본적인 힘이다. 하지만 특별한 인식 및 감각능력을 갖고 있고 그 힘을 제대로 발현시킬 표현 매체 및 방법론을 지닌 예술가는 대강대강과 듬성듬성의 세계를 끊임없이 세공하고 밀도를 채운다. 또 통속적 경험과 덩어리진 지각을 평면적인 틀에서 해방시켜 다양한 지점과 층위로 횡단, 분할, 이접, 중층화, 복수화, 변형, 변질, 변성시킨다. 그렇게 해서 일상의 무차별성으로부터는 비범한 차이를, 실재로부터는 풋내와 핏물을 제거하고 아주 작은 미적 가치라도 구해낸다. 그럴 때의 예술가는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1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이, 어떤 남용도 잉여도 범하지 않고 소의 살과 뼈를 발라냈던 중국 문혜군 시절의 요리사처럼 도(道)로써 일한다. 요컨대 포정의 소 각뜨기(?丁解牛).
강홍구는 이를테면 내가 생각하는 한국 현대미술계의 탁월한 ‘예술가-포정’ 중 하나다. 이 작가만큼 신물 나는 일상 현실로부터-아니 사실은 절대적으로 바로 그것으로부터만-비범하면서도 결코 젠체하지 않는 이미지를 떠내는 이가 없다는 뜻에서다. 또한 이 작가만큼 겉보기에 힘들이지 않고, 대단한 각오나 철두철미 심각함도 자랑하지 않으면서 날것의 현실로부터 즐거운 것, 기분 좋은 것, 감상할 만한 것 그러나 송곳 같은 의표가 있고 영양가 높은 비판성이 담긴 무엇을 발라내기 어렵다는 뜻에서다. 요컨대, 작가가 말하는 “시시한 것”으로부터 미학적 용어로 ‘미적인/감각 지각적인 것(the aesthetic/aisthetikos)’ 각뜨기.
비린내를 풍기며 아무렇게나 엉켜있는 듯하고, 무더기져 뭐가 뭔지 모르겠는 리얼리티 내부에도 분명 나름의 결이 있고 틈이 있다. 또 가치와 의미의 마디들이 존재한다. 작가 강홍구는 먼저 바로 그 결을 따라, 어떤 틈 안으로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어서 생짜 원초적 이미지를 포획(capture)한다. 그런 다음 그 원초적 이미지 무리를 현실의 피상성2에 내버려두지 않고, 스스로 “B급”이라 낮춰 부르는 자신의 예술 역량에 따라 자르고 접붙인다. 이때 ‘자르기’와 ‘접붙이기’는 현실에 내속된 동종 혹은 이질의 마디들, 결절들로 침투해 의도를 갖고 혼합 편집하는 실천법인 만큼 무차별로부터 비판적 인식의 거리를 확보하고, 예술인문적 실체를 증가시키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런 작업 과정 및 창작의 방법론은 강홍구의 초기 전시에 속하는 《강홍구》(1992)와 《위치, 속물, 가짜》(1999)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드라마 세트》(2003) 《오쇠리 풍경》(2004) 《풍경과 놀다》(2006)로 이어졌고, 《사라지다-은평 뉴타운에 대한 어떤 기록》(2009)과 《사람의 집-프로세믹스 부산》(2013)을 통해 하나의 정점을 이뤘다.
여기까지 한 후, 강홍구는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궤도 하나를 발명해낸다. 이 작가의 원래 전공 분야인 ‘회화’와 지난 20여 년간 자기 작업의 주 무대였던 ‘사진’이 상호 중층결정 작용을 하는 평면이 그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그 집》(2010), 《녹색연구》(2012), 그리고 《언더프린트: 참새와 짜장면》(2015)에서 구현한 평면인데, 쉽게 말해 ‘사진 위의 그림’이다.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리는 이 사진 위의 그림이 내가 강홍구의 작업을 ‘예술사진’이든 ‘사진예술’이든 간에 결코 사진에 한정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다. 이를테면 그의 예술은 사진과 인화지/전자기기 모니터의 관계 구도로 파악해서는 핵심을 놓친다. 대신 이미지 일반과 평면의 관계 속에서 이해될 때 가치가 솟아나고 즐김이 증폭될 것이다. 나아가 뷰파인더와 피사체의 포획 관계를 넘어, 형상의 구축(image constructing)과 “그림을 서서히 드러나게 하는 운동을 주도하는 것”으로서 “모티프”3라는 회화 실천적 관계를 고려하도록 요청하는 작업이다.

코끼리

〈코끼리〉 사진 위에 아크릴 35×100c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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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전경

평면의 위와 아래로 운동
매체학자 플루서는 ‘피상성’과 ‘평면’을 실제 현상, 그림, 사진, 비디오, 컴퓨터그래픽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광의적으로 사용하는데4, 이는 논쟁이 필요하다. 그도 알다시피 피상성, 가시적 표면, 평면이라는 범주에는 인간의 의도, 행위, 제작, 장치, 환경, 역사 등이 작용하는 방식과 정도 차에 따라 매우 상이한 이미지 종(種)이 포함될 수 있고, 그런 만큼 각각에게는 공통성보다는 분별 가능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1996년 강홍구가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저수지의 개들’ 스틸을 차용해 자신의 얼굴과 합성한 디지털 자화상 〈나는 누구인가〉는, 2015년 아스팔트바닥을 딛고 서 있는 자신의 두 발부리를 찍고 그 사진 위에 아크릴물감으로 생선 대가리와 꼬리를 그려 넣은 〈고등어〉와 피상성 과/또는 평면이라는 이슈에서 동일시될 수 없다. 전자가 통속과 기성의 이미지를 가져다 이리저리 비틀어 가짜와 거짓을 보여준다 한들, 그것이 사진인 한 〈나는 누구인가〉는 실재의 지표(index)인 동시에 그 실재의 피상성 파편들이 꿰매진 피부다. 또 인화지에 현상되든 전자 모니터에 띄워지든 간에 그것은 결코 아무것도 없는 데서부터 출현하기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이미지다(뭔가가 찍혀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인화지나 모니터는 사진영상의 역사가 얼마가 됐든 새로 생산되는 모든 이미지가 언제나 제로 그라운드에서 실재의 조각들로부터 얻어내야만 하는 것이다(심지어 그것이 다른 이의 사진을 표절, 차용, 변조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반면 후자 〈고등어〉는 미학적으로 그다지 대단할 것 없어 보여도 실재의 객관적 존재와 작가의 주관적 행위가 중층결정 작용한 결과다. 이를테면 고등어 머리와 꼬리를 우둘투둘한 질감의 터치로 그린 것은 작가가 그 회화적 표현 아래 이미 각인돼 있는(언더-프린트) 아스팔트평면의 물질성을 감각적으로 모티프에 투입한 결과이며, 또 그 역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메를로 퐁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림을 나타나게 하는 운동의 견인체로서 아스팔트바닥이라는 모티프의 영향관계.
이런 맥락에서 최근 강홍구의 ‘사진 위의 그림’ 작업은 지표나 실재의 피상성 같은 기준 대신, 사물/모티프의 물리학적이고 위상학적인 운동 및 평면이라는 특수 환경(하나의 차원이자 회화예술의 역사적 현존으로서)의 조직화에 초점을 맞춰 비평해야 한다. 요컨대 이런 것이다. 초기 이 작가의 사진합성작업들은 포정의 소 각뜨기처럼 삶의 피상성으로부터 어떻게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고 날선 이미지를 해체해낼 것인지에 맞춰져 있었다. 골계미를 뽑아내는 창작 말이다. 그런데 현재 그의 사진 위 그림 작업들은 평면과 평면 사이로, 평면의 위와 아래로 ‘강홍구’라는 주체의 주관성(subjectivity)을 집어넣는 양생(養生)과 양화(+)의 미술이다. 그렇게 해서 리얼리티의 무서운 구멍, 삶의 냉혹한 벽, 일상의 강압적 틈에, 모티프의 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상실한 소망이미지와 범속한 자유의 이미지를 메워 넣는 것이다. 플루서는 평면은 곧 ‘표면’이고 ‘피부’라고 봤지만5, 이미지의 세계에서 진짜로 빚어지는 사태는 그렇지 않다. 평면은 사물/사태에 대한 정확한 틈입, 해체, 구축의 일들이 중층결정되는 공간이고, 그런 한 단순한 표면이나 피부가 아니다. 그것은 2차원과 3차원과 4차원의 한가운데서 두께 및 부피가 쉬 바뀌지 않는 독특하고 강한 몸이다. 현재 강홍구가 《언더프린트: 참새와 짜장면》에서 보인 ‘찍은 평면’으로서 벽과 담, 그 위에 ‘그린 평면’으로서 짜장면 다섯 그릇, 토끼 인형, 벽돌 위 참새, 세잔의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 등이 구축하고 있는 몸이 바로 그 현현이다.●

쿠르베

〈쿠르베〉 사진 위에 아크릴 100×170cm 2015

1 장자, 오강남 풀이, 《장자》, 현암사, 1999, pp. 146-154. “동양에서는 엄격히 따져 궁술, 검술, 유술 등 ‘술(術)’의 연마를 목표로 하는 훈련과 궁도, 검도, 유도 등 궁극적으로 ‘도(道)’와 하나가 되어 자연의 움직임과 합일하려는 수련을 구별했다. 말하자면 여기서 포정은 ‘해우술’이 아니라 ‘해우도’를 터득한 것이다.”(p. 152)
2 여기서 ‘피상성’은 말 그대로 가시적 표면으로 나타난 형상적 속성을 가리킨다.
3 Maurice Merleau-Ponty, Sens et non-sens, 권혁면 역, 《의미와 무의미》 중 “세잔느의 회의”, 서광사, 1985, p. 27.
4 Vilem Flusser, Lob der Oberflachlichkeit, 김성재 역,《피상성 예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pp. 2-5 및 45-49 참조.
5 같은 책, p. 57.

강 홍 구 Kang Honggoo
1956년 태어났다. 목포교육대를 졸업하고 홍익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갤러리 사각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5회 이상의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미술관 밖에서 만나는 미술이야기1,2》 《앤디 워홀:거울을 가진 미술사의 신화》《시시한 것들의 아름다움: 우리시대 일상 속의 시각문화 읽기》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