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TIC 장현주 숲, 깊어지다

갤러리 조선 2.5~26

풍경화에는 화가의 세계와 자연에 대한 사유가 오롯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서양에서, 신화 속 영웅들을 화면 곳곳에 그린 풍경화에는 그 영웅에 대한 화가의 동경이 드러나며, 햇살의 명암과 색채를 포착한 인상주의 풍경화는 화가의 자유로운 시선의 해방을 의미한다. 또한 한국에서, 신선산수에는 신선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화가의 염원이 담겨있고, 진경산수에는 화가의 조선 산천에 대한 긍지가 그려진다. 오랜 시간 풍경화 또는 산수화는 화가가 체험하고 관념화한 자연 그리고 자연과 화가 자신의 관계를 담아왔다.
장현주의 개인전 <숲-깊어지다>는 장지에 먹과 목탄, 분채로 그린 모노톤의 추상에 가까운 풍경화 연작을 소개한다. 작가는 전작에서 보이던 꽃과 나뭇가지를 단순하게나마 형상화해야 한다는 회화적 부담감을 내려놓는다. 바탕을 먹으로 거칠게 처리한 후 그 위에 목탄으로 낙서에 가까운 선을 그려 검은 면의 흔적들만을 남긴다. <Woods-작품번호>라는 제목을 읽을 때에야 비로소 관객은 이 대담한 회화들이 실은 풍경화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풍경들은 무엇이든 되어가게 가만히 둔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번 연작들은 어느 순간 존재했고 스쳐지나간 자연 속 대상들의 흔적을 종이 위에 사색하듯 표현한다.
“몇 해 전부터 나의 작업은 조금씩 밖에서 안으로 내밀한 내 이야기와 상처를 건드리며 들어왔다. 의미있게 바라보고 풍경을 묘사하기보다는 그 풍경이 나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와 장소감을 이미지 안으로 끌어들이고 이러한 풍경을 내면화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밀한 상처와 상실감은 쉽사리 쓸려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옅은 흔적으로 쌓이는 것이기에, 숲에서 나는 긴 여행을 떠난다.”
_ 작가노트에서
장현주가 첫 개인전 <지우개로 그린 풍경>을 연 2007년은 작가가 서양화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지 20년이 지난 해였다. 작가는 이 기간을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세 아이의 엄마로서의 삶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순간들이었고, 스스로 생각의 출구를 찾지 못할 때’였다고 속내를 밝힌다. 가족의 일상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굴러갈수록, 장현주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을 완주하고 싶은 생각이 강해졌다 말한다. 정형화된 가족관계는 작가에게 의지, 독립, 일에 몰두할 자유에 대한 갈망을 극대화시켰을지 모른다. 분명 이 고독의 시간은 장현주가 다시 그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장현주의 소재는 유년기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보고 자란 시골의 산과 들, 숲, 그리고 현재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를 둘러싼 산과 같은 자연이다. 장현주의 자연은 분명한 형태를 섬세하게 구축하거나 특정한 서사성을 명료하게 전달하기보다는, 자유롭고 다양한 층위의 이미지들이 공존하는 상태이다. 작가가 선을 그으면 그 선은 자기 의지대로 자라나 나무가 되기도 하고 숲이 되기도 한다. 작품 속 세계에서 각 개체는 존재의 무게를 덜어낸 채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자유롭게 부유한다.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고 기록하는 방식에서 여성과 남성은 그 출발점이 다르다. 여성 동물학자 제인 구달은 남성 동물학자들이 실험실에 가둬놓고 연구하던 침팬지를 다시 자연으로 불러냈다. 장현주는 여성적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본다. 그에게 자연은 도상화된 수단이 아닌 체화된 자신의 일부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생태여성주의를 표방한다거나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자아를 발견한 극적 순간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남보다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내면화된 자연을 그릴 뿐.
양지윤 코너아트스페이스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