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옅은 공기 속으로

금호미술관 5.27~8.23

조성지 미술비평

금호미술관의 <옅은 공기 속으로>는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 동시대적 풍경의 한 단면을 조망해볼 수 있는 전시다. 권기범, 김상진, 김수영, 김은주, 박기원, 이기봉, 카입+김정현, 하지훈, 홍범 등은 깨어있는 눈과 치열한 작가정신, 예술의 개념으로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형상담론을 추구해온 이들이다. 국내 국공립, 사립미술관과 갤러리, 문화예술기관들이 해외 블록버스터급 근현대 유명작가들로 운영과 소통 성과 올리기에 급급한 가운데, 국내 작가들에 대한 진득한 관심이 참으로 고맙고 반가운 미술관 전시다. 또한 참여 작가군 역시, 현란하고 속 시끄러운 세태를 향해 난해한 개념의 날덩이들로 맞대응하는 집단혈기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공력의 시간을 거쳐 정련된 개념형상을 추구하는 차별성이 눈에 띈다. 흑백을 기조로 한 이들의 특징적인 드로잉, 영상, 사운드 설치는 무채색의 시각적 비움을 연출한다. 어느덧 국내 중진・중견작가로 자리매김한 이들의 작품은 현대미술이라는 콤플렉스로부터 해방된 듯 한결 무난하고 여유로운 느낌이다.
하지만, 일견 시각적 비움으로의 초대는 편치 않다. ‘옅은 공기 속으로’란 제목이 말하듯, 미술관도 전시도 투명한 곳이 아니다. 옅은 공기 속에 지엽적으로 개별 작가의 개념과 의도, 정신성이라는 환영 짙은 공기들이 정체된 느낌이다. 그런가 하면, “견물생심”이라 했거늘, “보고 온몸으로 느끼며 소통하고픈 마음”을 일으키기에는 볼 것이 없다. 관객 입장에서는 이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환영의 미끄러짐과 동일한 환영의 반복에 식상하고 무료함을 느낄 법하다.
난해한 것은 난해한대로 무난한 것은 무난한대로 현대미술이라는 헛것을 따라다니다가 헛것 된 듯 관객의 입장은 무안하다. 관객이 좌절하지 않을 방법은 황망하니 잊어버리거나, 휑뎅그렁 남겨짐에 대해 해명하는 일이다. 전시입장료와 상관없이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 착한 관객이거나, 전시입장료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얻으려는 악착 같은 관객이 후자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감과 휑뎅그렁 남겨짐은 비단 현대미술을 대하는 관객의 경험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참여 작가를 포함한 동시대 국내외 현대미술이 처한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현 상황에서 금호미술관이 기획한 이번 전시는 여러모로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남는 전시다.
금호미술관 <옅은 공기 속으로>는 분명 작가 선별과 전시일정상, 서구 미니멀리즘 이후 개념미술, 공감각적 환영과 상호작용성 등에 관한 다양한 양태의 국내작가 일파를 집중 조명하고 검증하는 프로그램들로 뜻 깊은 전시기획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러한 관객의 경험은 오히려 작가와 관람객, 예술세계와 현실세계를 만나게 하고 특별한 사물로서 현대예술에 대한 문제 제기와 비평적 견해들을 되짚어보며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로 기대해봄직한 전시였다. 그런 만큼 상당 부분을 관객의 능동적 참여와 학습에 맡겨버린 작가와 미술관의 방만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미술관 전시와 작가와의 대화가 모든 검증이 끝난 작가의 팬 미팅 자리가 아닌 이상, 참여 작가는 일반인에게나 미술인에게나 대체로 낯선 무명이다. 굳이 반세기 전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회고전에서 한 작가가 미술관으로의 역사화, 제도화에 반기를 들었던 해프닝까지는 아니어도, 이번 전시는 흑백의 다채로운 색감과 독특한 개성을 남기지 못하고 무채색 옅은 공기 속에 묻힌 인상을 준다. 미술관의 무난한 관성범위 망 안으로 너무나 온순하게 들어온 거 아니냐고 작가에게 묻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작가들과 함께 꾸준히 시대적 감수성과 현대미술의 방향성을 모색해온 금호미술관의 이번 전시를 눈여겨본다. 현대미술의 크고 작은 집단 혈기와 돌풍이 끊임없이 소진되고 지나간 자리, 그 위로 감도는 살아있는 무언가를 품었으리라. 이번 전시 <옅은 공기 속으로>를 뚫고 나올 참여 작가들의 그 무언가를 기다려본다.

위 권기범 <Jumble Painting 15-1 Gravity> 벽면 회화에 고무줄 설치, 혼합매체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