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우주생활

일민미술관 2.6~5.17

지금과 달리 정보가 많지 않던 시절, 골방에 앉아서 신문에 실린 기사 한 줄, 잡지에 나온 사진 한 장에 심장을 두근거리며 우주를 상상하는 아이를 생각해보자. 갈 수는 있을까, 어떻게 가능하지, 외계인은 있을까, 무섭게 생겼으면 어떡하지 등등. 기획자 이영준이 말하는 ‘표상으로 하는 우주생활’이란 다른 게 아니다. 사진 논문 기사 등 간접적 정보는 있으나 직접 확인할 수 없으니, 머리로만 생각할 수밖에. 이것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었다. 몸이 있는 곳은 지구나, 바라보는 곳은 우주인 그때 그 시절의 우리. 이러한 심성은 서문에도 ‘엉뚱한 형태’로 등장한다. “마트계산대에서 이 쿠폰이 왜 할인적용이 안 되냐고 따질 때의 호기와 논리력으로 우주 관련 데이터가 정말 가능한 일인지 따져보는 것이 ‘우주생활’이다.” 몽상과 일상의 기묘한 조합이자 즐거운 아이러니다.
이것은 전시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전시는 미 항공우주국(NASA)이 공개한 자료가 뼈대를 이룬다. 우주선 설계도, 실험 사진, 발사 장면, 관객 반응, 각종 기계장치와 여러 은하계 행성 등 NASA가 몇 십 년 동안 축적한 우주 관련 사진자료가 전시장 곳곳을 가득 채운다. 우주생활을 음미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양과 강도다. 그리고 감각의 확장을 약속하면서 작업들이 이러한 현실에 구멍을 판다. 현실의 인장이 진하게 찍힌 ‘스트레이트’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전시’입니다” 눙치는 것처럼 마냥 말이다. 방식도 다양하다. 인식의 한계를 정당하게 성찰하는 회화(김지원), 대상을 바꾸어 기술적 숭고를 그대로 반영하는 사진(조춘만), 과학의 이면을 무의미하게 정밀한 예술로 역추적한 작업(김홍석), 우주생활을 반(反)-반(半)기계적인 나무 인공위성으로 눙치는 설치(김나영・마스) 등. 물론, 종류만 다를 뿐 하나같이 ‘농담’인 것은 마찬가지다. 농담 같은 현실, 아니 농담이 섞인 현실, 어쨌든 현실을 돌파하는 방식들이며, 그때마다 우주는 오랫동안 다양한 형태로 질료를 제공했다. 하지만 지금은.
SF 번역가 박상준의 지적대로 현재 ‘우주’는 한물갔다. 과학과 인문학 양쪽에서 상상력의 엔진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냉전이 치열하던 1980년대 ‘별들의 전쟁’ 때까지는 부정적이어도 어쨌든 ‘우주’가 기술문명의 상상력을 끌었지만, 지금은 ‘디지털’에 자리를 내준 지 오래다. 과학소설의 최근 경향도 이러한 현상을 증명한다.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이라인 등 우주과학 일변도의 초기 하드 SF에서 과도기를 거쳐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1984) 같은 사이버펑키 장르로 전환된 것도 그때다. 상상력의 장소도 크기도 축소된 것이다. 그래서 이 전시가 반가웠다. 조금은 망각된 상상력의 원천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니까. “우주시대를 달리는 고성능 휘발유! 국내 유일한 호남정유의 슈프림.” 그랬기 때문인지, 우주인 내조자의 인터뷰기사들과 신문 한 면을 정확히 반분하여, 주유기를 들었지만 미래형 복장을 한 여성 우주인이 등장하는 광고를 보면 슬그머니 웃음이 날 수밖에. 소박하지만 정직하게 상상하는 태도, 진지하게 하는 농담, (층위가 다르긴 하겠지만) 내게는 그게 더 알레고리 같았다.
김상우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