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OR’S VOICE 최민화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나무화랑 1.28~2.7

화가의 의식은 항시 작업으로 무장돼 있어야 한다. 화집 《분홍》을 만들면서 방문한 최민화의 작업실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상고사> 연작 에스키스를 보며 든 생각이다. 한동안 개인적인 문제로 활동이 주춤했던 최민화지만, 2003년 대안공간 풀에서 상고사를 주제로 한 개인전 이후에 그린 이 시리즈 습작만 200점 정도라니 여전히 그의 의식은 작업에 집중돼 있다는 증거임엔 분명하다.
도서출판 나무아트에서 화집 발간과 더불어 마땅한 행사가 없을까 생각하던 차에 이 에스키스들은 좋은 ‘꺼리’였다. 출판기념을 겸한 에스키스전인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주춤하던 그의 작업추동력에 점화스위치를 누르는 것이자, 본격적인 작업 활동을 이륙시키고자 의도적으로 몰아간 것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 에스키스들을 바탕으로 다수의 <상고사> 연작 회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고 또 전시가 열려야 할 것이다.
이번 화집 발간과 에스키스전은 작가와 기획자의 대(對) 관객 공약이다. 지켜야 할 의무다. 부담이라는 강제성을 작가나 기획자가 스스로 걸머진 거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활동 부양책’을 쓸 만큼 최민화는 지난 몇 년간 스스로를 세상 밖 절해고도에 위리안치시켰다. 그런 그를 움직이게 하고 세상 속으로 그의 새로운 작품이 나오게 만드는 것이 이번 화집 출간과 에스키스전의 의도였다. 최민화의 은둔을 끝내려 시도한 것이라 하겠다. 물론 기획자는 작가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해서도 안되고. 다만 기획으로 작가적 욕망과 의지를 자극할 뿐이다. 작가는 그 제안을 선택하고 실천한다. 선택한 순간 그것은 자기실현과 함께 신뢰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책무가 된다. 기획자와 작가가 서로 간에 지우는 채무인 것이다.
전시기획은 작가의 조형과 세계를 펼쳐 보이는 기제임과 동시에, 작가를 지켜보고 또 기다리는 긴 조망의 관계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작품은 굴곡과 영욕과 애증의 대상이다. 지문처럼 그의 존재에 새겨진 운명이기도 하다. 작품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임무를 띤 기획자도 결국 그 연장선에서 작가와 엮일 수밖에 없다. 작품-작가-기획자-관객으로 연결되는 사슬의 주요한 한 축이다. 그 관계에서 기획자는 자신이 선택한, 그리고 자신에게 부여된 책무를 효과적인 방식으로 작가와 관객에게 제시한다. 당연히 작품에 대한 분석과 작가에 대한 공고한 믿음에서부터 이 일은 진행된다. 이번 최민화의 소략한 에스키스전은 작가에게, 그리고 대중에게 기획자의 입장을 전달한 것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최민화의 작품 발표와 인연이 깊다. 그의 개인전을 기획한 게 여러 번이다. 1990년 한선갤러리에서의 <유월-1전>, 1991년 나무기획의 초대로 토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첫 <분홍전>, 1993년 나무화랑 개관기념 <10년: 1983~1993전>, 그리고 2010년의 <청춘-Prologue전>을 기획했다. 25년 정도의 인연이다. 그의 작품 흐름 전체와 디테일을 모두 지켜보며 지내온 시간이기도 하다. 화집 《분홍》의 발간은 내가 기획한 <분홍> 연작의 출발을 다시 내가 대단원으로 정리하는 의미도 띤다. 에스키스전은 기획자가 작가와 관객에게 다짐한 무언의 약속이다. 이런 약속을 굳이 하는 이유는, 기획자도 결국은 작가처럼 무장돼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김진하 나무아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