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포스코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

작가 문봉선은 “전통을 확실히 배우지 않고서는 결코 전통을 넘어설 수 없다”고 말한다. 9월 1일부터 10월 6일까지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리는 <청풍고절(淸風高節)>은 작가의 23번째 개인전이다. 이 전시에는 대나무와 돌을 그린 수묵화 신작이 대거 선보인다. 그는 오래 전부터 구례와 하동 섬진강변을 비롯해 담양 영산상, 진주 남강, 울산 태화강 등 전국의 유명한 대숲을 두루 돌아다니며 대나무를 관찰하고 사생했다. 이와 같은 문봉선의 대나무 그림은 대나무의 생태적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여기에 다시 주관적 심회를 투사한 뒤, 묵죽 본연의 사의적(寫意的) 세계를 표출한다.

청풍고절 그리고 뭉툭한 돌 하나

류철하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묵화운동이 배출한 기재(奇才)인 문봉선이 전 벽면을 대나무 그림으로 채워 서슬한 대숲으로 만들었다. 문봉선은 일찍이 중국화보를 일소하고 청신한 조선의 사군자를 그리고자 뜻을 세운 화가다. 문봉선이 여행과 사생으로 확인한 실제의 대나무와 국립박물관과 간송미술관에 있는 진적들을 비교확인한 후 자신이 그리고자 한 대나무가 무엇인지 고심한 것은 누구보다도 자주성 강한 화가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문봉선은 대나무를 직접 보고 기르며 계절과 날씨에 따른 참모습을 파악하는 화가로서 대나무에 대한 식견과 화가로서의 지향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오랫동안 대나무를 관찰하여 이미 눈과 마음에 대나무의 생태를 알고 있어야 하고, 손보다 마음이 앞서서 그림 속에 자신의 의지가 나타나야 하며 또한 화폭에 그려진 대나무는 더 이상 가슴속의 대나무나 손에 익숙한 자연 속의 대나무가 아닌 그림 즉 대나무도 묵죽화도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그림 속의 대나무(紙中之竹)’의 세계를 지향했다.”
눈과 손으로 대나무의 생태를 익히고 마음과 정신으로 대나무의 의지를 그리고자 한 것은 앞선 화가들의 지향이었으나 문봉선은 이보다 더 나아가 ‘그림 속의 대나무(紙中之竹)’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마음속의 대나무(胸中成竹)나 손안의 대나무(手中之竹)도 어려운 데 그림속 대나무라니…? 문봉선에게 대나무는 마음이라는 주관의 의지도 아니고 묵죽화(墨竹畵)라는 대상화도 아닌 독자적인 세계로서 감상되는 그림 자체를 의미한다. 이 점에서 문봉선은 과거와 절연했다고 말할 수 있다. 회화로서의 독립과 화가로서의 의지, 그리고 현대성에 대한 생각의 일단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石竹圖_비단에 수묵담채_143×368cm_2014

〈石竹圖〉비단에 수묵담채 143×368cm 2014

문봉선은 수묵으로 한정되는 특정한 과목으로서의 전통과 이념의 과잉이 아닌 수묵으로 표현되는 세계, 그 정경의 일단을 그린다. 수묵으로 표현 가능한 세계와 그 한계는 “반은 배우고 반은 버린다(學一半廢一半)”는 청대의 기걸(奇傑) 정판교(鄭板橋)의 말처럼 여하한 장점이라도 그 기질과 맞지 않으면 과감히 버리고 특단의 일점만을 취한다. 실제 강가의 풍죽을 관찰 참조하며 탄은(灘隱) 이정(李霆)의 풍죽(風竹)을 떠올린 것도, 눈이 그친 후 잎눈이 반쯤 가려진 설죽이 가장 보기가 좋다는 것도 이러한 참조의 결과이지만 이러한 실례들을 확인한 후 문봉선 식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탄은의 풍격을 가졌으되 문봉선으로 해석된 “그림 속의 대나무”를 그린다는 점이 중요하다.
문봉선이 피하고자 하는 것은 회화적 고식(古式)과 관습의 일단이지만 서예가 갖고 있는 간고하고 깊은 먹의 운용과 서체의 힘은 문봉선에게 유효한 것으로 남아있다. 문봉선이 현대적 화면과 회화적 정경으로, 전체 화면을 운용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서체와 필법이 가지고 있는 기본 요소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비수(肥瘦) 장단(長短), 그리고 비백(飛白)에서 오는 조형과 필력은 문봉선 회화의 바탕을 이룬다. 서체로 단련된 필선과 적절한 감필(減筆), 먹과 먹을 부딪치는 과감한 번짐과 깨짐은 천연의 효과를 내며 생기를 더하고 있다.
<청풍고절淸風高節>은 문봉선 특유의 신속한 붓질과 장중한 먹, 강력한 기세의 힘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고고한 대나무와 둔탁한 돌이 이루는 조화는 요란하거나 과장되어 있지 않지만 활물의 모습으로 느껴진다. 언젠가 보았음직한, 그리고 마주했던 산야의 돌과 대나무의 모습이다. 평범한 돌과 대나무가 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상징이 필요하다. 문봉선은 고식인 주름과 그 표현법을 대신해 보다 현실감 있는 표현으로 주름지게하고 문지르며 바위를 과감하게 표현해낸다. 계절과 기상, 그리고 성정이 대나무와 바위에 함께 있어 우죽과 풍죽, 그리고 설죽의 모습이 생생하며 그윽하고, 맑고 화탕하며, 냉엄하고 적막하다.
확실히 사물을 활물의 정경으로 만드는 것은 특기이자 장점이지만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는 어떤 이념이 떠오르는 것은 막강한 고법의 작용이 여전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비바람을 맞고 있는 듯한 돌의 표현적인 요소와 준법을 넘어선 파격적 바위표현과 비백(飛白)은 압도적인 것이지만 이념은 현상을 압도한다는 점을 상기할 때 문봉선에게는 여전히 요청되는 것이 있다.
정판교 가슴속에 10만 그루의 대나무가 있듯 문봉선도 그만한 뜻이 일어 대나무를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가슴속 대나무를 감당하는 바위 몇 점이 10만 그루의 대나무를 지탱하듯 전체 그림의 요체는 흉중의 일기(逸氣)와 대나무의 변상(變相), 그리고 그 뜻이다. 자연의 생태와 조건에 근접한 바위 주름과 양감의 표현이 강렬한 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돌과 바위는 천고(千古)라는 시간의 축적이기도 하다. 문봉선의 그림이 그 자체로 회화적 공간감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지만 대나무라는 공간의 힘과 천고가 합친 시간의 축적이 대비되는 모습은 기대할 수 없었다. 문봉선은 그러한 수많은 생멸의 변상(變相)을 그리는 데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고 있고 진보적이다. 그 변상의 일단을 볼 수 있는 것이 우죽도(雨竹圖)이다. 압도적 크기의 우죽도는 수직으로 내리는 비와 흘러넘치는 빗줄기, 희뿌연 대지의 이내(해 질 무렵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와 안개 속에 홀연히 떠오른 댓잎 등이 실감나게 묘사된 파격적인 작품이다. 이러한 격정과 정취를 다른 그림에서 본 적이 없기에 문봉선은 여전히 다른 그림을 기대하게 만드는 작가이다.
현무암과 죽림이 그의 그림의 모태가 되었던 문봉선에게 대나무와 돌은 천생 탐구대상 일 수밖에 없다. 고법을 배우고 고법을 버린 결과 설죽은 유덕장을 닮았고 풍죽은 탄은의 소리를 낸다. 그러나 문봉선 식이다. 판교가 그랬듯 고법은 그의 스승이 아니다 그가 마주한 강변의 대숲과 바람이 그의 스승인 셈이다. 맑은 바람과 높은 뜻이 있으려면 뭉툭하고 장중한 돌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준법을 지우고 표현력을 가미한 문봉선의 돌은 아직 낯설다. 나에게서 돌은 천년이 한 살인 까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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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竹圖 VII〉(왼쪽) 비단에 수묵담채 143×369cm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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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竹圖〉 연작 한지에 수묵담채 191×96cm(각)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