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드림 소사이어티 – X brid

드림 소사이어티  __  X brid

서울미술관 10.10~11.16

융・복합의 세상이다. 퓨전, 하이브리드, 잡종, 혼성, 융합, 통합, 교차, 혼합, 협업 개념에 동양적인 통섭, 총섭, 회통사상까지 더하니 세상은 온갖 종류의 만남들로 들떠 있는 것만 같다. 이번 전시도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의 부단한 만남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이 시대의 정언명법 같은 흐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기업의 후원을 통한 산업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고전적인 문제의식마저 갖고 있어 전시 자체도 흥미롭지만 그 탄생동학이나 전후 맥락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비판적인 예외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예술은 늘 사회나 기업의 여유 있는 후원을 원했고, 실제로 이러한 후원 속에서 얼마간 힘을 받아왔다. 그리고 그 부족함과 아쉬움을 여전히 미래의 희망으로 남겨둔 것이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의 맥락과 배경은 어떤 면에서 희망이고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작년 문화역서울 284 전시에 이은 두 번째 전시이고 이후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발전된 횡보를 더한다 하니 기대감마저 갖게 한다. 국내 대표적인 기업이 순수 예술의 대중화와 저변 확대를 위해 전시를 직접적으로 후원한 것도 그렇지만 국가, 기업, 개인을 망라한 모든 사람의 꿈이어야 할 드림 소사이어티라는 이상적인 캐치 프레이즈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서구 모더니티 초반기의 미술공예운동, 독일공작연맹, 바우하우스, 데스틸,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이 꿈꿨을 것만 같은 예술과 사회의 통합이라는 유토피아적이고 아방가르드한 문제의식마저 담고 있어 단순히 미래를 향한 전시만은 아니란 생각이다.
이번 전시는 이렇게 과거 모더니티를 발흥시킨 테크놀로지, 기계미학의 감성과 산업과 예술의 행복한 만남을 향한 오래된 꿈에 더해 지금의 복잡한 현실의 다양한 상황들, 이를테면 확장된 환경이나 공공성의 개념, 그리고 인본주의적인 감성, 동시대예술의 위상 등을 복합적으로 되짚어보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를 단순히 미술, 건축, 패션, 사진, 미디어아트, 설치, 퍼포먼스 등의 다양한 장르가 혼합된 전시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미 서로 다른 것들이 부단히 만나는 세상이기에 이런 다양한 장르의 이질적인 만남 자체가 색다른 것이 아닐뿐더러 만남 자체만으로는 융・복합을 운운하는 이 시대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이한 만남들을 서로 통하게 하는 구체적인 방식이나 과정, 결과들의 깊이 자체가 더 문제가 되는 세상인 것이다.
이번 전시 역시 다양한 장르의 혼합형 전시라기보다는 이를 회통(會通)하게 하는 전시의 개념적인 방향 설정과 전시구성의 안정적인 짜임새가 돋보인다. 아마도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고, 가로질러 다시 사회의 미래 속에 자리하게 될 예술 본연의 의미를 추구하고, 이를 위한 다양한 분야와의 현실적인 네트워킹의 발판을 만들려 했기 때문인 듯싶다. 가시성 볼거리에 그치지 않는 이번 전시의 비가시적인 장점들이다. 이질적인 것의 혼합이라 할 하이브리드 개념을 넘어 미지의 수를 의미하는 X개념을 더한 엑스브리드(x-brid)라는 신조어를 통해, 아직은 규정되지 않았지만 늘 동시대예술이 관계하고 있는 무한한 창조적 가능성의 미래와 그 방향을 벡터항으로 설정한 것도 이와 연관된다. 사실 이번 전시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들을 묶어낼 공통분모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이미 서로 너무나 다른 관심을 기반으로 한 고유의 작업 영역을 확고히 한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이를 조화롭게 엮어낸 이번 전시의 미덕이라면 이처럼 결이 서로 다른 작가들이 각기 고유의 작업을 펼칠 수 있도록 전시의 바탕이 되는 서울미술관 공간의 장소성을 잘 살린 세련된 세노그래피(scenography)가 아닐까 싶다. 앞서 말한 기업 후원, 협업, 예술의 공공적 실현이라는 현실적인 함의가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고 전시 자체의 자율적인 독립성이 더 돋보인 점도 이와 연동된다. 참여 작가들 역시 기업과의 협업이나 서로 다른 영역의 작가들과 어색한 만남을 의식하지 않고, 이미 다를 수밖에 없는 자신의 고유한 작업을 기반으로 각각의 공간들을 풀어냈다. 개개의 사물은 독자적인 현존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이 서로간의 다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고, 무한히 비추면서 세상이 펼쳐지는 것처럼 말이다.
서울미술관이라는 이전에 미처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공간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것들이 이접해 새로운 장소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마도 전시를 관통하는 미지수 X라는 변수들이 계속해서 그 다르고 새로운 것들을 펼치게 했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 기저에 서로 다른 지반에서 앞으로 도래할 사회와 예술의 미래 위상을 향한 작가들의 공통된 시선과 문제의식이 자리하지 않나 싶다. 참여 작가들의 전시를 통한 상이한 시간, 공간과의 새로운 접속들도 그렇지만 이윤 창출을 우선시하는 기업과 예술의 만남은 이렇듯 서로 다른 지반, 이를테면 사회의 미래적인 지향 속에서 조우하고, 작동되어야 함을 은근히 역설하는 셈이다. 통섭(consilience)의 어원이 ‘함께 뛰어오르기(jumping together)’라니 이 또한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인 것 같다. 이런 모습들이 기본적으로 동상이몽(同床異夢)이겠지만 이상동몽(異床同夢)으로도 향하기에 다성화음처럼 묘한 궁합을 이루어낸 것 같다. 이번 기획의 미덕도 바로 이런 미지의 미래, 그러나 현재 혹은 과거와 연결되어 늘 새로운 모습으로 도래하는 예술의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역할을 전시 동학으로 무리하지 않게 연결시킨 점에 있지 않았나 싶다. 예술과 예술 밖의 영역들을 자연스럽게 연동시켜내면서 말이다.
민병직·문화역서울284 전시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