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직관의 풍경

2016.12.15~2017.1.22 갤러리 아라리오 서울
남선우 | 일민미술관 큐레이터

실재와 그에 대한 인식 사이의 낙차, 혹은 말과 말 사이의 미끄러짐 같은 오해 없이 세계를 파악할 수 있을까? 갤러리 아라리오 서울에서 열린 전시 《직관의 풍경》은 실재를 직접 알아낼 방법이자 이를 시각적으로 경험케 할 방법으로 직관(intuition)을 제시했다. 그리고 작업에서 직관의 방법론을 뚜렷하게 보이는 예로 김웅현, 노상호, 박경근, 박광수, 안지산, 윤향로의 작업을 들었다. 그러나 “동시대 일군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직관적 사유에 대한 정리이자 시각적 시도”라는 전시의 기획 의도는 개별 작업과 전시 자체와는 별개로 크게 공감 가는 말은 아니었다.
우선 직관은 세계를 파악하는 직접적인 방식이지만, 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차원이며, 직관이 일어나는 곳 내부에서만 성립하는 폐쇄적 구조를 갖는다. 직관으로 무언가를 명확히 인식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할까? 개인이 직관으로 포착한 세계의 파편을 작업으로 구현하면 이를 또 다른 개인이 자기 직관으로 포착해야만 하는 대화의 방식은, 모두가 귀를 막고 말을 전달하다가 마지막 사람이 엉뚱한 대답을 하면 ‘아 우리가 이렇게나 대화가 안 됐구나!’를 확인하고 깔깔깔 웃고 끝나는 게임 같은 것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또한, 이 전시가 작가들이 직관으로 헤아린 세계를 관객이 받아들이면서 생기는 미끄러짐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직관적이지 않은 다른 소통에서 생기는 미끄러짐과 무엇이 다른지도 궁금하다.
그보다 이 전시는 2016년 다양한 층위의 장소에서 보았던 인상적인 장면들을 한 자리에 압축해 놓은 듯한, 또는 그 장면들과 모종의 연결을 가진 뒷이야기 같은 전시로 보였다. 작년 초 애니메이션 〈심슨〉을 프레임 단위로 분리해 인물을 삭제하고 다시 겹친 다음 일민미술관 2층 벽면에 아주 납작하게 박았던 윤향로는, 이번 전시에서는 애니메이션 속 여자 주인공들이 변신하는 장면에서 화면 가득 내뿜는 에너지를 스크린샷으로 포착하고 추상화처럼 가공했다. 그 결과물은 표면 뒤에서 빛을 발하며 매끄럽고 얇게 떠 있는,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화면 하나와 너무도 촉각적인 카펫 같은 표면 하나로 구현되어 나란히 놓였다.
정주영 방북, 대전엑스포, 금 모으기 운동 등 1990년대의 특징적 사건들을 토대로 만든 가짜 이야기에, 한때 사진이 그랬던 것처럼 진실의 증거로 쓰이곤 하는 영상 푸티지를 섞었던 김웅현은 그간 빈 창고(웨스트웨어하우스), 점포가 빠져나간 건물(아시바 비전) 등 주로 서울 유휴공간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 〈헬보바인과 포니〉의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작년 가을 작가가 산파로 분한 퍼포먼스에서 태어난 분홍색 포니들이 기다란 비닐 풍선을 타고 떠 있는 〈Pong Pong Pong〉을 따라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산고가 끝나 전보다 가뿐히 매달린 듯한 엄마 포니와 비스듬한 스크린에서 이야기가 완성된다.
작년에 박광수는 신한갤러리에서 들썩이는 리듬에 맞추어 커다란 화면 가득 들어찬 선들이 움직이는 영상을, 금호미술관에서는 빼곡한 검은 선으로 치밀하게 완성한 어두운 숲의 이미지를 다양한 크기의 여러 작업으로 보여주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어두운 숲의 모습보다 숲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의 쪼개진 뒷모습이 더 인상적으로 보이는 두 작업과 그 사람의 시선을 따라 숲 안쪽을 들여다보게 되는 한 작업 〈Deep Sleep Deep〉을 새로 선보였다.
노상호는 웨스트웨어하우스 개인전에서 주목받았던 특징들을 압축하고 변형해서 보여주었다. 즉, 의류 매장을 연상시키는 촘촘한 디스플레이 방식과 프레임 없이 공중에 매단 대형 캔버스, 작업의 디테일을 확대한 간판과 인쇄물 등을 축소판으로 제시하되, 갤러리 공간에 맞게 세팅을 정제하고 보는 이의 시선을 달리 의도했다. 예를 들어 지난 전시에서 좁은 간격으로 켜켜이 걸어 그사이를 탐험하듯 다니게 했던 〈태어나면 모두 눈을 감아야 하는 마을이 있었다〉 시리즈는 육각의 폐쇄된 구조 안에서 제자리를 한 바퀴 돌며 조망할 수 있었다.
작년 북서울 시립미술관에서 거대한 스크린으로 보았던 박경근의 작업 〈1.6초〉는 이번에는 좁은 공간에서 마주 보는 두 화면에 투사되었다. 한쪽 화면은 몸통과 가지가 모두 돌아가는 놀이기구 같은 시점으로 생산라인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다른 쪽 화면은 설비 구조에 더 집중하는 듯했다. 양쪽의 시점은 서로 바뀌기도 하며, 관습적인 방향으로 회전하지 않기 때문에 더 역동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규칙적인 속도로 생동감 있게 돌아가는 주황, 노랑, 초록색 설비와, 회색 작업복을 입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대비가 가까이 마주한 두 화면에서 더 두드러졌다.
합정지구 밖으로 난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았던 안지산의 작업이 곧 떨어질 것만 같아 아슬아슬한 순간을 주로 포착하고 있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그 이후 장면을 보는 듯하다. 〈The Sea of Pink Ice〉의 바닥에는 건물 어디선가 뜯어낸 아이소핑크가 널브러져 유유한 빙하를 연상시키고, 가까스로 지탱했을 〈Broken Flower〉의 무거운 꽃머리는 꺾여 버렸다. 이미 17세기에 친인척 문제로 명망을 잃은바 있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 위에 반쯤 떨어진 채 붙어있는 현 권력자의 포스터는 추락이 당연해 오히려 긴장감이 없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이 2016년에 보여주었던 풍경을 굳이 이번 전시의 풍경과 일일이 비교한 이유는 이 전시가 한 해 동안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들의 다음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직관적인’ 생각 때문이다. 미술관, 유휴 공간, 신생 공간 등 다양한 층위의 장소에서 보았던 이 작업들은 개별로서도 의미 있었지만, 그 작업을 포함했던 전시들 또한 2016년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사건과도 같았다. 그 장소에서 잘려 나와 갤러리라는 또 다른 성격의 공간에 들어온 작업들은 어떤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까, 그리고 지금 만들어진 이 장면 이후를 올해는 또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가, 그러고 보니 벌써 새해의 첫 달이 지나갔다.

위 안지산 〈The Sea of Pink Ice〉(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194×259cm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