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OR'S VOICE 룰즈 RULES

2016.12.22~1.26 원앤제이갤러리
최정윤 | 독립 큐레이터

대학 시절 처음 미술을 접한 것은 모작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 모네, 드가, 고흐, 피카소 등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컬러로 출력해 유화물감을 사용해 따라 그리고, 학기가 끝날 때 즈음이면 전시회를 열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의 사람들〉, 오치균의 〈풍경〉 같은 그림을 좋아했다. 조금 덜 흔한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 화집을 뒤적이고, 미술 관련 교양 수업을 듣다가 본격적으로 미술사를 공부하게 됐고, 지금에 이르렀다. 동시대미술 현장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회화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작가들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개념에 맞는 형식, 매체를 작품에 맞추어 선택하였고, 형식적 한계를 먼저 받아들이고 내용을 구상하는 경우는 줄어드는 추세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회화작품은 오늘날에도 만들어지고 있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추상표현주의, 단색화, 민중미술, 신구상회화, 극사실주의 등 다양한 회화적 경향이 한국 현대회화사의 시대별 주요 쟁점으로 언급되어 왔다. 하지만 동시대 회화 작가들은 다양한 주제를 각기 다른 기법을 활용해 그리고 있다. 오늘날 기획자, 평론가, 작가 할 것 없이 미술계에 종사하는 모든이가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아마도 ‘어떤 미술을 할 것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방향 설정이 온전히 개인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공통적으로 합의된 의제가 없는 상황에서 작가들의 작업은 지극히 개별적인 성취이다. 그럼에도 특정 시대의 삶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작품에서 느슨하게나마 어떤 경향성을 읽어낼 가능성은 있다고 보았다. ‘요즘 젊은 세대 회화 작가들의 작품에는 뭔가 다른 분위기가 있다’는 말을 수차례 들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는 것은 기획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몇몇 작가를 만나면서 그들이 가시적인 세계를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에 큰 거부감을 보이고 있음을 알게 됐다. 텔레비전, 광고, 영화 등 이미지 포화의 시대에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이미지가 유일성을 갖기를 원하는 듯 보였다. 회화가 가져야 할 고유하고 독자적 특성을 평면성이라 여긴 그린버그의 형식주의적 태도와 일부 통하는 지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색, 선, 면 등 평면회화를 구성하는 요소들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었다. 재현적 요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형태의 형식 실험이었다. 구체적 대상의 재현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이나 색의 활용방식이 더 대담했다. 전시장에서, 대학의 졸업전시에서 지인의 소개로 이 같은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 작가를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작품을 구성하는 내적 요소 그 자체를 활용한 실험이라는 측면에서 전시의 키워드를 ‘규칙 (rules)’으로 정했다. 룰즈(rules)는 참여 작가 모두가 자신이 온전히 ‘통치(rules)’할 수 있는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규칙(rules)을 고수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붙였다. 보통 규칙은 여러 사람이 같이 지키기로 작정한 법칙이자 질서를 의미하지만, 전시에서 지시하는 각 작가의 ‘규칙’은 온전히 각 개인에게만 해당되며, 그 규칙을 명확하게 남에게 설명하거나 공표할 이유조차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규칙이라는 단어의 원래 뜻과는 차이가 있다. 작가들이 제시하는 자못 객관적이고 명확해 보이는 규칙마저 실상은 그 목적이 지극히 불투명하고 자의적이다. 참여 작가 7인의 작업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면, 첫째로 감정이나 경험을 시각화하는 경우(김미영, 최수인, 에이메이 카네야마), 둘째로 선, 색, 형태, 재료 등 회화 구성 요소의 실험에 집중하는 경우(이환희, 고근호, 성시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화 혹은 회화적 재료에 관한 회화(이상훈)를 제작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전시의 의도를 읽으려면 언어로 설명하는 것보다도 출품 작품을 직접 대면하는 물리적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빛, 촉각적 느낌, 분위기와 같은 감각적 체험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2017년, 이 시점에 작가들은 왜 이런 형식 실험을 하는 것일까? 정치사회적 이슈나 특정 내러티브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형태이기 때문에 외부세계와 단절된 세상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그림들을 말이다. 사회적 맥락과 미술의 맥락에서 그 이유를 각각 생각해볼 수 있다. 어쩌면 작가들이 만드는 것은 개인 차원에서 즉각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실현 가능한 형태의 소규모 유토피아였을지도 모른다. 몇몇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 둔 하나의 게임 속에서 유희적 태도로 온전한 창작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미술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형식 게임 말이다. 그곳에서 이들은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와 해방감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현실에서 작가들의 삶은 녹록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작품이라는, 스스로가 만든 가상의 공간 안에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자신이 만든 규칙대로 그 세계를 통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미술의 맥락에서는 조금 다르게 접근 가능하다. 패션이나 음악 분야에서도 트렌드가 돌고 도는 것처럼, 미술, 회화에서도 마찬가지로 구상적이고 재현적인 회화, 또는 추상적이고 형식 실험이 중요한 회화가 다시 등장하고 또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20세기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진보의 역사가 하나의 선처럼 한쪽 방향으로 이어져나갔다면, 이제는 다양한 경향이 한데 섞여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는 특정 경향에 관한 선호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온전히 취향의 문제가 됐다.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여러 자산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 역시 자유다. 기존의 다양한 스타일을 재조합함으로써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다양한 경향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상황이라고 보았다.
‘전시기획’을 왜 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기획자마다 각기 다르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시의적으로 이야기해봄직한 의제를 설정하고, 해당 주제에 관해 고민하는, 잘 알려져 있지 않더라도 흥미로운 작업을 하는 작가를 소개하는 것을 중히 여겼다. 또한 지금, 여기에 살아가는 젊은 작가들과 ‘우리’의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나가고자 했다.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는 오늘날, 〈룰즈〉를 통해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미술을 살핀다.
위 김미영 〈Between Jungles〉 캔버스에 유채 210×180cm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