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박미화

2013년 갤러리 담에서 열린 개인전 전시광경

2013년 갤러리 담에서 열린 개인전 전시광경

작가 박미화는 자신의 작품을 ‘마음의 기록’이라고 설명한다. “내 작업에서는 다양한 물질(재료)이 등장한다. 흙, 모래, 시멘트, 종이, 스티로폼, 나무 등. 각 재료는 그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다른 목소리들은 결국 한 가지 소리를 내게 된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나의 ‘마음’이다. 따라서 어떤 재료를 사용하든 늘 한 가지 흐름을 가져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물질들이 내 마음과 만났을 때 내 작업은 관념이 아닌 살아있는 증거로 남게 된다. 다만 ‘물질’과 ‘관념’의 유혹에 너무 깊이 빠지지 않고, 내가 표현해야할 생명에 대한 예의를 지켜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물질과 정신이 어우러진 박미화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물질에 새긴 마음의 기록

박영택 경기대 교수

흙은 질료덩어리다. 그것은 본래의 형체가 없다. 물의 농도에 따라 질퍽이고 물컹하다가도 단단해지는가 하면 말라버리며 균열을 일으키다 먼지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불을 받으면 더없이 단단해진다. 물과 불, 공기의 양에 따라 흙은 자유자재로 변화무쌍하다. 따라서 흙은 가변성이자 본래의 확고한 자기 정체성으로서의 물질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여백 같은 물질이고 구멍과도 같다. 고형과 액체 사이에서 유동하는 물질이 흙이다. 흙의 이 수동성은 외부 환경을 자기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수시로 몸을 바꾸는 넓고 깊은 포용성과 맞닿아 있다. 가연성을 지니며 더없이 활성적인 물질인 흙은 미술에서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인 재료이다. 그것은 보는 이를 상상하게 하고 그 손길과 육신의 노동을 받아들이며 원하는 형상으로 마음껏 변할 순종의 마음으로 편하게 자리한다. 흙을 다루는 이들은 미지의 표정으로 질펀한 이 촉각적인 물질을 주무르고 쳐대고 굳혀서 원하는 상 하나를 만들어가는 체험, 신비스러운 유희에 빠진 이들이다. 그 체험은 흙으로부터 나와 그와는 전혀 다른 물질로 환생하는 기이한 경험이자 세계의 기원을 이룬 창조주의 능력에 근접한 매혹적인 행위, 놀이이다.

소녀상__조합토1220도산화소

<소녀상>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45×21×14cm 2015

흙과 불 그리고 형상
박미화의 작업은 흙(물질)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에게 흙은 모든 상념과 상상력을 가능하게 해주고 그로부터 발아한 상을 받아내는 한편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작가는 흙에 숨을 불어넣고 자신의 온기를 밀어넣어 저 흙과 자신의 마음과 정신(관념)이 맞닿은 접점에서 파생한 결과물을 조심스레 건져 올린다. 그것은 작가의 계획된 의도나 목적에 부합하기보다는 흙 자체의 본성과 작가 자신의 성향이 손상되지 않는 지점에서 밀려나온 것들이다. 흙으로부터 출발하는 박미화의 작업은 흙의 본성과 느낌, 그 상태를 가능한 유지하면서 그로부터 발아되는 이미지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흙과 함께 다루어지는 모래, 시멘트, 종이, 스티로폼, 나무 등의 물질 또한 동일하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여러 물질을 매만지며 그 물질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밀어넣는다. 작업이란 결국 작가의 몸과 마음이 또 다른 물질에 기생해 나가는 일이고, 그 재료들을 자신만의 체온, 마음의 결, 음성을 드러내는 일이자 자신의 몸을 갖고 물질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는 자신의 삶의 반경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박한 물질을 자신만의 감각으로 매만져 내놓는다. 희한하게도 그 모든 것은 흙의 맛을 물씬 풍기며 아득한 시간의 자취와 생명체에 대한 경의와 예의로 가득하다. 어떤 물질을 다루든 결국 흙의 색채, 질감, 맛이 나게 다룬다. 자신만의 감각, 색깔,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전시장 전체로 확산되는 작품 설치에서도 엿보인다. 역시 공간을 자신의 흐름으로 조율하고 있다. 이처럼 물질을 생명체처럼 다루며 그 위에 생명의 흔적, 기운을 절박하게 올려놓고자 하는 작가는 자신의 육체와 기억에 따라, 육체의 기억에 따라 그 물질을 인식한다. 작가는 의식하는 사람이자 물질로 사유하는 이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생명에 대한 예의”(작가노트)다. 삶에서 마주한 다양한 사연, 타인의 상황, 비극과 참상들 그리고 책(문장)과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것들이 작업의 단서로 풀려나온다.
박미화의 작업은 채색 테라코타가 주가 된다. 그 외에 판(나무판, 종이, 스티로폼 등)에 채색을 입히고 긁고 파내는 기법을 통한 회화작업이 함께 한다. 근작에는 나무와 풀, 야생화, 손과 발, 사람의 얼굴, 숫자와 문자들이 오래된 느낌을 주는 물질의 표면에 새겨져있다. 사라진 생명체들, 세월호의 비극이 참혹하게 새겨져 있다. 소멸된 생명체에 바치는 진혼의 성격이 강한 작업이 주를 이룬다. 물질들이 작가의 심정을 반영하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변신을 거듭한다. 한편 테라코타작업은 조합토로 성형된 형태에 화장토를 바르고 초벌한 후 다시 화장토를 발라 섭씨 1,200도에서 소성한 것이다. 뜨거운 불을 맞아 성형된 흙은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한다. 온기를 품은 흙이 사람과 동물, 식물의 형상이 되고 그 무엇인가를 연상시키는 오브제가 되었다. 색채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시간의 흐름을 비벼 넣기 위해, 상처를 올려놓기 위해 화장토를 바르고 소성하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했으며 착색한 나무나 스티로폼의 표면에는 수없이 칼로 긁고 파내는 과정을 올려놓았다. 모두 오랜 시간이 경과하는, 지루하고 참을성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작업을 자신의 의도나 목적에 종속시키기보다는 재료 자체의 발언을 존중하고 이념이나 논리, 개념을 앞세우기보다는 재료와 자신이 만나 불가피하게 이루는 것을 용인해내고자 한다. 작업들은 암시적이며 지워진 듯, 미완성인 듯 혹은 인공과 자연의 경계가 지워진 상황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미감으로 가득하다. 모든 작업은 흙 자체가 지닌(혹은 흙의 느낌으로 가득한 맛) 소박하고 무심하게 주무르고 구워낸 흔적을 지문처럼 지녔다. 흙과 흙 이외의 물질을 다룬 입체나 부조, 평면작업 모두가 회화적인 분위기와 오래된 흔적을 두텁게 지니고 있다. 표면의 균열과 탈색되거나 희박한 색채로 인한 색감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드리워준다. 무심한 제스처와 자연 그대로의 물성을 끌어내면서 수수께끼 같은 형상과 표정, 신비스러운 색채 역시 가득 안겨주고 있다. 흡사 오래된 흙벽에 난 알 수 없는 스크래치나 부분적으로 박락된 벽면의 느낌이 나기도 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도 풍겨 나온다.
특별한 목적이 배제된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한 상, 원형 같은 이미지를 반복해서 호출해내고 이를 자연스럽고 무심하게 빚고 불에 굽거나 표면 처리를 해서 가능한 한 오랜 시간, 낡고 퇴락하고 박락된 느낌으로 응고시킨 이미지, 물질들이다. 그것은 수백 년, 수천 년 땅속에 있다. 이제 갓 나와 핼쑥해진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다. 자신의 생애를 이루었던 시간의 결과 자기 몸이 기억해내는 모든 것을 호명해 이를 흙과 불로 이겨 만든 것들이다. 개별적인 형상들, 흙으로 구워낸 오브제들은 마치 특정 텍스트의 행간을 암시하는 낱말이나 부호들처럼 전시장 공간에 흩어져 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거나 화산재를 맞거나 깊은 지층 속에 박혀있던 것들이 출토되어 햇살 아래 파리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장면이고 특정한 성소에서 나름의 기능을 했던 이미지들이 이제는 사라져버린 옛 공간을 추억하며 졸고 있는 듯 하다. 작가는 “얼마나 많은 내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의 삶이 쌓여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날의 심상心象에 따라 흙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다. 그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흙 위에 손가락으로 형태를 그리고 나무칼로 흙을 잘라낸다. 수수께끼 가득한, 나도 알 수 없는 눈빛들,,.어설프고 모호한 상,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재료와 기법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들을 불러올 수 있다면…” 이라고 말한다.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43×19×11cm 2005

<서있는 어머니>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43×19×11cm 2005

박미화의 작업은 지워지고 희박해진, 문드러지고 떨어져나가고 뭉개진 얼굴과 몸체로 이루어졌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힘과 아득한 사연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그 존재의 생애를 다만 희뿌옇게 어른거리게 해준다. 그것들은 더 이상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하다. 소멸과 부재의 자리를 아련하게 추억하게 해준다. 따라서 그가 만든 이 희박해진 상, 불가해한 표면은 결정적인 볼거리를 망막에 안기는 상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심안으로 보아야 하는 상이고 희미하고 사라져버리기 직전의 추억의 이미지들이다. 무엇인가의 잔해이고 죽은 것들이고 망실된 것들이자 도저히 잡히지 않고 포착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것은 흙이 섭씨 1,200도의 불을 맞은 자취이자 녹슬고 희미해지는 절묘한 색채를 피처럼, 녹처럼 뒤집어쓴 것이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마지막 불꽃 같은 것들이기도 하다. 또한 시간의 입김 아래 허물어지는 벽면이자 사물의 피부들이다. 그 위에 얹힌 흔적, 상처는 주술적이며 신비스러운 영감으로 가득하다. 명시성과 구체성에서 한 발짝 물러난 얼굴이고 몸이다. 머지않아 사라질 얼굴이고 몸들이다. 겨우 끄집어낸 형상들이고 마지못해 드러난 잔해들이다. 기억과 추억 속에서, 상처 속에 나온 것들은 모두 슬프거나 외롭거나 아련하다. 암시적인 덩어리, 모호한 상을 통해 보는 이들은 상상력을 증폭하고 자신이 보고자 하는 부분을 겹쳐놓게 된다. 사실 미술에서 완성이란 개념은 무의미하다. 완성은 있을 수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흙 자체를 무심하게 다루고 불에 구워내 인간의 손길이 깃든 인공의 것인지 혹은 돌이나 나무 둥치 그대로인지 구분이 안가는 지극히 무심한 작업들이다. 작가는 인간과 동물의 구분도 없고, 자연과 인공의 경계도 지우고 전통과 현대의 갈등도 없고 죽음과 삶의 가늠, 혹은 물질과 마음의 분리도 더 이상 무의미한, 완성과 미완성을 넘어 자리하는 영속성, 신비한 종교성, 유한한 생애를 초월하는, 아니 포월하는 수수께끼 같은 표정(아우라) 하나를 불멸로 새겨놓고자 한다. 그것이 모든 생명이 짓는 유일한 표정이자 진실과도 같이 다가온다. ●

박 미 화 Park Mihwa
1957년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공예전공)과 미국 필라델피아 University City Art League, 미국 템플대학교 타일러 미술대학원에서 도자조각을 졸업했다. 1989년 미국 필라델피아 펜로즈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2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2015년 4월 1일부터 24일까지 인사동 갤러리3에서 13번째 개인전이 열린다.

(왼쪽)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54.5cm(지름) 2014 (오른쪽) 골판지 위에 목탄 60×50cm2014

<꽃을 바치다>(왼쪽)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54.5cm(지름) 2014 <선인장>(오른쪽) 골판지 위에 목탄 60×50cm2014

 

EXHIBITION TOPIC 그림/그림자_ 오늘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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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 사부 <댐의 그림자>(사진 맨 왼쪽) 캔버스에 유채 146×123cm 2008 ⓒSerban Savu, Courtesy David Nolan Gallery, New York (위)세르반 사부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캔버스에 유채 135×180cm 2011 ⓒSerban Savu, Courtesy David Nolan Gallery, New York Serban%20Savu_The%20Card%20Players.jpg

답이 없는 질문이 있다. “회화란 무엇인가?”
역시 그런 질문이 아닐까? 그것은 어쩌면 답을 찾는 과정에 있음을 증언하는 것일지 모른다.
3월 19일부터 6월 7일까지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리는 <그림/그림자_ 오늘의 회화전>도 그러한 부류의 질문에 다름 아니다. 국내외 작가 12명의 작품 35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에서 회화의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기획된 전시다. ‘회화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회화의 기원’으로 보는 역설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다수의 중심이 넘실대는 그림

이선영 미술비평

뭔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면서 자극적인 표현에 탐닉하는 이들은 ‘OO는 죽었다’는 식의 수사법을 자주 구사한다. 그렇게 선정적이고 요란하게 종언이 고해지는 대표적 항목으로 신, 인간, 역사, 모더니즘 등을 꼽을 수 있으며, 회화 역시 이 대열의 단골메뉴에 끼어든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끝은 나지 않았고, 종언의 역사만 수백 년 이어가게 생겼다. 하기야 ‘내 그림이 마지막 그림일 것이다’라는 정도의 야심도 없이 작업을 한다는 것도 싱거운 일이다. 마지막을 생각한다는 것은 주목 끌기에 불과한 사이비 청산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진지한 태도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명확한 답이 없는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식의 물음은 마치 ‘OO란 무엇인가’로 요약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질문—논리실증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답이 없는 우문—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질문은 계속 그리면서 또는 쓰면서 답을 찾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다. 만약에 결정적인 대답이 있다면 회화는 정말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
그림이 제의나 종교로부터 자율화되던 순간부터, 사진이나 영화 같은 다른 경쟁적인 시각매체가 부상한 이후부터 회화의 종언에 대한 담론이 많아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각 분야의 자율성이 확립되던 시기에, 즉 이미지의 오랜 역사 중 결정적 국면에 해당되는 순수예술의 탄생 시기에 회화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자의식적으로 묻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종언의 가능성 역시 떠올랐을 것이다. 회화의 종언은 근대에 탄생한 회화의 몸체에 속해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몰라도 회화가 죽은 것 같지는 않다. 이전시대와 달리 이미지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수많은 복제매체가 편재하며, 장르 구별이 와해된 지금도 가장 많은 미술인이 하고 있으며, 대중이 미술에 대해 가지는 대표 이미지 역시 그림이다. 공정한 눈으로 돌아보면, 재능 있는 수많은 화가가 매진하고 있는 이 오랜 역사의 예술이 가지는 보편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회화의 건재를 알리는 중간점검 식의 전시가 열리곤 한다.
플라토에서 열린 <그림/그림자전> 역시 왜 회화인가 자문하는 맥락이지만, 그림의 기원을 그림자로 보는 관점을 통해서 현대회화의 특징을 가늠해보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주류였던 창이나 거울로서의 비유를 넘어서, 비주류의 역사로 그림을 다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에른스트 크리스와 오토 쿠르츠가 쓴 《예술가의 전설》에 의하면, 실물이 드리운 그림자의 윤곽선을 베낀 것으로부터 시작된 그림자 그림은 실물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그림과 실물을 동일시하는 것은 주술적인 사고이며, 이러한 경향은 종교분야에서 유서가 깊다. 저자들에 따르면 주술적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림이 실물을 얼마나 닮았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고대에 이러한 신화를 처음 기록한 플리니우스의 《박물지》는 그림자 그림이 떠나갈 애인을 기념하기 위해, 부재중인 것을 현존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보조물 구실을 했다고 전한다.

빌헤름 사스날  캔버스에 유채 180×220cm 2009 ⓒWilhelm Sasnal, Courtesy Sadie Coles HQ, London

빌헤름 사스날 <무제(캐스퍼와 앙카)> 캔버스에 유채 180×220cm 2009
ⓒWilhelm Sasnal, Courtesy Sadie Coles HQ, London

백현진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매체 172×230cm 2014 Courtesy of the artist

백현진 <평상심>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매체 172×230cm 2014 Courtesy of the artist

비주류 역사로서의 그림
같은 기원을 공유하는 《그림자의 짧은 역사》(빅토르 스토이치타)도 거울과 대조되는 그림자의 속성을 강조한다. 타자에게 속해있으며 타자를 닮은 그림자 그림은 동일자가 아니라 타자, 존재가 아니라 부재를 알린다. 플리니우스가 묘사한 재현은 그림자의 이미지에 대한 재현이었기 때문에, 최초의 회화는 복사물에 대한 복사물 이상은 아니었다. 그림자로서의 그림은 원본/복제에 근거한 이원론적 사유가 아니라, 차이와 반복의 유희에 의한 허상simulacres에 속한다. 모상이 아닌 허상으로서의 속성이, 그림자/그림의 신화와 현대회화가 연결되는 부분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허상은 무한히 반복되는 사물들의 순환을 보여주며, 이 반복은 우연한 것, 다양한 것, 생성을 긍정한다고 말한다. 두뇌기관의 한 연장으로서의 시각이 체계적인 광학적 사유를 발전시키며 이상적인 원형idea의 재현으로 귀결된다면, 그림자 그림은 우연하고 다양한 것이 생성되는 바탕의 자유를 선포한다. 그래서 그림자 그림은 촉각적이다. 이러한 촉각적 시선에 눈이 있다면 뇌의 말단이 아니라 손의 끝에 있을 것이다.
떠나가는 연인을 기념하기 위해 탄생한 그림자 그림은 이성적인 시선의 냉정한 거리감이 아니라, 전신의 피부에 와 닿는 끈적끈적한 것이며 몸과 무의식에 호소한다. 한국을 포함해 영국, 미국, 중국, 루마니아, 폴란드 등 다양한 국적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물감의 물성과 붓질이 직접 드러나는 회화적painterly 경향을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조세핀 할보슨의 화면은 공사장 같은 데서 흔히 보이는 널빤지 같은 거친 모양새로, 사물과 물감의 물성을 하나로 수렴한다. 케이티 모란의 작은 작품들은 예측 불가능한 기후적 현상과 폭풍같이 몰아치는 붓질을 하나로 만든다.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모호한 것들을 통해 재현의 투명성에서 그리기의 불투명성으로 이동한다. 어둡고 칙칙하며 두꺼운 화면을 보여주는 질리언 카네기는 무대의 커튼으로 시작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오마주하면서 재현주의를 끝장내려는 의도에 동참한다. 이곳과 저곳 사이를 구별하는 무대적 환영의 거리감은 질척거리는 회화의 대지로 재탄생했다.
물웅덩이에 비친 그림자를 보여주는 빌헬름 사스날의 작품에서는 반영된 세계가 실제보다 더 실감나는 역전이 일어난다. 회화는 사진을 포함한 다른 매체의 경험을 종합할 수 있으며, 그것이 현대회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일순간 지나가는 일상의 한 장면을 포착한 박진아와 셰르반 사부, 보도사진에서 소재를 취한 리송송李松松의 작품에는 사진적 시각이 있다. 사진과 그림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그림자의 지표index적 특성을 지적한다. 플리니우스는 그림자를 사람의 흔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사진 역시 도상적 유사물이자 지표로 여겨진다. 다수의 스냅샷을 한 화면에 결합시키는 박진아, 흐릿한 역사의 기억을 불러내는 셰르반 사부와 리송송의 작품에는 잠재적인 혹은 명시적인 다수의 틈이 있다. 직선적 전망이 아니라 미로처럼 얽혀있는 이곳에서 새로움은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 위에 있는 인과론적인 것이 아니라, 균열과 간극으로부터 예기치 않게 생성된다. 빛을 모범으로 하는 계몽적 의식의 세계와 달리, 그림자의 세계는 무의식적이다.
이 의식 하부의 불연속적인 세계에 출몰하는 인물들은 대개 낯선 타자들이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백현진의 그림들은 자유분방한 회화적 터치로 조증과 우울증을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무의식적 흐름을 보여준다. 데이나 슈츠의 <싱어 송 라이터>는 입체파적으로 조각난 파편으로 활달한 인물을 구축한다. 브라이언 캘빈의 팝적인 초상화는 현실의 누구와도 닮지 않았으며 그리기를 위한 방편일 뿐이다.
소수자 또한 타자의 형상을 취한다. 헤르난 바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하얀 흑인, 그리고 서양미술사의 전형적인 초상화 구도에 흑인들을 집어넣은 리넷 이아돔-보아케의 작품엔 작가의 자의식이 투사된다. 그들의 작품은 주류 사회에 의해서 그림자로 취급받는 성적, 인종적 소수자나 아프리카계 영국 여성 작가의 자의식을 반영한다. 정글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촉각적 우주 속 인물(동시에 ‘괴물’)들은 하나의 태양만이 빛나는 지배적 질서에 포착되지 않으려 한다.●

박진아 (사진 왼쪽) 캔버스에 유채 220×182cm 2015   캔버스에 유채 135×183cm 2010  Courtesy of the artist

박진아 <여름 촬영>(사진 왼쪽) 캔버스에 유채 220×182cm 2015
<수평재기> 캔버스에 유채 135×183cm 2010 Courtesy of the artist

헤르난 바스  린넨에 아크릴 182.9×152.4cm 2014  Courtesy of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and Hong Kong

헤르난 바스 <달빛 정원의 알비노> 린넨에 아크릴 182.9×152.4cm 2014
Courtesy of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and Hong Kong

 

 

EXHIBITION FOCUS BILL VIOLA

시간을 물질적 경험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독보적인 영상세계를 구축한 비디오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대규모 개인전(3.5~5.3)이 국제갤러리에서 열린다. 세간의 주목과 동시에 논쟁적인 이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것은 빌 비올라가 지속적으로 보여준 영적세계, 종교적인 상징성과 비디오 미학의 관계 설정에 관한 것이다. 빌 비올라의 작업세계를 조명한 필자 두 명의 글을 통해 이번 전시를 둘러싼 비평적 관점을 주목해본다.

비디오가 사라진 상징과 은유에 대한 경계

김지훈 중앙대 영화·미디어연구 교수
국제갤러리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갖는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2000년대 이후 작업들은 매 번 상반된 반응을 낳았다. 시간을 비디오의 미적 질료로 삼아 삶과 죽음, 영혼과 자연에 대한 초월적 스펙터클을 주조하고 변주하는 그의 작품들은 국내외의 일반 관람객과 주류 언론의 취향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이에 호응하듯 이 전시를 소개하는 주류 언론의 기사들은 “고통을 견디는 인간의 모습 선보여”(《조선일보》 허윤희), “뭉클한 성화를 보는 느낌”(《한겨레》 노형석), “위로가 필요한 세상에 어울리는 전시”(《중앙일보》 문소영) 같은 문구들을 부각시켰다(물론 이 문구들 중 어떤 것들은 비올라가 기자회견에서 한 말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반면 매체의 물질성과 기법에 대한 탐구와 예술에서의 성찰적 시선을 중요시하는 비평가와 저널들은 비올라의 최근 작품들의 형식과 미적 체험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옥토버》의 한 대담에서 할 포스터Hal Foster는 비올라의 작품이 유도하는 경험을 “강렬한 미디어 몰입immersion을 통한 영적 직접성immediacy의 경험이자 마법적 신비주의bewitched mysticism”라고 비판한 바 있다. 실제로 비올라의 2000년대 이후 작업인 <수난Passions>, <사랑과 죽음: 트리스탄 프로젝트LOVE/DEATH: The Tristan Project>, <해변 없는 바다Ocean without a Shore> 연작을 망라하는 이 작업들은 포스터의 비판을 어느 정도 확증해주는 듯하다. 이 연작들에서 비올라는 필름과 고화질high-definition 비디오에 힘입어 회화적 도상성과 영화적 생생함을 특징으로 하는 환영적이고 몰입적인 이미지들을 창조했다. 그 이미지들은 인간의 감정과 고통, 영적 모험과 같은 친숙한 종교적 모티프를 구현하는 데 충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이번 세 번째 개인전에 소개된 작품들은 어떤가.
이번에 소개된 7편의 작품 대부분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제작된 것이지만 지난 2008년 같은 갤러리에서 개최된 두 번째 개인전 작품들(즉 <트리스탄 프로젝트>, <해변 없는 바다> 연작에 속한 작품들)의 형식과 테마를 반복하고 변주한다. 어머니와 아들이 사막을 걷는 모습을 담은 <조상들Ancestors> (2012)과 황야에서 각자 다른 길을 가던 두 여자의 만남을 보여주는 <조우The Encounter>(2012)를 비롯한 3편의 무성 작품은 ‘트리스탄 프로젝트’의 한 작품인 <밤으로의 여로Passage into Night>(2006)와 동일한 공식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오랜 시간 동안 아지랑이 피어오른 풍경을 가로질러 조금씩 화면을 향해 다가온다.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의 이행, 탄생과 죽음, 이승과 저승, 무와 유, 현실과 기억의 문턱을 체험하게끔 하는 이러한 도식은 비올라의 대표적 모티프인 물과 불을 관통하는 작품들에서 반복된다. 검은색을 비롯한 여러 색깔의 물을 뒤집어쓰는 남자의 모습을 느린 역재생reverse play으로 장대하게 보여주는 <도치된 탄생>(2014), 밧줄에 묶여 거꾸로 매달린 남자가 물벼락을 맞으며 정지하고 승천하는 모습을 담아낸 <물의 순교자>(2014)는 <해변 없는 바다> 연작을 이루었던 “물의 벽을 통과하면서 가시화되고 사라지는 인간 존재들”과 닮아 있다.
그렇다면 이 작업들, 나아가 비올라의 2000년대 이후 작업들은 포스터가 말하는 “마법적 신비주의”의 결과인가? 포스터에 따르면 비올라의 작품들은 오늘날 미디어문화의 부정적 징후들인 가상화와 비물질화에 호응하는 것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공간과 장치 자체에 대한 의미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퇴행적이다. 나는 이 비판이 공간과 장치의 반영적 탐구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점에서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관람객들은 비올라의 작품을 중세 성화聖畵와 같은 아우라를 느끼며 관조한다. 전통적인 회화성에 호응하는 듯한 이러한 관람 태도에는 작품의 공간과 장치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그렇지만 나는 비올라의 작업이 비디오 이미지를 ‘비물질화’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시간을 명백한 물질로 경험한다”는 비올라의 말은 그의 1970년대 작업부터 견지된 원칙이었다. 현실은 물론 필름으로도 불가능한 시간성인 시간의 미묘한 감속과 역행은 비올라의 작품에 대한 미적 경험의 핵심이다. 이 경험은 비디오의 기술적 특정성들(전자적 신호의 흐름으로 좌우되는 비디오 이미지의 탄력성, 필름보다 자유로운 시간의 감속과 가속, 고화질 비디오로 표현할 수 있는 회화적이고 영화적인 시각성)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는 비디오의 물질성을 직접적이거나 왜곡된 모습으로 노출하는 방향을 취할 수도 있고, 물질성 그 자체와는 다른 상징과 은유들의 표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것들은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의 역사를 규정지은 동시에 공존하고 때로 서로 대립하던 두 가지 경향으로 여기에 어떤 확정적 위계를 둘 수는 없다. 비올라는 1970년대부터 명백히 후자의 길을 탐색해왔다. 그의 2000년대 이후 작품을 특징짓는 정지에서 미묘한 운동으로의 이행, 아지랑이와 물결로 상징되는 흐름에 대한 감각, 점에서 인간으로 변형되는 형상의 가변성 등은 이미지의 시간성과 표면을 미묘하게 조작할 수 있는 디지털 비디오의 기술적, 미학적 특징들을 물질화한 결과다. 이러한 기술적이고 미적인 특징들이 인간의 감정과 의식, 지각에 대한 빌 비올라의 주제적 키워드들과 연결될 때 감상의 회로가 완성된다.
중요한 것은 비올라의 작품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열어주는 이러한 회로를 마련하지 못한 채 영적 세계의 탐구, 종교적 상징의 형상화 또는 심지어 ‘힐링’의 체험으로 규정짓는 비평적 시선들에 대한 경계다. 이러한 시선들은 비올라의 작품을 형상화하고 그에 대한 체험을 낳는 데 필수적인 비디오의 물질적, 기법적 국면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결여하고 있다. 이 시선들을 통해 걸러진 비올라의 작품세계는 비디오가 사라진 상징과 은유들의 세계다. 이 상징과 은유들을 가능케 하는 가시성과 흐름, 지속을 고려할 때만이 그의 작품에 대한 찬반양론이 의미 있을 것이다.●

 비디오/사운드 설치 18분6초 2005/2009

<밤의 기도> 비디오/사운드 설치 18분6초 2005/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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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비올라_06_Water Martyr 2

<물의 순교자> 비디오/사운드 설치 107.6×62.1×6.8cm 7분10초 2014 자료 제공: 국제갤러리

비디오 작가는 무엇을 말하는가?

김백균 중앙대 한국화학과 교수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국내 세 번째 전시가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대규모 미술관 전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술 애호가와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올해 기대되는 전시 중의 하나로 그의 전시를 손꼽는 이가 많았다. 현대미술의 변방인 서울에서 빌 비올라 정도의 유명세를 지닌 작가의 전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백남준의 조수로 일한 적 있다는 인연을 들어 백남준과 그를 ‘스승과 제자’라는 한국식 아름다운 미담으로 치장해 언론홍보에 활용한 데 힘입은 바도 컸다.
그러나 막상 전시를 보면서 “인간 내면을 어루만지는 영상시인”이라는 빌 비올라에 대한 세간의 호의적 평가와 백남준과 그의 관계를 미화해 인구에 회자되는 ‘뻔한’ 인연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작품안에서 백남준에게 사사 혹은 영향을 받았을 어떠한 사유나 표현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문제의식에 대한 예술적 탐색이나 성찰도 발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와 백남준의 연결고리는 작품 안에 흐르는 의식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백남준의 작업을 도운 조수라는 느슨한 외적 유대에만 있고, 단순한 직업적 역할을 스승과 제자 관계로 확대 해석한 것은 백남준 신화에 사로잡힌 한국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감정적 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일었다. 국제갤러리의 빌 비올라 전시와 짧은 기간 겹쳐 열린 학고재갤러리의 백남준 전시를 참조해 보면서 이러한 생각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백남준은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어떻게 사유하고 무엇을 표현하는지 형식을 통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낼 줄 아는 작가였다. 학고재갤러리의 백남준 전시는 그의 예술세계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핵심 작품들이 출품된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그가 TV를 통해서 사유한 탐색의 결과로써 세계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 하나하나는 TV의 속성을 가지고 ‘논’ 결과, 감각을 통해 세계와 삶에 대한 인식의 확장을 가져온 것들이다. 백남준은 우리가 TV의 속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원리를 상징과 비유를 통해, 세계란 인식의 틀 안에서 의식화된 것들이고, 인식이란 가변적인 허상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것을 우리 몸으로 느낄 수 있게끔 시각적 장치들을 통해 그려냈다.
<흰 잔재에 대한 발판 스위치 실험>을 예로 들어보자. TV란 전원이 들어갈 때만 화상을 보여주며,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TV라는 제한된 틀 안에서만 화면이 보인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 발판을 발로 누를 때만 화면에 화상이 나타나는 <흰 잔재에 대한 발판 스위치 실험>은 이와 같은 TV의 속성을 하나의 메타포로 보여준다. 우리의 인식이란 외부의 세계가 내부에 남긴 잔상이다. 그런데 그 잔상은 우리의 감각과 사유의 틀 속에서만 인식된다. 우리의 인식이 이와 같은 TV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우리는 백남준이 보여주는 감각과 인식 확장에서 오는 쾌감을 맛볼 수 있다. 백남준은 이처럼 자신이 감각을 통해 느끼고 사유한 그 과정을 시각적 장치를 통해 관객도 느껴볼 수 있도록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다.
이에 반해 빌 비올라는 자신이 느낀 세계의 ‘당위’를 말한다. K3관에 설치된 <도치된 탄생Inverted Birth>는 탄생의 반대 지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말하자면 죽음이다. 죽음을 도치된 탄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면 빌 비올라는 죽음을 생명의 소멸이 아닌 새로운 탄생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첫 화면에 검은 오물을 뒤집어쓴 남자가 어둠 속에 고요히 서 있고 물과 함께 그 검은 오물도 위로 솟구쳐 올라간다. 검은 오물 다음에는 빨간색의 액체가, 그 다음에는 우윳빛의 하얀 액체가, 마지막으로 모래 같은 고체가 올라가고 화면에 남자만 꼿꼿이 선 채 8분22초의 영상은 끝을 맺는다.
이것을 죽음의 과정을 묘사한 알레고리Allegory로 보면, 죽음 후에 시간의 경과에 따라 육신의 외피를 덮고 있던 검은 오물이 사라지고, 그 다음 빨간 피가 사라지고, 그 다음 우윳빛 살이 사라지고, 그 다음 모래 같은 고체의 뼈가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고 순수한 영혼만 남는 과정으로 유추할 수 있다. 빌 비올라에게 죽음은 육신이 사라지고 순수한 영혼만 남는 탄생 같은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폭포 같은 물줄기 속에서도 강건히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은 이미 주어진 주변의 환경에서 오는 어찌할 수 없는 삶의 고통에 대한 겸허한 수용과 각성을 그린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서 항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의 답일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거나, 신념이라고 하거나 이로부터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가 생겨났다 할지라도 굳이 그의 생각에 대해 시비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자유다. 그러나 그것이 예술이라는 형식으로 읽히고 공공의 장소에서 보인다면 그것을 가치로 평가할 자유가 우리에게도 있다. 우리가 왜 그것을 봐야 하는지와 같은 의미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신념이라면 신념 그 자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신념을 형성하게 된 또 다른 배경을 이해해야 그 신념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고, 그 신념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될 때만이 그 신념을 지지하거나 환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빌 비올라의 작품에서 내가 볼 수 없는 것은 빌 비올라가 왜 어떻게 그런 생각과 느낌을 지니게 되었는지 하는 과정이다. 화면에 감각과 정신을 집중하고 보고 있다하더라도 어느 순간 어떻게 나의 감정을 작가의 감정에 이입해야 하는지 그 감정 이입의 단서를 화면에서 찾을 수 없었으므로 감정이입은 불가능했다. 영상 속의 남자가 어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할지라도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단서가 화면 안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영상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현실의 시간보다 느리게 가는 듯한 환상 같은 느낌,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주는 시원함 같은 감각적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감각적 쾌감이란 예술작품이 주는 감각을 통해 인식의 확장에서 오는 쾌감이 아니라, 우리가 시원한 폭포 물줄기를 보면서 느끼는 쾌감처럼, 더운 여름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주는 청량감의 시각화와 같은 것이다.
빌 비올라의 신념과 의미
이처럼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일방적으로 발산해버리고 마는 방식은 그의 모든 작품에 동일하게 작동한다. K2관의 <내면의 통로Inner Passage>에서는 사막을 배경으로 나지막한 산이 있고, 산 앞에 한 그루 나무가 있다. 이윽고 저 멀리서 카메라를 향한 쪽으로 한 남자가 걸어온다. 그 남자가 화면의 끝, 즉 카메라가 찍고 있는 끝에 다다랐을 때 화면은 격하게 수없이 변화하는 여러 이미지를 보여주고, 희미한 불빛이 길을 비추며 다시 조용한 사막 화면으로 바뀐다. 남자는 뒤돌아서 출발했던 곳을 향해 다시 걸어간다. 그 출발했던 곳이 처음과 다른 점은 한 그루의 나무가 여러 그루의 나무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17분12초의 긴 영상은 그 자체로도 지루하다. 더욱 허무한 것은 그것을 다 보고 난 다음 찾아오는 빌 비올라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에 대한 환기이다.
영상에서 한 그루의 나무로부터 걸어 나오는 남자를 유기적 생명을 지닌 하나의 존재로 비유해 보면 우리는 하나의 일자로부터 생명을 부여 받아 이 세상에 나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그는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고 감정을 맛보고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올 때는 하나에서 왔지만, 이 세계에서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떻게 살았느냐는 인과율에 따라 돌아가는 곳은 여러 곳이다.
<조우The Encounter> 역시 단순히 화면상의 두 여인이 평행하게 걸어오고 한 순간 만났다가 무엇인가를 전해주고 다시 뒤돌아서 다른 길로 평행하게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혼자서 인생을 살아간다. 삶 속에서 조우는 우연한 것이다. 그리고 단 한 번의 그 조우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받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아니라 왜 그런지 그러한 이유가 형식을 통해 화면에서 보여야 관객이 그 느낌과 생각에 공감하고 찬사를 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빌 비올라의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실망을 안겨준 것은 <물의 순교자Water Martyr>이다. 발목이 묶인 순교자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물을 견디며 점점 팔을 벌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식을 드러내고, 불굴의 의지와 인내로 죽음에서 빛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펼쳐 보인다. 자신의 생각을 선언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까지는 여타의 작품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작품의 출품으로 인해 빌 비올라의 작가 의식과 삶의 태도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에 맞닥뜨린다.
이 작품은 본래 런던 세인트 폴 성당의 의뢰를 받아 제작되었다. 중세 사회도 아닌 오늘날, 성당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작품은 성당에 모셔놓고 기도를 하면 될 뿐이다. 과녁 없이 맞히는 것이 예술이라는 장-뤼 낭시의 언급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제작한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전시에 선보인다는 것은 한국 관객이나 미래의 소장가를 얕보았거나, 아니면 원래부터 예술이 무목적적인 것이라는 자각이 없는 작가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의 말대로 삶은 고통이거나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 할지라도, 그 말 자체로는 그것 이외에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하며, 그것의 이유를 작품 안에서 형식으로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빌 비올라는 비디오라는 매체를 사용한다는 공통점 이외에 백남준으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작품 스스로가 하나의 유기적 언어가 되는 백남준의 작품과, 작품 이외의 배경을 다시 말해야 하는 빌 비올라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왜 영상이라는 매체로 표현해야 하는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포괄한다.
영상을 미디어로 이용하는 예술행위는 1920년대 말 살바도르 달리가 <안달루시아의 개>(1928)와 <황금시대>(1931)와 같은 전위영화를 선보인 적이 있지만, 본격적인 비디오 영상 예술시대는 1960년대 소니 포타팩portapak의 발명과 더불어 등장했다. 1965년 백남준이 당시 뉴욕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해 ‘카페 오 고고Café au Go Go’에서 그 영상을 방영한 것이 공식적인 비디오아트의 시작이다. 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 소니 포타팩의 발명은 당시 회화에 식상함을 느끼던 예술가들의 열광적인 지지에 힘입어 ‘뉴미디어아트’를 출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회화의 한계를 자각하고, 회화의 죽음을 예견했다. 그들이 포타팩에 주목한 것은 포타팩이 단순히 영상을 화면에 구현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비디오는 영화의 번거로운 필름 촬영과 인화, 상영의 과정을 편리하게 해준 것만이 아니라 비디오가 자신이 의식하지 않은 바를 관찰하고 성찰하는 유용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비디오는 자신의 행동이지만 자각되지 않은 행동, 즉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카메라라는 의식 없는 타자의 시선으로 관찰하는 도구로 쓰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비토 아콘치, 리처드 세라, 브루스 나우먼 등과 같은 초기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작업에는 카메라와 모니터 사이에서 반복되는 피드백을 통한 반사적이고 자기반영적인, 마조히즘과 지루함이 투영돼 있다.
여기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세계는 ‘세계와 나’, 그리고 인식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끈질긴 근대적 예술의 과제가 지닌 문제의식의 연장선 위에 있다. 국제갤러리의 빌 비올라 전시에서 ‘나’에 대한 천착이라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예술의 과제를 근대 이전으로 되돌린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즉 비디오라는 매체는 새로우나 말하는 방식은 구태의연하다는 것이다. 그가 작품을 통해 평소의 소신대로 ‘죽은 이’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를 말하고, 죽은 이가 현실 세계로 발을 내디딘 후 다시 돌아가는 순간의 망설임, 떨림 혹은 슬픔을 표현한 것이라면, 또 불교의 윤회를 믿는다면 그 세계를 ‘선언’할 것이 아니라, 비유나 상징을 통해서라도 ‘묘사’하여 관객도 그 세계를 느끼거나 상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물의 순교자> 비디오/사운드 설치 107.6×62.1×6.8cm
7분10초 2014
자료 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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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 THEME 산수 & 여성을 위한 진혼4 정종미 개인전

여성, 전통, 자연 등 주류의 삶보다는 소외된 영역에 가치를 부여해온 작가 정종미의 20번째 개인전(2.27~4.12)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열린다. 미술평론가 조은정과 대담을 통해 작가가 지난 30여 년간 펼쳐온 작업세계를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행보를 함께 고민해 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마이너의 삶을 위무하다

조은정 (이하 ‘조’) 이번 전시는 초기 작업부터 최근 작업을 아우르는 회고전이네요.
정종미 (이하 ‘정’) 수련기를 포함해 그림을 그린 지 40년 가까이 됩니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어느 방향으로 항해할 것인지 제 안에서 단서를 찾는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전시입니다.
선생님의 작품은 예전부터 꾸준히 봐왔는데요. 처음에는 평면작업을 주로 하시다가 최근 공간에 작품을 구현하는 데 관심을 두시는 것 같아요. 많은 작가가 평면이 가상현실이라면 그것이 실제공간에서 구체적으로 감각되기를 원해서 공간에 대한 탐구를 많이 하는데 선생님도 그런 경로인지, 전통이란 화두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간을 탐구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있죠. 제 안에 숨은 세계를 찾아가는 길과 한국 채색화의 뿌리를 찾아가는 길이 별개의 길이 아니고 같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동체 안의 나와 개인적인 내가 묘하게 밀착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제외한 상태에서 다른 것이 의미를 갖는 일은 성립되지 않는 것 같아요.
한국화를 색으로 구분한다면 수묵화와 채색화 두 갈래가 있는데요. 선생님의 초기 작업이 색채는 있지만 사대부의 세계관을 반영한 산수의 이상향을 그려낸 것이라면, 이후로 채색화의 뿌리를 탐구하는 작업을 하셨는데 그 두 갈래의 동질성과 배반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여성을 말하는 이유는 남성이 있기 때문이죠. 극과 극, 즉 상극은 상생과 묘하게 얽혀있어서 우리가 상극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상생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학창시절 저를 가르친 선생님 대부분이 광복 이후 수묵추상화 운동에 참여하신 분들이라 수묵화의 비중이 컸어요. 흔히 수묵을 남성 미학이라고 하는데요. 수묵은 조선시대 사회구조 속에서 당시 사대부의 독특한 신분에 의해 만들어졌고 기운을 한순간에 터뜨리는 일품화를 최고로 쳤지요. 동시대에 여성의 미학도 존재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보자기인데요. 강한 힘은 없지만 색채와 구성에 여성만이 해낼 수 있는 정서가 담겨있죠. 하지만 결국 색채 안에 먹의 세계가 포함되는 것이지 수묵과 채색이 대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구조적으로 사람들이 구분을 만들었을 뿐이지 근원적인 것은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수묵운동은 채색화를 왜색倭色 내지 일제 잔재로 간주해 이를 극복하고 타파할 대상으로 여겼는데 그분들 아래에서 교육을 받으신 선생님은 수묵과 채색을 조화로 생각하셨어요.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남성적 이상세계와 색채를 통해 여성적인 감각을 하나로 통합하셨어요. 여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이 <어부사시사>인데요. 분명히 사대부적 세계관과 이상적인 공간 경영에 관한 내용인데 이 부분을 색채로 표현한 점이 굉장한 흥미를 끌었어요. 방금 상생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이해가 잘되네요.
제가 보기에 여성은 실제로 약자는 아니지만 사회적인 구조가 여성을 약자, 소수자로 만들었습니다. 채색화 역시 당시 마이너 영역이었어요. 교수님들이 수묵을 하라고 하는 이유가 마이너를 선택하지 말고 주류에 편승하고 대세에 따르라는 것이었지요. 유일하게 채색을 가르쳐주신 이종상 선생님이 10년간 강의하면서 채색화를 완성한 학생은 저밖에 없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정도로 당시 학생들은 채색화를 일절 그리지 않았어요. 저는 의문이 들었죠. 고구려 벽화, 고려 불화도 채색화고 조선시대 주요 그림에만 수묵이 득세했지 초상화, 영정, 민화가 채색화인데 왜 그걸 못하게 하느냐 그런 생각이 들었죠. 채색화의 문제가 여성의 문제와 굉장히 유사하게 느껴진거예요.
핍박받는 대상, 타자화된 대상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미술계 내부의 권력관계를 삶의 권력관계와 유사하게 이해하고 그 안에서 내가 약자인 여성인데 주류에 편승하기 위해 나와는 정서와 맞지 않는 수묵을 굳이 택해야 하느냐 그런 고민을 하신거군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여성이지만 젊은 나이에 여성의 문제를 인식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여성적 삶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대학원 졸업 이후 채색화 작업을 하면서 여성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뚜렷하게 여성의 문제를 다루어야지 그렇게 결심한 건 아닌데 어릴 때부터 주변 여성들의 삶을 통해서 저에게 내재된 그 무엇이 있었나봅니다. 나이가 들면서 확연히 풀어낼 수 있었을 뿐이죠. 저희 어머니는 근대기 여성의 삶이 대개 그렇듯 굉장히 인내하고 희생적인 삶을 사셨죠. 그리고 저에게 극적인 요소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대신해 저를 키워준 할머니의 삶입니다. 어릴 때는 따뜻한 품 정도로 생각했는데, 결혼 후 제가 마이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할머니를 자꾸 떠올리게 되었어요.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계시다가 광복 후 한국에 돌아와 병든 채 길에 쓰러져 계신 걸 아버지가 모시고 와서 치료를 해드렸고 건강을 회복하신 후에 오갈 데가 없으셔서 저희 집에서 일을 도와주시다가 결국 운명하셨어요. 철이 들어 생각해보니, 지금 살아계시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많은데 어린 나이에 보내드려 안타까움이 커요. 그분을 통해서 제가 느낀 건 여성의 위대한 모성입니다. 상상하기 힘든 고통의 삶을 사셨는데 어떻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저희를 그토록 따뜻하게 돌봐주실 수 있었는지 여성이란 정말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죠.
내 새끼만 아끼는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 새끼가 아니어도 돌보는 포용력과 생명을 살리는 여성의 사랑을 경험을 통해 파악하신 거군요.
네. 여성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계기가 되었지요.
조 초창기 1990년대 작품을 보면 여성의 모습이 명확하지 않고 그저 이미지화되어 있는데 최근에 외면보다 구체적인 모습, 허왕후, 논개, 허난설헌, 명성왕후 등 구체적으로 명명하고 역사적으로 소환할 수 있는 여성,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형태로 그려집니다.
한국의 여성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처음에는 길에서 만난 애기 업은 촌부와 같은 익명의 여성을 그렸습니다. 당시에는 여성의 고통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습니다. 한국이 식민지, 전쟁을 거쳐 여기까지 오는데 그 배경에는 여성의 힘이 크게 작용했는데도 여성에 대해 가치부여를 안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고발 또는 폭로하고 싶었어요. 이후 익명의 여성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구체적인 여성을 담아보고 싶어서 작업이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작가가 인문적인 부분을 담아내는게 굉장히 버겁더라고요. 역사 속의 여성을 그리면 그 여성이 존재하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도 공부해야 하고 당시 의복도 고증해야 합니다. 지난한 작업이었죠.
사실 현대를 살면서 근대를 쉽게 잊게 되는데 선생님은 식민지 여성으로서 고통스러운 삶을 사셨던 할머니, 전통적인 가부장적 제도에 희생하신 어머니를 통해, 선생님 스스로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인 여성이 느끼는 억압적 상황을 경험하셨는데요. 이런 구체적인 경험들이 하나의 작품 안에 전통, 근대, 현대를 모두 담아낼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흔히 페미니즘, 여성주의 문제는 관념화되기 쉽잖아요.
예전에 어떤 평론가가 제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상은 서구 페미니즘의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여성이 아니라 포용력있고 고전적인 면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에게 페미니스트냐고 묻는데 페미니즘이다 아니다를 떠나 이것이 내 삶이고 한국 여성의 삶, 이것이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선생님의 여성상은 내 삶의 가치를 존중해달라는 웅변적인 요소보다는 선생님의 경험이라는 현재적 입장에서 그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향이 더 강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남성을 극복하는 여성이 아니라 생명을 포용하는 자연과 같아요. 이런 측면에서 페미니즘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여성을 인정하고 가치부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거죠. 결국 남성과 여성의 이야기도 인간의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조금 전에 언급된 <어부사시사>로 돌아가자면 윤선도가 쓴 <어부사시사>는 후렴구를 제외하고 본시는 한글로 쓰여졌습니다. 당시 한시로 쓰여지지 않으면 제대로 된 시 대접을 못 받았는데 한글로 한시 못지않게 깊이 있는 시 세계를 펼쳤기 때문에 국문학적으로 굉장한 의의가 있는 작품이죠. 지금은 한글이 한자와 비교할 수 없지만 영어에 비하면 마이너죠. 그런 식의 순환체계를 갖는 게 인간의 삶인데, 저는 어디까지나 마이너의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사회적인 조건으로 저를 마이너로 안 보지만 어릴 때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자라왔지요. 그밖에 여러 상황을 봤을 때 제가 마이너가 아니라면 이런 작품을 할 이유가 없어요. 제 그림은 아픔이 있는 여성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고 여성의 고통과 인내를 통해서 인간의 삶과 역사를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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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은 나의 힘
선생님은 일찍부터 전통 안료를 연구하셨고 전통적인 제작방식을 되살리는 데 일조하신 현장성 있는 작가입니다. 그런데 초기 작업과는 다르게 언제부터인가 선생님의 작품을 설명할 때 전통이라는 용어가 자주 거론됩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설명하는 전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전통에 대해 지금 사회적 분위기는 고리타분한 것, 크게 의미부여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미국에 잠시 체류한 적이 있는데 이때 일본 문화를 접하면서 전통에 관한 관점이 열린 것 같아요. 일본은 전통을 전략적으로 잘 보존 유지함으로써 얻은 것이 엄청납니다. 이에 비해 미국은 전통이 없는 국가이다보니 이에 대한 콤플렉스가 대단한 편이죠.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의 문화에 자부하지 못하고 미국 문화를 부러워하고 추종하기만 했어요.
작업에서 전통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예를 들어 오방색 활용 같은 건데요. 미술은 내용과 형식인데, 오방색이 한국의 정신을 담아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통을 표상함으로써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작가에게 그것 역시 고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작업이 한국의 여성을 위무하고 여성성에 바치는 헌사인 만큼 우리 조상들의 어법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재료 기법을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전통의 색채 개념을 접하게 되었고 전통의 색이 왜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지 고민하게 되었죠. 일반적으로 일곱 가지 무지개색이란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건 서양식 개념이고 오색무지개가 전통적인 한국적 개념의 색채관이죠.
지금의 작가들 성향을 보면 현대라는 것에 지나치게 함몰돼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라도 그렇지 않아야 이 사회가 균형을 잡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첨단의 재료를 가지고 얼마든지 영혼에 호소하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만, 제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고요. 저의 정체성은 전통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일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다양성을 위해 전통을 선택하신 거군요.
그것은 2차적인 이유이고, 근본적인 이유를 말하자면 여성이란 주제를 말하는 데 여성성이 잘 드러나는 전통적인 자연 재료를 사용하는게 잘 맞았어요. 그리고 전통적인 재료를 쓰면서 저 스스로 굉장히 큰 힘을 얻었어요. 일종의 힐링이죠. 자연의 색을 얻으려면 굉장히 번거롭고 육체적 노동이 뒤따르지만 어느 순간 제 주위를 돌아보면 건강이 안 좋아지고 피폐해진 사람이 많은데 저는 이상하게 건강하더라고요.
여성성과 전통, 생명에 대한 관심이 깊이 연결되어 있군요. 선생님께서는 전통적인 색채를 연구하고 복원하는 데 일종의 모범 같은 것이 있나요.
숭례문 복구 때도 드러났지만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 안에 든다고 큰소리치지만 국보 1호도 제대로 수리하지 못했습니다. 경제만 선진국이지 문화적으로 굉장한 후진국인 셈이죠. 제가 전통재료를 연구하며 나름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보니 문화재를 복구하거나 복원할 때 관련 문화재 관계자만 참여하는 게 아니라 저 같은 사람도 정보를 제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학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색채연구소를 설립해 전통적인 색채관과 재료기법을 복원하고 개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옛날에 사용한 천연재료를 똑같이 사용하는 건 어렵지요.
과거와 시스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에 불가능하죠.
천연재료는 고가인데다 생산량도 감소했고 색채 자체도 다양하지 않아요. 전통적인 안료와 가장 유사한 색감을 지닌 현대 안료를 개발해야 화가들이 한국적인 색을 표현할 수 있어요. 한국의 색채 표준을 만들기 위해서는 굉장히 다각도의 연구가 선행돼야 합니다. 이를 위해 연구소를 설립한 것입니다.
미술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일이고 사회적으로도 정말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문화 원형적 측면에서 색은 나름의 상징이 있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데 안료가 동반되어야 하죠. 색을 다루는 작가로서 사회 참여적으로 행동하시는 모습이 인상 깊습니다.
사실 전통은 드러나는 것뿐 아니라 무형적인 부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는데요. 선생님 작업에서 전통의 문제가 여성, 오방색 등 유형학을 낳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역사 속의 다양한 여인이 등장하지만 어떻게 보면 하나의 모습으로 수렴되는 면도 있고요. 몇 백년 전의 여인과 동시대인이 공감하기에는 시간차가 많이 나는데요. 외형이 너무 옛날 것으로 고정되어 있다보면 그 막을 뚫고 정서적으로 감흥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요. 그 여인들의 틈에 작가의 정서가 들어갈 여지가 별로 없는 거죠. 그리고 전통의 힘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면 오방색 말고 다른 면도 보여주셔야 할 것 같아요. 다음 작품에서 어떤 세계를 다루실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제가 외국에 안나갔다면 이렇게 전통에 집착하지 않았을 거예요. 중요한 문제인데 우리에게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하다보니 그동안 집착한 것 같습니다. 저도 이번 전시를 통해 탈바꿈해야 하고, 그런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낀건데 정체성 없이 쏠린 경우도 많지만 예상외로 전통을 굉장히 고무적으로 받아들이고 탄력있게 수용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제가 느끼는 전통과 젊은 세대가 느끼는 반응에 차이가 큰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전통에 대한 생각의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동안 저의 작업은 사라진 전통미감을 부활시키는데 전념했었는데 이제는 한걸음 나아가 한국적 미감을 승화시켜 새롭게 피어나는 현대성을 담을 생각입니다.
진행 정리・이슬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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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은 정 Cho Eunjung
1962년 태어났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2회 구상조각회 조각평론상을 수상했다.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 문화산업경영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인물미술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조각미의 발견》, 《비평으로 본 한국미술》(공저),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권력과 미술》,《김종영》 등이 있다.

정 종 미 Jung Jongmee
1957년 태어났다.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뉴욕 파슨스 스쿨 디외 도네 페이퍼메이킹 스튜디오에서 수학했다. 1991년 백악미술관에서 열린 <자・연・인전>을 시작으로 20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제13회 이중섭미술상, 제13회 이인성미술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고려대 디자인 조형학부 교수 및 고려대부설 색채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우리그림의 색과 칠》이 있다.

WORLD TOPIC Björk

bjork 11 all is love

뷔욕의 뮤직비디오 <모두가 사랑이 넘친다>의 촬영을 위해 감독 크리스 커닝햄(1970~, 영국)은 두개의 로봇을 디자인하여 주문 제작했다 Björk, Still from directed by Chris Cunningham 187×63×103cm 1999
Credit: Courtesy Wellhart Ltd&One Little Indian. 위 앨범 <볼타>에 실린 <방랑벽>의 뮤직비디오에서 뷔욕이 입었던 의상. Encyclopedia Pictura, Isaiah Saxon(American) Sean Hellfritsch(American), costume, 2007 Wool and leather. Björk. Still from directed by Encyclopedia Pictura, 2008. Courtesy Wellhart Ltd&One Little Indian

아이슬란드 출신 싱어 송 라이터인 뷔욕(Björk, 1965~)의 회고전이 뉴욕 MoMA에서 개막했다. 3월 8일부터 6월 7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에는 그녀가 20여 년 동안 발표한 8장의 앨범을 둘러싼 이야기가 펼쳐진다. 앨범 커버 사진, 사운드, 영상, 악기, 오브제는 물론 의상까지 선보이는 이 전시는 그야말로 미술관에서 일견하는 한 음악가의 인생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술관이 호출한 음악가는 무엇을 보여주었나

서상숙 미술사
현재 뉴욕현대미술관(이하 ‘MoMA’) 아트리움에서는 아이슬란드 출신의 팝 가수이자 작사 작곡가인 뷔욕Björk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단 하나의 음에서도 극적인 감동을 이끌어내는 목소리를 가진 천재적인 가수’ ‘팝뮤직의 지평을 바꾸었으며 음악의 시각적인 프리젠테이션을 바꾸었다’는 등의 평을 듣는 뷔욕은 일렉트로니카, 펑크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뿐만 아니라 파격적인 의상, 테크놀로지를 적극 활용한 아방가르드 뮤직비디오 등으로 지난 20여 년 동안 세계 팝음악계의 정상을 누린 가수다. 이 전시는 1965년 생으로 오는 11월 50세를 맞는 뷔욕의 첫번째 솔로 앨범 <데뷔Debut>(1993)로 시작해 올초 발매된 <버니큐라Vulnicura>(2015)까지 음악사를 돌아보는 중간 회고전 형식으로 기획되었다.
특히 지난 2013년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10년 넘게 함께 살았고 비디오 작업도 같이 한 예술적 동지였으며 딸 이사도라(13)를 낳아 키워 온 현대미술가 매튜 바니Matthew Barney와의 관계를 청산한 이후 그 아픔을 솔직하게 표현한 새 앨범 <버니큐라>에 수록된 뮤직비디오, <검은 호수Blake Lake>가 이번 기획전에 소개 될 예정이어서 더욱 관심을 모았었다.
그러나 지난 1월 앨범의 음원이 인터넷에 무단 유출되었고 뷔욕은 전시 개막 두 달 전 앨범을 발표해버림으로써 모마가 이 전시를 위해 기획했던 비디오의 상영은 그 의미를 잃고 말았다. ‘Vulnicura’는 라틴어로 상처라는 뜻의 ‘vulnus’와 치유라는 뜻의 ‘cura’를 합친 말로 뷔욕이 만들었으며 사전에는 없다고 한다. 이 앨범에는 역시 잘 알려진 현대미술 작가와 사랑에 빠져 뷔욕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 바니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때로부터 이별 그리고 그 상처를 극복하기까지의 과정에 만들어진 곡들이 차례로 수록돼 있다.
이 특별전은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미술관인 MoMA가 비판을 감수하고 팝가수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는 취지로 기획한 것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지난 3월 8일 전시 개막과 함께, 아니 그보다 앞서 3월 2일 프리뷰 직후 MoMA 전시사상 유례없는 혹평이 쏟아져 나와 더욱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필자 역시 프리뷰에 참석한 후 큐레이터인 클라우스 바이젠바흐Klaus Biesenbach(모마 P.S.1관장)가 그답지 않게 베테랑 큐레이터로서의 경력과 기획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술 큐레이팅을 전혀 모르는 뷔욕에게 전권을 넘겼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특히 바이젠바흐에게 팝가수의 기획전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는 2012년 독일 테크노 음악그룹 크래프트워크Kraftwerk를 초대, 같은 장소인 아트리움에서 라디오 액티비티 등 매일 앨범 1개씩, 8일 연속 라이브 콘서트를 열고 MoMA P.S.1에서 그들과 관련된 전시를 따로 마련하는 등 성공적으로 마친 바 있기 때문이다.
바이젠바흐는 2000년 뷔욕에게 전시를 제의했으나 “음악을 어떻게 미술작품처럼 벽에 걸 수 있겠느냐”며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음악이 중심이 돼야 한다는 조건하에 3년 전에야 성사되었으며 뷔욕이 이번 전시의 세세한 부분까지 참여했다”고 밝혔다. 모마는 이번 전시를 위해 아트리움에 가건물을 지었다. 2층짜리로 1층 전시장에서 2층 전시장으로 가려면 전시장을 나와 모마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 연결된 입구를 통해 2층전시장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 구조다. 이렇게 모두 3개의 임시전시실을 만들었는데 1층에는 2개의 전시장을 만들어 각각 뮤직비디오를 보여주고 있다. 새 작품인 <검은 호수>가 한쪽 방에서, 그리고 다른 한쪽 전시실에서는 뷔욕의 커리어를 모아놓은 32개의 비디오가 연속 상영되고 있다. 180도로 움직이는 렌즈가 설치된 스포츠 중계용 카메라 4세트를 이용해 찍은 <검은 호수>가 상영되고 있는 비디오룸은 아이슬란드의 동굴에서 촬영한 이미지에 맞춰 6000개의 콘 모양 장식을 천장에 붙여 방음효과와 동굴 이미지를 연출하는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 광경. 유명한  드레스와 매튜 바니가  비디오를 위해 제작한 뮤직박스를 들고 라이브 슈즈를 신은 흰 드레스의 뷔욕 마네킹이 보인다 Marjan Pejoski, Macedonian, Swan Dress, Tulle, feathers and leather 87×60cm 2001 Matthew Barney, Vespertine Music Box, 2001 acrylic, brass and copper mechanical apparatus 30.5×33×35.6cm Installation view of Björk, The Museum of Modern Art, Mar. 8~Jun. 7 2015.

전시 광경. 유명한 <백조> 드레스와 매튜 바니가 <베스퍼타인> 비디오를 위해 제작한 뮤직박스를 들고 라이브 슈즈를 신은 흰 드레스의 뷔욕 마네킹이 보인다 Marjan Pejoski, Macedonian, Swan Dress, Tulle, feathers and leather 87×60cm 2001 Matthew Barney, Vespertine Music Box, 2001 acrylic, brass and copper mechanical apparatus 30.5×33×35.6cm Installation view of Björk, The Museum of Modern Art, Mar. 8~Jun. 7 2015.

Bjork instrument MOMA

뷔욕이 앨범 <바이오필리아> 발매 후 투어를 위해 제작 의뢰한 로봇 악기, 그래비티 하프가 MoMA 1층 로비에 전시돼 있다. Andrew Cavatorta, American Gravity Harps, 2011 Walnut, spruce tonewood, poplar, aluminum, harp, strings, motors, sensors, electronics and software 320×61×61cm Credit: Sang Suk Suh

뷔욕의 과욕? MoMA의 과신?
뷔욕은 디자이너에게 “인간의 내장 속에 들어간 듯한 공간을 만들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전시장이 비디오 상영관이거나 오디오를 들으며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폐쇄되고 정체된 공간이어서 관객들은 비디오룸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걷고 스치면서도 볼 수 있는 그림이나 조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2층 전시장에 마련된 <Songlines>는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을 제한하고 있어 1층 로비에서 시간이 찍힌 티켓을 받아야 하는데 아직도 추운 뉴욕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미술관 밖에 줄 서서 기다리는 안타까운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막상 티켓을 받아 들어간 전시장의 빈약함이다. 이미 비디오를 통해 대중에게 친숙한 뷔욕의 의상과 소품 등을 전시하고 있어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Songlines>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먼 길을 가면서 길을 찾기 위해 노래나 이야기 등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가 된 곳들을 묘사한 노랫길을 뜻한다.
MoMA는 이 전시장에 뷔욕의 25년 커리어를 대표하는 솔로 앨범 8장에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했다. 블루투스 신호를 이용해 장소를 인식하고 사람의 머리동작에 따라 작동하는 헤드폰을 끼고 아이패드를 목에 걸면 뷔욕의 음악과 아이슬란드 시인인 숀Sjon이 뷔욕에 관해 쓴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이 오디오를 들으며 전시장을 둘러보는데 40분짜리 이 소프트웨어는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개발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짧고 좁은 이 전시장에서 40분 동안 뷔욕의 일생에 관한 동화 같은 이야기를 즐기기는 힘들었다.
전시장에는 뷔욕의 신체를 3D로 스캔해 만든 실물 크기의 마네킹에 무대의상들이 입혀 있다. 2001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장에 입고 나타나 조롱의 대상이 된 (가수 엘튼 존은 이에 대해 미국인은 유머가 없다고 일갈했다) 백조 드레스, 알렉산더 매퀸의 벨 드레스(2004), 후세인 샬라한의 에어메일 드레스(1999)등이다.
또 매튜 바니가 2001년 <베스퍼타인Vespertine> 앨범을 위해 제작한 뮤직박스와 라이브 슈즈, 크리스 커닝햄의 로봇(<All is Full of Love>), <메둘라Medulla>(2004), <볼타Volta>(2007) 등의 비디오에 등장하는 소품, 모자와 머리장식, 악보, 스케치북, 다이어리 등이 함께 전시돼 있다. 뷔욕은 자신의 노래를 작사 작곡하며 때로는 원하는 소리를 얻기 위해 악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악기들은 1층 홀에 따로 전시돼 있다.
물론 뷔욕의 음악과 비디오는 한번 듣거나 보면 잊기 힘든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의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독특한 목소리와 거칠게 내뱉는 듯한 창법은 우리나라의 판소리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비디오의 배경이 되는 아이슬란드의 풍경과도 어우러져 신비감을 더한다. 클래식 악기, 특히 현악기를 이용하는 센스가 뛰어나고 아이슬란드의 전래민요, 스스로 만든 악기 등을 믹싱하는 등 뷔욕은 거의 모든 음악을 직접 프로듀싱하며 또 음악을 만드는 데 필요한 협업자들을 잘 선택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미셸 공드리, 스파이크 존스, 데이비드 황, 크리스 커닝햄 등의 음악감독들이 바로 그들 중의 일부다. <베스퍼타인> 앨범에 참여한 그린란드 이누이트족 여성 합창단이라든지 트랜스젠더인 앤토니의 목소리를 이용하는 것 등 그의 소리에 관한 감성은 다른 음악인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뷔욕은 모마전 개막 전날인 3월 7일 카네기홀에서 <버니큐라> 앨범 월드투어를 시작했다. 모마에서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뷔욕의 비디오와 라이브 무대를 보면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그만큼 뷔욕의 창의성은 음악을 넘어 예술가로서의 통합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뷔욕의 비디오를 <피필로티 리스트전>(2008)처럼 아트리움의 큰벽에 상영하고 넓은 공간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걸어 다니거나 앉을 수 (그리고 누울 수도 있었다) 있게 했더라면, <Songlines> 전시를 마리나 아브로비치전처럼 6층의 특별전시실에 따로 마련했더라면, 크리프트워크처럼 아트리움에서 콘서트를 하고 비디오와 의상 등은 모마 P.S.1에서 상영 전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꼬리를 이었다.
이번 뷔욕전에 대해 《뉴욕타임스》의 한 기자는 이렇게 정리했다. “뷔욕은 MoMA의 제의에 ‘No, thanks’라고 거절했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마는 아직 (뷔욕에 관한 전시를 할 만한) 준비가 돼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술관이 할 일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니라 미술품을 잘 전시하는 것인데 그것에 실패했다”고. ●

뷔욕의 카펠라 앨범  커버사진에 쓰인 숍리프터 (Hrafnhildur Arnardóttir aka Shoplifter 1969 아이슬란드) 디자인의 머리장식(2004)과 알렉산더 매퀸 디자인의 벨 드레스(2004). Credit: Sang Suk Suh

뷔욕의 카펠라 앨범 <메둘라> 커버사진에 쓰인 숍리프터 (Hrafnhildur Arnardóttir aka Shoplifter 1969 아이슬란드) 디자인의 머리장식(2004)과 알렉산더 매퀸 디자인의 벨 드레스(2004). Credit: Sang Suk Suh

 

WORLD REPORT Hongkong,the Global Art Hub

〈아시아 아방가르드〉전시 전경

〈아시아 아방가르드〉전시 전경

미술본색 in 홍콩

임승현 기자
홍콩이 아시아 최대의 미술허브로 급부상 중이다. 물론 홍콩이 아시아 현대미술의 메카로서 주목받은 것이 어제오늘일은 아니다. 그러나 홍콩의 2015년 3월은 그야말로 ‘아트먼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 세계 미술인이 주목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페어인 <아트바젤 홍콩 2015>을 포함해 ‘아트홍콩(ART HK)’에서 새롭게 선보인 <아트 센트럴>, <아시아 호텔아트페어(AHAF Hongkong 2015)>가 열려 아시아 컬렉터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시장은 있고 작가와 전시는 없다”는 비판을 뒤엎기 위해서 일까. 페어 기간에 미술시장을 찾은 컬렉터와 미술애호가들을 붙잡기 위한 다양한 전시가 홍콩 전역에서 펼쳐졌다.
이 기간 한국미술로서 가장 주목받은 부문은 단연 단색화다. 국제갤러리를 비롯한 국내외 갤러리가 소개한 박서보, 하종현, 정상화 등 이른바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은 <아트바젤 홍콩 2015> VIP오픈 첫날 뜨거운 판매행진을 이어가, 단연 시장의 ‘대세’임을 입증했다. 단색화에 대한 관심은 잠시 홍콩을 들른 한국 컬렉터만을 자극한 것이 아니었다. 홍콩의 젊은 컬렉터들 또한 단색화에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세계적 규모의 옥션인 소더비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 아방가르드전〉(3.12~27)은 이를 증명한다. 소더비 홍콩은 경매와 무관하게 한국의 단색화와 일본의 구타이회화를 함께 조망하는 자체 기획전을 열었다. 두 장르을 최초로 조합한 전시가 경매회사의 기획으로 열린 점은 특이한 사항이다. 시장의 중심에 있는 소더비가 한국미술의 이미지에 깊이있게 접근하고자 ‘단색화’를 선택한 것은 ‘스마트 초이스’였다. 전시에 맞춰 베니스비엔날레 관외전시로 〈단색화전〉(5.7~8.16)을 기획한 이용우와 구겐하임 미술관 아시아 미술부 큐레이터 알렉산드로 먼로가 각각 단색화와 구타이를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참여 작가인 박서보와 하종현이 직접 나서 작가토크를 진행해 적극적인 방법으로 단색화에 대한 미술애호가들의 이해를 도왔다. 전시 연관 행사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최연수 소더비 홍콩 비즈니스 매니저는 “홍콩의 컬렉터에게 단색화는 아직 생소하다. 시각적으로 매료되더라도 한국미술사, 역사 속에서 단색화가 어떤 맥락으로 읽히는지 알지 못하면 구매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번 행사가 홍콩 컬렉터들에게 단색화의 미술사적 콘텍스트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며 홍콩 컬렉터의 작품구매 특징을 짚었다. 작년부터 국내에서 불기 시작한 단색화 열풍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지만 ‘단색화’에 대한 미술사적 논의는 아직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다. 단색화에 대한 관심이 시장에 머물기만 한다면 결국 세계미술시장으로 나아가는 데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는 5월 DAP에서 출간될 단색화 관련 연구논문집은 세계미술인들의 미술사적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으로 관심을 끈다.
시장은 자율성을 가질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시장에 의존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홍콩은 그동안 미술시장은 팽창한 데 비해 전시장과 미술관련 기관의 인프라 구축이 빈약하다는 점을 지적받아왔다. 마크 스피글러 아트바젤 이사의 “그림이 판매되는 페어에 머물지 않겠다”는 말은 다분히 이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아트바젤 홍콩 2015>은 알렉시 글래스-캔토(시드니 아트스페이스 상임 이사)를 큐레이터로 초빙해 <인카운터전>을 열어 전시 기능을 강화할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인카운터전>은 아트페어 장 중앙부에 20여 점의 대작을 설치해 “역동적인 도시가 멈춘 공간을 표현”했다. 우리나라 갤러리도 이 프로젝트에 선정됐다. 아라리오갤러리의 인도 작가 탈루 L.N, 서울과 대구의 리안갤러리가 소개하는 카를로스 로론 디진, 원 앤 제이갤러리의 김태윤, 국제갤러리와 뉴욕의 티나킴갤러리가 함께 추천한 이우환의 작품을 선보였다. 아트페어 부스에서는 보기 드문 대규모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페어의 시각적 다양화를 이뤄냈으나, 아트페어의 일부일 뿐, 담론을 담은 전시로서 읽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트홍콩(ART HK)’이 새롭게 선보이는 위성 페어인 <아트 센트럴>은 이러한 시장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한 노력의 흔적이 돋보였다. <아트바젤 홍콩>이 수용하지 못한 보다 실험적인 작업과 젊은 갤러리들을 끌어들여 아시아 현대미술의 생생한 현장을 담으려 했다. 하버뷰프런트에 위치한 페어 행사장은 <아트바젤 홍콩>보다는 한결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그림을 즐기려는 가족단위 관람객이 많았다. 이를 의식한듯 어린이를 위한 미술행사나, 길거리 음식을 먹는 공간을 마련하는 등 관객의 저변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그 어떤 아트페어보다 홍콩미술계를 넘어 아시아 미술계가 주목하는 공간은 완공을 4년이나 앞둔 ‘서구룡문화구West Kowloon Cultural District’였다. 앞으로 홍콩 미술의 장을 확대할 세계 최대 규모의 전시·공연·교육 공간과 함께 공공녹지 공원이 들어설 예정이다. 설립을 위해 홍콩 정부가 투자한 예산은 9억 달러(약 1조160억원), 2012년부터 작품 수집으로 소비한 금액은 1억2900만 달러(약 1460억원), 현재 수집한 소장품만 4000여 점, 전체 공간 연면적 6만m(1만8150평)에 전시 공간은 1만7000m(5142평). 일련의 천문학적 숫자 나열만으로도 그 규모에 압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도련이 ‘M+뮤지움’의 수석 큐레이터로 부임하고, 세계적인 명성의 스위스 컬렉터 율리시그가 1500여 점의 작품을 이곳에 기증한 것으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다. 3월 14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나르스 니트브Lars Nittve ‘M+뮤지움’ 총괄 디렉터는 ‘M+뮤지움’에 대해 “역사적 개념의 미술관이 아니다. 홍콩을 넘어 세계의 주목을 받는 새로운 형태의 복합 시각미술 공간을 창출할 것이다”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비록 ‘M+뮤지움’의 전시공간은 공사 중이지만 이미 구매한 소장품을 외부 전시장에서 선보여 미술관의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 <M+ Moving Images>는 2월 27일부터 4월 26일까지 ‘홍콩, 꿈, 희망, 집’이라는 주제로 스크리닝 프로그램과 Midtown pop과 Cattle Depot Artist village에서 전시를 이어간다. 이 전시는 이주를 테마로, 디아스포라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건축과 디자인에서 간학문적 접근이 가능한 미술관의 지속적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기획이다.
한편 공간을 이전한 홍콩의 대표적인 대안공간 ‘Para site’도 같은 기간 개관전을 열어 미술애호가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A Hundred Years of Shame–Songs of Resistance and Scenarios for Chinese Nations?>란 제목의 개관전은 홍콩을 포함한 중국어권 국가가 현재 처한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조건에 대해 반항적인 의식을 반영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홍콩을 찾은 많은 외국인과 중화권 사람들에게 펀치라인을 던지는 전시로 작지만 알찬 구성이었다.
이 외에도 K11 예술재단의 <인사이드 차이나전>, 페더빌딩에 입주한 세계적인 갤러들의 전시 등 홍콩의 3월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홍콩은 기존 전시장의 모슴을 탈피하고 상업과 예술이 교묘하게 줄타기 하는 새로운 장을 표방하는 곳이 유독 많다. 홍콩은 자유로운 분위기만큼 해외미술의 진입로가 열려 있는 곳이다. 아시아 미술시장의 허브로 자리를 확고히 할 홍콩에서 우리의 미술이 그 기반을 다잡고, 함께 어울려 갈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

 외관 전경

<아트 센트럴> 외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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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 site 〈A Hundred Years of Shame전〉 전경

 내부에 설치된 특별부스

<아트 센트럴> 내부에 설치된 특별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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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_Adrian_Cheng_1애드리언 청(Adrian Cheng)
K11 예술재단 설립자 및 회장,주대복(周大福) 전무이사

“신개념 모델을 제시해 홍콩만의 미술생태계를 조성한다”

 K11은 신개념 쇼핑몰을 표방한다고 들었다. 보충 설명 부탁한다.
K11은 예술과 상업이 결합한 ‘뮤지엄-리테일’콘셉트의 신개념 모델이다. 중화권 국가 내 아트몰, 사무실, 호텔식 아파트를 선보이며 최고급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인정받고 있다. K11은 ‘예술, 사람, 자연’이라는 핵심 요소를 결합해 대중에게 예술을 전하는 독특한 공간이다. 2014년 상하이 K11 아트몰에서 진행된 모네쇼가 대표적인 예인데, 이 전시회가 열리는 3달 동안 34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했으며, 2000개가 넘는 관련 기사가 게재됐다.
K11 예술재단은 2010년 설립한 비영리재단이다. 그동안 유수의 미술관(팔레 드 도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과 협력체계를 유지하며 전시를 해왔다. K11 예술재단의 비전이 궁금하다.
K11 예술재단은 2010년 사회혁신과 사회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됐다.
주 목적은 중국 신진 현대미술 작가를 양성하고 공공예술교육을 촉진하는 것이다. 그동안 유명 기성 작가들에게만 관심이 쏠리다 보니, 미술계에서 젊고 유망한 신진 작가를 찾기 어려웠다. 세계적으로도 중국 신진 작가 관련 소식은 가끔 들릴 뿐이었다. 중국의 젊고 재능 있는 인재들이 역량을 키우고 성장할 수 있게 지원하는 한편, 세계무대에 더 많이 오를 수 있도록 중국의 예술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홍콩 신진 작가를 양성하고 그들을 위한 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국제무대 진출 외에 홍콩 내부에서 이뤄지는 지원 형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K11 예술재단은 팔레 드 도쿄 같은 글로벌 파트너와 함께 중국 작가들이 세계무대에서 주목 받을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작가들이 상주하고 상호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K11 아트빌리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전시 지원도 맡고 있다. 지난 2014년에는 다수의 작가를 초청해 190여 개가 넘는 전시회, 세미나, 포럼, 워크숍을 진행했다. 특히, 입주작가 프로그램과 관련해 국내외 큐레이터와 중국 예술학교 교수들로 구성된 평가단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아트빌리지 입주를 희망하는 지원자의 지원서를 평가하고 인터뷰해 최종 후보를 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홍콩은 미술시장만 존재하고 전시공간, 교육기관이 부족하다”는 평이 있다.
또한 홍콩 내부의 작가보다 외국 작가가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컬렉터로서 홍콩 작가들의 위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한 중국 작가와, 홍콩 작가를 구분하는 기준이 있는지 궁금하다.
맞다. 홍콩은 현재 주요 미술시장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전시공간 및 예술교육기관은 충분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변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다. 미술계는 홍콩만의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다.
‘M+ 뮤지움 모바일 아트 이니셔티브 지원’을 바탕으로, 홍콩 예술생태계는 유기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관객 교육 프로그램도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신진 작가 양성에 나서는 홍콩의 젊은 후원자, 컬렉터, 작가들도 증가한다. M+뮤지움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환경을 바탕으로, 향후 세계무대와 교류하고 현대미술의 미래에 기여할 것이다. 이를 통해, 홍콩은 다양한 관점, 내러티브, 관객이 공존하는 만남의 장소로 변화할 예정이다.
외국 작가들이 주목 받는 이유는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좋은 플랫폼을 갖춘 예술 환경에서 작업하기 때문이다. 홍콩은 매우 탁월한 작가들을 보유하고 있으나, 이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 큰 플랫폼이 필요하다. K11 예술재단은 이들 홍콩 및 중국 작가에게 이러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한 예로, 홍콩 작가 에드윈 로(Edwin Lo)는 팔레 드 도쿄와 공동 주최한 〈인사이드 차이나전〉에 작품을 출품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과 홍콩 작가는 큰 차이가 없다. 이들 모두 국제적인 비전을 갖고 있으며, 국제 문제를 다룬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미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혹시 주목하는 작가나 이미 컬렉션에 포함된 작가가 있다면 공개 부탁한다.
한국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다. K11은 한국 작가들과 함께 다양한 전시를 진행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협업을 구상 중이다. 2012년에는 최정화와 작업을 진행했다.
최 작가는 홍콩 K11 아트몰에 크리스마스 마케팅 캠페인의 일환으로 다수의 작품을 설치했다. 또한, 2014년 홍콩 K11 아트몰에서 한국 디자인 전시회를 주최했다. 미디어아트, 회화, 공예, 디자인, 상품, 패션, 그래픽, 타이포그래픽 등 14명의 한국 작가 작품들이 망라된 전시회였다.
홍콩=임승현 기자

K11 아트몰 전경 (사진제공·GRAPE PR)

K11 아트몰 전경 (사진제공·GRAPE PR)

 

NEW FACE 2015 박아람

“전시장에 놓인, 평면 혹은 입체의 작품들은 일곱 개의 형상이 거듭나는 절차, 그 일련의 기제에 의한 것들이다. 일단 이러한 기제를 이해하게 된다면 전시장에 전시된 작품들은 짐짓 태연해 보이지만, 사실은 작가에 의해 계산된 절차들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된다.”
– 윤민화 전시기획

명확하지 않은 것에 대한 측량

박아람 작가를 만나 명함을 받았을 때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스스로를 ‘측량사surveyor’로 정의하고, 영문이름을 ‘Parc Rahm’으로 적시하고 있어서다. 작가의 설명은 이렇다. “도처에 산재한 이미지에 대해서, 이미지의 내적인 논리(내용과 의미의 차원으로 인도하는 인식/판별 가능한 사물이나 인물의 형태)를 따르지 않고, 사소한 색이나 명암 차이에 불과한 것을 따라가면서 이미지를 회膾 뜨는 행위를 반복하는데요. 저는 이것을 개인적으로 ‘이미지-측량’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러면서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벌인 퍼포먼스에 대해 설명했다. “<착륙 기념사진>은 ‘자석 올가미magnetic lasso 측량-뉴욕’ 기획하에 구상한 작업입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참고로 한 이 퍼포먼스는, 구글 뉴욕 지도를 포토숍의 자석 올가미로 측량하고, 그것을 깃발에 프린팅한 후, 누구나 알고 있는 뉴욕을 마치 처음 발견한 양 센트럴파크의 쥐바위Rat Rock 위에서 천연덕스럽게 착륙 기념 촬영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어로 ‘parc’가 ‘공원’을 뜻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D프린트 가변크기 2014 케이크갤러리 전시광경

<운석들> 3D프린트 가변크기 2014 케이크갤러리 전시광경

학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박 작가는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인 포토숍의 ‘마그네틱 라소툴’을 이용한 작업을 선보였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시각예술분야에서 어떤 장르건 간에 작가는 매체를 활용해 표현한다. 그런데 박 작가가 사용하는 매체는 좀 생소하기도 하고, 프로그래밍된 진부한 것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는 미술가 대부분이 작업 과정에 디지털 이미지와 그래픽 프로그램, 출력기를 이용하죠. 그래서 그것들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에는 별달리 특기할 점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저는 그래픽 프로그램의 툴과 그런 작업 내역들을 개념화하고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변별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툴의 예정된 기능에서 무엇인가 다른 것을 도출하는 것은 오히려 더 지난한 과정일 것도 같다. 이는 작품에 스며든 ‘노동의 흔적’이 곧 작가의 미학적 특성이라는 등가관계에 어떻게 역행하느냐의 문제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토숍의 ‘자석 올가미’ 툴은 이미지를 명확하게 지정하거나 항상 같은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 툴을 반복적으로 같은 이미지에 적용하는 행위는 일견 대상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행위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 같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력장치를 매개로 하는 제 손에 의한 무작위적인 개입에 의해 왜곡되어 결국 무의미한 궤적을 산출합니다. 실제로 측량한 형상들은 원본 이미지와 대조했을 때 별다른 연관성을 갖지 않아요. 저는 대상을 명확히 지정하거나 정의하는 일에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참조 대상으로부터 막다른 것을 도출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해석의 과잉이나 오독을 경계하는 태도가 분명했다.
지금 작가는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우주생활전>(2.6~5.17) 3층에 <운석들>이라는 작품을 설치했다. 최근 첨단 테크놀로지의 총아로 떠오른 3D프린터로 출력한 가공의 ‘운석’을 오렌지색 바탕에 깔았다. 45억 전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구에 불시착한 이방의 물체인 운석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기계 장치에 의해 ‘구현’되는 가공의 운석과 여러모로 닮아 있다.
당장은 근작인 운석 등을 크게 제작하고 싶다는 작가 박아람. 몇 번의 개인전이 열린 곳은 다분히 실험적인 작품이 선보였던 공간이다. 의도성은 없었지만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것이다. 그래도 현실은 현실이다. 박 작가 말대로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도 현재 큰 고민거리다. 그래서 최근 통영을 다녀왔고 “모니터 스크린만 보다가, 저 멀리 뻗어나가는 실제적인 거리감, 시야를 확보하는 경험을 오랜만에 했다”고 했다. 그곳에서 해수의 표면에 반사되어 산란하는 빛을 어떻게 봤을지, 그것이 어떻게 작업으로 ‘쌓일지’ 지켜볼 요량이다.
황석권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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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 커팅 및 드로잉 21×29.5cm 2014

<유령-지도> 종이 커팅 및 드로잉 21×29.5cm 2014

박아람은 1986년 태어났다. 가천대 시각디자인과, 홍익대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2014년 케이크갤러리에서 <자석 올가미 측량전>으로 명명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2012년부터 각종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2012년 일현트래블그랜트에 선정됐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NEW FACE 2015 호상근

“이 모든 장면과 그림과 이야기들은 해석하려 하면 미신이 될 것이고, 가까이 다가가면 인생극장이 되어버리기 십상이고 좀 더 가까이 가면 그 장면을 야기한 사회구조와 삶에 관한 불신과 회의와 분노를 일으킬 테지만 거리를 두고 본 이 모든 것은 ‘영감’이라 일컫는 그 어떤 에너지가 되어 목격자나 재현한 자에게 남거나 때때로 휘발하는 성질의 것으로 변모한다.”
– 윤재원 독립잡지 《칠(Chill)》 전 편집장

혼자만 보기 아까운 풍경

‘호상근재현소’. 작가 호상근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수많은 사람과 마주치면서 자신이 본 것(내가 본 것) 혹은 타인이 본 것(네가 본 것)을 넘나들며 일상에서 경험한 소소한 풍경을 드로잉 형식으로 재현한다. 특별한 기준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작가는 사람들과 시시콜콜 이야기하면서 관심이 가는 부분을 포착해낸다. 이때 요구 사항은 한 가지다. TV나 인터넷을 통해서 본 것이 아닌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본 장면 혹은 특이한 꿈을 되도록 자세히 얘기해달라는 것이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 눈에 익숙해져서 주목받지 못하지만 머릿속 한 귀퉁이에 남아있는 구석진 풍경을 끄집어낸다.
손글씨처럼 정감이 넘치는 호상근의 그림은 SNS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을 호출한다. 손바닥 크기만한 작품이 완성되면 그림은 이야기를 들려준 이에게 우편으로 전달된다. 그림을 받는 이는 오랜만에 손편지 받을 때의 설렘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요즘 손쉽게 타인의 일상을 엿보고 자신의 일상을 노출하면서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을 가볍게 대상화해 현상이 안타깝기만 하다.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SNS를 통해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쉽게 볼 수 있고, 덕분에 나도 살아있음을 힘들이지 않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들의 이야기들이 너무 가볍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즘 인터넷, SNS을 통해서 다양한 이미지가 범람하지만 모두가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인다.

3_끝까지얘기안하는사랑 사본

<끝까지 얘기 안하는 사랑> 관제엽서에 연필과 색연필 10.4×14.8cm 2014

 종이에 연필과 색연필 21×29.7cm 2012

<부드러운 침범> 종이에 연필과 색연필 21×29.7cm 2012

2011년부터 꾸준히 그린 그림은 어느 새 수 백장이 넘는다.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물어보자 작가는 ‘네가 본 것’ 중에서 한강 둔치에서 운동하는 한 아주머니가 얼굴에 검은 손수건을 얹자마자 빠르게 걸어 나가던 모습을 꼽는다. 천이 얇아서 앞을 보는데 전혀 지장이 없지만 햇볕을 가려주는 편의성과 동시에 속도측정도 가능한 손수건이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집중하는 이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주머니가 살면서 얻은 노하우가 압축된 장면이다. 자신을 소인배라 부르며 겸손함을 보이는 작가는 탑골공원 할아버지들이 손 안 대고 코푸는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타인이 주차하지 못하도록 자리 주인이 만든 다양한 모양의 주차금지 조형물에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한다.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의 단면에 매력을 느끼고 사람들이 살면서 축적해놓은 사소한 삶의 내공에 존경을 표한다.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사회적 모순, 부조리가 가득한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작가들도 있지만 호상근은 조금만 관점을 달리하면 “수많은 잣대가 교차하는 치열함 속에서 스스로만의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호상근재현소’는 지금까지 하나의 장소에 머물지 않고 서울, 부산, 청주 등지로 이동하며 사람들의 사연을 모았다. 최근에는 한 라디오프로그램 코너에 고정적으로 참여해 선정된 사연을 재현하고 있다. ‘내가 본 것’, ‘네가 본 것’은 혼자만의 풍경으로 간직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호출된다. 그리고 전시로 펼쳐지며 많은 사람과 기억을 공유하고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 같은 풍경을 두고도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느끼는 점이 다르다. 그림 원본이 실제 이야기의 주인에게 전달되다보니 작가에게 작품이 남지 않는 특성상 호상근은 이미지를 모아 책을 만들 예정이다. 그리고 제3자가 그림에 관한 글을 써 이미지와 텍스트의 간극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교차시켜 보여주고 싶단다.
최근 작가는 작은 그림뿐 아니라 대형 캔버스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작은 크기의 작품은 한 화면에 하나의 이야기만 담을 수 있지만 큰 화면에는 다양한 이야기를 함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상근재현소는 앞으로도 계속돼 다양한 기억의 재현물을 축적할 계획이다.
이슬비 기자

청주 우민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광경

청주 우민아트센터에서 열린 <다시, 그림이다> 전시광경

호상근은 1984년 태어났다. 한성대학교 미술학과와 동 대학원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2012년 꿀풀에서 첫 개인전 <내가 본 것, 네가 본 것: 호상근 재현소>를 열었고 <산으로 간 펭귄>(백남준아트센터), <어쩌다 꾼 꿈>(부산시립미술관), <다시, 그림이다>(우민아트센터)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NEW FACE 2015 지희킴

“자화상은 작가 자신의 심리적 전이의 효과들이 기록되는 도상적 기호로, 거기에는 항상 작가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다. 개인적 욕망을 접목시키고 사회의 표준적 경계 내에 포착되지 않은 모호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마두-여성은 그 자체가 자화상이자 작가의 투쟁 장소이며 혼성과 경계 넘기를 실현하는 시대적 표상이다.”
– 배명지 코리아나미술관 큐레이터

마스커레이드는 끝났다

12시 종이 울리면 신데렐라의 마법은 사라진다. 화려한 치장은 사라진다. 그렇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이 한낮 백일몽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본연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최근 지희킴이 선보인 작업은 12시가 지난 신데렐라 같다. 마스커레이드가 끝나고 베일을 벗은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희킴의 최근 작업은 책에 기반을 둔다. 그녀의 북드로잉 작업은 텍스트에 담긴 논리적 인과관계를 무시한다. 그리고 책 위에 드로잉을 그림으로써 텍스트를 지운다. 이 행위는 단순히 글자를 그림으로 덮어쓰는 것이 아니다. 책 위에 그려진 드로잉의 주제는 텍스트의 서술적 내용을 무력화한다. 드로잉은 철저히 개인적인 기억과 감정에 의지한다.
북드로잉 작업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책을 펼쳐서 눈에 띄는 한 단어를 포착한다. 그 단어에 뿌리를 두고 브레인스토밍을 이어간다. 잊고 있었던 내면에 자신을 맡긴 채 생각의 길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기억 앞에 발걸음이 멈춘다. 바로 그 종착지에서 마주하는 장면이 책에 그려지게 된다. 작가는 개인적인 기억의 조각을 책에 활짝 펼쳐 보이지만, 관객이 그 의식의 흐름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는 없다. 마치 남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데 모르는 언어로 쓰여있어서 해석 불가한 상황 같다. 영국 유학시절, 언어의 장벽에 부딪힌 지희킴은 유독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흔히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다”라는 표현처럼 작가에게 독해가 어려운 영문 텍스트 단락은 이미지 덩어리와 같았다. 이미지화된 텍스트 위에 그려진 그림은 레디메이드(책)를 사용한 작업이다. 검은 덩어리(텍스트)와 조응을 이루는 콜라보레이션이다.
의식의 과정을 생략한 결과물로, 내면을 한 단계 감추면서도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지희킴의 작업에서 꾸준히 나타난다. 책을 지지체로 사용하기 전에는 얼룩말 탈을 쓴 여성이 등장하는 회화를 주로 했다. 얼룩말의 줄무늬는 카모플라주다. 얼룩말 모양 탈로 그림 속 인물은 이중으로 자신을 숨긴다. 이를 통해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반항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의 모습을 감춘 여성이 등장하는 유학 이전 작업은 어딘지 모를 불편함이 있다. 반면 유학 후 작업에 등장한 여성은 훨씬 직접적이다. 풍자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여성은 얼룩말 탈을 벗고 실존 인물로 등장한다. 작가는 너무나 명확하게 규정지진 아름다움의 기준에 염증을 느꼈다. 한국 여성은 큰 눈, 높은 코 등 서구의 아프로디테를 설정하고 이를 위해 몸부림친다. 이러한 기준에서 작가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작가는 과연 우리의 이러한 미적 기준이 옳은지 질문을 던진다. 잡지에 등장한 서양모델들을 지知의 아이콘인 책과 함께 배치해 문제를 제기한다. 얼룩말 탈로 얼굴을 가리고 다소 폭력적으로 드러내던 반항적 표현과 사뭇 다른 변화다.
지희킴에게 책은 무한한 자유의 창작소다. 도서관에서 기증 받은 책에는 많은 사람의 추억과 기억이 남아 있다. 책장 사이에 사람을 찾는 편지가 끼워져 있기도 하고, 압화가 발견되기도 했다. 책 위에 식물도감에서 스캔 받은 꽃을 오려붙여 정원을 만드는 작업도 이러한 타인의 흔적에서 시작되었다. 결국 책을 펼쳐 눈에 띄는 한 단어에서 시작해 자기 자신의 의식이 닿는 어느 지점을 표현하거나, 또 다른 책에서 차용한 이미지와 부착해 사회를 풍자하거나, 타인의 흔적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진행하며 작가는 이전보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책이라는 지지체에 의지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작가는 이 위험성을 자각하고 기존의 작업을 확대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 중이다. 앞으로 펼쳐질 지희킴의 작업이 기대되는 이유는 그의 모습이 어떤 식으로 드러날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날 전면에 자신을 드러낼 수도, 혹은 사회나 관객을 드러낼 수도 있다. 자신의 모습을 한 꺼풀씩 드러낼 때마다 우리는 작가와 가까워질 것이다.
임승현 기자

〈불가능한 열망〉 기부 받은 책에 프린트 이미지, 가변크기, 2013~2015

〈불가능한 열망〉 기부 받은 책에 프린트 이미지, 가변크기, 2013~2015

〈Sleepless Night 2〉 캔버스에 아크릴, 마블링 130×162cm 2008

〈Sleepless Night 2〉 캔버스에 아크릴, 마블링 130×162cm 2008

지희킴은 1983년 태어났다. 동국대 미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골드스미스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07년 진흥아트홀에서 열린 〈Finding my other self〉를 시작으로 서울과 런던에서 4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서울시립미술관, 골드스미스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3월부터 2016년 2월까지 인천아트플랫폼 6기 장기 입주작가로 활동한다.

 

KIM SHIN’S DESIGN ESSAY 9

창조 적당히 합시다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미팅을 하려 경복궁역에서 내려 서촌을 걸었다. 이곳은 최근 몇 년 사이 상권이 엄청나게 뜬 곳이다. 중국과 한국 관광객들로 붐빈다. 인왕산과 북악산, 경복궁과 사직공원, 옛날 도시형 한옥과 골목길이 있는 예스러운 곳이다.
그러나 길가에 늘어선 상점들을 보면 고개를 돌리고 싶다. 어지러운 간판들 때문이다. 한국의 디자인 수준은 모든 분야에서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단 하나 거리의 간판 디자인만 빼놓고 말이다. 간판 속 한글 서체는 모두 대학에서 정규 디자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디자인한 거다. 그렇지만 옛날에 디자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간판장이들이
간판 만들 때보다도 더 형편없어진 거 같다. 왜 그럴까?
옛날에는 무식한 간판장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멋을 부려가며 글자를 만들지 않았다. 옛날부터 내려오거나 그 시대에 널리 쓰이는 글꼴을 선택해서 글자를 만들었다. 전화 취급소나 버스표 판매소를 알리는 양철간판, 이발소나 쌀집, 도장집을 알려주는 나무입간판, 아무 장식도 없는 백색 바탕에 고딕체로 중량감 있게 쓴 메인 간판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정도에서 벗어난 못났거나 요란한 간판을 보기 힘들었다. 그건 그걸 쓴 사람의 솜씨라기보다 전통과 시대의 솜씨다. 개성의 과시나 열정적 창조 따위는 주인이, 동네 사람이, 그리고 간판장이 스스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암묵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창조적인 능력이 없어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간판이 없다는 건 사람을 얼마나 편안하게 만드는가! 아니 오히려 “창조하라”는 사회적 강요가 없기 때문에 간판들은 사람들의 신경을 자극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한국이 창조로 먹고사는 나라인 양 떠드는 오늘날의 간판을 보라. 대개는 붉은 색, 파란색, 노란색, 심지어는 핑크색 또는 무지개색, 그라데이션 효과를 바탕으로 글자가 쓰였다. 또는 업종을 표시한다고 간판 배경에 시골의 목장이나 음식이 끓고 있는 찌개, 소, 돼지, 생선 따위가 인쇄돼 있다. 상점 간판 하나에 심벌, 업종 관련 사진, 글자, 타원과 같은 그래픽 요소, 게다가 글꼴마저 여러 가지, 온갖 색상들로 무질서를 넘어 방종, 방탕, 난잡하기 이를 데 없다. 산업혁명시대의 수준 낮은 바로크 스타일을 보는 것 같다. 글꼴은 또 어떤가? 개성이 지나치다고 하는 건 과분한 평가다. 그냥 수준 이하의 글꼴이 수두룩하다.
글꼴 회사들이라고 변명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글꼴의 가치를 몰라주니 돈 주고 사지 않는다.
또 영문 알파벳에 견주어 너무나 많은 수의 글자를 디자인해야 하니 생산성과 효율이 떨어진다. 한글 서체는 오로지 한국시장에서만 팔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상품이다. 그러니 생산하는 모든 서체를 다 완성도 높고 아름답게 디자인하는 건 불가능하단 걸 인정한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낙서한 것 같은 글꼴을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구색을 갖춰야 해서, 고객이 다양한 걸 찾으니까 라고 변명하지 말자. 왜냐면 불행하게도 어떤 상점 주인이나 간판업자는 그런 형편없는 글꼴로 간판을 만들어 시민들의 눈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간판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서 이런 걸 이슈로 삼는 건 진부하기조차 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개선이 안 되는 걸 넘어 나빠지기까지 하니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나는 이 문제에 대안을 낼 능력이 없다. 단지 창조의 압박, 다시 말해 남과 달라야 한다는 내부, 또는 외부의 강요로부터 초연해질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사실 거창한 창조는 그다지 필요 없다. 글자를 쓰고 읽는 대다수 사람은 글꼴이 많지 않은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상점 주인도 간판업자도 이상한 글씨가 있어서 골라 쓴 것이지, 없었다면 아마도 더 아름답고 완성도 높은 단순한 명조체 같은 글꼴로 간판을 만들었을 것이다. 만약 상품의 구색 때문에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면 기본 글꼴에서 조금만 변화를 주어 출시하는 건 어떨까? 차별성과 동시에 완성도도 높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개성과 창조에 매달리다보면 사람이 손으로 쓴 흘림체 같은 걸 바탕으로 한 글꼴 만들기의 유혹에 빠져들고, 괴물을 낳기 쉽다. 창조의 압박이나 경쟁 없이도 아름답고 정겨운 간판세계를 만들었던 옛날 사람들의 평화롭고 느긋한 마음이 새삼스럽게 부럽다. ●

위 정희우 <종로의 나무간판> 시리즈 2014 갤러리 그리다에서 열린 개인전(2014.11.26~12.7) 광경 작가는 종로의 나무간판을 탁본으로 떠내 전시장에 나란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