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우리 옛 그림 민화의 재발견

*본 기사에 실린 도판과 해설은 《한국의 채색화》(정병모 기획, 다할미디어, 2015)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민화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우리 그림이다 말 그대로 ‘백성(民)의 그림(畵)’ 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특정 계층이 향유하던 문화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남녀노소에게 사랑 받는 하나의 미술장르로 우뚝 섰다 현재 민화 인구는 만 명에 육박한다고 추산되며 그 증가세가 꺽일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 최근 세계 곳곳에 소장된 우리의 궁중회화와 민화를 권의 책으로 묶은 한국의 채색화 가 발간되었다.
일부 중년여성사이의 여가활동 대상으로 여겨지던 민화가 이제 주류 미술계의 문을 당당히 두드리고 있다. 바야흐로 민화의 예술성이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민화의 매력은 무엇일까 월간미술 은 근래의 민화 열풍을 이해하기 위해 민화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인 민화 라는 명칭부터 새롭게 접근하고자 한다. 다채로운 고전 민화를 살펴보며 민화 하면 떠오르는 막연한 이미지와 저급한 예술이라는 편견을 깨고자 한다 또한 민화 를 둘러싼 논쟁의 쟁점을 짚어봄으로써 세계미술 속에서 우리 민화가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엿본다 오색찬란한 민화 속 색의 향연이 자연의 색을 입은 봄꽃과 함께 당신의 눈과 흥을 자극할 것이다.

八景圖
팔경도는 특정 지역의 경관을 여덟 가지의 주제로 묶어 이름 붙이고 이를 그린 그림을 말한다 아마추어 민간화가들이 그린 민화 팔경도는 기법적인 편의성으로 인해 완성도는 약하지만 기발한 발상과 해학성이 돋보이고 설화적인 이야기를 통해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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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종이에 채색 73.4×32.4cm(각) 8폭 병풍 19세기 말~20세기 초 (김세종 소장)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민화 산수화 가운데 가장 빈번히 그려진 그림이다.
이 작품은 기존의 화법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조형세계를 표현하면서도 소상팔경도의 화제가 지닌 특징들을 각각 잘 살리고 있다. 원포귀범遠浦歸帆은 육지로 들어오는 배를 그렸고 평사낙안平沙落雁은 기러기가 내려앉는 모티프가 그려져 있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
“구한말에 이르러 한국적인 팔경도가 꽃을 피웠는데 그중 하나가 관동팔경도다. 그림의 구성이 어린아이들의 그림처럼 상식과 거리가 먼 부분이 있지만, 이런 요소들이 오히려 기존의 화풍에 물들지 않은 참신한 조형세계를 보여준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虎獵圖
호렵도는 세기 이후 유행한 그림으로 그 내용은 청나라 왕공귀족의 군사 훈련을 겸한 대규모 사냥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종이에 채색 74.9×30.5cm(각) 8폭 병풍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뉴아크미술관 소장)

<호렵도(虎獵圖)>(부분) 종이에 채색 74.9×30.5cm(각) 8폭 병풍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뉴아크미술관 소장)

호렵도(虎獵圖)
“원래 호렵도는 관아에서 무장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돋보이게 하거나 벽사의 용도로 제작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처럼 해학적인 호렵도는 기능적인 측면보다 조형적인 측면에 주력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통적인 기법을 해학적인 표현과 연결시켜 어떤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 도드라져 보인다.” – 정병모(경주대 교수)

故事人物圖
역사나 설화 문학에 얽힌 이야기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인물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를 고사인물도라고 한다.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삼국지연의도와 신선도가 어우러진 것이다. 첫 세 폭은 ‘삼국지연의도’ 중의 장면, 나머지는 다양한 신선의 모습을 담았다. 바둑을 두는 신선의 모습에서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동굴 속에서 두 노인이 바둑 두는 것을 보고 구경하다 집에 와보니 수백 년이 흘렀더라’는 왕질의 고사를 떠올릴 수 있다.” – 유미나(원광대 교수)

冊巨里
책을 비롯하여 그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기물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거리란 먹을거리 입을거리처럼 복수의 의미다 책거리 가운데 책가 즉 서가로 구성된 그림을 책가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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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장막도(虎皮帳幕圖)> 종이에 채색 355×128cm(각) 8폭 병풍 19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호피장막도(虎皮帳幕圖)
“8폭 가운데 두 폭은 표피豹皮를 걷어 올린 공간에 문방구와 기물이 빼곡히 배열되어 있다. 책가 앞에 장막을 설정한 장한종 양식의 책거리와 관련이 깊은 민화 책거리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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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에 채색 161.7×39.5cm(각) 10폭 병풍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책가도(冊架圖)> 종이에 채색 161.7×39.5cm(각) 10폭 병풍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책가도(冊架圖)
“10칸의 서가를 책으로만 가득 채운 책가도이다. 정조 연간에 책만 빼곡히 채워서 그린 책가도의 초기 양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책가도의 제작 시기는 19세기로 본다.”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花鳥圖
화조를 주제로 한 그림은 민화 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내용이 다양하고 표현된 물상의 종류와 형태 및 채색의 변화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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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도(蓮池圖)> 비단에 채색 177×75.4cm(각) 4폭 병풍 19세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연지도(蓮池圖)
“여러 쌍의 원앙새는 주체할 수 없는 연꽃의 향기에 취해 이리저리 연꽃을 완상하며 분주하게 물결을 가르고 있다, 원앙금침을 수놓아 자식을 많이 낳고 부부 금슬이 좋기를 기원하는 신혼방에 펼쳐졌을 법한 그림이다.” – 이경숙(박물관 수(繡)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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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조도(花鳥圖)> (부분) 종이에 채색 90.4×37.2cm(각) 8폭 병풍 19세기 (일본 개인 소장)

화조도(花鳥圖)
“매화, 파초, 초롱꽃, 대나무, 모란, 소나무, 연꽃, 백일홍으로 구성된 화조화 병풍이다. 화조로 이루어진 자연이지만, 따뜻한 휴머니즘의 세계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가늘고 구불구불한 선묘와 소나무 잎 표현으로 보건대, 제주도 민화일 가능성이 높다.” – 정병모(경주대 교수)

翎毛・魚蟹圖
호랑이의 이미지는 선사시대 바위그림, 고구려 고분벽화 등 이른 시기부터 즐겨 제작되었다 민화로 전해진 호랑이 전통은 상징성이 강해지면서 호랑이는 부패한 관리 까치는 민초를 대변하게 되었다 물고기의 경우 벽사뿐만 아니라 다산을 상징하는 길상적 소재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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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작도(虎雀圖)> 종이에 채색 100.5×60cm 19세기 (이우환 컬렉션,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호작도(虎雀圖)
“민화 호랑이 그림에는 대부분 호랑이와 까치가 등장하는데 이 그림에서는 참새가 까치 대신 호랑이의 상대역을 담당한 점이 이채롭다. 참새 외에도 토끼나 꿩 등이 호랑이의 상대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 정병모(경주대 교수)

 종이에 채색 87×52cm 19세기 (바라 컬렉션,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 종이에 채색 87×52cm 19세기 (바라 컬렉션,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
“등용문 고사가 충실하게 묘사되어 배경에 패방牌坊 모양의 용문을 표현한 중국의 약리도와는 달리 우리의 어변성룡도는 일출하는 태양이나 태극문, 또는 장식적인 여의주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 조에스더(미국 사우스웨스트대 교수)

文字圖
문자를 소재로 한 민화로서 원래 한자의 상형성에 기인하며 그 시원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민화 문자도는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발전했다 문자도는 다른 소재보다 윤리성과 이념성이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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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도(文字圖)> 종이에 채색 55×40.5cm(각) 8폭 병풍 19세기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문자도(文字圖)
“이 효제문자도 8폭은 판화로 글자의 윤곽을 찍은 후에 내부를 흑색 바탕으로 채우고 다시 각종 동물, 새, 화초, 일월日月, 운문雲文 등을 그려넣은 것이다.”
– 진준현(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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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백문자도(飛白文字圖)>(부분) 종이에 채색 95.2×34.8cm(각) 6폭 병풍 19세기 (호림박물관 소장)

비백문자도(飛白文字圖)
“효제孝悌 충신忠信 예의禮意 염치廉恥 국원菊遠 강산江山 등 여섯 폭이 남아 있는 비백서 문자도 병풍이다. 비백이란 큰 붓으로 먹을 묻혀 재빨리 큰 글자를 쓸 때 먹이 묻은 곳과 묻지 않은 곳이 뚜렷이 대비되어 필획 중 흰 부분이 마치 날아가듯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진준현(서울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관)

 

 

SPECIAL FEATURE 행복을 담은 색깔 그림 길상화吉祥畵 다시 보기

윤범모 가천대 교수

‘미술계의 숙원 사업’이던 우리의 채색화를 집대성한 두꺼운 채색화 도록이 드디어 출판되었다. 《한국의 채색화》(다할미디어 발행)가 바로 그것. 우리는 이 책에 소개된 채색화 작품을 통해 우리 민족의 독창성과 감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아, 아름답다! 우리 색깔 그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우리 민족의 회화작품 가운데 이렇듯 아름답고, 멋있고, 독창적이고, 상징적인 그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진정 국제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우리의 그림이다. 그런데, 강하게 치밀어 오르는 의문 사항 하나, 그것은 바로 기존 한국미술사 관련 저술들의 한계이다.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기왕의 한국회화사 관련 저술에서는 우리 채색화 작품을 찾아볼 수 없다. 정말?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우리 색깔 그림’을 푸대접하고 무시했던가. 작가명과 제작연도를 알 수 없는 ‘민화’는 미술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에 ‘하자’가 있다는 것, 하지만 이는 궁색한 변명일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채색화를 다시 보아야 한다.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다

그동안 한국회화사 연구는 수묵 문인화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의 예술관은 한마디로 예술 천시관賤視觀이었다. 그림 그리기는 취미생활 정도의 여기餘技로 여겼지 직업적 대상이 아니었다. 예술은 완물상지玩物喪志의 애물단지 정도, 그래서 사대부가 가까이 할 대상은 아니었다. 문인 당사자들이 여기라고 주장한 수묵 문인화를 가지고 한국회화사의 골간으로 삼아 기술했으니, 이는 불구의 연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문인화는 중국풍을 기본으로 하여 전개되었으니, 민족 회화의 독창성 문제를 생각할 때 한계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의 그림, 그것은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 불화, 조선 초상화와 기록화, 불화와 무속화, 그리고 이른바 민화로 이들의 공통점은 채색화이다. ‘민화’는 채색화의 꽃이다. 따라서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이다. 회화사 연구의 시각 교정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한국의 채색화》는 이 점에 대해 절규한다. 절규!
흔히 한민족을 일컬어 백의민족이라고 한다. 어느 순간에는 그랬을지 모르겠다. 현재 한국인은 백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종로거리에서 흰옷 입은 사람 만나기란 매우 어렵다. 실제로 국가 기관에서 한국인의 색채선호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오늘날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색? 그것은 파랑색이었다. (참고로 오늘날 세계 민족의 색채 선호 역시 파랑색이 1순위라는 조사보고서가 있다.) 바닷가 출신 사람들은 완벽할 정도로 파랑색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가, 섬 출신 김환기는 파랑색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못할 정도로 파랑색을 좋아했다. 통영 출신 전혁림 역시 파랑색을 작품의 기저로 삼았다. 오방색의 단청을 보자. 여기서 바로 한국인의 색채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단청과 같은 원색의 농채濃彩를 좋아한다. 하지만 일본인은 2차색인 간색間色을 좋아한다. 일본 미인도에 보이는 간드러지는 색깔과 필선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한민족은 밝고 짙은 원색을 좋아한다. 그래서 채색화가 한민족의 심성 표현에 적합했던 것이다. ‘민화’는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민화’는 무명의 저속한 하수의 그림이 아니다

민화라는 용어를 만든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민화를 무명의 저속한 하수下手의 그림이라고 개념 정리했다.(물론 하수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민화는 아름답다고 말했다.) 아무튼 민화하면 3류의 그림, 심하게 말해서 시골 장돌뱅이의 막그림 정도로 폄하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표현은 민화의 본질을 무시한 것이다. 민화는 그렇게 무명의 하수 그림이 아니다. 더군다나 저속한 그림도 아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민화작품의 독창성과 상징성, 장식성과 해학성 등 특성은 결코 하수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 나름대로 훈련된 과정을 거친 수준급 화가가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보하여 그린 작품이다. 하여 민화는 마을 공동체의 눈높이에 맞춘 공동체 사회의 시각적 산물이다. 민화세계의 특성으로 동심童心을 들 수 있는 바, 동심의 표현은 고수가 아니면 불가능한 수준이다. 추사 김정희의 〈板殿〉(강남 봉은사 현판)이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아프리카 미술의 제작 과정처럼 익명성은 주요한 특징을 이룬다. 아프리카 미술은 마을의 공동의지를 작품에 담는 것이 특징이다. 이때 작가명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미술작품처럼 작가의 개인 브랜드를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화의 무명성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여겨진다.
기왕의 민화 걸작전은 상당부분을 왕실회화 작품으로 꾸몄다. 근래 궁화宮畵 관련 연구 성과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궁화와 민화의 구분을 요구하게 되었다. 왕실에서 사용한 궁화를 두고 백성 민民자를 붙이기에는 어폐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화나 민화는 똑같은 채색화이고 커다란 의미에서 형식과 내용이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있다. 궁화의 작가는 도화서 화원이었고, 군왕에게 진상하는 그림에 자신의 이름을 표기할 수 없는 신하의 신분이었다. 궁화에 작가명이 누락된 것은 시대적 환경의 반영이다. 이런 궁화가 민간에 퍼져 유행하면서 이른바 민화의 세계가 광역화되었다. 궁화와 민화는 재료를 비롯 표현형식 등에서 약간의 차이는 보이지만 크게 보면 같은 맥락에서 평가하게 한다. 민화의 물결은 점차 넓게 파급돼 민화의 독창성과 함께 자생력을 갖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민화라는 용어의 비과학적 부분이다. 민화는 하수의 저속한 그림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궁화와 민화의 경계선 구별 짓기에 어려움이 있다. 궁화와 민화의 완벽한 구별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수용자 중심의 이와 같은 구별이 얼마만큼의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근본적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화원이 똑같은 그림을 2장 그려 한 점은 왕실에 진상하고, 또 한 점은 민간의 친지에게 주었다면, 그것은 궁화인가, 민화인가. 더군다나 화원은 중인 출신으로 피지배계층에 속한다. 왕공사대부 계층도 아닌 중인 출신이 궁정화풍을 이룩하면서 그린 것이 궁화이다. 하지만 궁화의 광역화 현상은 민화와 대동소이한 형상을 만들게 했다. 요즘의 현상은 궁화와 민화를 한 형제로 볼 것인가, 남의 집 식구로 볼 것인가, 혼란을 자초하는 꼴이다. 무엇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점이 있다. 현재 민화 그리기 붐은 전국적으로 열광의 도가니를 만들고 있다. 10만 명 이상의 민화인구는 한국 문화현상의 아주 독특한 흐름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들이 ‘민화’라고 그리는 내용을 보면, 대다수가 궁화라는 점이다. 민화공모전 수상작은 궁화를 모본으로 삼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궁화는 민화보다 규모로 보나 내용의 품격으로 보나 고급스럽고 화려하기 때문이다. 궁화 취향은 시대적 추세의 반영이다. 그래서 민화라는 용어를 고집한다면, 궁화라는 보물창고를 잃게 된다. 굳이 민화라는 용어를 쓰고자 궁화라는 전통을 방기해야 좋을까.
이른바 민화의 내용은 대부분 행복추구이다. 가장 큰 사랑을 받은 화조화 부분,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작품이 남은 모란 그림, 이는 바로 부귀영화의 상징이다. 모란병풍 그림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또 장례식도 거행했다. 모란 사랑의 조형적 증거물이다. 책거리, 문자도, 인물화, 산수화 등 민화작품에 내재하는 기본적 심성은 바로 행복 추구이다. 산수화도 넓은 의미로 행복을 추구하는 그림이다. 그래서 한 일본인 학자는 민화라는 용어를 차라리 ‘행복화幸福畵’라 부르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용어의 신선하지 않음, 이런 점을 감안하여 나는 지난 3월 열린 ‘경주민화 포럼’에서 출전이 확실한 ‘길상’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길상화吉祥畵’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러니까 궁화와 민화를 모두 아우르면서 우리 채색화의 특성을 담아낼 용어, 무엇보다 무명의 저속한 그림이 민화라는 야나기 이론의 개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의 산물이었다. 물론 새로운 용어가 자리매김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조선말기 왕실에서부터 시골의 민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유행했던 우리 식의 그림, 그것의 형식은 채색화였고 내용은 길상화였다는 점이다.

경상북도 상주에 위치한 남장사 극락보전 벽에 그려진 물고기를 탄 인물 © 윤범모

경상북도 상주에 위치한 남장사 극락보전 벽에 그려진 물고기를 탄 인물 © 윤범모

사찰에서도 길상화를 그렸다

채색화의 전통을 온전히 지킨 곳은 사찰이었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억불숭유 정책에 의해 핍박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사찰은 고려의 찬란한 불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펼쳤다. 채색의 전통을 지킨 공로, 이는 정말 박수 받을 일이다. 어째서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민화’가 대대적으로 그려지면서 유행했을까. 거꾸로 표현하면, 이 시기는 정치 경제적으로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민간의 생활은 글자 그대로 궁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렇듯 살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행복을 담은 그림을 좋아했다. 길상화를 보면서 괴로운 일상생활을 잊고 내일의 행복을 꿈꾸었다. 마치 망자亡者를 위무慰撫하기 위한 감로도甘露圖가 이 시기에 유행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역설적 표현은 세상을 훈훈하게 한다. 길상화 속의 풍자정신과 상징성은 이런 의미에서 더욱 돋보인다.
오늘날 사찰 벽화에 남아 있는 민화풍의 그림들, 사찰이 바로 민화 제작의 모태 역할을 했음을 증거하는 부분이다. 토끼가 호랑이에게 담배 물려주는 그림, 이런 내용이 왜 사찰 벽화에 그려졌는가. 산신각의 산신도는 타종교를 배려한 불교의 산물이라 볼 수 있지만, 불교와 무관한 민화풍 소재의 사원 벽화는 정말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조선시대 말기의 사원경제는 매우 열악했다. 제지업이 사찰에서 흥행했던 것도 경제난 타개책의 일환이었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불화를 그리는 화승畵僧이 민화를 그려 경제문제를 해결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찰은 채색 물감을 다루는 전문성을 지니고 있었고, 또 채색물감은 비쌌기 때문에 아무나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청 담당 가운데 소묘력을 요구하는 그림, 바로 별화別畵 담당 화가는 민간용 민화를 그릴 수 있었다. 벽에 그린 내용을 종이에 그리면 바로 ‘민화’가 됐다. 이런 민화작품에 작가 이름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까치 호랑이를 그려주면서 굳이 스님의 법명을 밝힐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증언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고암 이응노가 주인공이다. 그는 1920년대 초 상경하기 직전 고향(홍성, 예산)의 사찰에서 ‘민화’를 그렸다. 당시 사찰에서는 민화를 많이 그렸는데, 고암도 그곳에서 일당을 받고 그림을 그렸다. 건장한 남자의 하루 품삯이 20~30전 할 때 고암은 1원을 받았다. 당시 스님들이 많이 그린 내용은 까치 호랑이 그림이었다. 뒤에 고암은 일당 5원을 받게 되었는데, 그 돈을 가지고 고암은 운동화와 기차표를 사서 상경할 수 있었다. 사찰에서 민화를 그렸다는 증언, 이는 매우 흥미롭다. 화승畵僧이 민화를 그렸다는 증언은 민화작가의 위상을 제고시키면서 민화의 성격을 다시 헤아리게 한다. 사찰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채색 전통을 지켜 온 보루였기 때문이다. 채색화의 위상 재고를 요구하는 작금의 현실이다. 아름답고 독창적인 우리의 길상화를 위하여. ●

〈해학반도도〉 비단에 채색과 금박 714×227.7cm 12폭 병풍 1902년 추정 (미국 호놀룰루미술관 소장)

〈해학반도도〉 비단에 채색과 금박 714×227.7cm 12폭 병풍 1902년 추정 (미국 호놀룰루미술관 소장)

 

 

SPECIAL FEATURE 민화야말로 진정한 우리그림이다

정병모(경주대 교수)는 민화의 매력에 빠져 20년 넘게 민화를 연구하고 민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주저하지 않고 찾아나선다. 그는 〈반갑다 우리민화전〉 〈행복이 가득한 그림, 민화〉 등 많은 다수의 민화전시를 기획했고 《만화보다 재미있는 민화 이야기》 《민화, 가장 대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등을 출간했다. 현재는 민화학회 회장이자 한국민화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자타공인 민화전문가 정 교수에게 민화의 모든 것을 물었다.

민화라는 용어 자체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학회나 포럼 등에서 ‘민화’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용어 논쟁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민화라는 용어에 대해 좋아하는 이도 많지만,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지었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보이는 이도 적지 않다. 그 대안으로 한민화, 겨레그림, 생활화, 천인화, 서민회화, 한채화 등 여러 용어가 제안된 바 있다. 하지만 새로 제안된 용어 가운데 어느 하나도 민화를 대체하거나 보편화되지 못했다. 민화라는 용어는 그 타당성 여부보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무언가 애틋한 느낌으로 인해 사랑을 받는 것이다. 결국 명칭은 학자나 연구가들의 뛰어난 이론보다 일반인의 취향과 기호에 의해 생명성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민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대민화의 예술성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저변이 다양하게 이루어진 토양 속에서 세계적인 예술가가 배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화의 대중화는 세계적으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예컨대 19세기 중엽 유럽의 사회주의적 성향의 미술이론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이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와 같은 이들이 미술의 대중화를 부르짖었으나 이론과 구호에 그쳤고 실제적인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이론가가 아니라 주부의 취미생활로 시작해 이룩한 민화의 대중화 현상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성공한 예로서 특기할 만하다.

조선후기 풍속화는 서민이나 사대부의 일상생활을 그린 그림이다. 민화는 서민이 그리던 그림이다. 풍속화와 민화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담론은 무엇이며 두 장르 간 영향관계에 대해 설명 부탁한다.

풍속화와 민화는 다른 분류기준에서 나온 개념이다. 풍속화는 산수화, 화조화와 같이 제재별로 분류한 것이고, 민화는 궁중회화, 사대부회화와 같이 신분별로 구분한 것이다. 뿌리는 다르지만, 이들은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신분사회가 붕괴되고 하류계층의 서민문화가 발전했다. 그 첫 번째 징후가 18세기의 풍속화로 나타난다. 이 시기 풍속화는 사대부 및 서민의 생활상을 다루고 있지만, 그 수요처는 주로 궁중이고 정치적 목적이었을 때 진정한 서민회화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서민의 생활상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향에 힘입어 19세기에는 진정 서민화가가 제작하고 서민 및 사대부들이 즐긴 그림이 유행했다. 그것이 민화다. 이러한 추세는 20, 21세기에 대중문화로 이어져 오늘날 문화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즉 풍속화와 민화는 18세기 이후 역사의 수면으로 떠오른 서민문화의 표상이고, 현대에 대중문화의 발전을 가져온 모태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민화를 ‘19세기의 문화’로 인식한다.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민화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을 만한 대표작품이 있는가. 또한 역사가 긴 민화를 문인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술사에서 주목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19세기는 민화가 성행한 시기이지, 민화의 역사가 시작한 시기는 아니다. 넓은 의미로 보면, 선사시대 암각화가 민화 역사의 시작이고, 좁은 의미로 보면 통일신라시대 처용문배가 시작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백성들이 대문 앞에 처용문배를 붙여서 역신을 내쫓았다는 기록이 있다. 진정한 민화인 백성의 그림으로는 기록상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예라 할 수 있다. 원래 한국의 회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불화와 같이 채색화가 주류를 이뤘다. 그런데 유교국가인 조선이 들어서면서 사대부의 이념에 맞는 수묵화와 문인화가 화단을 주도하면서 채색화는 변방으로 밀려났다. 이후 18, 19세기에 민화를 통해 그동안 소홀히 했던 채색이 기적처럼 부흥했다. 그것이 바로 조선후기 민화의 역사적 의의 중 하나다.

민화를 그린 주체는 서민이지만 그 문화를 서민만이 향유한 것은 아니다. 민화와 궁중회화는 어떻게 구분 지을 수 있을까.

민화와 궁중회화는 기본적으로 수요가 다르다. 민화는 서민이나 사대부들이 즐긴 그림이고, 궁중회화는 왕실에서 쓰인 그림이다. 그렇다보니 민화는 크기도 작고 안료나 종이와 같은 재료도 비싼 것을 사용하지 않지만, 궁중회화는 크기가 크고 재료도 비싸고 좋은 것을 사용했다. 게다가 둘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여부’이다. 민화는 표현주의적 성향을 띠는 반면, 궁중회화는 사실주의적 묘사를 중시한다.

《한국의 채색화》에서 보듯 채색화는 불화, 궁중기록화 등도 포함할 수 있게 범주가 확장된 용어다. 실제로 승려들도 민화를 많이 그린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채색화라는 용어에 불화를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가 있는가.

도록의 제목이 ‘한국의 채색화’, 부제는 ‘궁중회화와 민화의 세계’다. 한국 회화는 크게 채색화와 수묵화로 나뉜다. 채색화 가운데 이번 도록에서는 궁중회화와 민화만을 담았다. 따라서 채색화는 민화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상위개념이다.
채색화를 내세운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수묵화 위주로 편성된 화단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일본화 하면 채색화를 가리키고, 중국화 하면 수묵화를 떠올린다. 그리고 한국화 하면 수묵화를 가리킨다. 수묵화는 중국 사대부문화의 산물로서 중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대표적인 중국문화이다. 수묵화 혹은 문인화는 단순한 이미지가 표현된 것이 아니라 고고한 중국의 철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러한 중국적인 성향이 강한 수묵화보다 자신의 개성이 강한 채색화를 내세웠다. 일본에서 수묵화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은 배울 데가 없어서 한국이나 중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할 정도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이 문화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불화 등 화려하게 전개되어 온 전통 채색화가 변방으로 밀려나고 중국식의 수묵화가 조선 화단을 지배해온 것이다.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한국화=수묵화”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이제는 한국적이면서 전통적인 채색화를 부활시켜서 우리의 진정한 회화를 찾자는 취지를 갖는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민화 작가의 맥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조선시대 민화는 6·25전쟁 이후 격동기를 겪으면서 그 전통의 맥이 잠정적으로 끊어졌다. 다행히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이 1970년대 말부터 한국의 조자용, 김호연, 김철순, 이우환, 일본의 이타미 준 등에 영향을 주면서 민화가 되살아났다. 예전의 민화작가는 거의 사라졌지만, 문화재 수리 보수, 수출화 제작 등으로 그림 작업을 하신 분들에 의해 되살려져서 오늘날 민화로 이어진 것이다.

민화는 형식과 틀이 정해져 있다는 편견이 있다. 민화에서 창작성은 어디까지 허용되며, 어떤 식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민화를 모사하는 분들은 대부분 아마추어로서 취미생활로 하거나 문화재로서 기술을 전승하는 분들이다. 요즈음 베스트셀러인 컬러링북 《비밀의 정원》처럼 우리 그림인 민화를 모사하면서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주부의 경우 오랫동안 자녀 교육과 집안 살림으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민화를 통해서 찾으며 삶의 새로운 활력을 찾고 있다. 그분들에게 무작정 창작성을 요구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오히려 미술의 대중화라는 다른 측면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조선의 민화가 일본의 민화와 중국의 민간연화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

민화는 어느 나라에나 다 있다. 일반 사람들이 피카소나 김홍도의 비싼 그림을 집 안에 걸 수는 없다. 대부분 이름 없는 화가들이 그린 값싼 그림으로 집안을 장식한다. 그것이 민화가 어느 나라에나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이고, 아시아에도 당연히 나라마다 민화가 존재한다. 그런데 조선민화는 일본 민화나 중국의 민화인 민간연화와 비교할 때 전통적이면서 자유로운 상상력이 뛰어나 매우 현대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해학과 변형이 자유롭게 이루어진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조선민화는 판화 위주로 발달한 일본이나 중국 민화와 달리 주로 붓 그림으로 그렸다. 그로 말미암아 민화는 비슷한 것은 있어도 똑같은 것이 드물고 약간씩 변화를 주어 다양하게 발달했다. 이러한 점이 조선민화가 갖고 있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 전국 각지 대학의 부설기관과 민화연구소를 통해 민화강습이 이행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식 학과를 개설해 민화를 가르치는 대학은 없다. 작가와 이론가 사이의 관계와 교류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기존 미술대학의 교수들께서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 미술계가 어려워지면서 지방 미술대학의 순수미술 학과가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다. 그런데 미술시장의 움직임을 보건대 민화계는 놀라울 정도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새롭게 떠오르는 민화 시장을 감당할 수 있는 인력을 당연히 대학에서 키워야 하는데, 정작 미술의 주체들은 이러한 현상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미술대학도 현실적으로 변모해야 한다. 지금의 민화 추세로 보아 전국에 적어도 2~3개의 민화학과가 생겨야 하고, 미술대학에서는 민화에 대한 실기 및 이론 강의를 개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화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시도가 필요할 때다. 민화센터의 수장이자 30년간 민화를 공부해 오신 전문가로서 우리 민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계신 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한다.

성철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보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가슴을 친다”라고.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실력으로 팝을 부르는 것보다 우리 가요를 부르는 것이 듣는 이에게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은가. 그림도 마찬가지다. 한국적인 특색이 뚜렷한 민화가 오히려 예술적인 감동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민화만큼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예술도 드물다. 민화는 분명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장르이다. 이를 널리 알리거나 이를 토대로 창의적인 그림을 그린다면, 다른 무엇보다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는 그림을 창작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진행・ 정리 임승현 기자

 2004년 민화조사차 일본 구라시키민예관를 찾은 정병모 교수

2004년 민화조사차 일본 구라시키민예관를 찾은 정병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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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콘텐츠는 최고의 감동을 선사한다”

한국 민화를 집대성한 단행본《한국의 채색화》출간

MM_SP_채색화이 책은 일찍이 “민화만이 세계시장에 먹힐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 세계를 다니며 민화를 조사한 정병모 교수의 열정으로 기획되었다. 필자는 정 교수의 부인으로서 1992년 12월 중국의 민간연화를 함께 조사하러 간 적이 있다. 중국과 수교하기 바로 전이었는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정말 겁 없이 중국 북경에 내려 20여 일간 중국의 연화를 조사하러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때를 계기로 정 교수는 우리나라 민화가 어느 나라 민화보다(주로 중국과 일본) 세계시장에서 큰 파급효과를 미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정 교수는 2010년부터 명품도록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은연중에 출판사를 운영하는 필자가 출간해주길 바랐지만 비싼 도록이 판매되기 어렵다는 생각에 선뜻 제안하지 못했다. 당시 어려워진 회사 형편상 엄두도 나지 않는 작업이었다. 그러던 중 2013년 봄 우연히 민화작가 두 분과 차를 마시면서 민화명품도록 이야기를 꺼냈고, 그중 한 분이 투자 제안을 했다. 그분의 한마디에 이 책의 기획은 본격화되었다. 1권을 기획했던 것이 3권으로 늘어났다. 그 사이 한 분의 개인투자자가 또 나타났고, (재)가나문화재단에서 선뜻 책값을 선지불하는 식의 투자를 약속했다. 우리 회사의 마케팅팀은 도록에 클라우드펀드를 도입하기로 했다. 즉 민화작가들이 투자자가 되어 선투자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결국 최소한의 제작비를 투자하여, 그 배의 가치를 지니는 책을 받는다는 개념이다. 전국적인 규모의 민화작가회와 전국 지역마다 터를 잡고 있는 민화작가 선생님들이 우리를 믿고(아니 정 교수를 믿고) 사전 예약을 해주었다. 그 결과 출간 전, 예약이 450건에 달했고, 책의 제작비는 전혀 염려하지 않고 최상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정 교수는 그냥 도판수집과 논문의 방향성만 제시하면 되는데, 최고의 명품을 만들겠다는 고집(열정)으로 제작 과정에 개입해 사사건건 부딪쳤다. 정 교수는 정말 “슈퍼갑”이었다. 중요한 사항에서는 정 교수와 편집장, 디자이너 그리고 필자가 합의해서 결정을 내리는데, “이건 아니다” 싶은 사항에 3사람이 동의하면, 나는 맞서 싸웠다. 바로 종이의 결정이고 표지에 대한 결정이다. 지금은 결정에 만족하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출판업을 하면서 가지지 못한 자부심을 느낀다. 어떤 분야건 좋은 콘텐츠는 사람을 감동시킨다. 어려운 시기를 거쳐 출간한 이 책은 더욱 가치있는 작업이었다.
《한국의 채색화》는 여러 가지로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우선 정병모 교수의 필생의 과제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살아생전 자신의 과제를 이루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20여 년 세월을 민화에 미쳐있었던(?) 정 교수 개인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두 번째는 민화계의 큰 업적이다. 좋은 명품을 모아놓았다는 점에서다. 이 아름다운 한국의 채색화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모아놓은 책을 출판하는 것은 앞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세 번째는 출판계의 향상된 기술이다. 이 책을 예약하기 전 많은 분이 일본의 《이조의 민화(李朝の民畵)》를
생각하며 과연 그 정도 수준의 책이 나올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졌다. 몇 해 전만 해도 도록은 수입지를 써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책 시대가 도래한 때에 이러한 미술 도록이 이후에 또다시 출간될 수 있을까. 혹 종이시대의 마지막 작품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최고를 지향해 만들었다. 이 책을 앱북으로도 기획하고 있지만, 시각적으로 주는 아름다움은 인쇄물을 따라가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네 번째, 도록을 통해 우리의 민화가 글로벌한 콘텐츠로 드라마, 음악에 이은 제3의 한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일본의 우키요에가 유럽에 자포니카 선풍을 일으킨 것처럼 말이다. 현재 일본은 물론 미국에서도 민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고 페루에서도 민화 체험을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불황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이러한 좋은 콘텐츠를 만들게 된 것은 민화인의 열정과 열망덕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을 완성하게 된 것은 순전히 민화인의 열정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애 Sni Factory 대표

 

 

SPECIAL FEATURE 민화民畵, 발화發花하다

(사)한국민화센터(이사장 정병모)에서 주최하는 <경주민화포럼2015>가 지난 3월 20, 21일
양일간 경주 현대호텔에서 열렸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이 포럼은 2013년 논의한 “민화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복기시켜 다시 포럼의 중심으로 삼았다. “같으면서 다른 세계, 궁중회화와 민화”라는 부제와 함께 열린 이번 포럼은 민화라는 용어와 개념에 대한 논쟁, 궁중 채색화와 민화의 개념 구분, 우리 민화를 포함한 서민/민중들의 문화에 뿌리 박혀 있는 웃음의 미학, 민화에 대한 양식사적 접근 등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첫날 포럼에서, 첫 번째 토론자로 참여한 윤범모(가천대 교수)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1927년 사용하면서 정리한 ‘민화’라는 용어와 개념의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용어의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길상화’를 민화를 대신할 용어로 제시하면서 좌중은 크게 술렁였다. 이후 “한국 웃음문화의 전통”을 발표한 조동일(서울대 명예교수)가 “민요, 민담과 함께 민화는 ‘민民’자 돌림 3형제이다. 민요나 민담이 ‘민’을 낮춰 부른다는 인식을 주지 않듯 민화라는 용어의 변경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용어 문제에 대한 논의에 불을 지폈다.
현재 전국 민화관련 인구는 약 10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각종 교육기관을 통해 민화를 배우는 일반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민화를 배우고 그리는 많은 이들은 민화에 대한 이론적 토대에 대한 궁금증 또한 상당하다. 그 동안 한국미술사에서 민화에 대한 연구는 문인화에 비해 다소 평가절하 되어왔다. 미술사학계의 개념정의가 확립되기 이전에 일반인들이 역으로 상아탑에 질문을 던지고, 개념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포럼에서 못다한 논의는 포럼 첫날 밤 약 2시간의 ‘번개 토론’으로 이어갔다. 이 자리에는 안휘준(서울대 명예교수), 윤열수(가회박물관 관장), 윤범모(가천대 교수), 정병모(경주대 교수)(왼쪽 사진)를 포함한 민화 이론 및 작가 관계자 약 30명이 참여한 가운데 민화의 개념정의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먼저 ‘민화’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자는 주장을 한 윤범모 교수는 “민화의 개념을 먼저 짚어야 한다며 개념이 변하면 용어도 변해야한다”며 “민화 연구에서 궁화와 민화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덧붙였다. 정병모 교수는 “현대민화의 개념을 포용할 수 있는 상위개념으로서의 용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최근 민화와 궁중화를 포괄할 수 있는 용어로 ‘채색화’를 내세워 도록을 출간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윤열수 관장은 “‘채색화’는 한국적인 용어가 아니라 어디에도 쓰일 수 있는 독창성이 없는 언어다. 하지만 ‘민화’는 세계적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경쟁력있는 용어다”라며, ‘민화’ 명칭 사용을 이어갈 것을 주장했다. 한편 안휘준 명예교수는 ‘서민화’ ‘위민화’ 혹은 ‘전승화’라는 다양한 용어를 제안했다. 민화는 우리의 전통미술을 계승한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전통을 이어간다는 뜻으로 ‘전승화’를 사용하면 민화를 떠올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더불어 민화에 대해서도 조선시대에 갑자기 등장한 장르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화원화가 출신이거나 아마추어 화가들이 주변사람을 위해 그린 그림을 민화라고 볼 수 있다며 “어떤 용어든지 시대 변화에 따라 내용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포럼과 특별토론에 참여한 다수의 작가들은 주로 민화란 용어를 사용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민화라는 용어를 오랜 기간 사용해 왔기에 대중에게도 낯익고 오히려 반감도 없다는 것이다. ‘민화’에 담긴 계급요소나, 궁중회화와 민화의 모호한 구별에 대해서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정리가 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아무래도 작가 입장에서는 소재의 폭을 넓혀 창조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궁중회화와 민화의 구분 짓기를 꺼리는 경향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조선시대의 민화와 현대민화는 그 용어는 같으나 개념은 전혀 다르게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모아졌다. 민화는 궁중이 사라진 후, 궁중회화까지를 흡수했고 신분제가 사라진 이후 민화를 제작하고 향유하는 사람도 변화했다. 민화의 표현은 전통을 충실히 계승했으나 오늘의 시대를 반영하는 미감과 독특한 창조성은 고전민화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요소다.
이날의 토론은 ‘민화’에 대한 개념정의와 그 장르의 분류가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냈다. 민화인구가 10만명에 육박하고 국제 미술사에서 한국미술의 한 장르로서 논의되려면 국내의 미술사적 개념정리는 선행되어야 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단순히 ‘작명’의 문제를 떠나서 그 개념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학문적 접근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민화시장을 확장시키고 그 기반을 튼실히 하기위해서 학계의 활발한 논의와 학문적 정의가 필수불가결하다. ●
임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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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엄재권 (4)“민화에 대한 인식이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

엄재권 (사)한국민화협회 회장

민화가 각광받고 있다. 민화의 매력은 무엇일까.
민화는 접근성이 매우 높다. 일단 화실이 전국 각지에 있다. 전국 대학 부설기관 평생교육원만 40곳이 넘는다. 이 회원들이 대부분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기초적인 민화는 초보라도, 열흘 정도만 배우면 한 작품이 완성된다. 기존에 있는 초를 따서 그 위에 색을 칠하면 작품이 탄생한다. 그렇게 시작해서 꾸준히 하다보면, 민화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한국민화협회 회원은 어떻게 구성돼 있나.
민화협회 회원만 400명이 넘는다. 입회 절차가 까다로운 편이다. 민화협회 공모전 대상을 받으면 30점, 특선 15점, 입선 8점, 미술대전 대상 10점을 얻는다. 민화협회 공모전을 살리기 위한 방법이다. 이렇게 30점을 채우면 입회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 민화에 입문한 지 최소 5년 이상이 되어야 자격요건을 갖출 수 있다.

협회의 주요 활동과 교육 진행과정이 궁금하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민화로는 우리 협회가 유일하다.
또 구청의 허가를 받은 평생교육원을 운영한다. 지도자과정, 신입생을 교육하는 기관이다. 이론과 실기를 두루 가르친다. 1기의 경우에는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론 강좌를 맡아서 진행했다.

협회 산하 기관 도화원은 어떤 곳인가.
협회에 속한 기관이지만 아직 그 형태가 애매하다. 교육기관은 아니다.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계속 논의할 생각이다. 공모전 대상 수상자가 도화원에 입회한다고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시스템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고민 중이다.

민화협회 신임 회장으로서 협회를 이끌어갈 계획이 궁금하다.
회장의 임기는 2년, 한번 연임이 가능하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기 때문에 계획을 면밀히 짜서 실행해 나가겠다. 우선 한때 부는 바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민화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아질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 첫째 목표다. 그래야 민화가 한 단계 더 도약 할 수 있다. 학회에서 세미나를 할 때, 몇몇 이론가만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민화에 관심 있는 모든 이가 함께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특히 전국에 흩어진 협회들을 모아서 연계하려고 한다. 민화협회 외에도 민화전업작가회, 우리민화협회, 민화센터 등 다수의 민화관련 단체 및 기관이 존재한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가 민화협회 회원과 겹친다.
임승현 기자

SPECIAL ARTIST 김주호

테라코타를 비롯해 나무와 돌, 그리고 단단한 철판에 이르기까지 조각가 김주호가 다루는 재료는 다양하다. 하지만 그 재료가 무엇이든 그가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주제의식은 초지일관 뚜렷하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찰과 사유로 포착한 세상의 표정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김주호의 작품은 내용과 형식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작가정신과 표현방식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김주호의 작품세계를 탐구한다.

말하는 조각들

성완경 인하대 명예교수

김주호 작품의 출발점은 ‘지금 여기’이다. 가까운 곳에 눈길을 주면 세상이 돋보기로 보듯 새삼스럽게 보인다. 거리의 삐까 번쩍 요란하고 누추한 간판들도 새롭게 보인다. 소통은 그의 작업의 핵심이다. 돋보인다는 것은 혼자서 되는 일이 아니고 나와 상대방이 서로 궁합이 맞았을 때 가능하다. “내 삶에서 나에게 관심을 끌려는 어떤 것을 알아봐주는 것, 이것이 소통의 기본이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꼼꼼히 보는 것, 일상 속을 걸으며 끊임없이 찬탄하는 것, 기어코 무언가 찾아내 무릎을 치고 사랑하고야 마는 것. 어쩌면 이것이 그의 작업의 민중적 지평이자 발견자로서의 전위미학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막걸리엔 ‘생’자가 붙은 생막걸리가 대세인데 그 생막걸리병의 다양한 라벨들을 보며 그는 삶의 충동과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배운다. 발견을 하고 철학을 한다. 대중적 삶의 지혜와 이름 없는 인생들의 에너지에 관해. 그것은 사랑이다. 그에게 소통이란 이처럼 사랑과 발견에 기초한 것이다. 항상 눈 맞추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김주호 작업의 출발이다. 그의 조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는 조각이기를 열망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말하는 조각이자 춤추는 조각, 사랑스럽게 몸을 뽐내는 조각, 타자의 시선을 받으며 행복을 뽐내는 신체들이다. 몸짓, 함박웃음 혹은 미소, 교환, 발화로서의 조형.
그의 조각 재료는 흙, 돌, 나무, 쇠, 발견된 오브제 등이다. 흙을 원통형으로 감아 쌓아 올린질구이(테라코타) 인물상들은 사랑으로 충만해 있다. 이 시기에 통나무에 작업한 나무 조각들도 재료만 바뀌었지 기본적으로는 통 형태의 질구이 작업과 유사한 세계를 보여준다. 따뜻하고 밝고 해학에 넘치는, 삶의 다양한 표정들을 뿜어내는 작품들이다. 불규칙한 나뭇가지들을 자유롭게 이용한 최근의 ‘책조각’들은 더 날렵하고 더 언어적이다.
2012년 6월 관훈미술관과 나무화랑 개인전 때 나무화랑 쪽에 설치된 나무에 채색한 소품 조각들을 말하는 것인데 이 조각들은 모두 책 모양으로 채색되고 글씨가 쓰여진 나무판자 위에 놓였는데 책 표지에 <그때 그 사람들-100년>, <너에게 침을 뱉어라>, <남북 왜 악수하기 힘들까>, <미국이라는 나라> 또는 <Folk Art in Korea>, <Sculptures from objects>, <Art in Nude> 같은 단어가 책 제목처럼(그리고 작품 제목처럼) 적혀 있는 작업이다. “책이 말을 한다/ 눈길을 끄는 표지/ 서서히 그들의/ 몸짓이 일어난다./ 손짓, 몸짓하며 나온다./ 광복 60년의 몸짓이/ Nude의 매혹적인 눈길도/ 책이 내 손길보다/ 먼저 와 있다.”(작가의 작업노트)
최근의 철판작업들은 드로잉 선을 따라 철판을 도려내어 그것들을 연결하고 구부려 공간 속에 펼치거나 세워놓은 작업인데 이 같은 발화의 새로운 실험을 보여준다.

2012년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작가의 개인전  전시광경. 앞쪽에 보이는 작품 (MDF에 에나멜페인트 2008)는 부천천만화박물관에서 열린 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으로 만화가 윤승운의 캐릭터를 응용했다

2012년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작가의 개인전 <사람사이> 전시광경. 앞쪽에 보이는 작품 <룰루 하하>(MDF에 에나멜페인트 2008)는 부천천만화박물관에서 열린 <타임캡슐을 열다>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으로 만화가 윤승운의 캐릭터를 응용했다

  64×21.5×16cm 혼합토(섭씨 1070도) 2015

<창문-2> 64×21.5×16cm 혼합토(섭씨 1070도) 2015

작가와 닮은 작품
김주호가 살고 있는 곳은 강화도다. 강화도에서도 아주 깊은 곳이다. 김주호는 강화도에 20년째 살고 있다. 강화도에서 지금은 퇴직한 직장(보성고등학교)이 있는 서울까지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출퇴근했다고 한다. 최근 김주호는 생애 첫 레지던시를 인천아트플랫폼에서 했다. 흔치 않은 일이기도 하고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의 나이를 생각할 때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그에겐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그곳의 잘 갖추어진 철조작업장에서 작업할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이유였다. 플라스마 용접 절단기, 크레인 등 장비가 잘 갖춰진 그곳에서 그는 봄과 여름 6개월 동안 땀 흘리며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결과물로서의 작업을 두 전시장에서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서울 북촌의 가회동 60, 다른 하나는 평창동의 김종영미술관이었다. 앞의 것은 개인전이지만 규모가 아주 조촐했고 뒤의 것은 5명을 초대한 기획전(<인간 그리고 실존전>)의 한 부분이지만 규모도 제법 컸고 작품수도 더 많았다. 작품은 모두 철판 용접 환조와 드로잉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드로잉은 빠르고, 날카롭고, 자유롭고, 도상학적으로 풍부하고 흥미로웠다. 철판조각은 바로 그 드로잉들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발화하는 조각, 녹아내리며 가스 방울이 되어 떠오르는 발포제 약과도 같은, 혹은 만화의 말풍선 같은, 혹은 만화의 그림 글자나 동작선 같은 그런 상태를 보여주는 조각들이다. 그 속에는 만화가 있고 언어가 있고 기호가 있고 연극이 있고 퍼포먼스가 있고 몸짓이 있고 패션이 있다. 풍물놀이의 도리깨질이나 목구멍을 튀어나온 밥풀이나 (만화의) 말풍선 같은 것들이 턱턱 들어가 있는 듯한 조형들이다.
김주호는 발견하는 사람이다. 김주호의 발견은 대개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된다. 앞서 잠깐 얘기한, ‘생生’막걸리를 마시다가 ‘생生’자 들어간 막걸리가 많다는 걸 발견했다는 얘기로 잠시 돌아가 보자. 그 발견 후 2010년 봄부터 그는 생자 들어간 막걸리 통을 모았다. 국순당 생막걸리, 서울 生生막걸리, 生장수막걸리, 덕산 生막걸리강화, 쑥生막걸리, 생배다리막걸리 등…. 그러면서 김주호는 거기서 우리 시대의 맥을 읽을 수 있다는 발견을 한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생은 여러 분야에서 쓰여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자가 붙은 단어를 좀 더 나열해 보면, 생비지, 생고기, 생금(치약), 생생우동, 얼큰 생라면, 순한 생라면, 생칼국수, 생짜장면, 생, 생머리, 생방송, 생생 정보통, 생생도시…. 결국 그는 생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왔고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생자 바람이 막걸리에 집중되면서 더 확실히 맥을 잡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生을 이렇게저렇게 분석해보는 것은 작품 제작에 도움이 되어서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 다음 말이 중요하다. “작가는 자기 나름의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자기 주변에서 찾을 때 더 실감나는 작품이 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가 찾는 것은 생생세상, 생생풍경이다. 일상 속 지금, 지금 여기의 생생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생생한 옷매무새, /마음껏 자랑하는 당당한 포즈, /길거리 여기저기 /사람이 아름답다 /꽃보다” 바로 이것이 생생풍경이다. 그의 중립적으로 품위 있고 우아하고 당당하고 아름다운 질구이 인물상들이 뿜어내는 무척 섬세하고 편안하고 당대적인 아우라의 핵심이 이것이다. 흙의 터치, 사실과 과장, 포즈와 표정, 단순화, 장신구, 질구이의 질감을 관통하는 것은 그야말로 당당하고 편안한 당대의 미학이다. 놀라운 성취이다. 목조와 석조 작품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다.
이 같은 성취의 바탕에는 삶의 진실과 소통에 대한 그의 소박하고도 질긴 믿음과 추구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어깨 두들기며 걱정 말라는 든든한 이웃’을, ‘(그들과) 함께 하는 흐뭇함’과 ‘따스한 이야기’를, 그리고 ‘어제가 좋아 보이고 내일이 괜찮을 것 같은 지금 여기’를 사랑하는 작가이며 답답한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람에 대한 신뢰를, 그리고 전통적 삶에 대한 신뢰감을 갖고 있는 이웃이다. 본질적으로 그의 작업은 웃음과 사랑의 회복을 선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알아보며 “여기요!”라고 외칠 때 인간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작가. 그것이 김주호다.
2002년 <제4회 광주비엔날레>에서 김주호는 5·18 때 헌병대가 쓰던 건물에서 열린, 필자가 기획한 프로젝트3 <집행유예전>에 출품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사병휴게실에 천으로 만든 실물 크기의 인물상 5점을 자유롭게 배치하여 숨 막힐 듯 음울한 이 건물에 유머러스한 공간을 연출했다. 당시 이 작품 제작을 위한 현장 설명회에 참석하고 나서 그가 쓴 ‘친절하고 자세한 답사일기’에 이런 대목이 적혀 있다.
“자유관의 다큐감상. 5·18의 진실이 만천하에 밝혀져 반드시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 법정에 선 전직 대통령. 그 수뇌들. 모두 지금은 대접 받으며 잘살고 있다. 달라진 것 없잖아. 오, 이 깨끗한 역사. 하얀 브로크 벽면. 누군가 낙서를 할 만한 브로크 벽면인데도, 저 흰 칸. 칸. 칸. 아무도 손대지 않은 관심 밖. 그 옆 골프장에는 평일인데도 고급 승용차가 꽉 찬 것과 참 대조적이군. 깨끗한, 조용한 민주화의 현장. 권위와 폭력과 위선과 망각의 건축물을….조롱하자! 자유롭게, 그리고 즐겁게.”
얼마 전 내가 본, 김종영미술관의 <인간과 실존전>은 그때로부터 11년 후에 열린 전시인데 이 전시 카탈로그에 김주호는 <나는 본다>라는 제목으로 ‘작가의 말’을 기고했다. “외국 관광객이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이 판문점이라 한다. 그럴 테지 선 그어놓고 넘어갔다 하면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게 희한하게 보일 게다. 세계가 하나다 하고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는데 세상에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다니. 이런 구경거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밑바탕에는 우리의 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자리 잡고 있다. 옆자리에 앉은 분이 갑자기 큰소리로 말한다. ‘… 아 글쎄 통 무슨 당인가 하는 거 뭐야 이 새끼 있잖아. 무기까지 있다 하잖아. 그 새끼 같은 놈이 아직 …’
재판도 받기 전에 국민재판에서 판결이 났다. 나는 그냥 듣고만 있다. 우리의 아픈 현실이 내 눈에 차츰 다가온다.” 김주호의 발견이 편안하고 행복한 것에만 머물지 않음을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분단 현실의 모순과 그것이 야기하는 불편함이나 낯섦을 우리 모두 비껴갈 수 없듯이 그의 시선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김주호의 집에 갔다. 그의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밥상은 그와 그의 아내의 인상만큼이나 정갈했다. 동네사람들하고 뚝딱뚝딱 지었다는 그의 집은 2개 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 겸 지하 공간이 그의 작업장이고 그 위층이 살림집이다. 마당 한켠에는 흡사 농가처럼 허름한 비닐하우스가 있고 그는 그곳에서도 작업을 하는데 겨울에는 주로 별채로 지은 작업장 안에서 한다고 한다. 살림집 아래층이나 별채 작업장 건물이나 모두 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두 공간 모두 한 개인의 오랜 작업과 시간이 숨 쉬는, 작은 신전이나 성소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작품은 마당에도 있는데, 그것들은 또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소박하게, 또는 태연하게 비바람과 햇빛에 온몸을 내놓고 있다.
김주호는 조용한 사람이다. 그는 욕심이 없고 성의를 다해 사람을 대하고 풍족하지 않은 삶이지만 창호지의 여백처럼 정갈한 여유가 몸에 밴 사람이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입가의 밥풀 같은 미소가 절로 나오게 하는 작품들은 바로 그런 ‘정갈한 여유’에서 나오는 유머인지도 모르겠다. 바쁘거나 강파른 성정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유머 말이다. 그의 작품들은 호호호, 푸하하, 훗후후, 낄낄낄, 룰라하하, 갈갈갈 거리며 말을 건다. 그의 인물들은 정답다. 김주호의 유머는 혼자 즐기는 유머가 아니라,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의 유머다. 그의 다양하고 방대한 테라코타 작업들에서 보이는 인간군상의 표정과 몸짓이 바로 그런 종류의 유머인 셈이다. 그것들은 드로잉 철조에서 다시 새로운 표정을, 좀 더 낄낄대고 풍자적이고 날카로운 유머를 새롭게 펼쳐 보인다. 김주호는 ‘지금’, ‘바로 여기’의 작가다. 김주호야말로 그 자신이 생막걸리이고 생생작가다. ●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린  전시광경. (앞쪽) 스틸 패널116.5×39×8cm 2013,  종이에 아크릴 150×300cm 2013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린 <인간 그리고 실존> 전시광경. <휘날리다>(앞쪽) 스틸 패널116.5×39×8cm 2013, <금수강산> 종이에 아크릴 150×300cm 2013

* 이 글은 <2013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보고 및 전시도록에 실린 필자의 글을 재 수록한 것입니다.

 

ARTIST REVIEW 김종인

바우하우스 교장을 지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는 “건축가, 조각가, 화가, 우리 모두는 공예로 돌아가야 한다. … 예술가와 공예가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예술가는 고귀한 공예가이다…”라고 말했다. 작가 김종인은 도예가 혹은 공예가라는 제한한 타이틀로 규정지울 수 없다. 그의 작품은 실용성과 조형성, 그리고 실험성과 예술성을 한 몸에 지닌 확장된 개념의 공예조형예술품이기 때문이다. 공예(가) 본연의 정체성을 확고히 지키며 일상의 삶과 깊이 관계 맺고 있는 김종인의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살아 있는 도자기, 생각하는 작가

조혜영 2015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역사적으로 또는 미술사조적으로 볼 때 미술의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성격의 작가들이 존재해왔다. 어떤 작가는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작품만 열심히 했다고 한다면, 의식과 사상을 바꾸는 것에 초점을 두고 새로운 흐름을 선동하는 작가들도 있었다. 작가 김종인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단지 작품만이 아닌 도자기분야와 공예분야 안에서 시대와 접목되는 새로운 시도를 지속적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김종인은 자신을 포함해 한국의 여성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김종인은 여성작가로만 구성된 도예그룹 ‘흙의 시나위’를 결성해 한국 여성의 사회적 위치-정신 등에 대한 고민을 작업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1990년대 후부터는 한국의 현대공예를 대중에게 알리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갈 방법들을 지속적으로 모색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마니미니재미 가게”이다. 마니미니재미는 ‘많이, 작게, 재미있게’를 뜻한다. 그런가 하면 김종인은 이 시기에 이미 인터넷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소설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연을 통해 전파하고 있었다. 인터넷과 공예를 결합시켜 활성화하는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2000년대에는 본인이 본보기가 되어 도자의 가치 제고 및 활용 방안에 대해 고민했고 서울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공예학과 교수로 부임한 후 후학들에게 현실적으로 생업에 필요한 교육을 해왔다. “세라믹 클라스Ceramic Class”라는 제목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으며 전시 현장에서도 수업을 진행하는 등 살아있는 미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제자들과 작가들에게 믿음을 주고 영향을 주면서 지금은 훌륭한 멘토로서 김종인만의 팔로잉following이 형성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2년 갤러리 세인에서 열린 에 선보인 인체 모티프 작품

2012년 갤러리 세인에서 열린 <세라믹 클라스Ⅱ>에 선보인 인체 모티프 작품

컵이나 접시처럼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이용한 설치 작업을 선보인 2013년 아원갤러리 개인전 광경

컵이나 접시처럼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이용한 설치 작업을 선보인 2013년 아원갤러리 개인전 광경

김종인을 생각하다
김종인하면 우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한 여성의 모습이 그려진다. 독특한 모양의 안경을 착용하는 것이 취미이며 짧은 머리와 헐렁하지만 전체적으로 조화가 잘된 의상의 코디로 다소 중성적으로 느껴지는 외모는 작가로 살아 온 그녀의 경험들을 대변해준다. 필자는 1990년 중반 당시 최고의 한국 현대도자 행사 중 하나로 여겨졌던 <진로국제도예지명전>을 통해 김종인을 처음 만났다. 그때의 인상적인 모습이 지금까지 나의 뇌리에 남아 있다. 우선 김종인은 노력하는 사람이다. 어느 한 부분도 소월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작업에 대한 열정, 후학들에 대한 애정, 한국 미술에 대한 작가로서의 책임 등 혼신을 다해 매일매일 노력한다. 그런 모습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인내와 노력의 시간들이 지지대처럼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을 것이다.
1990년대 한국의 현대도예는 조형적 표현에 집중했기 때문에 현대도예 작가로 활동하던 사람들은 모두 조형적 작업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현대도예 작가란 대학에서 도자전공을 한 사람들을 말한다. 미국의 피터 볼커스Peter Voulkos의 영향을 받아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조형에 대한 추상적 표현 즉 쓰임이나 기능적인 도자가 아닌 흙이라는 재료적 물성을 이해하고 그것에 집중된 다양한 표현들이 1990년대 한국에서 시도되었다. 당시 한국의 현대도예는 미국의 로버트 아너슨Robert Arneson, 리처드 쇼Richard Shaw, 커크 맹거스Kirk Mangus와 같은 작가들의 추상 표현적 도예에 영향을 받았다. 도자를 공부하던 많은 학생이 조형적 도자의 본고장인 미국 서부의 대학들로 유학을 가던 시절이었다. 그런 흐름 안에서 김종인은 미국을 선택하기 보다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했다. 당시에는 영국으로 미술공부를 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영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미국의 영향을 받아 도자분야의 작가가 조형적 표현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만큼 흙이라는 매체로 거대한 작품을 만들지는 않았다. 1990년대 영국 조형적 도자분야의 대표 격인 질 크롤리Jill Crowley, 모 접Mo Jupp, 파멜라 룽Pamela Leung, 마틴 스미스Martin Smith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김종인은 당시 골드스미스 대학Goldsmiths, University of London에서 공부했다. 매체의 다양성 즉 흙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재료를 혼합해서 사용하게 된 김종인의 작품적인 시도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골드스미스 대학은 미술분야에 자유롭고 열린 교육을 하기로 유명하다. 하고자 하는 개념과 생각만 뚜렷하면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표현을 제재하지 않는 미술교육으로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스티브 매퀸Steve McQueen과 같은 훌륭한 작가들을 배출했다. 따라서 김종인의 많은 실험은 여기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예상한다. 골드스미스에서 공부를 마친 후 김종인은 도자로 잘 알려진 영국 웨일스 카디프 미술대학교Cardiff College of Art and Design, Metropolitan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를 이수했다. 지금은 카디프 미술대학교 하면 도자분야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한국인이 많이 가지 않는 곳이었다.
영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김종인은 본인의 여성성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는 여성 인체 작업을 주로 했으며 전시를 통해 선보였다. 설치미술 개념으로 여성의 인체와 관련된 사물found objects을 특정 공간에 배치하면서 한국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여성성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같은 주제로 여러 번 전시하면서 생각이 정리 된 듯하다. 실제보다 더 큰 사이즈의 여성 인체를 제작하여 도자 고유의 장식기법인 투각기법으로 표면을 장식하기도 하고, 인체를 공중에 띄우기도 했다. 흙을 사용했으나 마치 나무처럼 보이기도 하고, 금속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작품은 마치 태고의 원형을 간직한 아프리카의 나무 조각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체 작업을 하던 시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의미에서 본인의 가족사를 보여주는 설치 전시도 기획한 바가 있다. 사진과 다양한 사물 그리고 김종인 특유의 인체형상들로 전시가 이루어졌다.
그 외에 김종인은 실용성을 기반으로 하여 물레고 용기 형태들을 제작했다. 푸드스타일리스트와 협업해 식기세트를 제작했는데 이것은 당시 MBC 드라마 <궁>의 소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조형적인 작업보다는 다시 실용적인 도자기로 돌아가는 흐름에서 맞추어 김종인은 갤러리 현대, 목금토木金土갤러리 등에서 실용적인 작품을 전시했다. 김종인은 색이 짙은 점토를 주로 사용하는데 특히 붉은 점토를 좋아한다. 발색이 효과적이어서 표면 장식을 하기에 적절한 점토이다. 영국에서 배운 색 사용 기법을 한국의 다양한 장식 기법에 접목시켜 화려하고 따듯한 느낌의 장식으로 애호가들의 눈길을 끌었다.
최근에는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사물found objects로 해학적인 얼굴표정과 인체를 만들어 군집을 이룬 설치작업을 한다. 마치 키스 해링Keith Haring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의 작업을 연상시키는 그라피티graffiti 작업과 유사한 표현을 입체적으로 시도한다. 미술 장르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대에 김종인은 도예 또는 공예 작가로 정의 내리기보다는 다양성을 추구하고 새로운 표현을 시도하는 작가로 볼 수가 있다.
공예페어-마켓은 최근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접할수 있는 행사이지만 1990년대 후 2000년대 초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김종인은 공예를 활성화하는 시도로 “마니미니재미 가게”를 진행했는데 처음에는 전시 개념으로 작게 시작한 것이 점차 규모를 키우고 공예분야를 전반적으로 다루면서 마켓 개념으로 브랜드화되었다. 이렇듯 현실적 접목을 시도하는 김종인은 공예인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생업이 중요한 젊은 작가들에게 하나의 돌파구를 보여주었다. “마니미니재미 가게”를 기획할 때마다 참여 인원이 증가하고 판매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지금은 홍익대 주변이나 대학로 등 여러 장소에서 크고 작은 공예페어가 열리지만 10년 전만 해도 흔하지 않았다. 현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마니미니재미 가게”를 선보이기 위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모습이 기대된다.
도자기를 판매하고 상품화하는 작업은 작가들에게는 절박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작가 김종인은 이러한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작업에서 늘 현실과의 접목을 시도한다. 얼마 전 갤러리 세인에서 개최된 기획전시에는 ‘병Bottles’의 형태를 주제로 하여 화려하고 따듯한 장식이 돋보이는 작품을 선보였다. 상업성과 작품성이 물과 기름처럼 나눠지는 것이 아닌 시대의 흐름 또한 녹여낸 조화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작가 김종인의 작품에서는 늘 신선한 시도와 변화를 엿볼 수 있어, 애호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한국의 도자기 분야를 포함한 예술분야를 보다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시도들이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김종인은 만들고 가르치고 느끼기를 멈추지 않는 작가임이 분명하다. ●

2015년 2월 27일부터 3월 13일까지 갤러리 세인에서 열린 개인전 에 선보인 ‘병(Bottle)’ 시리즈 전시광경

2015년 2월 27일부터 3월 13일까지 갤러리 세인에서 열린 개인전 <세라믹 클라스Ⅴ>에 선보인 ‘병(Bottle)’ 시리즈 전시광경

김 종 인 Kim Jongin
1957년 태어났다. 서울여자대학교 공예학과와 University of London, Goldsmiths’ College, Postgraduate Diploma in Ceramics, South Glamorgan Institute Higher Education, MA in Ceramics를 졸업했다. 1990년 공간화랑에서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2회 개인전을 열었다. 2007년부터 <마니미니재미가게>를 기획했고,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공예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