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입장바꿔 생각하기

자연의 섭리는 언제나 어김없다. 때가되면 비를 내려 대지를 적시고 따사로운 햇빛으론 꽃을 피운다. 간혹 심술을 부릴 때도 있지만, 세상만물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그 조화는 그야말로 경이롭다. 지난겨울은 가뭄이 무척 심했다. 예년에 비해 눈도 조금 내렸고 비도 거의 오지 않은 까닭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 대부분은 실감하지 못했지만, 농사짓는 분들의 근심은 이만저만 아니었을 게다. 얼마 전 내린 비로 간신히 해갈은 됐다지만 ‘물’과 관련된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두어 달 전쯤 본 가뭄 실태를 전하는 뉴스화면. 항공 촬영으로 전하는 소양강댐 상류는 완전히 말라 거북등처럼 갈라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욱 놀란 건 (덕분이라고 말하기엔 찜찜하지만) 댐이 만들어 지면서 수몰되었던 마을이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광경이었다. 수십 년 동안 물 아래 잠겨 있던 마을은 폐허의 수준을 넘어 말 그대로 유령도시처럼 보였다. 집과 건물은 완전히 부서져 사라졌고 겨우 도로의 흔적 일부만 남아 이곳이 한때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가슴속 깊은 곳이 먹먹했다. 마치 내가 깊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 마냥 숨이 턱 막혔다. 새삼스레 인간이란 잔인한 동물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 잘 먹고 잘살겠다고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무지막지하게 통째로 물속에 빠트려 버리는 게 바로 사람이란 동물이니까. 여전히 ‘물’과 관련된 트라우마에서 온 국민이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요즘이어서일까. 뻔뻔한 인간(성)에 대한 혐오와 절망이 교차한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인간에 대한 희망과 연민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은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이번 특집 ‘동물원을 다시본다’는 이런 생각에서 비롯됐다. 뜬금없어 보이는 동물원이란 테마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부연하자면 인간의 시선과 가치관, 즉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미술은 아름다움의 성질을 보는 시선을 다루는 기술이다. 결국 시선의 정치는 이미지의 정치로 나타난다. 모든 의미화 정치에 대처하는 방법은 결국 관점 투쟁밖에 없다. 가치관을 어디에 어떻게 둘 것인가가 다시 인생의 최종 심급일 수밖에 없다.”(강성원, 《시선의 정치》, 시지락, 2004, p. 135)

미술이란 근대 이후 인간이 고안해낸 수많은 ‘발명품’ 가운데 하나다. 제도와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미술은 일차적으로 물질과 시각에 의존한다. 같은 맥락에서 무엇인가를 컬렉션하고 진열-전시한다는 점에서 박물관/미술관과 동물원은 이란성 쌍둥이다. 컬렉션의 대상과 보여주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 따라서 박물관/미술관은 유물/작품의 공동묘지이며, 동물원은 동물의 감옥이라는 과격한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박물관/미술관이나 동물원을 만든 주체도 인간이고 그것을 구경하는-바라보는 주체도 인간이다. 자아(自我)의 상대개념인 타자(他者)없이 인간은 세계에서 고립된 채 존재할 수는 없다. 결국 나 이외의 대상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고 그것을 타자화해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물원을 ‘다시본다’라고 쓴 행간의 의미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시선’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P.S. 이번 호부터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의 새 연재물을 선보인다. ‘진경산수화 톺아보기’라는 제목을 달았다. ‘톺아본다’는 뜻대로 옛 그림 속 현장을 직접 샅샅이 답사하며 추적한 흥미로운 글이다.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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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현박소현 도쿄대 미술관학 박사

이번 특집이 단순히 동물원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도록 풍부한 시각을 부여해준 주인공이다. 그녀는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박물관과 미술관, 미술사의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두고 활발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도쿄대 문화자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문화예술연구실 부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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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_CT조사라 광주비엔날레 홍보사업부

2013년 광주비엔날레 홍보사업부 언론홍보 담당으로 옮기기 전까지 8년 동안 《전남일보》 기자로 일했다. 그래서일까. 광주비엔날레 취재 때마다 기자가 원하는 정보를 정확히 집어내 제공해준다. 이번 박양우 대표이사 취재도 마찬가지였다. 전남대 신문방송학과와 동 대학원 미술학과 석사를 졸업하고 미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늘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고 기자를 대하는 명확하고 우아한 홍보담당자다.

COLUMN

이제 청년들이 미술계에 대해 말한다

2015년의 1분기가 지난 지금, 미술계에서는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Artist Run Space)들의 약진이 눈에 띈다. 이러한 공간들을 운영하는 주체는 대부분 청년이다. 이들은 과거의 대안공간처럼 기존 제도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어떤 지점을 목표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각자가 직면한 기존 미술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제하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타입의 ‘대안적인’ 모델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의 청년미술가들은 한두 가지 프레임에 가둘 수 없는 다층적인 방식으로 미술계의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앞에서 서술한 공간 운영자들을 포함한, 젊고 진취적인 청년미술인을 통틀어 말한다.) 청년이 한시적인 개념임을 상기할 때, 이들은 미래의 미술계를 이끌 다음 세대로서 점차 중심으로 이동할 것이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청년미술가들이 ‘변두리에서 활약하다가 기성의 눈에 띄어 개별 호명되는’ 기존의 방식으로 제도권 미술계에 편승한다면 아무것도 바뀔 수 없다. 이에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 SAVE THE MUSEUM’은 이 지점을 말하고자 한다.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 SAVE THE MUSEUM’은 지난해 12월 말 ‘유능사(최정윤+안대웅)’ 주최로 ‘교역소’에서 열린 좌담회 <안녕 2014, 2015 안녕?>에서 발화되었지만 당시 비평가 임근준이 호명한 이들로 구성된 모임이 아니다. 오히려 지난 1월, 홍대의 디자인실기실을 작업실로 점유하고 있던 727NOW!에 건강한 미술계를 만들자는 대의에 동의하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개인 컬렉티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의견을 공유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청년세대로 스스로를 호명하고 기존의 미술제도 또는 미술정책 차원의 변화를 요구한다. “새로운 주체가, 자신들의 목소리로”(강수미, <세대미학, 미술주체의 문제>, 《월간미술》 2015. 2, p.47. 이후의 인용구 모두 같은 글) 말이다.
‘청년관’이라는 구호는 “자신들의 사고, 감각, 취향, 판단에 따라 만든 자신들의 환경에서 새로운 미술을 시도”하는 데 안주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제도에 침투하는 새로운 방식의 예술운동을 위한 플랫폼 기능을 할 것이다. 따라서 청년의 이름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청년관을 요구하는 것은 “공적 제도에 자신을 의탁하려는 것”이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이 공공을 위한 미술공간으로서, 동시대미술을 다루는 ‘국립’기관으로서 시의적절한 비전을 가지고 분명한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대한 청년주체로부터의 질문이다.
지난 1, 2월에 두 차례의 강연과 라운드테이블을 통해 현 미술계의 문제의식에 대해 논의한 이래로,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 SAVE THE MUSEUM’은 국립현대미술관을 향하여 동시대미술로서의 청년미술을 전시할 별도의 상설전시장을 만들 것, 그룹전과 소장품 구성에서 여성 및 성소수자의 비율을 늘릴 것, 신진비평가와 기획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새로운 담론을 만들 것, 내부 큐레이터 처우를 개선할 것 등을 주장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차기 관장 선출을 둘러싼 잡음들에 관해서는 지난 3월 25일 국립현대미술관 앞에서 기자회견(사진)을 열고 입장을 발표한 데 이어 4월 8일에 624명의 지지서명을 포함, 관장 선임과정과 선발기준 투명화를 요구하는 민원을 인사혁신처에 제출했다.(우리는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의 변화를 보며 ‘누가 관장이 되는가’의 중요성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관장이 교체될 때마다 기관 내부에서 대규모 개혁을 겪는 것은 아무래도 소모적인 일이다. 따라서 국공립미술관은 저마다의 정체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적확한 위치에서 필요한 비전을 보여주어야 한다.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이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둘러싼 이슈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4월 1일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앞을 무대 삼아 <미술관의 탄생전>을 개최했는데, 한쪽에서 설치작업과 이벤트가 진행되는 동안 주최 측은 국립현대미술관 직원들과 여러 차례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자유로운 예술형식을 마주하는 경직된 행정의 현주소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강연, 라운드테이블, 서명운동과 민원, 전시 등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 SAVE THE MUSEUM’의 활동에 관한 정보와 자료, 칼럼들은 홈페이지(savethemuseum.net)를 참고.)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 SAVE THE MUSEUM’은 앞으로도 여러 사람과 만나면서 청년미술의 도약과 건강한 미술계의 미래상에 대해 고민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공적 미술기관과 제도에 다양한 방법으로 이 새로운 주체들의 기대를 전할 것이다. 이제 청년세대의 부름에 제도권이 응답할 차례다.
송윤지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 SAVE THE MUSEUM 학술/민원팀

COLUMN 강수미의 공론장 4

인격화 또는 사물화, 미술제도의 문제

앞선 칼럼에서 나는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미학’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거기서 훨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썼다. 그 말은 사실 완곡어법이다. 좀 더 진실에 가깝게 말하자. 부리요의 관계미학은 자신이 특정 개념 및 형식적 유사성으로 범주화한 미술을 ‘관객의 사회적 상호작용과 공존능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예술’이라고 내세운 현대미술 담론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범주의 것들이 언제든 ‘체험시장 (Erlebnismarkt)’1의 마케팅 전략에 들어맞는 초고가/초 희귀 미술체험상품이나 ‘가벼운 고급 예술(High Art Lite)’2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는 눈감은 미술온실 속 논변에 가깝다. 그러니 최근 7~8년 사이 한국 미술계의 젊은 작가나 큐레이터, 그리고 대형 미술기관들이 그러듯이, 해당 논리와 작품은 물론 엇비슷한 경향의 미술을 베스트셀러처럼 돌려가며 읊고, 매입하고, 전시하고, 따라하는 데 그쳐서는 곤란하다. 요컨대 ‘관계’란 특정 작가들의 작품과 미적 경향을 배타적으로 옹호하면서 그로부터 유무형의 이익/권력/유명세를 얻어내거나, 미술에 대한 사회의 속물적 환상을 자극하는 데 쓰는 개념적 액세서리가 아니다. ‘관계’는 미술이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삶에 기반을 두고 벌이는 행위인 한 근본적 요소이고, 미술이 하나의 인위적 사회 제도로서 존재하는 한 그로부터 책임과 권리와 의무와 역할이 정의되는 확실한 준거 중 하나다.
부리요의 책이 영문 번역되고 국제 미술계에서 반향을 일으킨 후 그에 대한 비판적 논쟁으로 나온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의 글 <적대와 관계미학>이 문제제기하는 핵심도 나와 비슷하다. 그중에서도 지금 우리의 형편에 비춰 특히 마음에 와 닿는 비판은 이것이다. 부리요는 관계미학을 통해 일군의 작가와 작품을 앞선 시기의 미술과 분리하려 했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관계미술은 이전 세대가 꿈꿨던 거창한 미래의 유토피아 어젠다 대신 “이 세계에서 더 낫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경로라고 설파했다는 점이다.3 쉽게 말해 사회 개혁이나 역사 혁명 같은 멀고 거창한 목표 말고, 가까운 사람들과 취향에 맞는 사물에 둘러싸여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소우주의 현재화를 찬미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3월 <양극화의 미학, 미술경향의 문제>에서 짚은 것처럼 그런 상황은 더 거시적이고 더 막강하며 비가시적인 힘을 발휘하는 현행 패권 지형을 공고히 할 뿐이다. 이를테면 대한민국 사회 전반이나 미술계의 현상처럼, 청년세대가 눈앞의 작은 이익과 발등의 불 끄기에 매이고, 지금 여기의 기분 전환에 급급해서는 진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 말이다.
비숍의 논문은 부리요의 논리에 매우 정교하고 생산적인 비평 논쟁을 제공했다. 그러나 부리요의 책이 받은 관심과 끼친 영향에 견주면, 비숍의 비판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고 말았다. 여러 이론가 사이에서는 중요한 텍스트로 회자됐지만, 부리요의 그것처럼 작가나 전시나 미술관 등지에서 폭발적인 지지와 유행, 심지어 물신화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왜 그랬을까? 비숍의 비판적 논의보다 부리요의 동시대미술계 일부(작가, 큐레이터, 작품, 경향, 시스템)를 위한 비평적 에스컬레이팅이 훨씬 더 미술제도에 먹히는 것, 그 제도가 원하는 지적으로 세련됐으면서 직관적으로도 매력적인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관계미학》을 통해서는 국제 미술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스타 작가와 큐레이터, 흥행을 열망하는 미술관의 전시기획에 부응하는 미술형태, 대중과 언론의 호기심이 꽂히는 아트 이벤트가 얼마든지 가능한데, 비숍의 논쟁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제도란 이 같은 냉정한 생리와 계산법으로 작동한다. 이미 비숍이 인용했던 할 포스터의 솔직한 지적, 즉 혁신적인 공공미술이나 장소 특정적 작업들이 문화 정치적 프로모션과 근친하는 일이 미술계에서 비일비재한 이유가 여기 있다. 심지어 “제도는, 상황이 달랐더라면 그것이 집중 조명했을 작업에 그늘을 드리울 수도 있다. 즉 제도가 스펙터클이 되며, 문화 자본을 끌어들이고, 또 관장이나 큐레이터가 스타가 된다.”4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역시 문제는 다시 ‘관계’다. 그런데 이때 관계는 단지 심리적이고 주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이며 객관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통찰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미술제도와 우리는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 사람들은 대체로 제도를 두 가지 방식으로 대하는 것 같다. 하나는 인격화시켜서, 다른 하나는 사물화시켜서 말이다.
예를 들어 젊은 작가들을 뽑는 어떤 아트 레지던시 기관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거기서 일하거나 그 선정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그 제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지원자는 그런 사람들의 미적 지향이라든지 선호 경향 같은 것을 알고 싶어 하고, 역대 선정자들은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는지 탐문한다. 나아가 여러 관계(인맥, 학맥, 친분 등등)를 통해서 좀 더 우위를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실제로 그에 맞추려고 애쓰기도 한다. 다른 한편, 미술제도를 사물화하는 경우는 예컨대 국공립미술관의 관장이라는 중책을 ‘권력의 자리’로 물화시켜 능력과 자질과 인성과는 상관없이 처리할 때다.
또 특정 이익단체가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공적 미술기관을 무고(誣告)하거나 집단행동으로 부당한 위력을 행사할 때다. 그럴 때 그들의 머릿속과 가슴속에 자리를 탐하는 자신의 능력 부족과 자질 및 인성의 궁핍함을 성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또 자신이 부당하게 대하는 그 기관 및 제도 안에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워지고,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이용가치만 셈해진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즉 미술제도의 차원에서 그 제도의 구성원, 행위자, 관계자, 그리고 제도 밖의 주체를 일종의 사물처럼 비인격화해서 취급하거나, 인간적 관계들에 과도하게 의존해서 제도를 운용하는 경우다. 기계적인 잣대, 실체 없는 통계지표, 허수로 가득 찬 경력 조건으로 국제 행사의 주관자를 지명하고, 대표 작가를 선정하고, 공적 지원금을 나눠주기. 또는 시스템의 규정과 가치평가 기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알음알음과 개인적 호불호에 따라 행정을 집행하고, 업무를 처리하고, 결국 책임지지 않기. 이런 사례들은 내 상상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미술계에서 종종 겪거나 심지어 행위의 당사자들이기도 한 실제 상황이다. 우리와 미술제도의 관계는 현실에서 대략 인격 vs. 비인격, 인격 vs. 인격, 비인격 vs. 인격, 비인격 vs. 비인격 이런 양상으로 펼쳐지지만, 각각의 정도 차에 따라 무수한 변종의 관계가 가능하다. 아마도 미술계에 갓 진입한 젊은 작가(혹은 나이나 분야에 상관없이 실질적으로 미술계 경험이 적은 이들)가 각종 미술제도에 막막함과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그런 복잡다단하고 불규칙하며 모호한 관계 양상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술계 현실은 충분히 어렵고 충분히 문제적이다. 하지만 가령 내게 유학 갔다 온 옛 학생이 ‘오랜만에 돌아왔더니 여기는 다 연줄로 일이 이뤄지는 것 같다’고 말하며 뭔가를 부탁해 올 때 무척 괴롭고 곤혹스럽다(그 괴로움과 곤혹감 때문에 답을 하지 못했는데, 이 자리를 빌려 미안함을 전한다. 미안합니다). 젊은 작가들이 자기 작품을 아무런 조건 없이 공개하는 곳에서 당연하다는 듯 ‘미술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눈치가 빨라야 하고, 기관에 있는 사람들과 잘 알고 지내야 한다’고 선언할 때 뭔가 아주 심각하게 잘못됐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제도를 이용하는 일이 눈치로 인격화되고, 인간관계가 기관을 통해 물화되는 미술계 현실에서 “예술작품의 구조가 사회적 관계를 생산한다는 부리요의 주장”5에 경도된 지금 여기 미술 전문가, 작품, 전시, 미술관교육, 아트 프로젝트는 얼마나 기이한가.
3월 25일 아트선재센터 1층에서는 사무소(samuso)가 기획한 ‘차고 프레젠테이션’이 열렸다. 사무소 옆 작은 주차장을 전시공간으로 내주는 ‘차고 프로젝트 공모’에 지원한 작가 16명/팀(이들은 선착순에서 밀려 전시 기회를 얻지 못했다)이 작품 발표를 한 그 행사에 묵묵히 3시간을 있었다. 그때 내가 경험하고, 이해하고, 생각한 것들을 여기에 다 쓸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술제도란 미술관 건축물처럼 딱딱한 하드웨어도 아니고, 온갖 이글거리는 욕망과 자의적 이해관계로 쥐락펴락하는 주관성의 덩어리도 아니라는 점이다. 미술제도는 ‘선착순’을 또 다른 경쟁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끔찍한 대상이다. 하지만 그것을 과도한 경쟁이나 비생산적 우열 짓기를 극복할 다른 길로 이해하는 이에게는 언제라도 더 좋은 방법을 찾아 나설 수 있는 현재의 준거다.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

1 독일 사회학자 게르하르트 슐체는 『체험사회』에서 동시대가 전사회적 체험합리성의 시대, 사회적 기제들이 거의 모두 경제적 목적에서 체험을 도구화/상품화하는 데 맞춰진 체험 지향적 사회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체험시장’은 그 구체적 경제 제도다. Gerhard Schulze, 《Die Erlebnisgesellschaft: Kultursoziologie der Gegenwart》, Gampus, 1992.
2 스텔라브라스는 1990년대 미술, 특히 yBas의 미술이 “예술처럼 보이지만(…) 그 대체물로 작동하는 예술”이라며 이 명칭을 부여했다. Julian Stallabrass,《High Art Lite》, Verso, 1999, p. 2.
3 Claire Bishop, , 《October》, vol. 110(2004, Fall), pp. 51~80 중 54. 인용구는 부리요의 것이다.
4 Hal Foster, 《The Return of the Real》, 이영욱・조주연・최연희 역,《실재의 귀환》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3, p. 292.
5 Claire Bishop, 같은 글, p. 63.

위 한선정 <리본> 리본에 출력 가변설치 2012
2012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제27회 한선정 초대전> 전시장 입구에는 평론가, 기획자 등 한국 미술계 유명 인사들의 이름과 축하 메시지가 적혀 있는 리본이 전시됐다. 이 전시는 <아르코미술관 전문가성장프로그램>에 ‘선정’된 9명의 작가(곽이브, 김경호, 김진희, 박재환, 송유림, 신주영, 이수진, 장유정, 정주희)가 기획한 가상의 작가(한선정) 개인전을 빙자해 신진작가가 경험하고 바라본 공모, 전시, 비평 등 국내 미술 제도에 대한 풍자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HOT PEOPLE 박양우 (재)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대한민국 대표 비엔날레의 재도약을 위해”

1995년 재단법인으로 출범한 광주비엔날레가 올해로 20돌을 맞았다. 광주비엔날레는 새 대표이사 취임과 동시에 재도약의 길을 모색하는 포문을 열었다. 재정비에 들어간 광주비엔날레의 대표이사로 박양우 전 문화관광부 차관이 선임됐다.
박 대표이사는 풍부한 행정경험과 예술 경영 전문성이 돋보이는 인물이다. 비엔날레의 매너리즘 타개와 재도약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시점이기에 새 대표이사의 비전이 더욱 주목되고 있다.
“세계 5대 현대미술제인 광주비엔날레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이제는 광주비엔날레가 얼마나 더 올라갈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100의 노력을 기울여도 올라가는 건 둘째치고 지금의 명성과 지위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게 현재 비엔날레 시장이다. 성장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예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선 곳간부터 채우겠다.” 박 대표이사는 지난 2월 열린 취임식 기자회견 자리에서 광주비엔날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지난해 비엔날레 특별전에 출품됐던 <세월오월>의 전시 철수 논란을 겪은 이후, 재단 혁신의 일환으로 비엔날레 대표를 맡게 된 그는 “고향에 와 일을 하게 돼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면서 “처음 제안받았을 때는 주저했는데 광주비엔날레와 함께 하게 할 앞으로의 제 삶을 숙명이라고 생각한다”고 취임 소감을 밝혔다.
광주 출신인 그는 누구보다도 광주비엔날레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취임기자회견에서 강한 어조로 밝힌 소감에서 비엔날레 대표를 맡게 된 남다른 감회가 느껴졌다. “사실 나는 피를 흘릴 자신은 없다. 일하다 보면 눈물 비슷한 것도 흘려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땀도 많이 흘리겠다. 그리고 비엔날레와 광주, 예술에 대한 사랑을 드리고 가고 싶다.”
그는 광주와 광주비엔날레의 현 상황을 냉철하게 진단했다. 몇 년째 한푼도 늘어나지 않고 285억 원으로 동결된 기금, 해마다 줄어드는 지역 기업의 후원금, 다른 시도에서 열리는 비엔날레 등을 언급했다. 국내 대표 미술축제인 광주비엔날레에 대한 중앙 정부나 시의 지원도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박 대표이사는 특히 광주비엔날레와 부산국제영화제를 비교하며 “2년 동안 광주시가 30억 원을 지원한 데 비해 부산시는 같은 기간 국제영화제에 120억 원을 쏟아 부었다”며 “최근 비엔날레 혁신위원회가 제안한 7대 혁신안의 실현 가능성을 살펴 3월 말이나 4월 초에 종합계획안을 마련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위한 ‘광주비엔날레 발전위원회’ 구성, 재단의 투명성 강화, 민간사무처장제 도입, 재단 내부의 역량 강화 등 7대 혁신안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지난 4월 17일 서울에서 만난 박양우 대표이사는 조금 더 정돈되고 확고해진 계획을 밝혔다. 이사진의 자율성, 예산 확보 및 비엔날레의 예술적 활성화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했다. 우선 민간이사장으로서 가진 자율성을 강조했다. 동시에 비엔날레에 관해서는 “유능한 예술총감독을 선정하기 위해서 공신력있는 선정위원단을 구성했다. 이후 감독이 선정되면 전시는 전적으로 감독에게 맡기고 예산 및 행정적인 업무의 전폭적 지원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며 전시의 자율성도 언급했다.
경영적 측면에서 비엔날레 기간 외에 유휴시설로 놓여있는 공간을 활성화 할 수 있는 다각도의 방법을 모색 중이다. 2017년까지 역대 비엔날레 전시 및 행사 출판물 등 방대한 양의 콘텐츠를 디지털 아카이브로 제작할 계획이다. 또한 2018년에는 이를 보여줄 수 있는 아카이브관을 선보일 예정이다. 비엔날레 전시기간이 아니더라도 생동하는 공간이자, 광주의 대표적 문화지구로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또한 오는 9월 개관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는 협력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국립아시아문화전당뿐 아니라 미술관 등 유관기관과 협력하면서 광주를 위한 다양한 발전 방안을 제시하겠다는 의미다. “광주를 예향이라고 한다. 광주만의 확고한 무엇을 갖고 승부해야 한다. 광주비엔날레와 다른 행사들을 더 성공시켜서 우리 광주가 문화, 문화산업, 나아가서는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찾아오는 관광도시가 됐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기관과의 공동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편 비엔날레 재단은 지난 4월 20일에 4대 정책목표·20개 실천과제를 담은 ‘광주비엔날레 발전방안’을 발표하고, 기존의 7인의 이사진 외에 5인의 이사진을 추가로 발표했다. 또한 새로 단장한 CI(Corporate Identity)(사진 왼쪽)를 발표하면서 확실히 변화된 얼굴을 보였다.
임승현 기자, 광주=박진현 통신원

박 양 우 Park Yangwoo
1958년 태어났다. 중앙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행정학과와 런던 시티대 예술경영학과 석사, 한양대 대학원 관광학과 박사를 받았다. 제23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해 뉴욕 한국문화원장, 문화관광부 차관 등을 역임했다. 2014년 12월 제137차 광주비엔날레 이사회에서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로 선출됐다. 현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HOT ART SPACE

권진규 아틀리에

권진규 아틀리에

고희동 가옥 내부

고희동 가옥 내부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최순우 옛집 | 권진규 아틀리에 | 고희동 가옥 | 나주도래마을 옛집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기부·증여를 통해 문화유산이나 자연을 보전 및 관리하는 시민운동을 뜻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로 잘 알려진 미술사학자 최순우가 말년을 보낸 집, ‘최순우 옛집’은 2002년 시민 모금으로 매입해 보전한 첫 사례다. 이곳을 복원 및 보수해 2004년 일반에 개방하면서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사장 김인회)이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최순우 옛집(등록문화재 제268호)’을 비롯하여 ‘권진규 아틀리에(등록문화재 제134호)’, ‘고희동 가옥(등록문화재 제84호)’, 나주 도래마을 옛집을 보전자산으로 관리·운영하고 있다.
공간 운영과 함께 재단은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기업참여 사회공헌 운영, 문화유산 보전을 위한 제도개선 연구사업도 진행한다. 김홍남(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우찬규(학고재갤러리 대표), 전보삼(한국박물관협회 회장)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임원진으로 구성돼 있다. ‘최순우 옛집’은 현재 ‘혜곡 최순우기념관’으로 전시장 기능도 한다. 1976년 최순우가 사랑방에 달아둔 현판의 내용은 1930년대에 지어진 고즈넉한 이 공간의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문을 닫으면 이곳이 곧 깊은 산중이다[杜門卽是深山].”살아생전 ‘살결의 감촉’, ‘잘생긴 아름다움’으로 백자를 표현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은 백자를 아낀 최순우에 대한 헌사이자 인연으로 5월 26일부터 7월 25일까지 달항아리 작가 박영숙의 〈흰빛의 세계전〉이 계속된다. 보전기금 조성을 위한 기증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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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나 (5)

아티스트 포트폴리오 Ⅱ
사비나미술관 3.18-6.5

2013년 열린 <아티스트 포트폴리오Ⅰ>의 속편 전시 격인 이 전시에는 고영근 김기철 김영나 유근택 한성필 홍순명 홍승혜 작가가 참여했다. 포트폴리오는 단순히 작가의 작업을 설명하는 자료집이 아닌, 작가의 예술적 시각과 작업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자체로서 ‘전시’의 의미를 가진다.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 외 60여 명의 포트폴리오도 함께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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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양 (2)

심리적 오브제
우양미술관 4.4-7.11

김택기 노동식 정승이 참여하는 이번 전시는 마치 연극무대를 연상하게끔 하는 장치로 가득하다. 3명의 작가는 현실에 바탕을 둔 주제와 소재를 각자의 전시장에 펼쳐놓는데, 세월호 참사부터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시선, 그리고 차이와 그로인한 충돌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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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환2

주재환 개인전
트렁크갤러리 4.2-28

전시 타이틀 ‘이매망량(魑魅魍魎)’은 “산천, 목석의 정령에서 생겨난다는 온갖 도깨비”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작가는 우리 사회의 제 현상을 통찰하고 그에 따라 제시된 키워드를 분석하면서 이른바 ‘망량질환’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고 진단했다.(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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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 (1)

소묘
갤러리 소소 4.4-5.17

김인겸 김혜련 박기원(사진 오른쪽) 정승운이 참여한 이 전시는 드로잉의 통상적 의미를 넘어 그리기의 기본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보여준다. 이에 ‘공간’을 구성적 도구나 작업의 플랫폼 혹은 온유적 개념으로 사용, 그 자체로서 작품의 요소로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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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림_나전 (6)

조선의 나전_오색찬란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3.14-6.30

조선시대 목공예의 총아로 ‘나전칠기’를 지목하는 데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나전칠기는 특히 조선시대 후기(18~19세기) 사회계층의 분화 확대로 인해 그 다채로움이 극에 달하게 되며, 장식적 요소가 극대화된다. 조선시대 화려한 공예문화를 일견할 수 있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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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시스

我亦愛我廬
옵시스아트 3.19-4.12

황세준의 회화작업에 호응하는 주황(사진 왼쪽)의 사진작업이 출품된 전시. 전시타이틀은 ‘풍경을 부정하는 풍경의 가능성’을 의미하는데, 주된 관심에서 벗어난 공간에 대한 각 작가의 독특한 시선을 비교해서 볼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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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_화이트블럭 (2)

일상이 별안간 다가올 때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3.5-5.17

이우림 이채영 하이경(사진) 황선태 4명의 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는 제목 그대로 일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각 작가의 소회가 담겨있다. 작품은 물론 작업에 사용된 아카이브 자료 등을 함께 전시하여 관람객이 작업과정도 살펴볼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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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

아브라암 크루스비예가스 개인전
아트선재센터 4.11-7.26

멕시코 태생인 작가는 2012년 양현미술상을 수상하며 국내에 소개됐다. <자가해체8: 신병>으로 명명된 전시타이틀은 작가가 2012년부터 L.A., 멕시코시티, 파리, 런던 등지에서 문학, 철학, 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접목해 펼친 연작에서 비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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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형전

상형전 40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4.9-17
1978년 창립된 ‘상형전(象形展, 회장 전창운)’은 ‘자연에서 보고 느낀 구상’을 작업의 방향으로 정립한 작가들의 모임이다. 이번 전시는 그들의 40회 정기전으로 지금까지 연 회원수 5045명이 5687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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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1)

서울역 (4)

한국화의 경계, 한국화의 확장
문화역서울 284 4.1-30

한국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29명의 작가에 의해 펼쳐진 전시. 평면 위주의 한국화에서 설치, 영상, 사진 등 다양한 장르로 변주되어 그간의 한국화에 대한 선입관을 깨려 했다. 한국화에 대해 ‘정신’에 방점이 찍힌 전시. 위는 우종택 <시원의 기억>, 아래는 홍지윤 <애창곡>.

이태호 교수의 진경산수화 톺아보기 1

서울이 아름답다
필운대 언덕의 봄꽃 잔치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이 연재는 나로서는 조금 부담스럽고 색다른 시도이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현장을 다시 밟으며 나도 스케치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미술사를 공부한 이후 줄곧 진경 작품과 그 실제 경치 찾기를 즐겨왔다. 그림의 실경을 카메라에 담을 때마다, 늘 옛 화가들을 따라서 스케치해보면 어떨까 했다. 그 생각을 이번 《월간미술》 연재를 통해 실현하게 된 셈이다.
나는 35년 이상 진경작품과 실경을 대조하여 ‘닮음과 닮지 않음’, 혹은 ‘기억으로 그리기와 사생하기’ 등 그 해석방식을 검토했고, 진경작품의 시대적 의미와 회화성을 짚어보았다. 이렇게 쌓인 진경산수 관련 글과 사진을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2010)로 묶어내어 ‘우현(고유섭)학술상’을 받았으나, 출판사가 도산하였다. 다행히 이 책을 수정 보완하여 올해 같은 제목으로 재간하였다.(마로니에북스, 2015) 이번 작업은 앞 책의 연장선상에 놓인 셈이다. 그동안 실경과 그림을 비교하던 경험을 토대로, 새로이 스케치를 병행하며 옛 거장들의 눈과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 재검토하고 싶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 톺아보기가 될 것이다. 실경그림의 현장 답사는 자연히 오늘의 모습과 비교하니, 또한 시간 여행이 되겠다. 그 사이, 곧 조선화에 담긴 옛사람들의 꿈과 변화한 현실 사이에서, 내가 그릴 진경을 떠올려 본다. 두렵고 흥분된다. 연재의 시작은 서울이다.

지금의 서울은 인간의 욕심을 한껏 드러낸 민낯 같다. 지난 백 년 동안 엄청나게 파헤치고 개발한 탓이다. 하지만 욕망의 상징이라할 빌딩숲 틈새나 그 너머로 보이는 산세와 물길은 유구하다. 오히려 현대물을 고스란히 감싸 안은 자연이 아직 넉넉한 편이다. 인간의 문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당찬 형상이 늠름하다. 화강암이 불거진 산세는 여전히 변함없고, 물길과 어울린 벼랑이나 계곡의 계절색이 조화롭다.
서울의 아름다움은 옛 문인의 시나 글, 화가의 진경작품에서 흔히 만난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을 비롯한 조선 후기 화가들의 진경산수화는 우리 산하의 자연미뿐만 아니라 선현들의 삶과 풍류를 확인케 해준다. 요즘 들어서는 한동안 잊고 살아오던 그 고전문화에 다시금 눈 뜨게 되면서, 고도(古都)의 모습을 새로이 만나려 야단이다. 최근 인왕산 아래 수성동(水聲洞) 계곡이 복원되는 등 여기저기 공원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예견하고 개발했더라면, 현재의 서울은 일찌감치 세계적인 명소로 자리잡혔을 법하다. 또 서울 관련 책들이 쏟아지고, 많은 이가 서울의 정취를 즐기려 북촌과 서촌, 삼청동, 부암동 자락에 몰려드는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마치 옛 문인들이 백악사단(白岳詞壇), 탑골의 백탑시사(白塔詩社), 인왕산 옥류동의 옥계시사(玉溪詩社) 등을 조직하여 조선 후기 문예의 르네상스를 열었다고 평가되듯이, 그와 맞먹는 우리 시대 문예부흥으로 이어질지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한양은 선분홍의 꽃대궐, 무릉도원
올해도 서울의 봄은 어김없었다. 화사한 벚꽃과 목련, 그리고 개나리와 진달래 등이 온 천지를 덮었다. 특히, 근현대에 의도적으로 심은 하얀 벚꽃과 번식력이 왕성한 노란 개나리는 대지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옛 그림과 글, 그리고 토박이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본래 서울의 봄은 분홍 꽃들이 연녹색 이파리들과 어울려 사뭇 다른 색채감을 뽐냈던 모양이다. 이원수 선생의 〈고향의 봄〉(1923),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에 나오는 분홍빛 고운 꽃대궐은 비단 산골만이 아니라 서울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엔 인왕산과 백악 사이에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듯, 도성의 서북부 지역을 도화동이라 불렀다. 이는 백악의 서쪽 기슭 ‘쌍계동(雙溪洞)’의 ‘대은암(大隱岩)’ 골짜기에 새겨진 ‘도화동천(桃花洞天)’과 ‘무릉폭(武陵瀑)’이라는 바위글씨가 말해준다.(지금의 청운중학교 교문 맞은편) 담졸 강희언(澹拙 姜熙彦, 1738~1784년 이전)이 ‘늦은 봄(음력 3월)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다[暮春 登桃花洞 望仁王山]’라고 화제를 써넣고 그린 〈인왕산도(仁王山圖)〉(개인 소장)는, 바로 이곳 도화동천에서 바라본 인왕산의 측면 풍경을 포착한 진경 작품이다.
‘무릉(武陵)’은 잘 알다시피 도가(道家)의 이상향이다. 흔히 경치가 수려한 풍광에 ‘무릉’을 붙여 무릉계곡, 무릉폭포, 무릉동 등으로 일컫는다. 또한 ‘도화동천’에 ‘무릉폭’을 곁들여 새김은 복숭아꽃이 아름다운,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무릉도원을 떠오르게 한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유토피아의 상징으로 그려진 세상 말이다.
세종 시절 1447년 4월 20일 밤에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이 도원을 탐승(探勝)하는 꿈을 꾸었고, 그 이야기를 따라 안견(安堅)이 3일 만에 그렸다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日本 天理大學 소장) 역시 도연명의 문예 경향과 연관된다 하겠다. 도화동길을 올라 북쭉으로 창의문(彰義門)을 나서면, 그 왼편 자락에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과 비슷하다고 여겨 마련했다는 무계정사(武溪精舍)가 그 터만 남아 있다. 현재 이곳에 새겨진 ‘무계동(武溪洞)’ 바위글씨가 안평대군의 필치라 전한다.
예부터 복숭아는 선과(仙果) 혹은 선약(仙藥)으로 신선세계의 식물이고, 300년 만에 열리는 복숭아는 천도(天桃)라 하여 장수를 상징한다. 복숭아나무는 귀신이 접근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어 사당에는 심지 않았고, 제사상에도 복숭아를 올리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도화꽃은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상징이기도 했다. 복숭아 도(桃)는 ‘길 도(道)’자와, 오얏나무 이(李)는 ‘다스릴 이(理)’자와 음이 같아 오얏나무와 복숭아나무의 도리원(桃李園)이 조성되거나 그려졌다. 도화꽃은 또 잉어 리(鯉)와 짝을 이루어, 물고기 그림 어해도(魚蟹圖)의 소재로 즐겨 그려지기도 했다. 모두 성리학을 추구한 사대부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도리(道理)’를 빗댄 셈이다. 생활 속에서는 복사꽃이 사주풀이에 등장한다. 일명 도화살(桃花煞)이다. 도화살이 낀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호색으로 집안을 망하게 한다고 생각했었다. 최근에는 도화살이 예능 개념으로 재해석되며 매력적인 사주로 바뀌었다.
복사꽃은 1820년대 후반 순조 시절에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봄철의 〈동궐도(東闕圖)〉(국보 제249호, 고려대학교박물관,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에도 빠지지 않는다. 전각 사이사이의 후원과 산언덕에 핑크빛 봄꽃들이 온통 가득하다. 큰 가지의 나무는 도화꽃과 함께 살구꽃이나 자두꽃일 법하며, 솔밭의 낮은 분홍꽃 나무들은 진달래로 생각된다. 그야말로 꽃대궐이다. 도성 밖에도 복사골이 많았다. 혜화동 밖 사람들은 복숭아밭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양의 봄꽃놀이 대상으로 성북동 복사꽃, ‘북촌도화(北村桃花)’가 꼽힐 정도였다. 복숭아밭이 얼마나 넓었던지 마포에는 도화동이라는 행정지명이 존재한다. 남산 기슭에도 도동(桃洞, 현 중구 남대문구로, 용산구 후암동·남영동)이 있었고, 한강 쪽 기슭도 봄이면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여기서 복숭아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과수원의 복숭아가 아닌 개복숭아이다. 토종인 개복숭아는 아기 주먹만한 열매로 심장과 폐, 대장, 기관지 천식 등에 좋고, 기침을 멈추게 하는 효능으로 유명하다. 개복숭아 꽃차는 피부에 탄력을 주고 얼굴에 화색을 돌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겸재 정선의 봄나들이 〈필운대상춘〉
분홍색 꽃대궐, 한양에서 봄 풍류를 즐긴 최고의 공간은 인왕산 남쪽 자락의 필운대(弼雲臺)였다. 문인사대부에서 중인, 서민층까지 시와 음악을 나눈 명소였다. 필운대 부근은 살구꽃이 가득하여 ‘필운행화(弼雲杏花)’나 ‘행촌(杏村)’이라 불렸으며, 도화꽃과 더불어 춘심을 자극하는 다채로운 꽃들이 함께 했기에 ‘필운대 꽃놀이(弼雲賞花)’가 장안의 제일로 손꼽혔다. 필운대에서 육각현(六角峴) 고개를 거쳐 모암(帽巖)으로 올라가는 인왕산 동남쪽 능선은 서울의 봄꽃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상춘(賞春) 장소일 뿐만 아니라, 도성 안팎의 장쾌한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 구실을 한다. 남산이 품은 도성의 구석구석은 물론이거니와 한강 남쪽으로 전개된 남한산성에서 관악산까지 확 열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많은 문인이 그러했듯이, 겸재 정선 또한 필운대에 올라가 서울의 춘경(春景)을 만끽하곤 했던 모양이다. 봄 향기를 가득 품은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개인 소장)이 그 좋은 사례이다. 한양을 꽃과 버드나무의 봄, ‘춘화류(春花柳)’라 노래했듯이, 화면의 필운대 아래 서촌마을과 도성 안에는 온통 연두색 봄버들과 분홍빛 꽃들이 만발해 있다. 옛 서울의 봄을 얘기할 때, 첫손 꼽히는 그림이다. 작품 사진이 먼저 알려지는 바람에 여기저기 소개되었지만, 실작품은 필자가 기획한 〈조선후기 산수화전〉을 통해서 대중에게 처음 선보였다. (이태호 엮음, 《조선후기 산수화전-옛 그림에 담긴 봄 여름 가을 겨울》, 동산방화랑, 2011)〈필운대상춘〉은 필운대와 그 남쪽으로 펼쳐진 도성과 지세를 담은, 고운 비단에 세필의 깔끔한 수묵담채화 소품이다. 남산의 미점준(米點皴), 필운대 언덕의 피마준(披麻皴)과 태점(苔點)이 어울린 남종산수화법의 그림이다. 필운대의 소략한 산주름을 따라 그려진 농묵의 듬성한 ‘丁’자형 소나무들의 솔밭은 정선의 전형화된 진경화법을 보여준다. 비슷한 구도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간송미술관 소장)에 담긴 〈장안연우(長安烟雨)〉나 〈장안연월(長安烟月)〉과 마찬가지로 양천현령을 퇴임한 이후 1740년대 후반의 대표작으로 생각된다. 세심하면서도 시원한 화 구성과 성근 선묘가 70대 명작답다. 정선이 70대 그림에 주로 찍었던 장방형의 음각도장 ‘겸재(謙齋)’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광활한 풍경을 포착하는 정선의 시야는 역시 품이 큰 화가답다. 또 너른 풍광을 작은 화면에 압축하여 그린 정선의 축경화법(縮景畵法)은 〈필운대상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도성 안의 궁궐이나 관청, 그리고 마을들을 운무(雲霧)로 여백을 살리거나, 원근의 풍경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면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세는 뾰족뾰족한 암산 능선의 관악산이다. 원경을 근경의 필운대와 동일화면에 담은 것은, 정선의 독특한 화면구성법이다. 원근의 풍경들을 모두 아우른 시점은 인왕산 북쪽 중턱 옥류동 언덕이나 창의문 근처쯤에 존재한다. 필운대에서 상당히 떨어진 거리이다. 푸른색 실루엣의 관악산 아래 그려진 오른쪽 이층 누각은 숭례문이다. 남산 정상엔 한 그루의 소나무가 또렷하다. 이는 정선의 〈목멱산(木覓山)〉(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에도 보이며, 애국가에 등장하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이다. 이 노송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사라졌다. 남산 아래 언덕은 지금의 명동성당이 자리한 종현(鍾峴)이다. 화면의 왼편 미점준에 싸인 희미한 돌기둥은 경회루(慶會樓) 터이니, 임진왜란 이후 폐허화된 경복궁임을 알려준다. 필운대 너머 인왕산 남쪽 자락 솔밭과 바위벼랑 사이에는 황학정(黃鶴亭)과 사직단(社稷壇) 풍경이 전개되어 있다.
오른쪽 가장자리 솔밭 위 필운대 언덕은 선비들의 봄놀이 터이다. 도성 풍광을 감상하며 시를 나누는 계모임 광경이다. 화면의 오른편 필운대 언덕에는 두 문인을 중심으로 다섯 명이 서있거나 앉아 있다. 그 아래로 동자를 대동하고 지팡이를 짚은 뒤늦은 참석자도 등장한다. 가운데 두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큰 인물상으로 좌장(座長) 격이다. 상당한 스승이거나 지체 높은 문인관료인 모양이다. 필운대 언덕 아래 두 그루의 노송 그늘에는 두 사람이 타고 온 듯 두 필의 말과 마부가 보인다.
언덕 아래 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 곳이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의 글씨 ‘필운대’가 새겨진 바위벼랑 위치이다. 그 아래로 화류(花柳)가 만발한 초가마을은 조선 후기 중서층(中庶層)들이 주로 살면서 달동네라는 의미의 ‘여항(閭巷)’ 문학을 발달시킨 ‘웃대’로 여겨진다. 지금의 누상동·누하동이다. ‘누각동은 연산군 때 지은 누각(樓閣)이 있어 생긴 동명으로, 사대층보다 하급관료인 서리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고 한다.(柳本藝, 《漢京識略》) 헌데 필운대는 선조 시절, 권율 장군과 그 사위인 이항복이 살았으니 본래 사대부층의 공간이었을 터이다. 조선 후기 들어 이곳에 서리를 비롯한 중인이나 서민층 마을이 조성되며 ‘웃대’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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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의문 언덕에서 본 필운대 남산 관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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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악의 서쪽자락 대은암 쌍계동 골짜기 ‘무릉폭’과 함께 새겨진 바위글씨 ‘도화동천’ (<한양사람들의 멋과 풍류, 바위글씨전> 서울역사박물관 200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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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겸재 정선 <필운대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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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왕산 남쪽자락의 봄, 필운대에서 육각현을 지나 모암까지는 도성의 최고 전망대이다. ⓒ이태호

송월헌 임득명의 필운대 꽃 감상 〈등고상화〉
조선 후기 웃대의 중인문학을 중흥시킨 대표 계모임은 18세기 후반에 결성된 옥계시사이다. 1786년 7월 16일 옥계시사의 첫 모임을 기록한 《옥계사첩(玉溪社帖)》(삼성출판박물관 소장)과 1791년의 《옥계사시첩(玉溪社詩帖)》(영국 브리티시 도서관 소장)은 당대 여항인의 문학적 진면목을 담아낸 것으로 평가된다. 모임의 연장자인 오옥재 최창규(五玉齎 崔昌圭)가 소장했던 《옥계사첩》은 〈옥계사십이승(玉溪社十二勝)〉이라 하여 한양의 12명승을 계절에 따라 즐기는 시회(詩會)를 기념하여 제작된 서화첩이다. 모임의 스승이자 좌장 격인 송석원 천수경(松石園 千壽慶) 구장의 《옥계사시첩》은 인왕산 아래 열 곳의 승경(勝景)을 노래한 결과물이다. 이 모임에는 장혼(張混), 김낙서(金洛瑞) 등 당대 내로라하는 여항시인들이 참여했다. 옥계시사의 계원인 송월헌 임득명(松月軒 林得明, 1767~1822)이 두 첩에 그림들을 곁들였다.
한양의 아름다움을 순서대로 설정한 십이승(十二勝) 가운데, 세 번째인 〈등고상화(登高賞華)〉는 《옥계사첩》의 네 그림 중 음력 2월 중춘(仲春)의 ‘꽃구경[賞春]’을 담아내었다. ‘높은 곳에 오른(登高)’장소는 옥계문인들의 시에 밝혀져 있듯이 필운대이다. 필운대 언덕에서 벌인 봄의 꽃잔치, 시잔치 장면을 그린 실경화이다. 음력 2월인 점을 감안하면 아직 복사꽃이 피기 이전이니, 그림에 가득 담긴 분홍빛은 ‘필운행화(弼雲杏花)’의 살구꽃일 것이다. 그림 속의 살구나무들은 버드나무와 함께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이들은 대부분 벚꽃이나 목련으로 대체되었다. 필운대가 있는 배화여고와 배화여대 교정에 겨우 두세 그루만 남아 있는 실정이니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든다.
임득명이 정선을 공부했던 만큼 화면의 짙은 농묵 미점과 소나무 표현은 정선 스타일이다. 마을의 화사한 분홍꽃과 버드나무를 묘사한 필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표현 기량이 덜 익었지만, 그 미숙함이 도리어 봄맛과 잘 어우러져 있어 좋은 그림이다. 대지의 싱그러운 봄기운을 전해주는, 담먹과 담청색 넓은 붓 바림과 번짐은 정선이나 기존의 산수준법을 탈피해 돋보인다. 임득명의 참신한 회화미로 현대감마저 물씬 든다. 그동안 옥계사 모임을 가진 시기 1786년에 의존하여 임득명이 20대 초반에 그린 초기 작품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개성적 화풍이 뚜렷하고 거칠게 그린 분방한 솜씨로 미루어 볼 때, 40~50대에 그려 《옥계사첩》을 꾸미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또한 임득명의 〈등고상화〉는 앞서 살펴본 정선의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과 달리 필운대 언덕과 그 아래 마을만 포착한 구성을 보여준다. 원경의 남산과 관악산, 그리고 도성 내부의 풍경이 생략되어 있다. 두 작품을 비교하자면, 정선은 멀리 위치한 남산을 담기 위해 제3의 시점을 설정하거나 부감하여 그린 반면, 임득명은 남산과 원경을 빼고 아래서 바라본 시선대로 필운대 언덕 능선을 살려 그렸다. 눈에 보이는 대로의 봄볕 가득한 풍경을 그린 셈이다. 오른편 능선은 필운대 언덕의 실제 풍경처럼 보이지만, 왼편의 능선은 실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선의 화면 구성상 일부러 좌우를 맞추어 놓은 듯하다. 필운대 언덕 위에는 일곱 명의 시인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서있고 여섯 명이 앉아 있으나, 정선 그림처럼 좌장을 중심으로 집중된 표정들이 아니어서 재미나다. 모두 갓을 쓰지 않은 점과 더불어, 여항문학을 선도한 중인층의 자유스러움이 묻어나는 듯해 눈길을 끈다. 영조 시절 문인사대부층의 경직된 모습을 읽게 해주는 정선의 〈필운대상춘〉에 비하여, 임득명의 〈등고상화〉에는 정조 시절 부상한 중인이나 서민층의 문예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8세기 영·정조의 시대 변화상을 읽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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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사첩》(삼성출판박물관 소장) 중 송월헌 임득명 <등고상화(필운대)> 종이에 수묵담채 24.2×18.9cm 18세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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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필운대 봄꽃 ⓒ이태호

노란 종이배를 타고 신도원의 꿈에 들다
올봄, 나는 틈날 때마다 인왕산을 찾았다. 산중턱에 살아남은 개복숭아꽃을 만나려고 3월 말부터 드나들었다. 4월 중순이 되자 드디어 여기저기서 복사꽃 꽃망울이 터졌다. 옥류동에서 인왕산 중턱으로 오르며, 양지바른 비탈에서 복숭아나무 10여 그루를 발견하곤 반가웠다. 몇 그루의 죽은 고목 밑둥치에서 새순이 돋고 새 가지에 꽃피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여린 가지에 새싹과 함께 핀 선홍빛의 〈개복숭아꽃〉 한 가지를 스케치했다. 이 개복숭아꽃에서 그야말로 자연이 지닌 생명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손길을 타지 않은 채 현재의 인왕산 숲을 그대로 놔둔다면, 언젠가 복사꽃 만발한 도화동천이 도래할 거라 상상하며 황홀했다. 신도원(新桃源)의 꿈을 떠올렸다.
이번에 그린 필자의 그림 〈신도원의 꿈〉은 정선의 〈필운대상춘〉 방식으로 화면을 잡아 보았다. 근경에 필운대를 배치하고, 수묵으로 표현한 원경의 남산과 관악산 아래 빌딩숲, 그리고 경복궁은 필운대 위쪽에서 내 눈에 든 모습 그대로이다. 현재 필운대 언덕에는 근래 세워진 정자가 덩그러니 있고, 그 옆에 두 면의 테니스코트가 들어서 있다. 수백 명의 시인들이 모여 봄노래를 읊었다는 언덕이 그렇게 변했다. 테니스 치는 모습은 그릴 자신이 없어 생략하였고, 신도원에도 필요할 정자만 살려 보았다. 필운대와 빌딩숲 사이, 옛 도성 안을 복사꽃으로 가득 채워 넣었다. 금년 필운대와 인왕산을 답사하며 봄꽃을 찍을 때, 그 너머의 광장에서는 세월호 1주기를 맞아 추모 인파가 오열하고 갈등하였다. 우리 시대의 신도원은 그 아픔을 안고 꾸는 꿈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필운대 아래에 노란 종이배를 띄웠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인적 없이 정박한 빈 배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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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 <개복숭아꽃> 종이에 채색 20.3×33c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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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 <신도원의 꿈> 종이에 수묵담채 37.8×56.5cm 2015

 

 

SPECIAL FEATURE 시선의 정치, 동물원을 다시본다

미술관 옆 동물원, 그 시각적 ‘애완(愛玩)’의 역사와 이별하기

박소현 도쿄대 미술관학 박사

미술관과 동물원은 세계에 대한 욕망의 발현에서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더 큰 세계, 더 큰 권력에 대한 욕망이 그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유럽에서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유럽인은 뱃길을 통해 미지의 세계와 만나고 유럽 바깥을 상상하게 되었다. 유럽인에게 더 큰 세계는 난생처음 보는 희귀한 물건들과 동식물의 대량 유입으로 체감되었고, 덕분에 공격적인 식민지 확장에 힘입은 탐험과 약탈이 경쟁적으로 벌어졌다. 동물원은 이 더 큰 세계를 상상하고 가시화하는 하나의 방법이었고, 각국의 지배자들은 자국에 없는 동물들을 포획하고 열정적으로 수집하면서 권력을 교환하고 확장해갔던 셈이다. 1515년 어느 날, 이 대항해시대를 선도한 포르투갈 리스본에 인도코뿔소 한 마리가 출현했다.
당시 포르투갈령 인도에서 포획된 이 코뿔소는 120일간의 긴 항해를 거쳐 리스본에 도착했고,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동물원에 잠시 보관되었다가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 1세에게 선물로 보내지던 길에 선박 난파로 익사하고 말았다. 유럽인에게는 전설의 동물이었던 코뿔소가 잠깐이나마 그 모습을 드러냈던 이 사건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여러 사람의 기록을 통해 그 실체가 전파되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코뿔소>는 그런 사람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이 코뿔소의 죽음에 이르는 여행경로는 당시 유럽에서 권력이 교환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그 여행의 마지막은 아마도 박제가 되어 누군가의 분더캄머(Wunderkammer, Cabinet of Curiosities)에 소장되는 것이었으리라.
보통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기원으로 거론되는 분더캄머 또는 쿤스트캄머(Kunstkammer)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이 둘은 신이 창조한 대우주에 비견되는 자신만의 소우주를 만들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대항해시대에 이러한 의지는 유럽 밖에서 약탈해온 신기하고 희귀한 광물이나 동식물의 박제 등을 수집하고 전시하려는 욕망으로 분출되었다. 유럽 왕실의 쿤스트캄머는 이 탐험과 수집과 권력의 삼위일체를 가장 정치한 형태로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희귀동물의 박제 등과 같은 자연사적 유물뿐 아니라, 고대유적에서 발굴된 유물, 값진 회화 등이 함께 소장되어, 미술관과 자연사박물관 또는 미술작품과 동물 표본이 동거하는 미분화된 상태를 체현하고 있었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적 이성에 근거한 분류학이 체계화되면서, 이러한 동거상태는 막을 내리고 비로소 미술품 컬렉션과 동물 컬렉션이 다른 계통과 공간을 확보하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미술관과 박물관(죽은 동물의 표본 수집 및 전시), 그리고 동물원(살아있는 동물의 수집 및 전시)이 분리되었음에도, 애초에 그 수집과 전시를 관통하는 욕망은 이후까지도 건재했다.
19세기 들어 만국박람회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에도 이 수집과 전시를 통한 국가권력의 집중과 가시화는 여전히 유효한 전략으로 채택되었다. ‘만국’에서 산출된 ‘만물’을 한자리에 모아서 전시하는 전지구적인 기획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등을 일종의 집합적인 단위로 총체화하는 강력한 기제였다고 하겠다. 뒤늦게 근대화에 착수한 일본에서 이 만국박람회 참여를 중요한 국가적 기획으로 간주하고, 내국권업박람회라는 이름으로 국내 리허설까지 수차 개최했던 일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각종 사물들을 수집하여 전시하는 일이 근대적 세계 또는 국가를 상상하고 가시적 형태로 실체화하는 데에서도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서 지난한 학습의 과정을 요했던 것이 바로 유럽의 분류학 체계였던 바, 초창기 일본의 박람회 역시 전통적인 박물학의 관점으로부터 이 근대적 분류체계로의 진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정부는 그 전해인 1872년에 일본 최초의 박람회를 개최했고, 일본 전국에서 조달한 서화, 골동품, 동식물의 박제 및 표본 등을 유리진열장에 넣어 전시한 다음 이를 대중이 관람하게 했다. 일반 대중을 관람객으로 설정한 근대적인 시각장치가 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작동된 기점으로 볼 수 있는 이 박람회는 15만 명 이상이 다녀간 것으로 추정될 만큼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후 1877년에 에도막부의 상징공간이었던 우에노에서 제1회 내국권업박람회가 개최되고, 그 전시관을 계승하는 형태로 일본 최초의 미술관(일본 전통미술 소장)이라 할 박물관(현재의 도쿄국립박물관)이 개관하였다. 그리고 1881년에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1882) 전시관 용도로 박물관 건물이 신축되었다. 박람회행정의 일환으로 박물관이 개관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박물관의 소관 관청은 농상무성(農商務省) 박물국이었고, 이 농상무성 소속 박물관의 천산과(天産課) 부속시설로 우에노동물원이 개원하였다(1882). 이른바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는 익숙한 체제 및 장소성의 직접적 기원은 일본의 내국권업박람회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미 1872년 박람회부터 동물표본이나 박제를 미술품과 마찬가지로 유리진열장에 격리시켜 전시함으로써, 전시대상과 거리를 둔 시각적 ‘애완’이라는 감각이 제도화되고, 죽은 동물(표본이나 박제)에 대한 이러한 시선은 살아있는 동물에까지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86년에 박물관이 황실 업무를 소관하는 궁내성으로 이관되면서 제국박물관 시기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제실박물관체제로 이어졌는데, 동물원 역시 박물관과 함께 궁내성으로 이관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산 동물을 넘어서 호랑이, 코끼리, 하마 등 외국의 진귀한 동물들이 도입되었다. 즉 미술관 및 동물원이 황실 소유로 이관됨으로써, 그 수집품의 예술적·보물적 가치 및 희소가치는 더욱 강화되었고, 미술품 및 살아있는 동물에 대한 거리를 둔 관조, 철저히 시각화된 경험으로서의 감상 역시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에도막부의 상징공간을 박람회 공간으로, 그리고 박물관 및 동물원이 들어선 거대한 근대적 상징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전략은 머지않아 식민지 조선에서도 재연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일본 통감부는 고종의 양위를 강제하였고, 순종의 새로운 거처인 창덕궁 수선 공사를 진행하면서 창덕궁에 인접한 창경궁에 박물관·동물원·식물원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공식기록으로는 순종이 ‘새로운 생활에 취미를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목적으로 밝혀져 있으나,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다른 자료에서는 이미 계획단계부터 순종만의 취미시설이 아닌 일반 공개가 예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909년에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일반 공개가 이루어졌는데, 이와 함께 공표된 것이 ‘어원종람규정’이라는 창경원관람규칙이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광질(狂疾)인 자, 만취한 자, 7세 미만으로 보호자가 없는 자는 입장이 금지되었고, 누추한 의복이나 마차 등을 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더해서 원내에서는 정숙하고 전시품을 만져서도 안 되었으며, 가축의 입장도 금지였다. ‘창경원’ 소속의 조선고미술을 전시한 박물관이나 동물원 모두 동일한 관람규칙을 적용받았던 셈인데, 흥미로운 점은 가축 입장 금지라 하겠다. 이는 시선의 주체를 인간으로 한정하고, 살아있는 동물일지라도 어디까지나 시선의 대상으로만 국한시킨 근대적 입장을 대변해준다.
한편 순종을 비롯해 일반 대중에게 인기가 높았던 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동물원이었다. 동물원은 창경원 개원 이전에 서울에서 사립동물원을 운영하던 유한성(劉漢性)의 동물을 전부 매입하고 그를 직원으로 채용해 설립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동물원에는 한국 각지에서 잡아온 호랑이, 늑대, 곰, 학 등과 외국에서 사들인 코끼리, 낙타, 캥거루, 악어 등의 이국적인 동물들이 있었고, 1930년대에 이르면 그 수가 180종 1000여 점을 넘을 정도로 늘어난다. 동물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과 공감은 각별해서, 1912년에 인도산 암코끼리가 위장병으로 죽은 것을 애도하는 신문기사에는 이 코끼리의 기념물을 제작해 동물원에 영구설치할 계획까지 보도되기도 했다. 이러한 동물원의 특별한 위상은 ‘미술관 옆 동물원’이 아니라 ‘동물원 옆 미술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듯하다.
태생적으로 미술관과 동물원은 대상을 사랑하여 가까이 두고 즐기는 ‘애완’의 전통이 근대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애완’의 말뜻이 주로 골동품이나 동물에 한정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애완’의 근대화란 다름 아닌 시각적 경험의 절대화이고, 세계에 대한 지배를 기저에 깔고 있는 시선의 욕망과 소유의 욕망이 유착된 수집과 축적, 그리고 이 수집품들의 체계적 분류와 전시 기법의 개발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근대적 대중공간과 여가시간의 태동과 함께 일상 속으로 빠르게 유통되고 오락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제도적인 차원에서도 여전히 미술관과 동물원은 하나의 법제적 범주 내에서 규정되고 있다. 우리의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은 동물원, 식물원, 수족관과 같이 살아있는 생명체를 수집, 보존, 전시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시설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하지만,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가족무덤’(아도르노)이라고 죽음과 유비시키는 관점에서 본다면, 동물원을 여전히 같은 범주로 취급하는 일은 위험천만하다. 미술관적인 시선을 죽은 동물, 살아있는 동물에까지 무차별적으로 확장시키는 근대적 기획은 인간 전시라는 획기적인 발명품까지 만들어냈고, 그 생명체에 대한 영구 보존의 욕망에 따라 살아있음에 대한 배려보다는 그 죽음 이후의 안식까지 시선에 노출시키는 과감함을 마다하지 않았다(미라, 박제, 표본 전시). 최근 동물원 운영에서 동물권 개념이 중요해지고 근대적 시선에 대한 반성이 논의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제 우리도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는 오래된 역사와 슬슬 우아하게, 인간적으로 이별하는 방법을 고민할 때이다. ●

Frans_Francken_(II),_Kunst-_und_Raritätenkammer_(1636)

프란츠 프랑켄 <쿤스트카머 컬렉션> 나무에 유채 74×78cm 1636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Garry Winogrand Central Park Zoo, New York 1967

게리 위노그랜트(Garry winogrand)
미국의 다큐멘터리 사진가 게리 위노그랜트는 1969년 첫 번째 사진집 《동물들(The Animals)》을 선보였다. 1962년부터 7년간 뉴욕동물원에서 촬영한 사진 43점이 수록된 이 사진집은 동물원의 동물과 관람객의 관계에 주목한 그의 사진에는 울타리 안 동물의 무기력한 모습과 구별되는 인간 중심의 시선이 잘 드러난다.
위 <뉴욕동물원(Central Park Zoo, New York)> 1967  아래<뉴욕>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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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 스기모토(Hiroshi Sugimoto)
<디오라마> 연작은 뉴욕 자연사박물관의 박제된 동물과 배경 그림으로 구성된 디오라마를 찍은 사진이다. 스기모토는 카메라의 눈과 세심한 조명을 이용해 이 장면을 마치 야생의 모습처럼 보이게끔 전환시켰다.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 즉, 보이는 것에 대한 오류는 사진이 진실을 말한다는 통념을 해체하는 동시에 과학적 역사를 고증하기 위해 전시된 디오라마도 하나의 재현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본질을 깨닫게 만든다.
<큰 사슴(Wapiti)> <디오라마 시리즈> 젤라틴 실버 프린트 50×60cm 1980 ©Hiroshi Sugimoto

ohahn

안옥현
텅 빈 강의실과 철망, 포르말린 병에 담긴 동물의 시신. 작가는 포토몽타주를 이용해 뚜렷하지 않은 이미지 속에서 파편적으로 등장하는 동물의 이미지와 밀폐된 시공간을 조우시키고 경계를 무화시키고자 한다.
<표본실의 청개구리> 젤라틴 실버 프린트 50×150cm 1997

윤정미_자연사박물관_2

윤정미
<동물원>에서 어둡고 칙칙한 실내우리, 삭막하고 인위적인 공간 구획이 강조된다. 유년시절 추억을 떠올리는 유희적인 공간이자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이 반영된 동물원의 이중적 속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동물원>이 흑백사진을 통해 인간의 어두운 소유욕을 드러냈다면 컬러사진의 <자연사박물관>은 ‘과학과 교육’이라는 명분하에 한국의 자연사박물관의 체계, 수집, 전시 디스플레이가 보여주는 다소 허술하고 키치적인 측면이 두드러진다.
<자연사박물관_2마리의 한국 호랑이와 2마리의 미국 늑대> C-Print 70×148cm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