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자본주의-신자유주의 그리고 예술의 딜레마

헬조선의 예술가

박은선 작가, 리슨투더시티 멤버

동료 작가들을 만나면 다들 밥은 어떻게 먹고 사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아르바이트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월세는 얼마 내는지, 어느 동네의 작업실 임대료가 가장 싼지, 이제 생존 자체가 어떤 작업을 할지보다 더 큰 문제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미술계가 비교적 호황이었다는 10년 전쯤에도 나는 가난했고, 아마 앞으로 10년 후에도 가난하게 살 개연이 높다.
아무리 경제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리슨투더시티 활동을 한다면 아마 10년 후에도 나는 여전히 가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가, 디자이너 모임인 리슨투더시티는 보통 구체적인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 자체를 예술로 생각하기 때문에 결과물이 팔 수 있는 물질적 형태로 나온 적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작업 방법을 바꾸어야 하는 것일까?

신자유주의와 예술주체
2008년 이전 한창 미술품이 잘 팔리던 시절이 있었다. 소위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은 주식과 같이 여겨졌고,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이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로 경기가 침체됨에 따라 예술품 경기도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다. 심상용은 《아트버블》(2016)에서 ‘결국 사람들은 시장이 예술화될 것이라 기대했으나 결국 예술의 시장화로 결말났다’고 말한다. 미술시장의 활기는 예전 같지 않지만 여전히 아트바젤(Art Basel)과 같은 주요 아트페어와 경매는 전 세계 미술시장과 예술에서 ‘가치’를 가늠하는 거의 절대적인 척도가 되었다. 바젤이 만들어내는 가격=가치의 등식이 이제는 고착되어 상관관계의 고리를 쉽게 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그 세계적 가격=가치체계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그 세계에 편입되기 위해 갤러리나 작가들이 해외 아트페어에 활발히 참여 할 수 있게 돕는 길을 선택했다. 2015년부터 “미술품 해외시장 개척지원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는 곧 미술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극소수의 작가를 배양하기 위해 많은 돈을 쓰기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 가격이 곧 가치가 되는 문제는 비단 오늘의 일만은 아니거니와 자본주의 초기부터 늘 문제되던 가치체계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특징은 모든 사회적 관계마저 자본으로 인식한다는 점에 있다. 인간의 고유한 가치라고 생각했던 가족관계마저 미국 사회학자들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으로 치환한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모든 비물질적인 것을 경제로 환원시키는 것이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푸코는 《생명 관리 장치의 탄생》에서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의 차이점을 짚어냈다. “생명정치(Vitalpoitik)는 각 개인이 다름 아닌 기업의 형식을 가진 골격을 구성하는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시장이라는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기업(enterprise)적 주체로 만드는 셈이다. 경쟁이 내재된 개인들의 집합, 그것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본질이다. 예술가도 예외일수는 없다. 미술가가 하나의 기업체적 주체가 되어 스스로를 시장에서 관리하려는 행위는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며, 아트바젤에서 고가로 작품을 판매할 수 있는 작가들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적통자가 되는 셈이다. 문제는 그 적통자는 1% 미만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 예술 교육과 정책은 왜 늘 1%만을 장려하는가? 예술 정책은 1%의 스타 작가군을 2~3%로 늘리자가 아니라, 99%가 각기 다른 가치를 실험하고 상상하는 행위를 보조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한 사회의 예술가들이 단일한 가치를 상상할 때 그 예술계는 부패한다(1950년대 이후 소비에트미술을 보라). 그러한 장면들을 미술에서 수없이 보았다. 우리나라 예술가들이 가난한 것은 기본 복지 시스템이 엉망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 원인은 해외 아트페어에서 팔릴 법한 작품들로 미술계의 취향을 단일화하는 데 있다. 권력 기관의 취향에 대해 질문하고, 다른 형식과 통치방법을 상상하는 일이 그나마 헬조선에서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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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시대 미술계 핫이슈

“예술의 가치가 사라진 시대”

지난 3월 3일 문화체육관광부가 3년마다 시행하는 ‘문화예술인 실태조사’ 2015년 결과를 발표했다. 자료에 따르면 미술 분야 응답자 총 39,393명 가운데 창작 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입이 전혀 없는 경우가 54.4%, 혹은 있다 하더라도 연 500만원 미만인 경우가 15%에 달해 지난 1년간 예술활동 평균 수입이 614만 원에 불과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를 월 평균으로 환산하면 약 50만 원 정도로 2015년 기준 1인가구 한 달 최저생계비 61만7,281원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또한 예술 경력이 단절되는 사유로 56.4%가 예술활동 수입 부족을 꼽았다. 이처럼 미술계에서는 현재 부업 없이 창작활동만으로는 기본적인 생계를 꾸려나가기 힘들 정도로 작가들의 생활이 어려운 실정이다.
사실 이 실태 조사는 조사 대상이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활동증명을 신청한 예술인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업 수혜 예술인, 문화예술 관련 협회·단체 회원으로 가입된 예술인으로 한정되어 미술계 실태 전체를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이 조사는 구조적인 문제상 예술가가 왜 빈곤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본질적인 원인을 규명하기보다 예술가 개인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는 차원에서 한계가 있다.(물론 미술 생태계를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가 되는 표본조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전부터 예술가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창작활동을 증진시키기 위해 예술가를 위한 복지 정책의 중요성이 끊임없이 부각되었으며, 이와 관련해 시각예술분야 표준계약서를 비롯해 아티스트 피 관련 이슈들이 화두가 되었다. 이에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연구용역을 의뢰해 2015년 시각예술 분야의 매매, 전시, 대여, 신작 제작 등 5종의 표준계약서(안)를 개발했으며, 지난해 12월 공개 토론회를 통해 시각예술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수정 보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 상반기 공정거래위원회 협의를 거쳐서 최종 확정하고 이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을 통해서 홍보, 보급할 예정이다. 이와는 별개로 오는 5월부터 개정 예술인복지법이 발표되면서 문화ㆍ예술활동과 관련된 계약의 당사자는 서면계약 체결이 의무화된다. 법 시행일에 맞춰 예술인복지법 시행령 개정을 준비 중이다. 여기에는 실효성 담보를 위해 과태료 부과 등의 제재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아티스트 피의 경우 2014년 12월 아티스트 피 연구 및 개발을 위한 착수보고회가 열렸고, 지난해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을 통해 국내외 실태 및 현황 관련 연구보고서가 발간된 상태다. 현재 현장의 의견 수렴을 거치는 과정에 있으며, 올해 국립현대미술관과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와 201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공모사업’ 중 전시지원, 공간지원에 시범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아티스트 피와 표준계약서는 예술가의 창작 행위 자체에 대한 보상과 예술가의 권익 보호를 위해 꼭 필요한 제도지만 이러한 제도적 정착이 오히려 제약이 될 뿐 아니라 예술에 대한 미학적 사회학적 논의 없이 권리와 의무로만 다뤄진다면 부작용이 클 것이라는 미술계 내부의 우려가 있다. 관련 전문가들도 이 같은 제도 정착은 10년 이상 장기적으로 봐야 할 일이기 때문에 단숨에 해결 가능한 문제는 아니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한편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 안에서 ‘지성의 산실’을 추구하던 대학은 원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경쟁과 수치적 목표를 최우선으로 삼는 취업 준비장이 되어버렸다. 몇 년 전 정부의 대학평가(부실대학 선정) 및 구조조정에서 부실대학 선정 낙인이 뜨거운 감자로 불거진 데 이어 지난해부터 정부는 학사 구조를 대규모로 개편하고 정원을 조정하면 각 학교당 최대 300억 원을 3년간 지원하는 ‘프라임사업(산업연계 교육활성화 선도대학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리고 이에 맞서 반대 여론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프라임 사업의 본질은 취업 시장에서 ‘먹히는’ 학과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경쟁력이 낮은 학과, 비인기 학과가 통폐합 대상이 되고 있는데 특히, 취업률이 저조한 예술관련 학과와 인문관련 학과가 제1순위로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중앙대, 동의대 등은 프라임 사업에 선정되기 위해 예술대학을 포함한 일부 학과의 통폐합 구조 개편을 추진하기로 발표했으며, 몇몇 대학에서는 폐과를 검토했다가 학생들의 반대에 부딪혀 철회를 표명하기도 했다.
대학구조조정 (2)이에 맞서 해당 학과 학생들을 비롯해 대학연합 학생 단체 측은 “대학은 기업의 하청업체가 아니다” 등의 문구를 내걸고 대규모 반대 시위를 진행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정부가 청년세대의 저조한 취업률 문제를 사회 구조적인 차원에서 근원적으로 해결하기보다 기존 대학 교육의 문제로 떠넘기는 식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대학 또한 일단 재정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지원금을 받기 위해 교직원 및 학생들과 제대로 된 소통 없이 학과 통폐합을 일방적으로 결정해 학생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이슬비 기자

SPECIAL FEATURE 자본주의-신자유주의 그리고 예술의 딜레마

전복하지 않는 싸움: 신자유주의 시대의 예술가들

안소현 독립 큐레이터

최근 예술인복지법, 작가 사례비, 표준계약서 문제 등을 둘러싸고 본격화된 예술과 노동, 경제적 가치에 관한 논의들은 미술계 안팎의 여러 균열을 드러냈는데, 그중에는 젊은 예술인들과 그들을 우려하는 예술인들(문제가 없진 않지만 편의상 기성 예술인이라고 부르겠다) 사이의 논란도 있었다. 예술인들이 기관들과 견해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지만 생존과 관련하여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거진 이런 ‘세대갈등’은 약간 의외였다. 물론 기성 예술인 중에도 작가 사례비나 계약제도의 정착을 주장해온 경우가 있기에 이런 이원적 구분을 일반화할 수는 없고,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이 대부분 기성세대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 젊은 작가들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온 선배 작가들이나 이론가들에게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는데, 그것은 바로 젊은 예술가들이 자본 혹은 자본주의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지적이었다.
기성 예술인에게 “미술생산자”나 “예술노동”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었다. 그것은 생활인으로서는 자본주의를 벗어날 수 없고 예술시장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예술이라는 행위는 생산이나 노동 같은 경제적 개념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반면 요즘의 젊은 예술가들은 예술을 엄연히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전개되는 활동으로 보고 오히려 경제활동과 적극적으로 연결시키려 하였다. 작가 사례비를 요구하고, 예술노동자가 될 것을 자처하며, 미술시장에 진입하고 싶다는 욕구를 작업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변화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단순히 자본에 대한 인식의 부족일까, 아니면 그들이 근본적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어떤 환경에 속해 있는 것일까?
아주 넓은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일반적 이미지는 확실히 달라진 것 같다. 기성 예술인들에게 자본주의는 제어할 수 없는 탐욕, 무한 축적의 관성, 수시로 축적의 전략을 바꾸는 용의주도함, 자기 파멸을 향해 치닫는 모순 등 하나의 ‘괴물’로 묘사되곤 했다. 1990년대 초 국가체제로서의 사회주의가 무너진 이후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은 체제를 선택하거나 정당화하는 문제를 특별히 고민하지 않으며, 기성세대의 그런 태도를 낡은 것으로 생각하고, 공기처럼 당연해진 자본주의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이들은 기성 예술가들 역시 생계를 유지해왔고 오히려 자신들보다 쉽게 미술시장에 진입하였기 때문에 기성세대의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이 ‘고상한 척하는 위선’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런 변화는 근본적으로 젊은 예술가들이 기성세대가 겪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아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변화들은 작가 사례비에 관한 공개토론이나 예술노동을 주제로 한 전시, 그리고 SNS 논쟁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는데, 가장 두드러진 징후는 역시 <굿-즈 2015>(이하 <굿-즈>)였다.
이 행사는 통칭 “신생공간”을 중심으로 젊은 작가들이 저렴한 작품을 제작하여 판매하도록 기획된 자리였는데, 모든 참여자가 자본주의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현대미술 장터를 연다는 말에 펄쩍 뛰며 걱정부터 하거나 혀를 끌끌 차는 세대와는 분명 다른 가치관을 보여주었다. <굿-즈>에는 일반적인 미술시장에서 보기 힘든 작품/상품들이 등장했다. 포장에 사진작품을 프린트한 휴지, 페트병을 잘라 만든 나무, 원하는 대로 잘라 파는 그림, 관객에게 구걸을 하는 걸인 퍼포먼스 등이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예술작품의 희소성이나 물질적 지속성은 물론 디자인의 유용성과도 거리가 먼 이런 작품들을 즐기고 또 구매했다. 심지어 기본적인 시장 질서를 비웃듯 거지는 1000원짜리 휴지를 가져와 구겨놓고 두 배의 가격에 팔았고, 또 다른 작가는 그것을 가져다 더 큰 이윤을 남기고 팔았다. 다시 말해 이들의 동력은 주로 기존 미술시장의 속성을 거스르는 재미와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이 행사는 기존 미술시장의 높은 장벽에 대한 풍자로도 읽히고, 또 대안적 미술시장의 모델로도 읽혔다. 그 결과 비록 각 개인에게 큰 경제적 이익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작가들은 관객들에게 자신의 색깔을 각인시키며 상징자본을 얻었고 관객들은 그들의 ‘엉뚱함’을 즐기거나 소유하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그런데 젊은 예술가와 관객들의 일견 순수해 보이는, 다시 말해 자본친화적이긴 하지만 기존 미술시장에 저항하는 위와 같은 태도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는데, 그것을 신자유주의의 인지자본이라는 맥락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1978년과 79년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연에서 신자유주의는 국가로부터 보호받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경영’하는 주체인 호모에코노미쿠스를 등장시켰다고 했다(《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신자유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온 자본주의가 최근 들어 취한 축적의 한 전략인데, 국가가 시장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자신이 능력, 기술 등을 스스로 관리하고 경영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인적자본 혹은 인지자본이라 하는데, 그것은 마르크스가 고려한 노동시간으로 환산 가능한 노동력과는 달리 지식, 정보, 상징 등 복합적이고 질적인 노동과 관계된다. 인적자본체제에서 (1)노동생산물은 비물질적이며, (2)노동생산물은 노동 과정과 분리되지 않으며, (3)각 개인이 기업처럼 자기계발을 통해 경쟁하며, 그에 따라 (4)자본 역시 비물질적이고 상징적인 형태를 띤다. 이러한 인적자본의 성격들은 <굿-즈>에서 만족을 준 요소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관객들은 비물질적인 퍼포먼스를 구매하고, 작품을 자르고 나누는 과정을 즐기면서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조각들을 구입하며, 작가들은 각자의 개성으로 약간의 판매 수익과 더불어 이름을 알린다.
물론 이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등장한 모든 노동에 해당하는 성격이지만 오늘날의 예술만큼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으며, 예술가들이 도시 젠트리피케이션의 첨병이 되는 상황이야말로 이 현실을 고스란히 압축한다. 때문에 인적자본론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예술을 비롯한 비물질노동을 모델로 삼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같은 학자들은 예술이 비물질노동의 폐단에서 벗어날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고 반박하긴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예술을 상품화하고 상품은 예술화한다는 비판은 하나의 정설이 되었고, 디자인 시장의 전례없는 팽창과 상품화된 예술의 전형인 ‘굿즈’의 유행은 그런 주장들을 부인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원하든 원치 않든 예술가들은 그런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젊은 예술가들의 생존 전략
젊은 예술가들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기존의 미술시장에 대안을 제시하려 하지만 오히려 더 힘들어진 자본주의의 형태, 즉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상징자본에 매달리며 끊임없이 스스로 생존전략을 세워야 하는 상황에 대해 비판해야 할까? 그들이 추구하는 당장의 재미와 만족이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매서운 각성을 유도해야 할까? 그러나 자본주의를 벗어나면 어떤 대안이 가능한 지 제시하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혁명을 일으키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젊은이들이 자본주의를 전복할 생각은 안하고 자기 행복만 추구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어느 쪽도 대안이 못된다. 정치철학자 조정환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주장이 인지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인정하지만 예술이 신자유주의의 잔혹한 경쟁 시스템에서 벗어나게 할 동력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그 힘을 푸코가 말한 “자기 배려(souci de soi)” 개념에서 찾는다. (조정환, 《예술인간의 탄생》, 갈무리, 2015). 푸코의 자기 배려란 개인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계발에 매달리거나 외부의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규칙을 만드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상태이다. 조정환은 이러한 자기 배려의 상태를 위한 예술가 공동체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삶의 태도는 구체적인 대안이나 생존전략이 되기에는 여전히 너무 포괄적이고 이상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 예술가들이 자본주의 내부에서 추구하는 가벼운 재미와 만족은 거센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아무런 자발적 동력 없이 떠내려감으로써 얻은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급격히 늘어난 신생공간이나 <굿-즈> 같은 움직임은 이미 어느 정도 취향과 정서를 공유하는 집단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었기 때문에 작가들은 수요자들의 성향과 만족의 지점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구도에 놓인 개인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집단적 대안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신자유주의 연구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예외 없이 모든 삶에 적용되며 삶 전반을 바꾸어놓을 만큼 강력한 자본주의의 전략이라는 점, 또한 젊은이들의 고달픈 삶이 반드시 자신의 노력 부족에 의한 것이 아니며, 그런 경쟁이 역사적으로 언제나 당연했던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사실에 대한 인식은 그 자체로 예술을 둘러싼 많은 착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신자유주의 미술시장에서 성공한 작가가 모두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예술성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며, 예술의 상품화가 극단화되면 전통적 작품의 속성(물질성, 지속성 등)과 멀어진 작품이 오히려 더 높은 가격에 판매될 수도 있다. 반대로 미술시장에서 성공한 작가들은 반드시 높은 예술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다만 신자유주의 시장의 속성을 재빨리 간파하여 그에 맞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작품을 공장처럼 ‘생산’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아마도 놀라운 자기계발과 소통 능력을 지니고 스스로 그 경쟁 시스템에서 살아남도록 노력했겠지만, 시스템의 본성상 그들은 극소수일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하면 성공을 위해 일방적으로 예술성을 포기할 필요는 없으며, 죽도록 경쟁하여 살아남는다 해도 그것이 예술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상업성과 예술성의 이분법을 벗어난 작가들은 그들이 구성한 집단 안에서 서로의 생존을 도와주며 불평등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들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젊은 예술가들이 자본주의의 전략을 날카롭게 파악하거나 신자유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혁명적 시도를 하지 못한다고 해도 각자는 불평등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것과 싸우는 중이다. 우리가 그토록 열광했던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도 말하지 않았던가. 부(富)의 분배는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며 다행스럽게도 민주주의는 전문가들의 공화국으로 대체되지 않는다고. 즐겁게 살아남아준 모든 것이 감사한 세월, 젊은 예술가들의 생존감각에 작은 기대를 걸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