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캐슬린 킴의 예술법 세상18]

“안녕 아델레”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I〉
캔버스에 유채 138×138cm 1907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I 〉이 걸려 있는 방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초상화는 마치 세기 전환기의 빈을 압축한 것만 같았다. 풍요로움과 관능, 그리고 혁신 말이다. 아델레와 그녀를 이토록 아름답게 묘사한 클림트는 사적으로도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1

현 소장자인 로널드 로더의 찬가다.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국립미술관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클림트의 대표작 〈아델레 블로흐 – 바우어 I (Adele Bloch – Bauer I)〉(1907)는 뉴욕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에 가야만 볼 수 있다. 유명 화장품 사 에스티 로더 창업주의 아들이자 슈퍼 컬렉터, 예술 후원가인 로널드 로더는 동유럽 유대계 출신으로 독일 –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예술에 푹 빠져있었다. 2001년 그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아트 딜러인 서지 사바스키와 함께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건너편에 있는 밴더빌트 주택을 매입해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 빈 분리파의 작품들로 뮤지엄을 세웠다. 그리고 2006년 5월, 이 뮤지엄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아델레 블로흐 – 바우어 I〉을 구입하면서 최고의 전문 뮤지엄으로 떠올랐다. 작품 가격은 당시로서는 역대 최고가인 1억3500만 달러.

명작이란 아는 이에게만 명징하게 본질을 드러내 보이는 법. 첫째로 이 작품은 모더니즘과 혁신, 정신분석과 인간 내면의 탐구, 그리고 과학으로 요약할 수 있는 1900년대 전후 빈의 상징과도 같다. 이 시대의 빈이 장식화가 출신 클림트를 모더니즘 예술가로 변모시켰다. 작품은 전통적 삼차원 공간에서 벗어나 ‘현대적 평면’ 공간으로 나아간 최초의 그림이다.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클림트는 의식의 세계에서 다차원적인 내면의 자아와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갔다. 더구나 클림트는 정신분석학뿐만 아니라 발생학, 해부학, 생물학 같은 자연과학에도 관심이 있었다. 작품에는 생물학적 상징들이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아델레’의 옷에 그려진 작은 도상학적 무늬들은 아르누보 스타일의 장식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생식세포를 상징한다. 당시의 정신분석학과 자연과학을 예술의 세계로 끌고 와 표면 아래 숨은 인간의 내면적 세계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둘째로 금빛 초상이 뿜어내는 화려하고 관능적인 아름다움이다. 모델은 금박의 기하학적 형상들에 둘러싸여 있다. 클림트는 의도적으로 의상, 소파, 배경 등 작품의 다양한 요소들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처리했다. 평면공간 안의 모델은 당시만 하더라도 터부시되던 여성의 성욕과 공격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세기 전후 빈의 세속적 아이콘을 탄생시켰다. 시대의 예술가가 여성의 아름다움을 재창조했다.

“안녕 아델레(Ciao Adele)” 문구가 적힌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I〉 광고판

그림 속에 얽혀 있는 드라마틱한 사연들이야말로 작품의 세 번째 가치다. 클림트와 작품의 모델이자 연인이자 후원자였던 아델레의 비밀스러운 관계. 영화 〈우먼 인 골드〉(2015)로도 소개된 적 있는 작품 반환 소송. 이 둘은 명작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아델레는 빈의 사업가이자 문화예술 후원자인 페르디난트 블로흐-바우어의 부인이었다. 자녀가 없던 부부는 조카들을 특별히 아꼈다. 작품의 상속자로 훗날 오스트리아 정부와 반환 소송을 벌인 마리아 알트만(Maria Altmann, 1916~2011)도 아델레의 조카다.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면서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하거나 탈출했다. 저항운동을 지원하던 블로흐-바우어 가문도 스위스로 망명했다. 가문의 자산은 모두 몰수당했는데 여기에 아델레 블로흐 – 바우어의 초상화 2점도 포함돼 있었다.

나치가 패망하고 약탈 예술품들은 오스트리아 정부로 되돌아왔다. 1946년 정부는 나치 점령기간 중 사유 재산을 약탈하기 위해 행해진 모든 법률 행위와 사실 행위를 무효화하는 특별법을 제정했다. 덧붙여 문화재나 국유 예술품을 정부 승인 없이 반출할 수 없도록 하는 법도 제정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부가 약탈 예술품들 중 일부를 원소유자에게 돌려주지 않았고 관련 사실들을 은폐했음이 언론의 폭로를 통해 드러났다.

1998년 정부는 여론의 압력에 밀려 나치 약탈 예술품 처리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반환하기 위한 문화재환수법(Kunstruckgabegesetz)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클림트 작품 17점 등 블로흐 – 바우어 가문이 약탈당한 예술품들도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인 마리아 알트만에게 반환됐다. 그런데 정부가 〈아델레 블로흐 – 바우어 I〉 등 6점의 클림트 작품에 대해서는 반환을 거부하고 나섰다. 근거는 아델레의 유언장이었다. 아델레는 1925년 사망 직전 “남편이 사망한 후 나의 초상화 점과 풍경화 4점을 국립미술관에 기증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20년 뒤인 1945년에 사망한 남편은 아델레의 초상화를 포함한 모든 유산을 조카들에게 상속했다. 아델레는 자신이 그려진 초상화를 자신의 소유라 생각하고 기증 유언을 남겼지만 애초부터 이 그림의 소유권자였던 아델레의 남편은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국립미술관에 자신에게는 아내의 유언을 따를 법적 의무가 없음을 명백히 통보하고 조카에게 상속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아델레의 유언장만을 근거삼아 미술관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에서 살고 있던 조카 마리아 알트만은 뉴스를 통해 자신이 합법적 소유권자임을 알게 됐다. 2000년 오스트리아 유대인 출신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손자인 햇병아리 랜드 쇤베르크 변호사를 선임해 작품을 되찾기 위한 국제 반환 소송을 시작했다. 당장에 소송비용이 문제였다. 오스트리아법은 반환 소송의 경우 반환 목적물인 작품가격의 10%를 법원에 선납하도록 정하고 있었다. 이 작품 가격이 보통인가.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알트만은 이를 피해 오스트리아 대신 미국 법정을 택했다. 이로써 작품의 배경이 된 한 세기를 뛰어넘는 세기의 재판 ‘알트만 대 오스트리아 정부’ 간의 소송 2 이 시작됐다. 과거 유럽을 주름잡던 합스부르크 제국과 현재의 미국이라는 신흥 제국의 다툼이기도 했다. 여전히 먹구름처럼 배회하는 나치 망령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기도 했다. 또한 나라와 나라 사이의 예술품 반환에 대한 국제소송의 법리와 표준이 정립되는 재판이기도 했다.

소송의 쟁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1. 재판 관할권 충돌 2. 소급효 문제 3. 공모 여부 및 반환청구권의 근거였다. 먼저 알트만 측은 클림트의 작품을 약탈할 때 나치와 오스트리아 정부 간에 공모가 있었다고 공세적으로 주장하고 나섰다. 나아가 정부가 나중에 약탈품을 돌려받았다면 당연히 원소유자에게 돌려주어야 하는데도 정부는 이를 속이고 작품을 편취했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소송 절차부터 따지고 들었다. 미국 법원은 이 사건 재판을 관할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재판 관할’이란 것이 있다. 아무 법원에나 가서 불쑥 재판을 제기할 수 없다. 그곳에서 재판을 해야 할 합의나 법적 근거가 있어야만 한다. 대부분 법으로 관할권을 정해둔다. 모든 재판은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본안 재판, 본래적 의미의 다툼으로 넘어가게 된다. 따라서 관할 문제는 본안 재판에 앞서 해결되어야 할 절차적 재판에 해당한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부분부터 다투고 나선 것이다. 미국에는 주권 존중 차원에서 외국 정부를 상대로 함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도록 한 외국주권면책법(FSIA)이 있다. 예외 없는 원칙이란 없는 법. 법은 예외를 두어 외국 정부가 미국에서 상업적 행위를 한 경우에는 미국 법원에다 재판을 걸 수 있도록 규정했다.

쟁점은 ‘상업적 행위’ 여부였다. 벨베데레 국립미술관에서의 전시가 상업적 행위일까. 미국 연방대법원은 벨베데레가 미국에 미술관과 작품에 대한 광고를 하고 있고 영어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으며 미국의 관람객들을 유치하였다는 점 등을 들어 상업적 행위로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관할 문제는 이렇게 정리됐다. FSIA는 1976년 제정되어 1977년부터 시행됐다. 벨베데레의 전시는 1976년 이전부터 있어 왔다. 그렇다면 법 시행 전에 발생한 일에 대해서도 법이 정한 예외 규정 부분을 소급 적용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연방대법원은 이 또한 알트만의 편을 들었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자신 있게 밀어붙인 재판관할권 문제에서 불리한 판결이 내려지자 국제적 비난 여론도 거세지기 시작했다. 정부는 정치적 해결을 모색하고 나섰다. 원고인 알트만에게 미국 내 재판을 종결하고 오스트리아 중재법원에서 해결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2005년 5월 알트만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중재 절차가 시작됐고 전문가들의 의견이 제시됐다. 마침내 오스트리아 중재법원은 문화재환수법 제1조 반환의무규정에 근거해 〈아델레 블로흐 – 바우어 I〉은 원소유자의 상속인인 알트만에게 반환되어야 할 예술품이라고 선언했다. 2006년 1월 15일 분쟁 개시 8년여 만에 작품은 벨베데레에서 알트만에게로 넘겨졌다. 빈은 주체하기 힘든 깊은 상실감에 휩싸였다. 버스 정류장 등 도시 곳곳에는 “안녕 아델레(Ciao Adele)”라는 현수막과 광고가 내걸렸다. 그리하여 ‘1900년 빈의 여인’은 미국으로 영영 떠나갔다. “안녕 아델레.” (사실 알트만은 매각을 꺼려했다. 형편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공공에 전시되어야 한다”는 최후의 조건을 내걸고 로널드 로더에게 팔았다. 덕분에 작품은 노이에 갤러리에서 언제든 만날 수 있게 됐다)

1 Sophie Lillie and Georg Gaugusch,, Portrait of Adele Bloch – Bauer (New York: Neue Galerie, 1984) at p.13.

2 Altmann v. Republic of Austria


글:캐슬린 김 | 미국 뉴욕주 변호사, 홍익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