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바운드


2020.3.6~2020.3.26 아마도예술공간


글: 김진주 | 시각문화연구

송상희 〈변신이야기제 16권: 코오라, 플라시오사우르스 그리고 리바이어던의 사랑이야기〉 연필 드로잉 애니메이션, HD, 칼라, 사운드 14분 2009

기획자는 전시 제목을, 작금에 직면한 위기의 원인이 근대성이라는 인간중심의 사고에 있음을 꼬집어 온 브뤼노 라투르의 단어에서 빌려왔다. 처음 공모에 당선된 기획안의 제목(‘클래펌 통근버스를타는사람’)과 달라진 과정이 궁금하면서도, 어스바운드로 결정지은 기획자의 문제의식은 우리의 운명을 둔 예언으로, 위기에 대한 따끔한 분석으로 다가오기에 좋은 선택이라고 보인다. 지구에 묶인 자라는 뜻을 풀어쓰는 대신 음차한 이 제목에서 어스는 지구(earth)이면서 우리(us)로 중의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2020년 3월 우리 인간은 지구 공동의 위기에 묶여버렸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간들은 한 지구상에서 살고 있음을 매일매일 강해지는 강도로 실감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바이러스를 옮기지 않기 위해 서로간의 물리적 연결을 잠시 끊어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미술도 예외는 아니어서 국내외 할 것 없이 미술관들이 속속 문을 닫는 가운데 이태원의 한 작은 공간에서 조용히, 무사히 열린 이 전시의 기획 방향은 애써 상상력을 끌어 모으는 수사나 논리가 덧붙지 않아도 지구인이 직면한 지금의 위기 속에서 더욱 간명하게(간단명료, 그리고 간에 새긴다는 두 가지 뜻에서) 관객에게 전이되는 호소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한동안은 이 전시 〈어스바운드〉를 코로나 시대와 함께 기억할 것 같다.

조현아 〈노와 I〉(사진 왼쪽) 단채널 영상 18분 32초 흑백, 사운드 2018 ©사진촬영 조준용

잔상의 이유는, 달리 말하면 좀 오래 기억되길 바라는 내 소망의 근거는 이 전시가 생명이나 생태 같은 지구적 문제를 독보적 강렬함으로 주장해서도, 또 시대를 잘 맞춰서도 아니다. 이미 몇 해 전부터 인간중심의 사회에서 오류, 재난, 죽음을 마주하는 사건들에 대한 반향으로 동식물을 다루거나 생명 또는 몸에 관해 작업해 온 여러 작가가 기획자들의 선택/구애를 받아 관객 앞으로 호출되고 있다. 소위 바이오아트로 작가적 관심사를 옮기는 변화도 본다. 〈어스바운드〉 또한 그 경향 속에서 읽히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사건들, 3ㆍ11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 구제역 이후에, 세월호 이후에… 그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나온 사유들, 그것을 반영하는 반성적 문화의 산물로서의 미술은 왜 지속하는, 해결하는 힘이 없었나. 의문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생태주의가 미술기획에서 제대로 유행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나는 〈어스바운드〉의 마지막 장면, 김화용/이소요/진나래 작가 공동의 전시 속 전시 〈예술을 위한 생물 전시, 첫 번째 버전〉에서 그 희망을 봤다. 김화용의 제안으로 모이게 되었다는 이들은 작품이라는 미술관 수집의 대상으로 결과 짓지 않고, 공부와 고민의 순간들을 수집하는 행위자가 되어 보여준다. 도판을 나열하고 글을 병치하는 식의 시각화 방식이 새로울 것 없긴 하지만, 그보다 이들이(일부러 이 지점을 포기하고) 치중한 고민의 교차점은 다른 새로움을 충족시킨다. 버려질 위기에 처한 박물관의 생물표본을 다시 보존처리하는 초기작에서부터 꾸준히 생물을 미술로 다루는 의미와 실제를 시도해 온 어떤 작가, 비거니즘과 같은 생태적 실천을 실행에 옮기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비인간종(種)에 대한 시각적 인식을 고찰하는 어떤 작가, 인간중심으로 구성해왔던 세계의 법칙과 질서를 인간에서 탈피해 생명체들 간의 소통과 결성으로 수립하는 실험을 하는 어떤 작가, 이 어떤 작가들의 공부 모임을 그대로 옮겨 놓은 설치는 시각을 인간중심주의에 치중해 활용한 미술의 역사를 성찰하겠다는 기획적 포부가 해소되는 지점이다.

염지혜 〈검은 태양〉 단채널 영상 13분 31초 2019

조현아 김화용 이소요 진나래 〈예술을 위한 생물 전시, 첫 번째 버전〉 책자와 이미지월이 있는 열람실 가변 설치 2020

다시 ‘어스바운드’로 돌아가, 라투르의 어스바운드는 이분법적 상대화를 통해 인간다움을 정의하는 휴먼(human)을 대신하는 단어이다. 주의할 것은 이름만 바꿔 부르는 것이 아니라, 기존 체계를 바닥부터 훑어내는 완전히 달라진 개념이라는 점이다. 어스바운드에게 그를 둘러싼 세계는 비인간적(따라서 정복해 인간화해야 할) 자연이 아니라, 서로 다른 말과 문화로 분할되기 이전의 지구 그 자체이다. 이때 지구는 인간다움의 표상인 인식이나 종교와 대별해서 비인간을 지칭하는, 자연이라 불러온 것들의 대체어가 아니다. 이 지구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여러 개체와의 연결과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를 조절하는 관계의 몸이다. 그래서 이성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여러 동시성을 가진다. 외재적이면서도 내재적이며, 공통적이면서도 지역적이고, 전적으로 생명체인 것도 아니지만, 생명체가 아닌 것도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유한성을 민감하게 인식하게 하는 존재적 위기의 순간에야 이러한 지구를 가까스로 알아본다. 위기에 직면한 존재들은 어스바운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어스바운드는 이 동그란 세상에 함께 살고 있다는 것에 머무르지 말고 이 지구를 하나하나 직조하는 어떤 관계망 속에 있음을 느껴야 한다. 이 전시는 이미지의 어스바운드들이 만드는 지구처럼 구성되어 있다. 비극적 사랑이야기 속에서 연동되는 먹이사슬(송상희)은 포식자의 몸에 축적되는 하이퍼오브젝트 플라스틱(염지혜)으로, 그리고 사라지는 빙하와 가려진 태양의 코로나(염지혜)는 아름다움을 위해 감염 작동시키는 식민주의와 그 속에 그림자처럼 자리한 집단적 환상과 욕망의 표상(조현아)으로, 이 어스바운드 이미지들은 서로 떨어진 순간 묵시록의 전형을 주어와 배경만 바꿔 반복하는 것처럼 흘러 지나갈 위험도 있지만, 서로 묶여 있음으로 관계를 추동하고 존재의 물음을 헤집는 수직축의 매개를 작동시킨다. ●

《어스바운드》
2020. 3. 6 ~ 3. 26
아마도예술공간

●  < 월간미술 > vol.423 | 2020.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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