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 이강소

 

이 강 소     Lee Kangso    | 사진 : 박홍순
1943년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국립경상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주립대학교에서 객원 교수 겸 객원 예술가로 활동했고, 1991년부터 2년간 뉴욕 현대미술연구소(PS1) 국제스튜디오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미술관, 일본 미에현립미술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용인 호암미술관 등 국내외의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경기도 안성 작업실에서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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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강소는 국내보다 일찍이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1975년 〈제9회 파리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닭 퍼포먼스’ 작품 〈무제 75031〉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비엔날레 기간 동안 살아 있는 닭을 말뚝에 묶어놓고, 그 닭의 의지만으로 먹고 움직이며 전시장 바닥에 석고가루 자국을 남기는 것이었다. 작가는 닭의 행동 범위만 조절했고 닭의 행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처럼 이강소는 인위적이지 않고 직감적으로 작품을 창조한다. 작가 이강소의 1970년대 작품을 재조명하는 전시가 9월 4일부터 10월 14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이 전시를 계기로 그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한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반열에 오른 작가의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를 예견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절실하고 가까운, 그윽하고 숨어있는 직관의 예술
글: 김최은영 | 미학, 경희대 겸임교수

이강소 〈Untitled 75031〉 닭, 모이통, 노끈, 분필, 횟가루 362.7×362.7×25.9cm 1975 이 작품은 파리시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제9회 파리비엔날레〉에서 처음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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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계몽자도 오락의 대상도 감정 이입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소통자로서 감상 과정에 들어오는 것이다. 작품은… 감상자를 통해 스스로를 초월하는 것이다. 감상 과정은 감상자와 작품이 양방향으로 초월하는 과정이다. *1

1973년 작(作) 이강소의 <소멸 Disapperance(Bar in the gallery)>은 감상자(관객)가 빠져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감상자가 목격할 수 있는 것은 나무로 된 긴 탁자와 의자뿐이다. 그 곳, 그 빈 곳에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자욱한 담배 연기 따위의 보지 못한 것들이 존재했었음을 인정해야만 작품은 완성된다. 이렇게 감상자의 상상으로 채움이 필요한 공간을 작가는 왜 ‘소멸’이라 불렀을까. 동아시아에서 허경(虛境)은 비어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가득 채워질 무언가를 위해 존재하는 여백이기도 하다. 가시적이지 않은 범주에 대해 고찰하는 방식 중 하나다. 비워져야 채울 수 있다는 순환적 사고다. 시각예술에 있어 존재를 위해 비존재하는 공간, 그것은 작품 속에 사람이 있었을만한 곳이기도 하려니와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작가의 직관적이고 선험적인 소멸에  해당하기도 한다.

소멸과 유사하지만 이강소의 조형적 인식 도구가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은 ‘닭의 퍼포먼스’라고 불리는 로 보인다. 흔적이라는 단서를 제시한 이 작품은 전시장에서 사흘간 닭을 사육한 뒤 닭은 본래의 농장으로 보내고, 전시 현장에는 그동안의 닭의 흔적과 그 과정에 담은 9장의 사진을 함께 설치하여 관객이 작업을 스쳐 지나가며 다양한 인식과 경험을 갖게 하는 작업이다. 전시장에 남은 닭의 흔적은 단서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낳는다. 그것은 보았거나 알고 있는 것을 유추해내기도 하지만 감각만으로 읽힐 수도 있는 일이다. 모든 관객이 같은 것을 보지만, 완벽하게 같은 해석을 내릴 수는 없다. 간단하고 명료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작품은 언어로 규정한 단위에서 벗어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다. 굳이 그것을 정의하자면 직관(直觀-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일 것이다.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재현된 〈Untitled 75031〉

 이강소에게 직관이란 인식의 도구이며, 창조란 직관을 통해 작가 본인과 그의 작품을 목격한 모든 관객이 스스로를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 된다. 찰나로 읽힐 수 있는 직관은 사실 다분한 관찰과 사유의 시간이 할애되어야 가능한 기능이다. 순간적으로 보이지만 많은 겹을 내포한 이러한 예술적 사고 행위는 낯설고 경이로운 감흥을 유발한다. 존재하지 않은 기억의 투사를 통해 마치 사실인 듯 세 마리 사슴의 뼈를 재조립한 후 복원해 보는 과정의 작업에 번호를 써넣은 는 단순한 재해석의 차원을 넘어 고전의 어느 구간에도 머물지 않는 통쾌함이 시각에 작용한다. 별다른 고민 없이 평범하게 사물을 바라봐선 이렇게 할 수 없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시각에 얽매여서도 안 된다. 평범한 눈이 아닌 이전과 다른 눈으로, 고정된 시각을 버리고 다른 차원에서 접근할 때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볼 수 없는 작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강소는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기에, 자기 스스로 ‘이강소 법(法)’ 또는 ‘이강소 식(式)’으로 삼은 조형어법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파리비엔날레를 시작으로 다양한 해외 화단을 경험한 작가는 오히려 그때 평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고 고백한다. “당시 많은 작가가 평면에 쉽게 손을 댔지만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원근법/비원근법 같은 이야기로만 서구미술을 받아들이는데, 우리 동아시아 시각으로 보면 평면 자체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궁무진하게 많거든요.”  2 설치와 실험에서 평면으로 전이된 작가의 사유는 다시 근원적인 질문으로 작업을 이어가는 변화를 맞는다.

1970년대 작품에서 보는 ‘오래된 미래’

일명 ‘오리그림’으로 불리는 평면 회화는 구상도 아니고 비구상도 아니며, 동시에 구상이기도 하고 비구상이기도 하다. 화면은 비논리적 공간을 형성하지만 오히려 열린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설치작품과 마찬가지로 관객 즉 감상자가 개입한 평가와 상상으로 화면은 언제든 추상과 풍경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하고 해석된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은 거침없는 선에서 살아있는 듯 활발하게 움직이는 기(氣)에 대한 작가의 표현 의지다. 정신과 취향을 추구하는 것 이상으로 이강소의 회화는 매번 끊어진 곳에서 완곡하게 흘러가는 기운생동을 추구한다. 화면에 닿은 붓질은 작가의 호흡과 직관에 따라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화면이 진행되면서 텅 빈 곳은 가득 채워진 곳이 되고 마찬가지로 끊어진 곳이 바로 이어진 곳이 된다. 끊어졌기 때문에 그곳에 내재된 맥박을 드러낸다. 표면의 붓질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지고 선은 끊어져도 맥박은 계속 뛴다면 살아있는 공간이 이어질 수 있다. 3 다시 말해, 채움과 비움이 공존하는 공간이 된다. 이들의 공존은 주(主)와 객(客)으로 구분된 기존 회화의 조형적 대상과 여백 관계의 공존이 아니다. 직관을 통해 바라본 즉물(卽物)의 실존인 동시에 사유(思惟)라는 무형의 실존이 동등한 위치의 공존으로 화면을 유지한다. 그렇게 채워진 것들을 고전이든 실험이든 어떤 이름으로 명명하든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강소 〈Untitled 75032〉 사슴뼈, 페인트, 분필 300×65×25cm 1975 〈Untitled 75031〉과 함께 〈제9회 파리비엔날레〉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던 작품이다.

화면 속 선들은 인식 수준의 범주에서 펼쳐진 광경처럼 보인다. 그러나 단순하지 않다. 학습 받은 단어 속에서 굳이 골랐을 뿐 이강소의 선은 선(線- 그어놓은 줄이나 금)이며, 필(筆-  붓, 덧보태어 쓰다), 획(劃- 긋고, 나누고, 쪼개고, 자름)이다. 관찰(혹은 바라보다)과 같은 일에 서툰 사람들은 알아차리기 힘든 고등 수준의 추상적 환경이다.

이것은 ‘조각’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그의 작업에서 모양은 작품명처럼 등장한다. 모양(象)이란 직관에 의해 파악된 것 중 상대적으로 좀 더 드러나고 절실하고 가까운 것이며, 뚜렷하게 변화가 많은 것이다. 반면, 그윽하며 숨어있는 직관은 뜻(意)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주역의 계사전 4 에서 빌려 쓴 이 말은 개별로써 일반을 표현하고, 단순한 것으로 풍부한 것을 표현하며, 유한으로써 무한을 표현하는 것과 유사하다. 개념으로 표현할 수 없거나 그 표현이 분명치 못하거나 불충분한 것도, 형상으로는 표현할 수 있고, 표현이 분명할 수 있으며, 충분하게 표현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때론 간결하고 때론 심오해 보이는 의식 같은 이강소의 작업은 옛 그림을 평하는 문구와 많은 부분의 교집합을 갖는다.

풍경으로 읽힐 수도 있는 화면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선의 합침과 흐트러짐이 특정하거나 분명한 ‘어디’가 아닌 익명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규정하고 명명했다고 믿는 오늘의 풍경은 사실 다분히 사회적이며, 규칙적이고, 소속된 개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품 속에는 뛰어난 구성과 리듬이 있어 보는 동안은 무겁지 않게 실존의 문제를 탐닉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은 직관의 시선이 관통하고 있다. 여러 파편의 선을 나열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은 작가의 감각적, 직관적 스킬이 매우 뛰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이렇게 모아 놓은 여러 조각의 선은 결과적으로 미묘한 덩어리감과 조화로운 여백으로 인해 마치 어떠한 대상을 다루고 있는 것과 같은 정서와 느낌을 잘 전달한다. 오늘의 시각예술가에게 필요한 덕목은 대상의 미세한 차이를 먼저 발견하거나 진리의 미묘한 사이에 대해 먼저 질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청명 Serenity – 18161〉 캔버스에 아크릴 182×227.3cm 2018

작가 이강소의 생각 체계는 경계 지어지지 않은 순환적 사고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고, 이것과 저것의 사이나 미묘함,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한 것들이다. 이러한 종류의 생각을 곁으로 치워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고하고, 철학적 단어로 사전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동아시아적 사고방식이다. 말로는 다 할 수 없어, 혹은 굳이 다 까밝힐 마음 없어 시각예술작가들은 그림이나 사진, 조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대상과 창작자의 생각, 캔버스 위나 흙덩이까지의 행위, 행위에 속한 노동. 그  사이사이 숨은 행간을 발견하고 작가의 속내를 미루어 짐작한다. 선험적 징후들과 차이와 사이의 개념들, 아직 그 상태를 표현할 조어(造語)가 없는 감정과 이념이 이강소의 시각예술작품 속에는 늘 차고 넘친다. 때문에 동아시아 미학을 빌려 이강소의 미술에 풀어 적으며 그의 시각예술작품을 읽을 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시대마다 새로운 개념과 명제는 항상 등장한다. 이강소의 소멸은 그러한 명제의 발아였고 오늘도 통용되는 가치로 소용된다. 시대를 초월한 당대성(contemporary)은 명제를 넘어선 미학으로 귀결되어야 할 것이다. ●

1 장파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푸른숲, 1999. p.11
2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가 이강소 – 캔버스 위를 헤엄치는 오리처럼 (미술가)
3 주량즈 《인문정신으로 동양예술을 탐하다》 알마, 2015. p.110
4 《주역》 계사전 立像以盡意, 觀物取象

● || < 월간미술 > vol.404 | 2018.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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