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とうきょう
동시대미술이라는 의식이 머무르는 장소
마정연 미술사/미술비평
이제 젊은 세대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지만, 긴자를 걸어다니며 구경한다는 의미의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로 긴자는 특권적인 장소다. 본지와 같은 이름의 일본잡지 《월간미술》이 창간 400호 기념으로 기획한 보존판 갤러리 가이드(2009년 1월호)가 여전히 긴자 화랑가의 이야기로 시작하듯, 불황 속에서도 긴자의 화랑가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렇지만 현대미술을 대상으로 생각할 때는 사정이 다르다. 현대미술의 선구적 거점이었던 긴자의 두 화랑, 도쿄 화랑(1950~)과 미나미화랑(1956~1979), 그리고 전후 그곳에서 활동한 전위예술 작가들에게 현대미술이란 모던아트라는 외래어의 번역어이기 이전에 일본화 대 서양화로 분류되는 당대 미술계와 자신들이 추구하는 동시대의 새로운 예술을 차별화하려는 의식을 표현하는 용어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 기사에서는 긴자를 벗어나 동시대미술이라는 의식이 머무르는 장소를 중심으로 일본 현대미술 거점 변화를 소개하려 한다.
일본 최초의 대안공간
‘세이부/세존 문화’란 말에 익숙하지 않은 국내 독자에게도 친숙한 브랜드 MUJI의 창설에 관여한 크리에이브 디렉터인 고이케 가즈코가, 도쿄 동부 지역의 사가란 곳에 위치한 오래된 식량창고 건물(1927년 준공)을 개조해 1983년 개관한 비영리 전시공간 사가쵸는 일본 최초의 대안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2,30대의 젊은 작가가 국공립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던 시절, 오타케 신로, 모리무라 야스마사, 스기모토 히로시를 비롯한 약 400명의 국내외 작가가 이곳을 거쳐갔다.
흥미로운 것은 사가쵸 전시공간이 입주해있던 이 식량창고 건물에 몇몇 신진세대의 기획 화랑이 모여들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갤러리스트 사타니 슈고는 2000년 부친의 사타니화랑에서 독립해 자신의 갤러리 슈고아츠ShugoArts를 설립하기 전부터 이곳에서 자신과 동세대 작가들의 전시를 수차례 기획했다. 그 후, 1996년 도미오 고야마갤러리Tomio Koyama Gallery, 1998년 타로 나수TARO NASU가 이 건물 2층에 문을 열었다. 3층에 위치한 사가쵸 전시공간은 2000년에 활동을 마감하고, 이전부터 스태프로 활동해 온 고야나기 아츠코의 갤러리 고야나기가 공동 운영한 RICE Gallery by G2가 2001년 이 장소를 물려받았다. 이듬해인 2002년 11월, 마지막 전시 <Emotional Site>를 끝으로, 아름다운 건물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아무런 특징도 없는 고급 맨션이 세워졌다. 그렇지만, 긴자의 화랑가처럼 특정 지역의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장소를 함께 만들어내는 현대미술 갤러리들의 협업 단서가 일본 최초의 대안공간과 맞닿아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할 역사로 남았다.
롯폰기의 새로운 이미지
여섯 그루의 나무라는 뜻의 롯폰기 지역 내에서도 ‘감자 씻기 언덕’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이모아라이자카. 이곳에 아트 컴플렉스 빌딩이 자리하고 있던 시기가 있었다. 갤러리 고야나기의 고야나기가 부동산업계의 대기업 모리 빌딩의 사장이자 모리미술관 창설자인 모리 미노루에게 직접 건의해, 미술 관계자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5년간 대여한 것은 모리미술관이 개관하기 약 반년 전인 2003년 4월의 일이었다. 지진에 취약한 건물의 특성 때문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이곳에는 OTA FINE ARTS, TARO NASU, Roentgenwerke 등과 현재는 에비스로 이전한 아트 바 TRAUMARIS가 입주해있었다. 이 시기에 이모아라이자카는 갤러리 고야기, 도미오 고야마갤러리, 다카 이시이갤러리가 모인 시카와의 창고, 다카하시 컬렉션 가구라자카 야마모토 젠다이, 고다마갤러리 등이 모인 가구라자카의 인쇄공장 등과 더불어 2000년대 현대미술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그 후, 국립신미술관과 리뉴얼해 이전한 산토리미술관이 2007년에 개관하여, 모리미술관과 더불어 ‘롯폰기 아트 트라이앵글’이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모리미술관의 개관은 사회 일반에 현대미술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받는데, 문화예술지역으로서의 롯폰기라는 자기 이미지를 그려내고자 했던 모리빌딩의 전략 역시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리적인 거점에서 네트워크 속으로
개관 20주년을 앞둔 도쿄도현대미술관이 들어선 곳은, 1995년 당시에는 좋은 입지조건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도쿄도현대미술관 주변에 디자인 사무소, 미술관계 서점, 작은 갤러리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두 개의 지하철 노선이 지나가는 기요스미시라카와역이 개통되고, 2005년 신카와의 갤러리들이 기요스미로 이전해 같은 창고 건물에 둥지를 틀면서부터 기요스미시라카와 지역은 한때 ‘도쿄의 소호’라고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슈고아츠, 다카 이시이 갤러리, 도미오 고야마 갤러리 등 현재 입주해있는 7개의 갤러리 가운데 3개의 갤러리가 2014년 12월을 끝으로 이 장소를 떠나고, 2015년 봄 무렵에 건물 자체가 철거될 예정이니, 2015년 도쿄의 갤러리 지도는 또다시 변화될 전망이다.
2004년부터 이 지역의 변천 과정을 지켜봐 온 도쿄도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야부마에 도모코는, 결과적으로 도쿄의 현대미술 중심처럼 보인다고는 해도, 이러한 변천은, 어디까지나 미술관이 더 이상 중심이 아닌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강조했다. 지금은 미술관의 헤게모니보다는, 크고 작은 이벤트를 함께 기획하고, 허물없이 소규모 스터디 모임을 하거나, 트위터상에서 대화를 주고받으며, 거주 공간 안에 마련한 아틀리에에서 인터넷 중계 방송을 하는 등, 다양한 형식의 자발적인 정보발신과 상호 교류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말이다. 2014년 발간된 저서 《예술에 있어서 가치란 무엇인가》에서, 인터넷 공간을 포함한 작가와 작품의 노출 형태 전체를 갤러리로 생각하는 개념 전환이 필요한 시대라고 한 미즈마 아트 갤러리의 미즈마 스에오씨의 견해 역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직후, 일본의 중심이 오사카와 교토 등 서일본 지역으로 이동하리라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2014년 현재도 경제, 문화, 정치의 중심이 도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지리적으로 한국에 가까운 세토우치 내해 지역의 존재감이 높아졌다고 《REALTOKYO》, 《REAL KYOTO》의 발행인 겸 편집장 오자키 데쓰야는 지적한다. 후쿠타케 재단이 운영하는 Benesse Art Site Naoshima 및 동 재단이 중심이 되어 2010년에 시작된 아트 세토우치, 의욕적인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히로시마시 현대미술관, 유서 깊은 사립 미술관인 오하라미술관, 젊은 기업인 컬렉터가 등장한 오카야마 지역 등이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동력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한편, 옛 수도인 교토에서도, 최근 국제무대예술제 KYOTO EXPERIMENT, 현대미술 이벤트 NUIT BLANCHE KYOTO, 국제사진페스티벌 KYOTOGRAPHIE 등이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다. 그리고 교토 교외에서 도심으로 재이전이 결정된 이래, 교토시립예술대학 주최의 다양한 준비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 미술시장의 중심이 아직 도쿄에 있다고는 하나, 흥미로운 움직임은 서쪽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오자키의 견해다.
2010년대 일본 현대미술의 중심거점은 어디일까. 본 기사의 취지를 넘는 대답이지만, ‘후쿠시마’여야만 한다고, 젊은 아티스트 컬렉티브 카오스*라운지의 미술가, 미술평론가 구로세 요헤이는 말했다. 물론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의 트라우마를 일컫는 개념으로서의 후쿠시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후쿠시마를 의식하지 않은 작품 제작과 비평은 불가능해졌다는 견해는, 구로세 이외에도 실로 많은 이가 공유하는 문제의식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구로세는 “시대란 자신들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지만 ‘포스트 후쿠시마’가 보다 구체적인 부흥과 재건의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