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나에게 그림은 현장이다_주영하
나에게 그림은 현장이다
민속학 교수 주영하
어릴 적에 그림을 그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사생대회에 나가서 제법 큰 상을 받은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릴 적 일이지 대학원에서 음식의 문화인류학을 공부할 때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미술은 추억이었다. 그런데 옹기 장인을 조사하면서 그들이 펼치는 미학에 빠져서 전국의 장독대를 뒤진 적이 있다. 아무리 사물이라도 자주 보면 더 자세히 보이기 마련이다. 매번 만나는 옹기의 문양과 형태를 필드노트에 그리다 보니 어느새 옹기 그리는 일은 밥 먹듯이 쉬웠다.
1990년쯤, 옹기 때문에 만난 그림이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다. 너무나 매력적인 기산 풍속화에 빠져들면서 먼저 옹기와 관련된 그림을 선별하였다. 그것을 화집으로만 보니 옹기를 그릴 정도로 깊이 빠져들지 않았다. 제법 큰돈을 들여 몇 장의 기산 그림을 큰 그림으로 인화 하였다. 이것을 공부방 벽에 붙여 놓고 매일같이 내 얼굴 들여다보듯이 보았다. 처음에는 보기만 하다가 점차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나왔다. 바로 ‘독점’이란 화제의 그림이었다.
급기야 이 그림을 벽에서 떼어내어 옹기 장인을 찾아 나섰다. 마침 그해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가 된 충남 홍성 갈산의 고 이종각 장인을 알고 있던 터라 그 일은 쉬웠다. 이종각 장인도 처음 이 그림을 보고는 무척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에서 이야기가 술술 터져 나왔다. 가마의 제작과 창불구멍의 기능, 그리고 일꾼들의 역할 분담까지. 이 인터뷰가 바탕이 되어 나는 기산의 ‘독점’ 그림 하나를 가지고 200자 원고지 80매의 글을 쓸 수 있었다.
사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오로지 백성을 배 불리게 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 대안으로 음식을 다루었다. 비록 허균과 같이 전국의 맛있는 음식을 짧은 글로 적은 선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식정(食政)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실학자라고 불리는 학자들이 적어놓은 음식 관련 기록이 실제로 행해진 일인지 의심이 들 때가 많다. 실제로 행해진 것이라 해도 그 현장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2000년부터 다시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기산의 ‘독점’을 두고 했던 작업 방법을 떠올렸다. 먼저 중앙일보에서 펴낸《한국의 미-풍속화》편에서 음식과 관련된 그림을 선별하는 작업을 했다. 고구려 때의 고분벽화는 물론이고 안중식의〈조일통상장정 기념 연회도〉까지 수십 편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 그림 역시 매일 거울을 보듯이 읽었다. 그래도 미술사를 전공하지 않은 입장에서 남의 밥그릇을 넘보는 듯하여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일본의 가나가와(神奈川) 대학 비문자(非文字) 연구센터(당시 상민문화연구소)에서 진행하던 기록화 자료 읽기 작업이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 연구소에서는 그림 자료와 사진자료를 사료로 보고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이용했다. 특히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일반 백성의 일상생활을 그림 자료를 통해서 읽어내는 작업은 마치 현장을 복원하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그러던 차에 국내의 한 식품회사 사보 담당자가 음식을 주제로 연재를 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나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림 자료를 가지고 음식의 역사를 풀어보자고 응답했다. 그 편집자가 작명한 연재의 제목이 그 이후 단행본의 책 제목이 된《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이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그림 속에 음식 자체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지는 않다. 화원들이 사진 찍듯이 그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상 식사 장면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이러니 나의 입장에서 조선시대 음식과 관련된 그림은 음식을 소비하는 현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현장감은 조선시대 음식사를 연구하는 데 너무나 중요하다. 더욱이 음식의 색감은 그림 속에서 분명히 감지된다. 이런 면에서 나에게 그림 자료는 현장은 물론이고 음식의 색과 음식을 대하는 사람들의 몸짓을 이해하는 데 없으면 안 되는 사료이다. ●
주영하는 1962년 경남 마산의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풀무원 김치박물관에서 근무하며 음식사를 접했다. 1993년 한양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김치의 문화인류학적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교수로 재직 중이다. 음식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김치, 한국인의 먹거리-김치의 문화인류학》《음식전쟁 문화전쟁》《음식인문학 》《맛있는 세계사》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