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패션은 안경이다_김홍기
패션은 안경이다
패션 큐레이터 김홍기
사람들은 나를 패션 큐레이터라고 부른다. 책을 쓰면서 저자 소개란에 그렇게 적은게 화근이었을까? 사람들은 특화된 직업명에 대해 궁금해 했다. 미술사를 공부했는지, 혹은 패션계에서 일한 이력을 갖고 있는지, 심지어는 올 계절에 유행하는 패션 트렌드에 대해 알려달라고 한 이도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말하지만, 나는 대학에서 미술사를 비롯한 패션관련 영역을 공부한 적이 없다. 패션에 대한 관심은 대형 유통업체에서 패션 바이어로 우연하게 일하게 되면서, 내 업무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독한 맘을 먹고(?) 독학을 시작했던 게 그 출발점이다. 아동복 바이어로 성장하면서 다양한 패션기업들과 디자이너들을 만나야 했는데, 그때마다 느낀 건 패션에 대한 누적된 지식 없이 관련 업무를 깊게 이끌어가는 건 힘들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매년 봄/여름 가을/겨울로 나뉘어 생산된 수많은 옷 중, 시장에서 먹힐 만한 것들을 선별하고 관리하는 일,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왜 특정한 옷을 선택하고 다른 것은 버릴까 하는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해야 했다. 어떤 상품은 세일(Sale)을 위해 가격을 인하하고 업체와 함께 시장을 만들어가야 했다. 책임을 함께 지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특유의 복식업계 및 디자인계 언어들에 친숙해져야 했다. 대학시절 영화를 부전공하면서 영상미학을 비롯해 문화이론, 기호학 등을 공부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요즘 뜨는 말로 인문학적인 패션 공부를 하게 된 셈이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이질적인 영역들을 결합시켜서 제3의 것들을 만드는 걸 좋아한다.
유학을 위해 떠난 영국 여행길에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봤던 시각의 구조〈 Fabric of Vision전〉은 내 인생을 바꿨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그림 속 패션에 나타난 주름의 의미를 통해 각 시대의 미감과 사회적 체계, 사람들의 열망의 코드를 읽어내는 전시였다. 머리를 탁 칠 수밖에 없었다. 패션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해왔다고 했고, 대학시절부터 갤러리를 자주 다니며 작은 판화작품부터 컬렉팅을 해왔던 내가 미술사를 비롯한 인문학이 패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두 개의 영역이 어떻게 공동의 땅을 경작하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지를 몸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독학해온 복식사에 대한 나만의 입장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 결과물이《 샤넬 미술관에 가다》이다.
서양미술사의 명작에 나오는 옷의 의미들을 다층적으로 풀었던 것. 책을 쓰는 문제를 앞에 두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내게 용기를 준 이가 있다. 바로 영국 법조계의 스타 변호사 앤소니 줄리어스다. 그는 홀로코스트 문제를 변호하다가 관심을 갖게 된 유대인 미술에 대해 연구하며《 미술과 우상》이란 책을 냈다. 무엇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미술을 역사적으로 공부하고 자신의 일과 관심사를 결합시켜 풀어내는 작업을 한다는 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4년에 걸쳐 자료를 다시 모으고 편집하면서 책을 썼다. 이 과정에서 패션이란 렌즈로 미술전시를 하게 될 경우, 생산적인 교집합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구체화했다.
패션의 역사는 당대의 옷 스타일을 묘사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패션은 일상에서 입는 옷이란 오브제를 미학적으로 표현, 승화시키는 기본적인 문화 활동인 동시에 지역적 차이와 시대적 변화의 방향을 반영하는 변화의 바로미터다. 인간이 입는 사물이란 점에서 일상성을 사유할 수 있고, 특정한 지리적 경계 내부의 사람들, 즉 공동체가 수용할 수 있는 미감의 수준에서 입을 수 있는 것들, 패셔너블(fashionable)의 개념을 정의한다는 점에서 사회성을 띤다. 패션은 그 자체로 삶과 예술, 실천과 미학, 생산과 소비, 개인의 취미와 집단정신을 연결하는 삶의 현장이 된다. 되짚어보면 패션이란 단어가 그저 한 벌의 옷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많은 발언을 할 수 있는 오브제인지를 알게 된다. 나는 옷에 담긴 이런 정신성들을 전시란 양식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지금껏 저술에 온 힘을 쏟은 것은 옷이란 사물을 전시하기에 앞서, 패션이란 개념의 외연을 확장하고 지금껏 ‘패션’을 규정해온 우리 사회가 협소한 시각을 넘고자 한 시도였다.
최근에 나온《댄디, 오늘을 살다》도 그런 연장선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사회는 새롭게 등장하는 유통체계와 패션의 논리로 뒤덮였다. 이때 새롭게 부상하는 지배적 스타일에 저항하는 정신의 소유자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을 댄디라고 부른다. 댄디즘은 일종의 생활철학으로서 삶의 많은 부분에 적용될 수 있다. 음식을 먹고 소비하는 섭생의 방식에서 옷차림, 신체를 가꾸는 일,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는 방식 등 다양한 측면을 성찰할 수 있다.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 속에 나타난 소비문화와 패션에 대한 해석들을 함께 소개함으로써, ‘우리나라’ 작가들의 감성을 통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큐레이팅이란 어떤 점에서 보면 삶을 위한 편집된 태도를 갖는 것이다. 패션이한 벌의 옷을 넘어, 그것을 입는 인간의 표정과 태도를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인간의 행위는 항상 이해관계로 연결된 이들의 시각 속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패션을 큐레이팅하는 일은 제2의 피부라 불리는 옷을 해석하는 안경을 사람들에게 씌워주는 일이다. 좌와 우를 가로지르며(안경에서 코에 걸치는 부분을 브리지(Bridge)라고 한다) 누군가의 가교가 되는 일을 하고 싶다. 평생 패션이란 황홀한 소울메이트와 업고 빨고 사랑하며 말이다. ●
김홍기는 국내 1호의 패션 큐레이터.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연극영화와 의류학을 복수전공했다. 졸업 후 신세계에 입사해 아동복과 상품기획을 익혔다. 현대미술과 패션을 독창적인 시선으로 결합한 저술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방송활동을 통해 대중과의 소통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샤넬, 미술관에 가다》 《하하 미술관》 등이 있으며 《패션디자인 스쿨》 《패션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등을 번역했다. 그의 글을 읽고 소통을 원한다면 www.facebook.com/fashioncurator1 혹은 twitter.com/fashioncurator에 들어가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