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흐르는 물이 담긴 어항_신현림

흐르는 물이 담기는 어항

시인 신현림

푸른 물고기떼가 내게 헤엄쳐오듯 미술에 대한 즐거운 기억부터 떠올려보자. 중3때 반장이었던 나는 잔소리 심한 담임의 수업시간이면 반항한답시고, 일종의 미술의 역사 개략서인 교재를 읽곤 했다. 몰래 먹는 찹쌀떡처럼 야릇한 기쁨에 떨기도 했다. 고흐, 구스타프 크림트, 마티스, 뭉크, 마그리드, 자코메티를 통해 미술의 마력에 이끌렸고, 들판을 뛰어다니듯 자유한 미술세계의 신비한 매력을 맛보았다. 하지만 코믹하게도 미술대회마다 학교 대표로 나가 상을 타도 방학 때와 졸업 후에 후배로부터 상장만 전달받던 일이나 고1때 미술학원을 돌며 가격만 묻고 돌아온 쓸쓸한 날과 우리 반이 특별 구급반으로 뽑혀 미술반 가입 기회를 삭제당하는 등등 우울한 기억들이 참 많다. 예술가는 밥을 굶는다고 엄마는 미대 진학을 반대하셨고,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투사였던 아버지의 국회의원 출마와 낙선의 반복으로 고단해진 엄마의 인생 앞에 미술대학 진학의 내 꿈은 사치였고 죄였다. 그러다 재수시절 엄마에게 떼를 써서 싸게 서양화과 입시를 위한 데생과 수채화를 배웠다. 낙방과 도전 끝에 응미 쪽에 합격했으나 반년 다니다 자퇴, 원하던 학교 진학에 실패한 4수생은 심각한 불면증을 얻어 병원과 성당을 오가며 13년을 죽을듯이 앓아봤다.
국문과 선택은 단지 내가 무식한 거 같아 책을 읽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인생에는 반드시 세렌티피티가 있다. 2학년 문예사조사 수업 때 바로크사조 발표를 준비하며 나는 ‘모든 예술은 한곳에서 만난다’ 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통섭에 감을 잡은 것이다. 이후 시, 소설만이 아닌 허버트 리드, 곰브리치 예술사……. 무엇보다 철학책은 필독서라 여겼으므로 쉬운 책부터 독파해나갔고, 전보다 더 열심히 전시장을 찾으며 카탈로그도 꼼꼼히 읽곤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니 보이더라. 예술이 먼지, 내가 뭘 해야할지. 이제 불행은 행복의 시작이며 절망은 한 가닥 희망의 빛을 찾는 시작이라고 나는 간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지리도 불면증을 떨치지 못한 채,의원직을 딱 한 번 하신 아버지 덕에 취직하여 번 월급으로 판화 1년, 유화 1년을 배울 정도로 미술에 압도되는 애착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다 31세 때 사진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사진을 찍고싶은 갈망이 장작불처럼 타올랐다. 이번에는 사진에 미쳐서 어머니께서 해주신 아파트 전세비를 빼서 사진 공방을 다닐 때 새로 이사간 흉가 같은 데서 부들부들 떨며 살기도 했다.
낮엔 애들을 가르치며 생활비를 벌고 틈틈이 시를 쓰고 밤에는 사진 공부하면서 3수 때는 지원 대학원을 바꿔 들어갔다. 사람이든 학교든 인연이든 금세 풀리더라. 편집증적일 정도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 방구석에는 아직 정리 못한 사진파일이 가득하다. 남은 어렵지 않게 입학하는 학교를 나는 왜 이다지도 지지리 힘들게 들어갈까. 나는 왜 이럴까, 회의하며 정말 남다른 인생을 산다는 건 눈물겹게 싫었다. 하지만 고뇌와 고통은 인생을 깊이로 파헤쳐가는 과정이며 기회였음을 이제 나는 고개 숙여 감사한다. 늘 내 인생의 표어처럼 냉장고 문에 붙여둔 마르쿠제의 글메모가 있다. 종이는 누렇게 바래 부드럽게 가슴에 비쳐들지만 글은 예리한 문 모서리같이 슬쩍 가슴을 긋고 지나간다. “예술적 진실과의 만남이란, 일상생활에서 아직껏 느껴지지도 이야기되지도 또 들리지도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을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만드는 낯설음을 자아내는 언어와 이미지 속에서 이루어진다.”
낯설음, 새롭게 하기. 예술에서 진정성과 함께 너무나 귀한 덕목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으나 새롭게 발견하는 시선들은 계속 있을 것이다. (나는 세계 사진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사진 영상에세이를 세 권 냈다. 중앙일보에 1년5개월 연재를 다시쓴 현대 세계사진사를 주제별로 묶은《 나의 아름다운 창》 외에《 희망의 누드》《 슬픔도 오리지널이 있다》이 있다. 또한 사진과 미술의 구분이 무의미한 시대에《 너무 매혹적인 현대미술》이란 책도 낸 바 있다.)
우리 존재는 흐르는 물이며, 물고기며, 물풀이다. 예술은 그렇게 연약하고 사라져가는 우리 존재를 환기시키는 고민이며, 되살리는 기억이고, 그 기억을 담으려는 어항이다. 시와 미술, 사진의 어항 모습은 다르나 인생의 관점과 진실의 이미지를 다룬다는 면에서는 다 똑같다. 넉달 전에 쓴 내 시를 읊어보면 조금은 쉽게 가닿을지도 모른다. ●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신현림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어 사랑의 역사를 담고 싶어해
세상에 사랑 주며 떠난 사람들의 역사를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느는 시대에
우리가 물고기인지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 시간에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으려고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시간에
죽은지 33년이 지나도 그 아들과 사는 어머니
헤어진지 3년이 지나도 그 애인과 사는 사내
죽은 남편따라 무덤의 제비꽃으로 핀 아내
사랑하는 이들을 가슴에 다 담지못해
죽어서도 그의 은어떼를 품고 싶어해
기억은 어항이 아니라서
어항이 되고 싶어
정든 추억을 품고 싶어
흔들리고 싶어
천천히
모우빌처럼

spec13-2

신현림은 시인이자 사진작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상명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사진학과에서 순수사진을 전공했다. 미술관련 저서로는 사진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창》, 《희망의 누드》 미술 에세이 《신현림의 너무 매혹적인 현대 미술》 등이 있다. 사진작가로서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 <사과밭사진전>등 3회의 사진전을 열었다. 2012년에는 울산국제사진 페스티벌 한국작가 대표로 선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