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이상향,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우리 미술판에서 이상향을 그린다는 말은 요원해져 버린 것일까
근현대 격동의 역사와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의 이상향은 과연 어떻게 바뀌었을까
분명한 것은 있다 그렇게 꿈꾸었던 이상향에 가깝게 세상이 바뀐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
최열・미술비평
20세기 한반도가 탄생시킨 언어의 마술사 정지용은 1935년 고향을 노래했다. 정지용이 부른 <향수>의 풍경은 우리가 상상하던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세상을 훌쩍 뛰어넘는 또 다른 이상향 바로 그것이다.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곳, 이제는 꿈에서나 있을 풍경이다. 그렇게 사라진 세계, 그 세계는 이상향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식민과 전쟁의 탓만이 아니다. 일백년 동안의 산업화, 도시화를 떠올리거나 새마을운동과 4대강사업이 낳은 황폐한 현장을 생각할 일이다. 은빛구름 흐르고 금빛모래 반짝이던 물결에 몸을 빠뜨리던 고향 마을 냇가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어이가 없다. 우리가 태어나 자라던 흔하디흔한 고향 풍경이 이상향처럼 여겨지다니 말이다. 저 청학동이나 무릉도원, 몽유도원 그리고 허균의 율도국(栗島國)을 지금 우리의 이상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건 아미타의 극락정토나 미륵의 용화세계, 예수의 천당도 마찬가지다. 사후 안식처일 뿐이다.
동북아시아는 19세기 말 서구문명을 수용하면서 이상향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도덕주의 세계관을 폐기했다. 대신 서구 근대가 설계한 사회주의 및 자본주의 이념을 이상적 가치관으로 삼았다.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핵심가치로 삼는 서구근대의 이상은 동양의 기존 정신가치를 전복해버렸다. 이에 따라 이상향을 상징하는 문인산수화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변관식, 이상범의 실경산수가 각광을 받으며 유행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도덕적 이상을 상징하는 사군자가 최후의 선비화가 윤용구를 끝으로 한갓된 정물화가 되어버린 일도 무척 자연스러운 시대 추세일 뿐이었다.
20세기 최초의 이상주의자들은 아마도 근대주의자들, 다시 말해 진화론의 세례를 받은 개화당원들로서 기술과학문명을 추종하는 세력이었다. 미술인으로서 오세창, 안중식, 이도영과 같은 개화당원들은 그러나 자신의 이상향을 예술세계로 형상화하지 못했다. 이상사회 설계도는 수용했으나 그 내면을 채우는 이념의 세계를 상상력으로 밀고 나가지 못한 까닭이다. 그것은 사회주의 이념의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 이래 영민하고 강직한 사회주의자들은 반제민족해방과 독립자주국가 건설이라는 원대한 이상사회 설계도를 그려놓았지만 그냥 설계도였을 뿐이다.
현실은 그들에게 아주 작은 자유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오지호와 이인성이 그토록 화사하고 세련된 색채로 조선의 자연과 인간을 눈부시게 묘사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이상향이 아니었다. 심미주의 미학이 지향하는 궁극의 이상향을 형상화하기에는 그들이 처한 시대가 지나치게 강퍅했다. 마찬가지로 다음 세대인 이중섭과 이쾌대가 몽환에 가득한 초현실세계를 그렸지만 그 세계는 환상이 아니라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악몽의 전설일 뿐이었다. 그렇게 식민지 시대가 흘러갔다.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또렷한 이상향은 신기하게도 미증유의 학살과 파괴가 이어지던 6·25전쟁 한복판에서 탄생했다. 이중섭이 피난민으로 서귀포 시절 그린 <실향의 바다>와 통영 시절 그린 <도원(桃園)>은 낙원 풍경 그대로다. 통영이건 서귀포건 모두 남쪽바다 그 아름다운 물빛에 뒤엉킨 하늘 복숭아가 천상의 노랫가락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풍경으로서 이상향은 난민의 고통을 벗어나고 싶은 소망이 반영된 것이었다. 현실을 초월하여 몽환의 세계로 순간이동하고 싶었던 욕망이 조작한 가상현실 말이다.
그 뒤로 우리 미술사에서 이상향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토록 염원하던 산업화, 기계화 시대의 미래상을 눈부시게 보여주는 저 숱한 새마을 기록화, 산업 기록화 제작 열풍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이상을 함축하는 예술작품은 결코 태어나지 못했다. 또한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거센 폭풍이 10여 년을 몰아쳤던 저 1980년대에도 그렇게 꿈꾸던 민중세상, 통일조국의 아름다운 이상향은 탄생하지 못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구호로 내세웠지만 바로 그 이상세계를 어떻게 설계하고 어떻게 그렸는지, 그 민중이 그리워 가고 싶어하는 세상의 모습을 어떻게 갖추었는지 질문만 잔뜩 던져두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상상력의 고갈
오히려 흐르는 시계의 반대쪽으로 방향을 잡고서 과거 농경사회의 두레와 대동굿 판에 어우러지는 농악과 춤의 선율에서 설레는 감동을 느끼곤 했던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오윤의 <통일대원도>가 참으로 20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참된 이상세계였던 것일까. 혹 지난날의 향수가 아니었을까. 이런 향수 취미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상향의 설정과 관련해서 가장 놀라운 현상은 한국형 단색 추상화 계열에서 일어났다. 이들이 노자나 장자의 철학을 자기 예술론으로 삼은 것은 한국형 단색화다운 선택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대나 사회로부터 단절된 미술임을 표방할 수 있었던 것인데 그렇게 하고 나면 너무도 공허해서 찾아낸 돌파구가 바로 아득한 과거로의 여행이었다. 그곳엔 소요유(逍遙遊)의 이상세계 즉 아무것도 없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은 기묘하게도 1980년대 민중미술이 보여준 과거로부터 이상향 찾기와 같은 꼴이었다.
추상 및 민중미술 이후 1990년대 미술현상에서 이상향을 찾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아니 집단이 해체되고 기획자의 개념 설정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중심의 상실시대에 발맞춰 공동체의 가치와 이상 또한 파편처럼 흩어졌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비단 미술계만의 현상이 아니다. 그것이 어느 계급계층이건 모두 이익집단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있는 터에 유독 미술집단만이 공동의 가치를 추구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노동자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던 이념집단이 노동조합과 같은 이익집단으로 변화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지난날 뜻을 모아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던 결사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가치는 개인의 이해와 욕망의 내면으로 잠복해 들어갔고 각자가 꾸는 꿈이 곧 이상향인 세상이다. 이제 더 이상 이상향은 없다. 꿈꾸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많아져버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이상향이 아니다. 개인의 환상일 뿐.
사전에 나와 있는 이상향의 뜻은 평화롭고 완전한 상상의 세계를 가리킨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반성이나 근대 과학기술문명의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서 출현한 근대의 이상향은 여전히 활력을 제공하는 원천이지만 그것도 지나가버린 옛이야기인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지난 세기는 이상향을 꿈꾸는 행위 그 자체가 사치였다. 극단의 황무지 위에서 살아온 기나긴 세월 끝에 안식을 구하기는커녕 절망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시대에 상상력마저 메말라갔던 것이다.
1990년대 이후 20여 년 동안의 미술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현실에 대한 염세주의 시선과 태도는 난무하지만 고상한 윤리와 도덕의 시선을 내비치는 경우는 없었다. 허위의식이라고는 해도 19세기 이전 공동체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던 시절에는 계급계층에 따라 이상세계의 설계도를 제출했었다. <무이구곡도>나 <고산구곡도>,
<도산구곡도>가 설령 자기 문파의 세력을 강화하려는 욕망을 드러내는 홍보수단이었다고 해도 집단의 가치와 이상을 호소하는 방편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모든 것이 괴멸당했고 남은 것은 벌거벗은 세속의 욕망 또는 음울한 도시의 냉소뿐이다.
이상향을 향해 거침없이 항해할 만큼 순결했던 미술가가 있었을까. 심미주의를 채택했다고 해서 그 예술가가 심미의 삶을 꾸려나갈 수나 있었던 것일까. 작업실을 나서면 시장에서 팔리기나 하는지 초조해 할 수밖에 없는 초라한 행색에서 무슨 공염불이란 말인가. 심미와 재물의 사이에 설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자아는 결국 분열의 경계인일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한 손엔 세속의 욕망을, 또 한 손엔 심미의 이상향을 쥐고 흔드는 모순의 희극! 어디 그게 20세기만의 이야기일까.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예술가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정지용이 부르던 노래 <향수>마저 끝났다. 세속을 향하지도, 이상향을 찾아가지도 못한채 방황하는 자의 어리석은 이야기 속에서 말이다. ●
백남순(白南舜, 1904~1994) <낙원(樂園)> 캔버스에 유채 166.0×366.0cm 1937 개인소장 ‘심산유곡(深山幽谷)’이 서구적 화풍으로 표현되어 있다. 백남순은 서양의 낙원도를 동양적 기법으로 표현했다
(위)채용신(蔡龍臣, 1850~1941)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부분) 종이에 채색 107.4×37.3cm(각) 1915 어진화사 채용신이 무이구곡을 그린 10폭 병풍. 성리학적 정서는 약화되고 형식화된 경향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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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과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장욱진, 시대의 마지막 이상향을 꿈꾸다
화가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의 작품에서 산수화풍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1970년 중반 이후라 할 수 있는데, 덕소아틀리에(1963~1974) 시기 후기부터 작품의 표현이 수채화처럼 묽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1980년대 작품에서는 자연과 함께 유유자적하는 도가적 정서가 잘 드러난다. 이 시기 장욱진은 수많은 <풍경>을 그렸다. 전통 산수화 기법과 같이 한 획으로 그린 나무와 집, 그리고 집 안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는 인물, 나무 위나 하늘 나는 새, 해와 달이 공존하는 풍경이 주를 이루었다. 유화물감을 통한 수묵화기법과 화면 구성에서의 산수 표현은 동양과 서양을 하나로 잇는 실험적인 작업이자 전통과 현대를 잇는 혁신적인 활동이었다. 이러한 표현은 예술에 대한 그의 확고한 정신으로부터 나왔다. 화가 장욱진의 예술세계를 대변하는 핵심적인 철학은‘신사실’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1947년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결성한 <신사실파(新寫實派)> 모임은“사실을 새롭게 보자”라는 주제의식을 표방했는데, 이는 사물 속에 내재하는 정신적인 본질을 찾고자 한 것이다. 특히 장욱진의 경우에는 사물 속에 존재하는 가장 이상적인 측면들을 발견해내고자 하였다. 그는 사물을 더욱더 사물답게 그리는 데 평생을 매달렸다. 즉, 나무를 나무로 그리고, 자연을 자연 그대로 그리고자 했다. 그랬기에 그는 순수한 아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대상의 참모습을 그리는 것, 그것이 바로 장욱진이 추구한 예술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상적 세계관은 불교와 도가적 사상의 핵심인‘무위자연’의 단순함과 근원을 지향하는 정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렇기에 장욱진의 산수화는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모던한, 단순하면서도 풍부한 여백의 순수함 그 자체를 향하고 있다.
백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