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Berlin
신데렐라 베를린
최정미 독립 큐레이터, 디스쿠어스 베를린 대표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졌다’가 아니고 ‘자고 일어났더니 독일이 통일되었더라.’ 1990년 하룻밤 사이에 베를린은 전 세계의 주목, 감동을 주는 동시에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1994년 수도가 본에서 다시 베를린으로 옮겨졌는데 정치인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관련 산업도 점점 베를린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발터 벤야민, 테오도어 아도르노, 위르겐 하버마스 등 철학 대가들의 저서를 출간하던 주어캄프Suhrkamp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베를리너 모겐포스트Berliner Morgenpost는 2014년 11월 현재 베를린에 약 350만 명이 살고 있으며 통독 후 270만 명이 베를린을 떠났고 290만 명 정도가 새 수도로 이주했다고 보도했다.
독일인 외에 덴마크, 스페인, 이스라엘,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새로운 이민자 물결을 만들었다. 뉴베를리너 중 미술인 외에 창작업에 종사하는 영화인, 음악가, 건축가, 패션디자이너들이 그 주축을 이루며 이들은 부유한 서베를린 대신 비교적 낙후한 동베를린 미테Mitte,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프레드리히스하인
Friedrichshain 지구에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당시 이 지구에는 공산정권 때 돌보지 않아 낡고 우중충한 건물이 넘쳐났다. 내부공사로 수리하기에는 경제적 부담이 크고 매매하기에는 적절한 시기가 아닌 이 건물들은 주인장에게는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였다. 늘 그렇듯 건축물 용도가 어정쩡할 때 예술은 만병통치약처럼 쓰인다. 건물주는 우선 예술가와 갤러리스트에게 싼 월세 혹은 공과금만 내게 하고 건물을 빌려줬다. 곧 덥수룩한 수염조차 멋스러운 젊은이, 눈이 초롱초롱한 모델 같은 여자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이 되고 동네 거리 곳곳에는 슬슬 공사표지판이 세워졌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은 비싼 동네가 된 미테 지구의 브루는스트라세Brunnenstrasse가 그렇고 중앙역 근처 콘도 개발지역이 된 하이데스트라세Heidestrasse가 한 예이다.
역시 베를린 미테
시 중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어 미테(중앙)라 불린다. 여행책자에 나오는 관광명소와 미술관, 박물관 외에 블루칩 갤러리가 가장 많이 밀집해있다. 미테에는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흥미로운 전시공간과 화랑들이 밀집해 있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거리는 아우구스트스트라세, 코흐스트라세, 루디-둣츠케-스트라세, 린덴스트라세Auguststraße, Kochstraße, Rudi-Dutschke-Straße, Lindenstraße일 것이다. 아우구스트스트라세에는 베를린비엔날레를 주관하는 카붸(KW Institute for Contemporary Art in Berlin), 신라이프치히 화파의 대표적 작가가 적을 둔 아이겐+아트Galerie Eigen+Art 그리고 괴짜 컬렉터 토마스 올브리히트Thomas Olbricht가 설립한 미 컬렉터스 룸Me Collectors Room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카붸 건너편에 나치와 동독정권을 모질게 겪고 1996년 폐쇄된 전 유대인 여학교Ehemalige Judischen Madchenschule는 정성스러운 공사 후 2012년에 럭셔리한 예술공간으로 회생했다. 미술인과 컬렉터의 레스토랑 파울리 잘Pauly Saal 외에 미하엘 푹스 갤러리Michael Fuchs Galerie, 아이겐+아트 랩, CWC 갤러리 등이 유명하다. 미테는 아트바젤위원회 심사단을 맡았던 노이게림슈나이더Galerie neugerriemschneider, 노든하케Nordenhake, 마이어 리거Gallery Meyer Riegger 그리고 스프루트 마거스Spruth Magers, 콘라드 피셔Konrad Fischer Galerie 같은 글로벌 플레이어의 서식지이며 당분간 그 위상을 유지할 것이다.
총천연색 크로이츠베르크
미테처럼 시크하다기보다는 얼터너티브한 성격이 강한 크로이츠베르크는 벌집처럼 항상 분주하다. 데모, 전시, 파티를 밥 먹듯이 하는 곳이며 모슬렘 여인의 차도르, 힙스터, 영화인, 한량 그리고 예술인이 섞여 묘한 균형을 이루는 현장이다. 젊은 유럽인 관광객 외에 예술인을 바다의 모래처럼 볼 수 있는 동네이기도 하다. 콧부써 토어Kottbusser Tor, 모리츠플라츠Moritzplatz 역 주위에는 바, 식당, 미술관, 대안공간, 젊고 실험적인 성격이 강한 화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또한, 미술인의 로망인 미술용품가게 모둘러Modulor,
강한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레지던시 베타니엔 쿤스틀러하우스Künstlerhaus Bethanien, 대표적인 대안공간 쿤스트라움 크로이츠베르크Kunstraum Kreuzberg, NGBK 쿤스트 퍼아인 등이 있다. 갤러리 중에는 파티를 예술처럼 여기는 갤러리스트 마틴 콰데Martin Kwade가 운영하는 콰드랏KWADRAT, 독일 미술계의 로열패밀리 쾨니히 아들 요한 쾨니히Johann König의 갤러리를 들 수 있다. 물품을 보관 수송하던 하역 역사 스테이션-베를린에서는 아트페어ABC(Art Berlin Contemporary)가 매년 9월에 열린다.
디즈니랜드 프레드리히스하인
슈프레Spree강을 끼고 크로이츠베르크와 프레드리히스하인 중간에 위치해 동서독의 경계이기도 했던 오버바움 다리Oberbaumbrücke는 20~40대 관광객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주말에는 오버바움 다리와 예전 베를린장벽이 있었던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이 그야말로 떼거리로 몰려다닌다. 이 근처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클럽 베르그하인 외에 종류와 성격이 가지각색인 클럽들이 무수히 몰려 있다. <해머링 맨>으로 유명한 조나선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Molecule Men>은 슈프레 강에 설치되었는데 오버바움 다리와 함께 프레드리히스하인의 상징물이다. 블루칩 갤러리 카피탄 펫즐Capitain Petzel 그리고 대안공간 아우토센터Autocenter의 디렉터 마이크 시얼로Maik Schierloh가 운영하는 코즈메틱잘롱 바베테Kosmetiksalon Babette가 동독의 대표적인 거리였던 카를 막스 알레Karl-Marx-Allee에 자리 잡고 있다. 프레드리히스하인은 화랑 집중 지역이기보다는 작가 집중 지역이라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크로이츠베르크에는 모슬렘, 흑인, 백인이 두루뭉술하게 섞여 있는 반면 프레드리히스하인에는 주로 유럽과 미국계 백인이 몰려 있다.
홍등가로 유명한 서베를린 포츠다머슈트라세Potsdamer Straße, 쿠어퓨어스튼슈트라세Kurfürstenstraße에는 미테의 비싼 월세를 못 이기고 옮겨온 신진 갤러리들이 자리를 잡았다. 블레인 서던 갤러리Blain Southern Gallery, 갤러리 탄야 바그너
Galerie Tanja Wagner, 마티아스 아른트Matthias Arndt 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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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통일 후 베를린 미술현장의 변화를 치열하게 경험한 얀 카게를 그의 전시공간인 샤우펜스터Schau Fenster에서 만났다. 스스로 ‘이상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그는 1997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했으며 ‘야넥Yaneq’이라는 예명으로 유명하다. 2009년부터 Flux FM 라디오에서 <Radio Arty>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2010년부터 크로이츠베르크 지구에서 샤우펜스터를 운영한다. 질문하기도 전에 야넥은 예술의 기본은 ‘태도Haltung’이며 독재주의에 가깝다고 외친다.
얀 카게Jan Kage
샤우펜스터 디렉터, 큐레이터, 저널리스트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서의 미술”
대안공간 샤우펜스터는 재정적으로 어떻게 운영되는가?
지원금이나 스폰서링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 오프닝과 전시 기간에 바를 운영하며 이 수익금으로 운영한다. 약간의 수익이 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적자를 면할 정도이다. 대신 아트페어에 참여해 수익을 올린다. 베를린에 약 1만 명의 작가가 있다는데 컬렉터 층이 아직은 척박하다. 그래서 전문 미술지 《쿤스트마가진》과 함께 ‘컬렉터와의 대화’를 미테에 위치한 ‘바1000’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딱딱할 수도 있는 행사가 바에서 열려 비교적 편하고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형성된다. 컬렉터 있는 곳에 갤러리스트가 모이고 이 두 그룹이 모이는 곳에 작가들도 온다.
베를린식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동독인은 변화를 뼈저리게 느꼈다. 사회주의에서 성장한 동베를리너는 통일이 되면서 갑자기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반면 전에 특정계층의 전유물이거나 사기 어렵던 제품들, 가령 벤츠, 바나나, 누텔라 등이 갑자기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술가, 히피, 펑크족, 문신족 등 과거 문제그룹으로 여겼던 이들이 미테, 프리드리히스하인 등 자기 동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따라서 월세도 서서히 상승했다. 토박이들은 점점 외곽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이 이방인 그룹도 경제적으로 풍요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결국, 주민 반 이상이 바뀌었다. 2013년에는 국민성이 가장 평온하고 조용하다고 알려진 뉴질랜드인, 캐나다인 누가 먼저 노이쾰른 지구에 자리를 잡았냐는 다소 격렬한 토론이 오갔다. 10년 전만 해도 노이쾰른은 가난한 유학생조차도 꺼리는 지역이었다. 이념문제는 없었지만, 뉴욕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고 젊은 예술가들과 화랑인들이 본의 아니게도 집값 올리는 데 일조를 했다. 베를린 또한 이 길을 걷고 있다. 이런 현상은 미테, 프란츠라우어베르크 지구에서 크로이츠베르크, 프레드리히스하인 지구로, 현재는 노이쾰른과 베딩Wedding 지구까지 확장되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베를린은 빠른 것과 수퍼리치에 대해 별 감흥이 없다. 백만장자 컬렉터도 자전거 타고 일하러 가고 국제적으로 왕성히 활동하는 작가, 큐레이터들도 바로 옆 후미진 바 한구석에서 열렬히 토론을 한다. ‘cool&easy’ 그리고 ‘섹시한 베를린’에 대해 앞으로도 국제현대미술계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베를린=최정미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