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시선의 정치, 동물원을 다시본다

미술관 옆 동물원, 그 시각적 ‘애완(愛玩)’의 역사와 이별하기

박소현 도쿄대 미술관학 박사

미술관과 동물원은 세계에 대한 욕망의 발현에서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더 큰 세계, 더 큰 권력에 대한 욕망이 그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유럽에서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유럽인은 뱃길을 통해 미지의 세계와 만나고 유럽 바깥을 상상하게 되었다. 유럽인에게 더 큰 세계는 난생처음 보는 희귀한 물건들과 동식물의 대량 유입으로 체감되었고, 덕분에 공격적인 식민지 확장에 힘입은 탐험과 약탈이 경쟁적으로 벌어졌다. 동물원은 이 더 큰 세계를 상상하고 가시화하는 하나의 방법이었고, 각국의 지배자들은 자국에 없는 동물들을 포획하고 열정적으로 수집하면서 권력을 교환하고 확장해갔던 셈이다. 1515년 어느 날, 이 대항해시대를 선도한 포르투갈 리스본에 인도코뿔소 한 마리가 출현했다.
당시 포르투갈령 인도에서 포획된 이 코뿔소는 120일간의 긴 항해를 거쳐 리스본에 도착했고,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동물원에 잠시 보관되었다가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 1세에게 선물로 보내지던 길에 선박 난파로 익사하고 말았다. 유럽인에게는 전설의 동물이었던 코뿔소가 잠깐이나마 그 모습을 드러냈던 이 사건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여러 사람의 기록을 통해 그 실체가 전파되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코뿔소>는 그런 사람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이 코뿔소의 죽음에 이르는 여행경로는 당시 유럽에서 권력이 교환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그 여행의 마지막은 아마도 박제가 되어 누군가의 분더캄머(Wunderkammer, Cabinet of Curiosities)에 소장되는 것이었으리라.
보통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기원으로 거론되는 분더캄머 또는 쿤스트캄머(Kunstkammer)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이 둘은 신이 창조한 대우주에 비견되는 자신만의 소우주를 만들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대항해시대에 이러한 의지는 유럽 밖에서 약탈해온 신기하고 희귀한 광물이나 동식물의 박제 등을 수집하고 전시하려는 욕망으로 분출되었다. 유럽 왕실의 쿤스트캄머는 이 탐험과 수집과 권력의 삼위일체를 가장 정치한 형태로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희귀동물의 박제 등과 같은 자연사적 유물뿐 아니라, 고대유적에서 발굴된 유물, 값진 회화 등이 함께 소장되어, 미술관과 자연사박물관 또는 미술작품과 동물 표본이 동거하는 미분화된 상태를 체현하고 있었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적 이성에 근거한 분류학이 체계화되면서, 이러한 동거상태는 막을 내리고 비로소 미술품 컬렉션과 동물 컬렉션이 다른 계통과 공간을 확보하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미술관과 박물관(죽은 동물의 표본 수집 및 전시), 그리고 동물원(살아있는 동물의 수집 및 전시)이 분리되었음에도, 애초에 그 수집과 전시를 관통하는 욕망은 이후까지도 건재했다.
19세기 들어 만국박람회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에도 이 수집과 전시를 통한 국가권력의 집중과 가시화는 여전히 유효한 전략으로 채택되었다. ‘만국’에서 산출된 ‘만물’을 한자리에 모아서 전시하는 전지구적인 기획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등을 일종의 집합적인 단위로 총체화하는 강력한 기제였다고 하겠다. 뒤늦게 근대화에 착수한 일본에서 이 만국박람회 참여를 중요한 국가적 기획으로 간주하고, 내국권업박람회라는 이름으로 국내 리허설까지 수차 개최했던 일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각종 사물들을 수집하여 전시하는 일이 근대적 세계 또는 국가를 상상하고 가시적 형태로 실체화하는 데에서도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서 지난한 학습의 과정을 요했던 것이 바로 유럽의 분류학 체계였던 바, 초창기 일본의 박람회 역시 전통적인 박물학의 관점으로부터 이 근대적 분류체계로의 진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정부는 그 전해인 1872년에 일본 최초의 박람회를 개최했고, 일본 전국에서 조달한 서화, 골동품, 동식물의 박제 및 표본 등을 유리진열장에 넣어 전시한 다음 이를 대중이 관람하게 했다. 일반 대중을 관람객으로 설정한 근대적인 시각장치가 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작동된 기점으로 볼 수 있는 이 박람회는 15만 명 이상이 다녀간 것으로 추정될 만큼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후 1877년에 에도막부의 상징공간이었던 우에노에서 제1회 내국권업박람회가 개최되고, 그 전시관을 계승하는 형태로 일본 최초의 미술관(일본 전통미술 소장)이라 할 박물관(현재의 도쿄국립박물관)이 개관하였다. 그리고 1881년에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1882) 전시관 용도로 박물관 건물이 신축되었다. 박람회행정의 일환으로 박물관이 개관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박물관의 소관 관청은 농상무성(農商務省) 박물국이었고, 이 농상무성 소속 박물관의 천산과(天産課) 부속시설로 우에노동물원이 개원하였다(1882). 이른바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는 익숙한 체제 및 장소성의 직접적 기원은 일본의 내국권업박람회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미 1872년 박람회부터 동물표본이나 박제를 미술품과 마찬가지로 유리진열장에 격리시켜 전시함으로써, 전시대상과 거리를 둔 시각적 ‘애완’이라는 감각이 제도화되고, 죽은 동물(표본이나 박제)에 대한 이러한 시선은 살아있는 동물에까지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86년에 박물관이 황실 업무를 소관하는 궁내성으로 이관되면서 제국박물관 시기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제실박물관체제로 이어졌는데, 동물원 역시 박물관과 함께 궁내성으로 이관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산 동물을 넘어서 호랑이, 코끼리, 하마 등 외국의 진귀한 동물들이 도입되었다. 즉 미술관 및 동물원이 황실 소유로 이관됨으로써, 그 수집품의 예술적·보물적 가치 및 희소가치는 더욱 강화되었고, 미술품 및 살아있는 동물에 대한 거리를 둔 관조, 철저히 시각화된 경험으로서의 감상 역시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에도막부의 상징공간을 박람회 공간으로, 그리고 박물관 및 동물원이 들어선 거대한 근대적 상징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전략은 머지않아 식민지 조선에서도 재연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일본 통감부는 고종의 양위를 강제하였고, 순종의 새로운 거처인 창덕궁 수선 공사를 진행하면서 창덕궁에 인접한 창경궁에 박물관·동물원·식물원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공식기록으로는 순종이 ‘새로운 생활에 취미를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목적으로 밝혀져 있으나,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다른 자료에서는 이미 계획단계부터 순종만의 취미시설이 아닌 일반 공개가 예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909년에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일반 공개가 이루어졌는데, 이와 함께 공표된 것이 ‘어원종람규정’이라는 창경원관람규칙이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광질(狂疾)인 자, 만취한 자, 7세 미만으로 보호자가 없는 자는 입장이 금지되었고, 누추한 의복이나 마차 등을 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더해서 원내에서는 정숙하고 전시품을 만져서도 안 되었으며, 가축의 입장도 금지였다. ‘창경원’ 소속의 조선고미술을 전시한 박물관이나 동물원 모두 동일한 관람규칙을 적용받았던 셈인데, 흥미로운 점은 가축 입장 금지라 하겠다. 이는 시선의 주체를 인간으로 한정하고, 살아있는 동물일지라도 어디까지나 시선의 대상으로만 국한시킨 근대적 입장을 대변해준다.
한편 순종을 비롯해 일반 대중에게 인기가 높았던 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동물원이었다. 동물원은 창경원 개원 이전에 서울에서 사립동물원을 운영하던 유한성(劉漢性)의 동물을 전부 매입하고 그를 직원으로 채용해 설립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동물원에는 한국 각지에서 잡아온 호랑이, 늑대, 곰, 학 등과 외국에서 사들인 코끼리, 낙타, 캥거루, 악어 등의 이국적인 동물들이 있었고, 1930년대에 이르면 그 수가 180종 1000여 점을 넘을 정도로 늘어난다. 동물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과 공감은 각별해서, 1912년에 인도산 암코끼리가 위장병으로 죽은 것을 애도하는 신문기사에는 이 코끼리의 기념물을 제작해 동물원에 영구설치할 계획까지 보도되기도 했다. 이러한 동물원의 특별한 위상은 ‘미술관 옆 동물원’이 아니라 ‘동물원 옆 미술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듯하다.
태생적으로 미술관과 동물원은 대상을 사랑하여 가까이 두고 즐기는 ‘애완’의 전통이 근대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애완’의 말뜻이 주로 골동품이나 동물에 한정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애완’의 근대화란 다름 아닌 시각적 경험의 절대화이고, 세계에 대한 지배를 기저에 깔고 있는 시선의 욕망과 소유의 욕망이 유착된 수집과 축적, 그리고 이 수집품들의 체계적 분류와 전시 기법의 개발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근대적 대중공간과 여가시간의 태동과 함께 일상 속으로 빠르게 유통되고 오락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제도적인 차원에서도 여전히 미술관과 동물원은 하나의 법제적 범주 내에서 규정되고 있다. 우리의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은 동물원, 식물원, 수족관과 같이 살아있는 생명체를 수집, 보존, 전시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시설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하지만,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가족무덤’(아도르노)이라고 죽음과 유비시키는 관점에서 본다면, 동물원을 여전히 같은 범주로 취급하는 일은 위험천만하다. 미술관적인 시선을 죽은 동물, 살아있는 동물에까지 무차별적으로 확장시키는 근대적 기획은 인간 전시라는 획기적인 발명품까지 만들어냈고, 그 생명체에 대한 영구 보존의 욕망에 따라 살아있음에 대한 배려보다는 그 죽음 이후의 안식까지 시선에 노출시키는 과감함을 마다하지 않았다(미라, 박제, 표본 전시). 최근 동물원 운영에서 동물권 개념이 중요해지고 근대적 시선에 대한 반성이 논의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제 우리도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는 오래된 역사와 슬슬 우아하게, 인간적으로 이별하는 방법을 고민할 때이다. ●

Frans_Francken_(II),_Kunst-_und_Raritätenkammer_(1636)

프란츠 프랑켄 <쿤스트카머 컬렉션> 나무에 유채 74×78cm 1636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Garry Winogrand Central Park Zoo, New York 1967

게리 위노그랜트(Garry winogrand)
미국의 다큐멘터리 사진가 게리 위노그랜트는 1969년 첫 번째 사진집 《동물들(The Animals)》을 선보였다. 1962년부터 7년간 뉴욕동물원에서 촬영한 사진 43점이 수록된 이 사진집은 동물원의 동물과 관람객의 관계에 주목한 그의 사진에는 울타리 안 동물의 무기력한 모습과 구별되는 인간 중심의 시선이 잘 드러난다.
위 <뉴욕동물원(Central Park Zoo, New York)> 1967  아래<뉴욕>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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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 스기모토(Hiroshi Sugimoto)
<디오라마> 연작은 뉴욕 자연사박물관의 박제된 동물과 배경 그림으로 구성된 디오라마를 찍은 사진이다. 스기모토는 카메라의 눈과 세심한 조명을 이용해 이 장면을 마치 야생의 모습처럼 보이게끔 전환시켰다.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 즉, 보이는 것에 대한 오류는 사진이 진실을 말한다는 통념을 해체하는 동시에 과학적 역사를 고증하기 위해 전시된 디오라마도 하나의 재현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본질을 깨닫게 만든다.
<큰 사슴(Wapiti)> <디오라마 시리즈> 젤라틴 실버 프린트 50×60cm 1980 ©Hiroshi Sugimoto

ohahn

안옥현
텅 빈 강의실과 철망, 포르말린 병에 담긴 동물의 시신. 작가는 포토몽타주를 이용해 뚜렷하지 않은 이미지 속에서 파편적으로 등장하는 동물의 이미지와 밀폐된 시공간을 조우시키고 경계를 무화시키고자 한다.
<표본실의 청개구리> 젤라틴 실버 프린트 50×150cm 1997

윤정미_자연사박물관_2

윤정미
<동물원>에서 어둡고 칙칙한 실내우리, 삭막하고 인위적인 공간 구획이 강조된다. 유년시절 추억을 떠올리는 유희적인 공간이자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이 반영된 동물원의 이중적 속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동물원>이 흑백사진을 통해 인간의 어두운 소유욕을 드러냈다면 컬러사진의 <자연사박물관>은 ‘과학과 교육’이라는 명분하에 한국의 자연사박물관의 체계, 수집, 전시 디스플레이가 보여주는 다소 허술하고 키치적인 측면이 두드러진다.
<자연사박물관_2마리의 한국 호랑이와 2마리의 미국 늑대> C-Print 70×148cm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