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 THEME 올해의 작가상 2015 나현
한국 현대미술의 비전을 제시할 역량 있는 작가를 후원한다는 취지로 제정된 <올해의 작가상>이 올해 4회를 맞이했다. ‘2015 올해의 작가’ 후보 작가로 김기라, 나현, 오인환, 하태범이 선정돼 각자의 작업세계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프로젝트 전시를 밀도있게 선보인다. 전시는 8월 4일부터 11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며 전시기간 중 최종 선정 작가 1인이 발표된다. 취재·인터뷰 이슬비 기자
나현 | 바벨탑 프로젝트-난지도 The Babel Tower Project-Nanjido
“공인된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저항정신”
이번 전시의 공간 구성에 대해서 설명해달라. 전시장은 2400여 년 전 바벨탑과 연결돼 있던 바빌론의 성문 이슈타르 문 외벽을 덮고 있는 푸른 벽돌색으로 채워졌다. 내부에는 바벨탑을 사이에 두고 군데군데 뚫린 구멍으로 탑을 볼 수 있는 둥근 벽과 맞은편에는 둥근 벽을 마주 볼 수 있도록 거울을 설치했다. 둥근 벽의 구멍들은 바벨탑을 바라보는 시점의 시작이자 전시장 내부를 지켜보는 일종의 파놉티콘(Panopticon)이며 맞은편 벽에 설치된 거울은 반대로 파놉티콘을 지켜볼 수 있는 시놉티콘(Synopticon)이자 공간의 한계로 축소된 바벨탑의 규모를 극대화하기 위한 현실적 고민의 결과이기도 하다. 기록에 근거해서 벽돌로 제작된 바벨탑 외부에는 난지도에서 현재 서식하고 있는 귀화식물과 같은 종들을 식재했다. 또 난지도에서 채록한 새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상층에 설치된 우물에서는 이태원과 원곡동에 살고 있는 이주민들이 그들의 모국어로 인터뷰한 영상을 보여주고 있다. 좁은 문으로 연결되는 탑 내부에서는 해외로 이주한 한인과 그 후손들을 인터뷰한 영상과 함께 악마의 산과 난지도가 바벨탑의 유적임을 입증하는 자료와 문서를 모은 작가의 아카이빙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바벨탑> 프로젝트는 베를린 악마의 산과 서울 난지도를 바벨탑의 유적으로 추정하고 두 장소의 역사를 발굴한 결과다. 여기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 근거는 무엇인가? 먼저 두 장소의 역사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된 베를린의 쓰레기가 모여 인공산이 된 악마의 산과 한국의 현대화, 산업화시대를 관통하며 서울의 쓰레기를 받아낸 또 하나의 인공산, 난지도. <바벨탑> 프로젝트에서 악마의 산과 난지도는 민족주의가 낳은 전체주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내부 구성원을 하나로 결속하고 그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민족’이라는 단어를 소환한 예는 역사에서 자주 등장한다. 독일 나치당(1919~1945)은 아리안민족의 혈통적 우월성을 내세우고 국민을 선동하며 정권을 차지한 후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백만의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하는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광기어린 전쟁의 폭력은 독일국민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나치 패망 후 악마의 산을 베를린에 만들어냈다.
서울의 난지도가 세워지던 당시(1977~1993) 군사정부는 쿠데타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막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발전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단일민족이라는 감성적 전체주의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어 국민의 정치적 다양성을 훼손하고, 인권과 민주화를 폭력으로 탄압하고 국민 개개인의 정신활동과 문화를 통제하려 했다. 그 결과로 단기간에 경제성장의 결실을 맛보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 경제위기(IMF사태)를 맞았으며 이후 중산층의 붕괴로 빈부의 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졌다. 뿌리 깊은 지연, 혈연, 학연에 따른 배타성은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곳곳에 만연한 천민자본주의가 더 이상 이상해 보이지 않는 대한민국에는 생태가 복원되어 시민의 공간으로 재탄생했으나 여전히 불안성을 안고 있는 난지도가 있다. 악마의 산과 난지도의 역사는 바벨탑에 관한 기록들과 상당부분 닮아 보인다.
이번 작업에서 우물의 상징적 의미가 궁금하다. 나에게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다리 구실을 하는 우물은 켜켜이 쌓여있는 시간의 층을 밀봉하고 있는 중요한 보물 상자이다. 전시장의 우물에서는 서울의 이태원과 안산의 원곡동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과의 인터뷰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은 주로 제3세계 국가에서 온 이주민들이다. 영상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한국에 왔는지 그리고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해 질문하고 그들에게는 각자의 모국어로 자유롭게 대답하기를 부탁했다. 따라서 작가도 그들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대부분 알지 못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다양한 민족이 한국에 공존하는 현재는 난지도가 세워지던 지난 시기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풍경이다.
역사에 접근하는 작가 자신만의 태도가 분명한데 이에 대해 설명해달라. 전설, 신화적인 요소 역시 당신의 작업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은 통시적 관점이 배제되다 보니 관념적인 시간과 공간의 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따라서 작업의 ‘시작’ 과 ‘끝’이 애매모호할 수 있고 장소 간의 개연성도 부족해 보일 수 있으나 인식의 관념적 기본 틀을 벗어날 때 어쩌면 그 ‘대상’을 보다 입체적이며 성숙하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번 전시의 경우 전시장의 바벨탑은 바닥에서 약 40cm 높이를 유지하며 공중에 떠있도록 연출했다. 일반적으로 바벨탑은 과거나 전설 속의 판타지로만 인식한다. 그러나 내가 해석하는 바벨탑은, 떠 있는, 마치 부유하는 유기물처럼 시-공간의 경계에서 벗어나 인간 삶의 풍경에 항상 함께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왜 바벨탑 이야기들이 사라지지 않고 현재까지 전해지겠는가!
역사뿐 아니라 민족의 개념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해왔다. 민족을 바라보는 당신의 관점에 대해 설명 부탁한다. 사실 나는 ‘민족’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모호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이용하는 특정 개인(집단)의 속성을 드러내는 점에 중점을 둔다. ‘민족’이라는 단어는 매우 진중하고 호소력이 있어 보이는 반면에 피상적일 수 있어 개인(집단)의 이해에 따라 해석이 용이하고 상당히 선동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와 닮아있다. 내 경험을 고백하자면, 민족이 뭔지도 모를 어린 나이에 초등학교에 취학하자마자부터 민족에 대한 교육(세뇌?)을 받기 시작하였다. 선생님의 체벌이 무서운 어린아이는 뜻도 모른 채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했다.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거대한 미션을 띠고 대한민국에 태어났다. 거기에 감히 부모님의 사랑이나 개인의 자아 따위를 거론할 자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 신성한 민족에는 ‘국가’와 ‘인종’이 함의되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민족’과 ‘국가’와 ‘인종’은 분명 서로 다른 의미이다. 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우선 민족의 의미에서 ‘국가’와 ‘인종’을 구분했다. 그리고 남은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흥미로운 점은 민족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 집단이나 개인은 주로 정치인과 과거 군사정권의 독재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과거 독일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독재자는 야욕을 채우려 폭력을 정당화하고 국민에게 공포심을 불어넣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한민국의 경우, 그것이 진정 민족을 위한 행동이었는지가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족’이라는 피상적일 수 있고 선동적인 구별 짓기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었을까! 수많은 외침과 식민지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반도에서 분명 역사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기도 했을 것이나 그 점을 노리는 자들에 의한 부작용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담은 스스로를 외부로부터 보호할 수 있지만 너무 높은 담은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베를린 악마의 산과 서울 난지도뿐 아니라 지금까지 작업에서 영국 옥스퍼드와 독일 드레스덴, 독일 라인강과 한국의 4대강 등 두 지역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연결하는 방식을 자주 보여주었다. 이 같은 방법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작업을 진행하며 가장 어렵지만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건이나 이슈를 단순히 기존의 관점이나 해석에 맞게 다시 시각화하거나 연출하는 것은 일종의 일러스트레이션에 가깝다. 작가는 기존의 관점을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재해석된 관점을 관철시키기 위해 어떻게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며 어떤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지 신중하고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한다. 이 부분은 예술가로서 스스로를 시험대에 세우는 일이자 관객에게 작업을 평가받는 주요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물론 관객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말이다.
나는 작가와 관객이 가질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선입관과 편견을 피하고 작가의 관점을 드러낼 수 있는 장치로서 다른 장소나 시간에 일어난 유사한 역사적 사건을 작업에 불러들이는 일종의 패러렐(Parallel) 방식과 은유적(Metaphor) 상징을 사용해왔다. 예를 들어 <로렐라이의 노래> 프로젝트에서는 독일의 라인 강과 한국의 4대강에서 유사하게 일어나고 있던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말뚝’이라는 은유적 경계선을 사용하여 보여주었으며, 바벨탑 프로젝트에서는 베를린과 서울의 쓰레기더미에서 자라는 토착식물과 귀화식물들을 단일민족과 다양한 이민족의 은유로써 표현했다.
아카이빙 자료는 당신의 작업에서 어떤 구실을 하는가?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바야흐로 신뢰 상실의 시대이다. 과학과 기술의 훌륭한 발전은 사회, 문화 환경의 변화와 인식영역의 확장을 이끌어 기존의 질서와 체계가 상당부분 신뢰를 잃어가는 형세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과도기임을 예증하기도 한다. 매력적이지만 불안하며 폭력적인 현재에 대한 나의 관심은 지금까지 어떻게 이 사회가 형성되어왔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역사로 순조롭게 이어졌다. 그리고 불편한 의심이 시작되었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공인된 역사는 신뢰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역사는 지금까지 진보해 왔는가! 나는 절대 진리(Absolute truth)의 역사가 탄생한 비밀의 원형질이자 각각의 역사에 권위와 신뢰를 부여하는 각종 기록문서와 다양한 자료들에 접근했다. 그리고 사적으로 선별하고 분류한 작업을 통해 내 방식으로 역사를 다시 해석했다.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믿기 어려워 보이지만, 좀 더 풍부하고 공정할 수 있으며 자신의 해석이 절대 진리임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신뢰할 순 없지만 작가의 해석하기는 비밀스러움을 걷어내고 관객에게 의도를 투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역사는 관점에 따라 망각되거나 세뇌될 수 있음을 환기하고자 했다. 작가에게 아카이빙 작업은 자체로서 하나의 결과물이자 수행적 퍼포먼스인 것이다.
나 현 Na Hyun
1970년에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옥스퍼드대 인문학부 순수미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과 후쿠이, 런던 등지에서 15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프랑스 파리 시테, 쿠바 아바나, 베를린 쿤스트하우스 베타니엔 등 국내외 레지던스프로그램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