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리뷰] 김성연 – 불투명성, 불확정성이라는 감동

김만석 미술비평

‘감동’이라는 말은 생각외로 특별한 순간에만 발화하는 용법이 아닐 수 있다. 감동은 감각과 운동이 합쳐진 단어로, ‘마음’이나 ‘정서’의 변화나 이행을 포착하고 있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이 말이 갖는 함의는 생각보다 훨씬 광범위할지 모른다. 특히 ‘동(動)’이 무거움(중력)과 (외부적) 힘이 적절한 기울기로 결합되어 있는 단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즉, 중력이 고정된 힘이라면, 그것에 외부적 힘들이 주어질 때 운동이 생성되는 것이니, 실상 삶은 곧 감동의 연속이고 감동의 지속이라고 해야 마땅할지 모른다. 우리가 감동을 특별한 순간이나 예술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그러므로 삶에서 ‘감동’을 형성하기 힘든 건 이 감동을 주체의 동력으로 삼을 수 없게 되어버린 어떤 기이한 조건들이 삶으로 급격하게 그리고 거부할 틈도 없이 구성되었음을 뜻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예술적 행위와 실천들은 삶을 다시 감동의 연속으로 구성하는 것이어야 할 테고, 삶이 살 만한 방식으로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을 세계에 되돌려 주려는 악전고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김성연이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미국 뉴욕대를 졸업한 뒤 부산으로 돌아와 평면과 설치, 사진, 비디오에 이르는 다채로운 작업과 활동을 통해서 그리기 자체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세계 형식, 도시적 삶과 풍경 등을 비판적으로 해부하고 재구성해왔던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의식을,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매체를 경유하면서 치밀하게 배치하는 작가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각각의 미디어를 통해 표현된 그의 작업들이 갖는 무게는 허투루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의 작업 궤적을 일별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다만 김성연이 세계를 차가운 시선으로 대하면서도 그 차가움이 외려, 그의 일상 삶에서 만나는 대상이나 사물에 대한 ‘사랑’에 기초를 두지 않았다면, 그의 작업이 그토록 다양한 매체를 경유할 이유가 없었으며 지속적으로 동일한 대상의 ‘이면’을 다른 방식으로 포착하려고 애 쓸 필요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섬> 전시장 2층 공간에 배치된 영상작업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비디오로 촬영된 그의 일광작업실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이 다채롭게 변주되는 것은 그 사소한 대상에 숨결을 불어넣을 때 일상적 지각 너머에 다르게 존재하는 거의 무한한 방식이 있음을 뜻한다. 세계가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것이라면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물이나 대상은 우리의 앎 바깥에 있으니 그것을 안정적으로 포착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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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되지 않은, 불완전성의 구축

따라서 세계를 고화질-디지털로 포획하여 미시적인 세계마저 시각적 반경 내로 회수하려는 현존 시스템의 지각능력을 무력화하는 방식이 그의 작업에 도입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작업은 대체로 확실성을 의도적으로 결여하고 있으며 선명하거나 작은 세계를 고화질 카메라로 선명하게 확대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의 불투명함을 강조하며 일상적 시지각의 무능력을 초점화한다. 3전시실에 설치된 작업이 이를 잘 보여준다. 즉, 불투명한 케이스에 담긴 체크무늬로 채색된 작은 형상들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며 시각적 ‘앎’과 그것이 갖는 욕망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다. 달리 말해, 그에게서 이 세계는 ‘포장’된 것이고, 세계의 진면목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무엇이 세계를 포장하는가?
자본이 세계를 포장함으로써, 세계의 진면목이 감추어진다는 점에서, 김성연의 포장 연작은 상품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함축한다. 디자인이 사물의 본성으로부터 이미지의 자율성을 획책함으로써 사물의 사물성이 상실되어 차갑게 변모해버렸다는 비판적 진단은 그의 평면작업이나 설치, 비디오작업들을 예민하게 만나는 데에 유효한 시각을 제공한다. 마치, 보르헤스의《 과학적 정확성에 관하여》에서 현실과 똑같은 크기의 정밀한 지도를 제작하는 제국의 우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불투명성이야말로 관계가 구성되는 기초이자 ‘우애’를 나누는 원리가 되며 삶이 서식할 수 있는 장소라고 역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차라리 잘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세계와 내가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일 수 있다.
kim3ok도시는 김성연의 작업에서 가장 불투명한 공간이자 삶의 장소로 나타난다. 사진과 비디오를 통해서 도시의 다양한 모습을 디지털 이미지로 포착하고 이 이미지를 다시 그리는 방식의 작업을 통해서, 젠트리피케이션이 도시의 외관과 이미지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을 냉정하게 바라보면서도,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자연’의 맨몸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산의 일부가 공룡으로 그려지거나 산복도로 마을의 옥상에 빨래와 파란 물통의 강렬한 색채가 남겨진 것은 삶의 기억과 흔적들이 급격하게 사라지는 사태에 대한 개입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비가시적인 체제로 내모는 논리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기도 한다. <불꽃놀이>와 같은 영상작업에서 특히 이런 태도가 잘 드러난다. 달리 말해, 쾌적하고 매끄러운 도시는 제 속살을 감추고 있으며 그 속에서 거주하는 존재들은 제 삶의 역사와 결을 유실한다는 것.
김성연의 작업들 역시 일정한 방식으로 불안정성을 구축하려는 경향을 띠기도 한다. 그의 작업은 전시되는 ‘현재’로 완결되지 않고 항상 미래의 사태로 개방된다. 이는 자신의 작업이 전시되는 순간으로 종결되는 게 아니라, 이후의 전시에서 다시 도입되면서 전시 방식을 항상 변용하고 변주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에게는 작업 역시 불투명한 것으로 남겨져 있으며 지속적으로 다른 것으로 이행해야 할 것으로 주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평면도 이런 태도로부터 비켜설 수 없으며 사진과 비디오작업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김성연의 작업은 항상 이행의 사태로 기입될 수밖에 없다. 같은 제목의 작업을 제시하더라도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다른 작업이 된다.
그러니까, 김성연은 하나의 텍스트가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위해선, 완결적인 구조를 갖기보다 지속적으로 형질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듯이 자신의 작업을 구성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작품을 작가로부터 소외시키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상기해보라. ‘소외’가 자본주의적 삶의 일반적인 양식이라면, 소외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술적으로 생산된 그것을 김성연은 지속적으로 돌보고 다듬는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 역시 작업에 항상 밀착해 있는 묘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작가의 세계인식과 그 생산물 역시 세계인식의 방식으로 취급하는 태도는 작업을 물신화하는 경향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예술 텍스트임을 주지시킨다.
그는 왜 이렇게 집요하고 철저하게 자신의 작업과 세계를 대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성곡미술관 2관 1전시실 전면에 전시된 새 떼가 망명하듯 파도와 바람을 거스르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는 작업에서 엿볼 수 있을 듯하다. 이를테면, <야간비행/trans->에 따르면, 영상에 등장하는 새 혹은 새들은 무엇보다 그 자신으로 여겨진다. 자유를 강하게 열망하는 사람들의 생애가 그러하듯, 그는 자유로운 비행을 꿈꾸었고 서식지를 공중에 마련하려 했음을 감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세계의 운동 속에서 미술적 실천이나 생산 그리고 어떤 결과물들을 결코 고정된 방식으로 두지 않으려는,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로서 그 자신과 그의 정서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여, 새로서 그의 비행이 어떤 비행이 될지, 그 불확정적인 행로가 무척 기대된다. ●

김성연은 1964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뉴욕대 대학원(석사), 동명대대학원 시각디자인과(박사)를 졸업했다. 15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국내 및 타이베이, 일본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부산의 대안공간 반디의 디렉터를 지냈다. 현재 부산에서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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