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리뷰] 황인기 – 물신주의적 표면이 사라진 자리
정신영 미술비평
그간 0과 1로 재정의된 픽셀 산수화로 전통과 동시대의 성공적인 융합을 제시해 온 황인기는 마치 과거의 선인이나 문인들처럼 사회와 격리된 무위자연 속에서 회화의 방식과 역사에 대한 고민에 집착하는 듯했다. 그러나 3년 만의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신작들은 그의 정치,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내 보임과 동시에 다듬어진 이미지에 대한 거부, 그리고 제작자로서의 신체적인 개입 결과물들을 통해, 여느 때보다도 적극적인 발언 의지가 돋보이는 것들이었다. 전시 제목에 암시되어 있는 것과 같이 물질적 풍요의 일과성 매력에 대한 회고적 태도와 과도한 소비에 대한 반발이나 저항은 황인기의 작품 속에서 보다 물질적인 형태로 제시되어 우리를 압도한다.
프랑스의 패션하우스 루이비통이 만들어낸 가죽 가방은 하나의 사회현상이기도 하다. 소지품을 넣고 이동하기 위한 가방이라는 본래 기능은 이미 부수적인 것이고 소비자에게는 이 제품을 소유하여 과시함으로써 브랜드가 상징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스스로에게 이항시키는 것이 보다 핵심적인 기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0년에 가까운 전통을 자랑해 온 루이비통은 자사 이미지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라카미 다카시를 비롯 리처드 프린스나 최근에는 쿠사마 야요이 등 국제적인 현대미술 작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하나의 가방에 우월한 패션감각이나 재력 이상의 예술성마저 부여하는 전략을 취해 성공했다. 어깨에 매달린 루이비통 가방 속에는 지갑이나 전화, 열쇠 외에도 문화, 예술, 사회적 부가가치가 담겨있는 셈이다. 황인기는 아마도 루이비통 제품이 갖는 이러한 복합적 측면에 착안한 것 같다.
전시장에는 먼지나 얼룩으로 오염되어 찢기거나 일그러진 형태의 루이비통 가방 44개(전 작품의 제목은 전시명과 같음)가 날카로운 쇠갈고리에 걸려 진열되어 있다. 우리 사회와 소비자들이 이 가방들에 기꺼이 부여해 온 모든 누적된 비물질적인 가치들을 작가는 일말의 주저나 참을성 없이 단숨에 박탈하고 있다. 일렬로 늘어뜨려진 낡고 해체된 검은 덩어리들은 유럽 전통의 고급 상품으로서의 아우라를 잃고 가방 주인의 허영과 조바심과 함께 변질되어 가까이 가기조차 꺼려질 정도로 흉물스럽게 변해 있다. 작가는 가공된 가죽에 지나지 않은 명품 가방들의 물리적 정체를 드러내 보인다.
84권의《 타임(TIME)》지를 동일 간격으로 조심스럽게 유리 선반 위에 진열한 설치는 1주일의 유통기한이 지난 지 오래된 이 시사주간지들을 마치 고대 파피루스나 중세 수사본인 양 취급하고 있다. 먼지와 흙모래로 뒤덮인 책 표지들은 아마도 세계사의 한 시점에 우리와 공유했었을 그 1주일에 대해 강렬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표지를 장식해 온 수많은 사건이나 인물들도 이들이 뒤집어쓴 먼지보다 더 뿌옇고 흐릿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 잠식되어 잊혀간다. 가슴에 새겨진 고백이나 문학작품 속 한 구절의 영속성에 비해 매순간 우리를 자극하는 최신의 시사정보란 인쇄된 얇디얇은 종이만큼이나 무의미하고 덧없는 것일까. 미니멀 조각처럼 규칙적으로 나열된 우리 사회의 잊혀진 증언들은 스스로의 가벼움과 반복적 성질에 허탈해 지레 퇴색해버린 화석인 듯하다.
시간의 진행에 따라 극적인 변화를 겪은 것은 작가가 2011년부터 의도적으로 부패시켜온 평면작품이다. 물감 대신 콩, 바나나 등의 식품으로 나무판 위에 그려진 유명 브랜드의 로고는 이제는 갈색과 흰색의 무기질적 가루로 변질되어 이미지 식별이 어려울 정도이다. 신성시되어야 할 캔버스 표면을 오물로 뒤덮는 방식은 단순한 파괴행위를 넘어선 자괴적인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 1977년 앤디 워홀은 캔버스에 금속도료를 바른 후 소변으로 부식시킨 결과물을 작품으로(<산화 회화(Oxidation Painting)>) 제시해 그때까지의 작업에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시각적, 개념적 전환점을 제공했다. 대량 생산, 소비가 미덕이던 찬란한 미국의 경제부흥에 발맞추어 각종 공산품과 스타들의 이미지를 섭렵해온 워홀에게 떠오른 소변이라는 소재이자 재료는 화려하고 지배적이던 물질문명에 대한 비웃음이었을 것이다.
치밀한 계산을 거쳐 산출된 정교한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해 까마득한 수의 플라스틱 블록을 하나하나 꽂아가며 이미지를 생산하던 황인기의 산수화 작업을 생각할 때, 부패라는 일종의 자연현상에 화면 구상을 내맡기다시피 한 것은 작가의 기술적 우월성에 대한 저항적인 태도의 분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대량 생산되는 완제품으로 뒤덮여 매끈한 인공적인 광택이 흐르는 물신주의적 표면이 사라진 자리에는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가 말하는 ‘저속한 물질성(base materialism)’이 자리 잡는데, 이는 바타유의 이상주의와의 싸움의 가장 중요한 무기였으며, 황인기의 경우에도 그에게 기대되는 익숙한 질서를 파괴하기 위한 궁극적 수단으로 사용된 듯 보인다.
지하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백색 천을 쓴 다섯 개의 부유하는 듯한 신체 지표이다. 중세의 카타콤과 같이 비밀스럽고 의식(儀式)적인 이 공간에서는 머리를 중심으로 향해 누운 인체의 흔적들이 순교자들의 석묘보다도 더 미련 가득히 무덤의 고요함을 깨고 주문을 되뇐다. 낮은 음성으로 반복되는 것은 7개 국어로 해석된 동물학자 로렌츠(Konrad Lorenz, 1903-1989)의 현대문명비판이라고 하는데, 역사시대로 진입하여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인류는 항상 지금, 현재의 상태에 대해 우려하고 회의하며 후회해왔다. 조상들의 미이라처럼 우리의 현재를 비난하고 우려하며 경고하는 이들의 불협화음이 어둡고 폐쇄적인 이 공간을 채워간다. 그럼에도 작품의 에너지가 결코 절망적이거나 자학적이지 않은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팽팽히 당겨진 듯 고정된 5명의 존재가 주는 긴장감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신체를 합성수지로 본떠 만든 복제된 형상 위에 천을 씌워 굳힌 이 구조물들은 말 그대로 작가 스스로의 허상이다. 예술가로서 세상만물의 허상을 만들어내는 것을 직업으로 한 그가 흥미를 가진 것이 창조자로서의 작가의 허상임은 겹겹이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환영을 만드는 것과 나를 환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 사이에는 교묘한 주체의 치환이 일어난다. 화면상에 이미지를 그려나가듯이 나의 유령을 만들며 작가는 유체이탈의 상태처럼 누워있는 나를 분명 몇 번이고 직시하며 개념적인 가사(假死)상태를 경험햇을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나에 대한 발견, 즉, 자아에 대한 경외(境外)시는 라캉이 말하는 거울 속 이미지로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과 같이 스스로의 부족과 미숙을 깨닫고 충족해가는 단서로 작용할 것이다. 소비사회의 허상뿐만 아닌, 마치 허물을 벗어놓은 듯한 스스로의 껍질을 제작하며 작가가 각성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번 전시에서 육체의 한계에 대한 자각과 이에 대한 극복의지가 그 어느때 보다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역설적으로 전시된 작품들의 물리적인 위압감 때문이다. 무겁게 늘어뜨려진 44개의 가방을 비롯해 50여 개의 액자로 채워진 벽면, 수년치의 주간지들과 반복되는 인체형상, 전 3층에 걸친 의욕적인 인스톨레이션에서는 마치 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작가와 같은 패기와 열정, 그리고 창조적 욕심이 느껴지는데, 이는 전시 전체에 충만한 죽음에 대한 연상과 대조적이다. 작가는 디지털화된 시각표현을 주 매체로 삼던 때에 잠복해 있던 신체적, 물리적 감각이 올라오는 것을 참지 않은 결과라고 풀이한다. 언뜻 상반되어 보이는 충만한 창조적 에너지와 이를 선동하는 퇴화나 부식, 부패와 같은 비구조적이고 비정형적인 경향에 대한 관심은 황인기를 통해 한곳에 집약되어 그 작품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갈 듯하다. ●
황인기는 1951년 충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공과대학 응용물리학과를 중퇴하고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와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을 졸업했다. 지금까지 11회 개인전을 열었으며, 199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 2011년 아르코미술관 대표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충북 옥천에서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