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차계남

선(線)과 선(禪)이 조우하는 장소와 시간

작가 차계남의 작품은 눈으로만 봐선 알 수 없다. 손으로 만지고 더듬으며 촉감의 세계를 경험해야 한다. 최소한의 컬러와 단순한 구조로 구성된 작품은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공간의 울림을 전한다. 재료가 지닌 고유한 물성의 특성을 극대화하며 존재감을 드러낸 입체작품이 이를 대변한다. 6월 17일부터 29일까지 대구 동원화랑과 봉산문화회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작가는 한지를 이용한 신작을 선보였다. 흑과 백의 단순한 색과 노동집약적인 결과물인 신작은 작가의 새로운 미래를 보여준다.

김옥렬  현대미술연구소&아트스페이스펄 대표

작가 차계남의 전시가 대구미술관 3전시실(2014. 5.27~8.31 <기억의 풍경 7인전)>과 봉산문화회관 1전시실, 그리고 동원화랑(6.17~29) 초대 개인전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가 주목받는 것은 작가가 6년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하는 대형 전시라는 이유도 있지만, 전혀 다른 재료와 기법에도 불구하고 이전 작품과의 연속성을 통해 그만의 독자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일본에서 첫 개인전 후 30년 이상을 한국과 일본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을 무대로 활발히 활동 해오다 긴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6년 동안 면벽수행하듯 지내던 시간을 담아 신작을 발표했다. 오랜 세월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기나긴 침묵 속에서 나온 작품은 어떤 것일까? 이러한 의문의 답은 개인전 오픈에 참석한 많은 사람의 면면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6년간의 공백, 그것은 긴 시간동안 몰입한 작업을 반추하는 숙성의 시간이자 새로운 도전이 담긴 창작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깊은 침묵 속에서 발견한 작은 생명이 발아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다해 개간한 창작의 경작지에 작은 홀씨 하나 심어 놓은 기분일 것이다. 홀씨는 다른 것과 합체하는 일 없이 단독으로 발아하여 새 개체가 된다고 한다. 씨줄과 날줄로 엮어 만든 직물이 아니라, 부드럽고 질긴 ‘사이잘삼’1 실이 가진 일차적인 물성만으로 선을 면으로 면을 다시 입체로 만들어가는 과정처럼, 차계남의 이번 신작은 선과 면이 2차원의 공간을 따라 3차원의 공간으로 확장되는 연속성을 가진다.
이를테면, 차계남은 물성 그 자체의 고유한 요소를 부각시킨다. 그래서 작가는 재료의 물성이 갖는 일차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씨줄과 날줄로 크로스(cross)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그의 작품이 어떤 상징이나 기호 혹은 은유가 아닌, 다만 물성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통한 작가적인 수행의 과정이 담겨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조용한 울림이다. 전시장에 걸린 대작들을 보면서 점이 선으로 그리고 선은 면으로 이어져 공간을 따라 무한히 확장되고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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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한 물성과 선(線 혹은 禪)
대부분의 사람은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면서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 행위는 명상과 참선 혹은 기도를 위한 일차적인 의식과도 같다. 그 이유는 눈에 보이는 세계에 현혹되지 않고, 고요하고 평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내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보기 위해 눈을 감는 것은 눈을 뜨고 보는 것과는 그 의미와 목표가 다르다. 그것은 낮과 밤만큼 다르거나 몸과 마음만큼의 차이를 가진다. 그 경계를 넘을 수 있는 것은 잠시나마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 바로 눈을 감고 나를 보는 순간일 것이다.
눈을 감고 깊은 심연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눈을 뜨고 보는 ‘나의 밖’에 있는 ‘나’가 아니라, ‘나의 안’에 있는 ‘나’일 것이다. ‘나의 안’을 보고자 면벽과도 같은 의식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눈을 감고 잠에 빠진 사람이 꿈을 꾸는 것과 구별된다. 눈을 감고 명상이나 기도를 하는 것은 삶의 깊이를 뚫고 들어가 내 ‘안’에 있는 ‘나’를 만나는 숭고한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다면, 눈을 뜨고서도 ‘나’를 보거나 또 나의 ‘밖’과도 만날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안과 밖을 연결하는 선(線)을 차계남은 사이잘삼이라는 끈, 즉 실을 겹치고 겹쳐 검은색의 입체조형에 투영한다. 그렇게 투영된 작가의 설치물은 하나의 존재, 즉 선에서 면이 되고 또 입체가 되는 과정을 통해 존재의 벽, 벽 너머의 존재가 되는 선(禪)일 것이다. 이렇듯  실(線) 따라 선(禪)에 가 닿을 때, 눈을 뜨고 벽 앞에서 보는 것은 벽 너머에 펼쳐있는 새로운 풍경, 즉 내 속에 있는 ‘나’가 투영된 또 다른 ‘나’를 보는 것이다.
차계남은 밧줄이나 노끈을 만드는 섬유재료로 ‘부드러운 조각(The Soft Sculpture)’을 만드는 것에 30년 동안 집중했다. 무엇보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물성이 주는 사이잘삼의 매력에 끌려 견고한 조각과도 같은 작품을 조형함으로써 섬유예술의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실(線), 그 실들이 겹치고 겹쳐지면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立體), 즉 구조적인 풍경은 하나의 장소에서 그만의 존재감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선입관을 버리고 세 곳의 전시를 두 번씩 보았다. 그렇게 하고서야 새롭게 발표한 작품이 이전의 작품과 어떻게 다르고 또 같은지를 작가로부터 듣고 싶어졌다. 내가 본 것과 작가가 의도한 동일성과 차이가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바쁜 작가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의 초기작은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배운 형염(型染)을 활용해 염색된 실과 실을 겹쳐 선명하고 강한 입체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선명하게 염색된 사이잘삼의 입방체로 한글을 활용한 자음조형이 탄생했다. 소재가 갖는 속성에 몰입하는 동안 색을 받아들이는 섬유의 특성을 실험하는 단계를 지나 이후, 작가는 모든 색을 포함하고 침묵하는 깊은 심연과도 같은 검은색의 섬유조각을 시도한다. 그의 섬유조각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빛을 품고 자신의 존재감을 가장 잘 드러낸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심오하고 지배력이 있고 과묵하며 또한 더할 바 없이 웅변적인 색을 소재에 입혀서 그 소재가 되살아나기를 기다린 것처럼, 검은색을 선택했다.”
흔히 섬유는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면서 직물로 태어난다. 그러나 차계남의 거대한 ‘섬유작업(The Fiber Work)’은 경사와 위사로 짠 직물이 아니라, 재료 자체가 갖는 물성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 무 (無)에 가까운 침묵하는 색, 어떤 의미나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아서 좋아한다는 검은색, 트레이드마크가 된 그녀의 검정색 패션은 일상 속에서도 집요하게 작품에 몰두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대구미술관 3전시실에는 밖으로 난 창이 있다. 이 창을 배경으로 10m에 가까운 차계남의 작품 <Untitled 5347-I>이 설치되어 있는데, 거대한 섬유조형물 사이사이로 풍경이 비쳐 자연과 인공의 대비, 그 대비가 빚어내는 미묘한 조화가 눈앞을 가득 채운다. 검정의 간결한 기둥, 그 사이를 곡선으로 연결해가는 구조적 형태는 마치 자연을 품은 그림 같기도 하고 빛의 그림자를 조형해 놓은 것처럼, 안과 밖이 하나로 연결되는 구조가 된다. 확실히 선(線)과 선(禪)이 조우하는 시간, 눈을 뜨고 보는 ‘나의 안’과 ‘나의 밖’이 만나는 장소가 되고 있다.
모든 색을 합치면 검은색이 된다. 하나이면서 동시에 모두를 담고 있는 색이 검정인 이유다. 빳빳하게 풀을 먹여 검은색으로 물들인 거대한 섬유조형 앞에서 관객은 눈을 뜨고도 검은 벽을 본다. 그 검은 벽 혹은 덩어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람과 공기가 흐르고 빛과 그림자가 피고 지며 살아 숨 쉰다. 이 심연과도 같은 검은 입체조형에서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서면  간결하게 정리된 사각의 입체와 곡선이 결합된 섬유조형물 사이, 작품이 놓인 장소와 공간이 그렇게 서로를 채우고 있다. 사각의 간결한 형태는 설치되는 장소에 따라 그 장소의 시간과 공간을 나누어 가지며 상호 침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정이 모든 색을 품은 것처럼, 침묵은 삶과 사랑 그리고 욕망과 증오마저 품는다. 깊은 골짜기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젖줄이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바다가 되듯이 검은빛은 낮과 밤, 사랑과 증오, 희망과 절망, 삶과 죽음을 모두 품고 심연의 바다처럼 침묵한다. 이렇듯 깊고 푸른 침묵과도 같은 색에 심취해 있던 작가는 한지를 길게 잘라 만든 한 가닥의 실(線)을 화면 가득 세로로 길게 붙여 한지 끈을 만들어 전면을 선으로 채운 신작을 선보이고 있다.
그 침묵의 시간 속에서 작가는 붓글씨를 쓰고 사군자를 치면서 한지가 먹을 받아들이고 품는 것을 보고 느낀다. 그렇게 쓰고 그린 수천 장의 한지를 1cm의 폭으로 잘라 한 가닥 한 가닥씩 꼬았다. 꼬아진 한지 가닥은 수백 수천의 글과 그림이 지나간 흔적을 품은 채 실  (線)이 된다.  인간에게는 말을 배우고 신으로부터는 침묵을 배우듯, 쓰고 그리는 행위를 통해 말과 침묵 사이에 흐르는 긴장, 그 속에서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알아간다. 누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고 했는가. 그것은 말이 곧 언어이고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책임질 수 없는 말보다 침묵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 속에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런 순간이 있기나 한 것일까? 아니면 항상 몸과 마음은 당연히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누구나 한 번씩 가져보는 질문이다. 이러한 의문에 작가는 깊은 침묵과도 같은 검정과 무위(無爲)의 흰색을 통해 몸과 마음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러한 시도는 먹으로 쓴 글과 그림이 그려진 한지가 실이 되면서 한지의 흰 부분과 검은 부분이 그만의 역할을 가지는 거대한 추상, 점과 선과 면이 우연과 필연 속에서 어우러지는 말과 침묵 사이, 빛과 그림자가 흐르는 풍경이 된다. 이 풍경은 점과 선 그리고 면의 연속성으로 이어져 여럿이 하나이고, 영원과 찰나가 교차하는 장소, 즉 선(線)과 선(禪)이 조우하는 시간일 것이다. ●

차계남은 195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효성여대 미술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 중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시립 예술대학 대학원 염색과를 졸업했다. 대구 카톨릭대학교 예술학과에서 미학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4년 일본 교토 마로니에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이후 국내외에서 30여 회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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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부터 8월 31일까지 대구미술관에서 열리는 <대구미술:기억의 풍경전>에 출품된 <무제 5347-1> 사이잘삼 200×9500×100cm 2000(오른쪽)과 <무제 5360-2> 한지에 먹 244×491×7cm 2013


1  Sisal hemp,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원산지인 용설란과의 여러해살이풀. 용설란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줄기가 짧고 가시가 없다. 사이잘삼이라는 이름은 멕시코 시살(Sisal)만에서 수출한 데서 유래. 열대와 아열대지방에서 많이 재배하고 건조에 강하기 때문에 다른 작물을 재배할 수 없는 곳에서도 잘 자라는 열대성 풀이라 질긴 잎이 있으며, 이 잎에서 섬유를 채취한다. 마닐라 마에 다음가는 마 원료인데 내수성이 떨어진다는 결점이 있다. 색은 흰색·노랑·담록색 등이 있으며 흰색의 것이 상질. 잎에서 채취한 섬유는 실내장식용 재료나, 어업·선박·포장 따위의 밧줄을 만드는 재료로 쓴다.《패션전문자료사전》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