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김남표
마치 앨리스가 토끼를 쫓아 ‘이상한 나라’로 입장하듯, 김남표는 동물의 형상을 캔버스 전면에 내세워 관객에게 동물의 시선을 따라가게 한다.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초현실적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서울 논현동에 새로생긴 전시공간 에이루트 (ARouTe)에서 개인전(4.22~5.22)이 열리고 있다. 손끝의 촉감으로 즉물적인 형상을 구현해내는 작가 김남표의 작업에 담긴 이야기를 살펴보자.
손끝 풍경
최은경 미술이론
김남표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집단 막’을 결성하여 5명의 작가와 함께 공동작품,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집단 막’은 “과연 일상적인 재료로 일상적인 장소에서 미술을 실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하여 실험적인 형태의 작업을 이끌어왔다. 예를 들어 〈재개발/재건축 프로젝트〉, 〈매봉터널 프로젝트〉, 〈비닐갤러리 프로젝트〉 등 이름만 들어도 한겨울의 찬바람이 살갗을 에는 듯 고생스러운 현장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작업이다. 김남표는 “젊은 시기의 대부분을 몇 명의 작가 동료와 함께했다. 일상적인 현장에 미술을 가지고 들어간 이때가 현재 개인 작업의 근간을 이룬 시기”라고 말한다.
김남표의 작품에는 초기(1990년대 중후반~)부터 캔버스에 여러 가지 재료를 ‘붙이는’ 형태의 모습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때로는 쇠 조각을 캔버스에 붙이고 때로는 캔버스 자체를 셰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로 변형시키기도 한다.
미완성작으로 여겨질 정도의 흰 여백이나 작품의 맥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물질을 오브제로서 캔버스에 부착하는 것은 회화의 본질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한 작가의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모더니즘의 화두와 관련된 것으로서 새로운 접근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작가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사회화 과정을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모더니즘적인 방식의 결과물로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접근 방식은 김남표 작업의 시작이자, 창작 환경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든 아니면 부정하고 극복하든 그것은 작가 자신의 몫이다.
김남표의 작업실은 언제나 캔버스 아래에 인조털이 놓여있고, 목탄, 콘테 등에서 나온 가루가 날리고 바닥에 내려앉는다. 캔버스 위에 무엇을 표현하든 항상 재료의 일부분이 캔버스 아래 수북이 쌓인다. 더욱이 캔버스에 표현된 재료 역시 불안정하게 정착된다. ‘집단 막’에서 현장 작업을 중시하던 것이 습관이 되어 요즘의 개인 작업에도 드러난다. 캔버스를 둘러싼 주변부가 이와 같은 현장성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집단 막’이 운영한 비닐갤러리에서 2005년 열린 김남표 개인 프로젝트 〈Stopping for a while전〉에서는 경제적 논리에 의해 유목민처럼 이주하는 현대인과 작가 자신의 모습을 재료의 불안정성과 표현의 순간성으로 드러냈다.
모든 표현을 붓 대신 손끝으로 직접 하다 보니 시커멓게 그으른 검은색 목탄자국과 붙이다 남은 인조털이 손끝에 늘 매달려 있다. 손끝의 인조털은 마치 붓 인 양 목탄을 캔버스에 옮기고 캔버스는 화가의 손끝을 반영한다. 즉, 김남표 작업에서 드러나는 현장성은 캔버스 주변뿐만 아니라 작가의 손끝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착되지 않는 재료를 선택하고,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비계획적이고 순간적인 표현은 김남표 작품 전반의 제목인 순간적 풍경(Instant Landscape)의 개념을 이끌어낸다. 다시 말해서 순간적 풍경의 불안정성, 순간성, 그리고 직접성은 모더니즘에 반응하는 김남표의 작업태도이다.
한편 그의 작품은 캔버스 전체를 인조털로 감싼 작업과 흰 캔버스에 오브제로서 인조털을 사용한 작업으로 나눠진다. 첫 번째, 전면 털을 사용한 작업은 인조털의 결을 이용한다. 바늘이나 포크 같은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 털을 누르고 세우기를 장시간 동안 반복하여 나타낸 음영으로 풍경을 표현한다. 고정된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완성된 작업이라 하더라도 어떤 물리적인 압력이 가해지면 이미지는 사라진다. 어릴 때 담요의 결을 이용하여 무엇을 그리고 지우 던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두 번째, 오브제로서 인조털을 사용한 작업은 우선 털을 임의로 캔버스에 부착한 후에 연상되는 이미지를 그려 나가거나 이미지를 그린 후에 인조털을 부착한다. 작은 점에서 무작위로 시작된 화면은 서서히 연결되고 그 결과 작품이 스스로 풍경이라는 구조 안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는 ‘의식의 흐름(flow of consciousness)’이라는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과도 연결될 수 있는데, 의식의 흐름을 차용한 기법은 구조적이기보다는 즉흥성을 더 강조한다. 지속성은 결여되지만 동시에 다양하면서도 복잡할 수 있는 수많은 아이디어와 마주할 기회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커피 잔에 커피가 아닌 폭포수가 떨어지고, 신발 안에 나무나 동물이 존재하는 공간이 나타남으로써 사물의 고유한 기능적 속성에서 벗어나 거대한 초현실적 풍경을 제공한다.
사물의 이상한 조합 –커피 잔에 신발을 올려놓는 비일상적인 상태 –을 기이한 사건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아름다운 풍경의 미적 사건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사물의 형태가 가지고 있는 기능적인 요소를 배제한 체, 하나의 미적 형태와 공간으로 인식했을 때 그 사물의 진정한 사물다움은 자유로운 상상의 공간 역할을 하며 보는 이를 몰입하게 한다. 사물다움이란 사물의 기능성과 용도에 의한 인식이 아니라, 그의 존재로부터 출발한다는 본질적인 깨달음이다.
또한 김남표 작품에는 동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 동물들은 소재적 측면보다는 작가에게 예술적 감흥을 일으키는 재료로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동물의 이미지를 ‘그린다’기보다는 동물을 손끝으로 ‘만지는’듯한 행위를 통해 작품을 구상하고 연상하기 때문이다. 손끝에 닿는 재료의 촉각을 통해 작품을 구상하고, 구상된 계획을 다시 손끝에서 실행한다.
화가가 무엇을 그릴 지를 결정하고 그에 맞는 방식의 기법과 재료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논리라면, 김남표는 ‘무엇을 만지고 무엇을 느꼈을 때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를 결정하는 독특한 과정을 취한다. 이를 통해 갇혀 있는 동물들의 함성을 손끝으로 들려주고, 일상의 재료 안에 갇혀 있는 사물다움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는 것이다. 손끝 풍경은 이러한 이야기가 존재하는 현장이다. ●
김 남 표 Kim Nampyo
1970년 태어났다. 서울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9년 웅전갤러리에서 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서울 암스테르담 뉴욕 등지에서 여러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0년 ‘집단 막’을 결성해 2004년까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5월 24일까지 갤러리 퍼플에서 〈TENT(김남표+윤두진)〉 2인전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