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김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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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 Break oneself > 182×102cm(각) 1988, < The spirit age・nsa1994607 > 180×88cm(각) 1994

사진은 재현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현실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며 현대미술의 중요한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김대수는 1980년대에 회화, 판화, 설치 등 타 매체를 적극 활용해 사진의 경계를 해체하는 작업을 선보여 한국 사진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었다. 6월 6일부터 8월 19일까지 고은컨템포러리사진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The New Wave in Korean Photography 1988-1998 DAE SOO KIM>을 통해 다양한 사진적 실험을 통해 내면 세계를 표현한 김대수의 초기 작업을 다시 만날 수 있다.

그 때를 아시나요?

최건수 사진비평

나보다 년식이 십년쯤 앞선 사람들은 영화 ‘국제 시장’을 보았다. 그리고 보신 분들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화의 이미지에 몸을 맡겼다. 오래 묵은 기억 속에 가라앉아 있는 전쟁과 가난이라는 유산은 그리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관객의 눈물로 스스로 증명했다.나 같은 7080 초노는 영화 ‘세시봉’을 선택했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명동 맥주집이나 하드 락카페를 전전했던 세대들이 선택한 영화들이다. 주말이면 통기타 하나 달랑 매고 교외선 기차에 의탁하여 일영이나 송추로 향했다. 거기서 봉두난발 장발을 휘날리며 미친 듯 고고와 트위스트를 췄다. 그 시절의 낭만이고 모던의 몸짓이었다.내가 낭만과 모던에 투신했을 때, 김대수는 미국으로 유학(1981)을 했고, 내가 1980년 내내 군사정권에 맞선 데모대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며 반독재 구호를 외칠 때, 홀연히 귀국(1987)하여 대학 훈장(1988)이 됐다. 그리고 어느 날 한국 사진의 ‘새로운 물결’의 한 아이콘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게 1988년 워커힐 미술관에서 열린 <사진 새 시좌전>이다. 이 전시는 사진가 구본창이 기획했는데, 결과적으로 기존의 한국 사진을 근본부터 뒤흔들 정도로 파괴력이 컸다. 당시 이 전시장을 찾은 내 입장도 그랬다. ‘이것도 사진인가?’라는 의문으로 시작해서, 대체 유학을 가면 이런 사진을 배우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이제까지 보고 해온 사진을 전면적으로 점검해 볼 이유가 생긴 것이다. 여하튼 이 전시회에 참여했던 사진가들(구본창, 김대수, 이규철, 이주용, 임영균, 최광호, 하봉호, 한옥란)은 이후 승승장구하고 한국사진의 전위대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은 곱씹어 볼 일이다.(이규철은 작고)그 이후, <11월 한국사진의 수평전(1991/1992/1994)> 은 이 전시의 확대 재생산 성격이 더 강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1988년부터 1994년까지의 한국 사진에 밀려 온 새 물결은 무엇일까? 그게 ‘바람 찬 흥남부두’가 2015년에 ‘국제 시장’으로 환유되듯이 전통적 의미의 사진이라는 도그마에 환몰 되었던 족쇄가 비로소 풀리고 그것들을 일시에 뽕짝 수준으로 밀어낸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김대수의 초기작 같은 이미지에 충격을 받고 열광하는 사진가가 있다면 그 또한 아마 그 의식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국제 시장’ 언저리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 증거이다. 오늘날은 지지고 볶는 것이 얼마나 현란한지. 또한 얼마나 빠르게 바뀌는지. 그 수준에서 다시 김대수의 초기 사진을 대하니, 어쩌랴 그만 영화 ‘세시봉’이 생각나고, 그의 사진을 ‘세시봉’과 등가의 위치로 자리매김하고 싶은 것이다.‘그 때를 모르시는 분’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대체 무엇이 어쨌다는 것이야? 인화지 위에 오일 페인팅을 하고 그것을 다시 긁어내는 것이 뭐 그리 신기하다고? 동판 위에 사진을 인화하고 부식하여 보여주면 사진이 아니라고? 미술 판에서 성공 못하고 대접 받지 못하니까 사진판에 기웃 거린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재현과 복제라는 미덕에 기댄 ‘바람찬 흥남부두’ 세대가 틀림없다.조금만 관심 기우려 세계 사진의 흐름을 살펴보면 변화는 당연한 것이다. 이런 사진의 경향은 소위 만드는(make)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다. 기록과 재현 사진 반대 축에 진영에 속한다. 사진 초기부터 끊임없이 타진되었고 1980년대에 들어서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 되었다. 이 시기는 김대수를 비롯한 유학 1세대들의 유학 시기와 겹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변화 현장에서 그 흐름에 합류했던 것이다. ‘사진은 사진이다.’ 라는 구시대를 지나 ‘사진이 예술이 되고 이미지’가 되는 새 시대에 호응했다. 물론 만드는 사진도 표현 방법에 따라 구성 사진(Fabricated photography), 연출사진(staged photography), 손질된(Manipulated photography), 창조사진(Invention photography), 계획사진(set-up photography) 등, 다양한 이름을 얻게 된다. 변화는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순수한 모던사진은 지루해졌고, ‘라이프’ 혹은 ‘룩’같은 화보잡지의 폐간과 맞물려 다큐멘터리 사진은 용도 폐기 될 위험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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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생 이후・nba1990103 >(오른쪽) Archival pigment print 120×150cm 1990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한 사진적 실험
이런 환경 변화에서 스스로 물어 볼 수밖에 없었던 질문이 ‘사진이 사진이어야 하는가?’일 것이고, 혼돈 속에서 사진가들은 스스로의 작품을 통해서 답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사진은 기계적 재현의 한계를 극복하고 예술적 표현의 도구로서 점검 받게 되었다. 사진의 역사 내내 꿈꾸어 왔던 세계가 실현 가능해 진 것이다. 기록의 용도로부터 벗어나 적극적인 표현 도구로 그 지평이 확장 된 것이다.김대수의 초기 사진은 이 지점에서 만날 수 있다. 1988년 귀국 후 첫 개인전이었던 <창조 그리고…>는 지금은 없어진 갤러리 한에서 열렸는데, 그 때 나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을 기억한다. “표현 방법이 새롭다. 그러나 더 궁금한 것은 이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떻게 읽혀지기를 원하는가?” 그는 말했다. “자유롭게…, 아이들은 모두 부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모 생각대로 크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외적 요인 속에서 스스로 한 독립 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작품은 작가가 만들었으나, 작품의 행로는 작품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뜻으로 들었다. 이미지가 품은 다층적 발화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다. 귀국 후 초기 십년간은 세계 사진의 흐름 속에 있었다. <빛으로 탐구>(1983) 와 <창조 그리고…>(1985), <태초에>(1990), <탄생 이후>(1990), <영의 시대>(1994)> 그리고 <지혜의 땅>(1996)이 그것이다.이것들의 주제는 ‘생명’ 혹은 ‘죽음’ ‘영(靈)’ 같은 인간의 기본적 문제와 그가 몸담은 기독교적 관심에 천착하고 있었던 까닭에 묵직했다. 그는 이런 이미지를 만드는데, 찍는다는 사진적 행위 만에 의존하지 않았다. 물감을 바르고, 수없이 많은 선을 그어보고, 바른 물감을 걷어내는 예술 행위들의 흔적들을 작품 속에 고스란히 남길 수 있었다. 순간을 잡아내는 사진가의 모습이 아니고, 스스로 해야 할 예술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위해 몸의 예술을 사진에 녹여내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기존의 사진이 미치지 못하는 지점을 언급한다는 측면에서 신선했다.<사진 새 시좌전> 이후 25년이 지났다. 오늘 날의 한국 사진은 거침이 없다. 좌고우면하면서 눈치 보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 씨앗들은 뿌려 준 것이 세시봉 시대의 모던 사진가들의 형식실험이 밑거름이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그 시절의 대표아이콘인 김대수의 작품을 다시 보게 되어서 반갑고 즐거운 것이다. ●

김 대 수 Kim Daesoo
1955년 태어났다. 홍익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미국 파슨스 디자인학교 사진학과에서 학사, 프랫 인스티튜트대학원 사진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1983년 뉴욕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1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홍익대 미술대학원에서 사진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