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염성순
미로화된 욕망의 회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동하는 것들. 그러나 미묘하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의 차이.이는 작가 염성순의 작품에 보이는 세계이다. 최근 갤러리 담에서 열린 작가의 전시 〈털〉(7.9~22)은 털끝만큼의 미세한 차이의 경계를 넘는 작가만의 방법을 보여준다. 여성과 남성의 몸을 통해 주체를 탐구하며 반복되는 경계넘기를 시도하는 작가를 지금 만나보자.
이선영 미술비평
염성순의 최근 전시 <털-심층의 표면에서 생긴 일>은 본질과 현상, 내부와 외부, 정신과 물질 등으로 구별되지 않는 하나의 실재로서의 몸과 거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표현한다. 복잡 미묘한 과정에서 생성된 풍부한 색감, 그것에 실린 유동적이고 유기체적인 형태는 염성순 그림의 특징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신체의 일부인 ‘털(hair)’을 특정하고, 남성과 여성의 성기관이 등장하는 등 보다 구체적인 접근을 꾀한다. 붓과 자신을 일체화한 삶 이래, 모호하고 추상적이기보다는 더 분명하고 특수한 양상을 띠는 작품에서 진정한 진보를 발견한다. 그것은 선택된 일부에도 전체를 담을 수 있는 역량이며, 반복 속에 차이를 주는 방식이다. 어떤 경계를 뚫고 나오는 털은 유연하면서도 강력하다. 털은 때가 되어 경계를 파열하는 필연적인 힘이지만, 그 목적과 방향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붓의 털끝에서 나오는 이 산물은 생명은 물론 작업의 기제를 알려준다. 작가는 생명을 이루는 이런저런 물질에서 생명체로의 도약, 작업을 이루는 이런저런 요소에서 작품으로의 도약을 촉구하고 그것을 기다린다. 경계란 곧장 경계 넘기를 예기한다. 경계 넘기가 가능한 힘은 말 그대로 털끝만큼의 미세한 차이일 수 있다. 필생의 업으로 그림 그리기를 선택한 이에게도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매순간의 도전과 그 도전의 연속이 바로 작품이다.
작업이란 늘상 작업자를 어떤 경계까지 몰아붙이는 흥미진진하고도 위험한 게임임을 염두에 둘 때, 털은 피상적인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포괄하고 내포하는 바는 풍부하다. 이 전시에서 털은 인간의 특징인 머리털을 제외한 체모로, 인간보다 더 근저에 있는 동물성과 닿아있다. 작품〈 털〉은 방향을 달리하면 대지 안팎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과정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엉덩이 라인은 둔덕이 되고 털은 식물이 되며 그 바깥은 노을 지는 하늘처럼 말이다. 몸은 화면 가득 펼쳐진 풍경(bodyscape)이 된다. 움푹 패이고 텅 빈 부분이 있는 등, 밀도와 강도는 부분마다 다르다. 동식물을 구별할 수 없는 형태에 생기다만 것들, 막 생긴 것들, 밖으로 터져 나가는 것들이 공존하며, 이러한 시간성에 의해 정지된 화면은 잠재적인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작품〈 털이 좋아〉는 알 속의 상황인데 이미 유동체를 넘어서 털로 뒤덮인 단계에 이르렀지만, 바깥을 두려워하는 표정과 몸짓이 역력하다. 알을 깨고 나갈 두려움 때문에 모체 속의 아이는 이미 폭삭 늙어버렸다. 〈 털이 좋아〉와 같은 크기의 짝으로 제작된 〈 알에서 나오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결국 바깥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삶은 냉혹하게 시작된다. 〈 알에서 나오다〉는 모호한 형상에 의해 시간과 그에 따른 인과적 순서가 교란된다.
엉덩이로 추정되는 선 사이의 형상은 태아보다는 남근을 닮았다. 화면 왼쪽 아래에 아이 머리를 한 형상이 육체의 심연 속에서 바깥을 향해 떠있으며, 나오는 중인지 들어가는 중인지 불확실한 상황이 그런 추정을 가능케 한다. 안과 밖의 경계가 느슨한 채 출렁거리는 모체는 점점이 뿌려진 색채의 입자와 더불어 생명의 율동으로 충전된다. 성(性)은 모호하지만, 비교적 명확한 해부학적 형태 위에 뭉침이나 확산 같은 힘의 분포가 두드러진 작품〈 몸〉과〈 엉덩이〉는 물질과 에너지의 상호교환이 활발하다. 뭉쳐진 피톨이나 예민한 신경망의 밀집은 심신을 동시에 활성화한다. 작품〈 끓는 남자〉, 〈 통증〉, 〈 우는 남자〉, 〈 쓸쓸한 남자〉에는 남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털이 남성에게 좀 더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털 전>은 여성의 관점으로 본 (남성적) 욕망의 모습이 상당 부분 차지한다. 여기에서 남성의 곧추 선 욕망에 가득한 고독과 고통은 숨길 수 없다. 그림 속의 남근은 지배적 질서에 군림하는 위풍당당한 기표(Phallus)로서의 위상을 잃었다. 거기에는 거듭 좌절될 수밖에 없는 출구 없는 욕망의 드라마가 있을 뿐이다. 〈 숲〉과〈 꽃숲〉으로 나타나는 여성화된 풍경은 하나의 성 기관에 밀집된 욕망이 아니라, 다형적(polymorpho usly)이다. 다형적 성은 성도착자의 성이기보다는 유아에게 보편적이며 여성적인 성욕으로 알려져 있다.
타자가 된 주체
작품〈 여성 속 남자〉는 거세된 존재로서 부재나 결핍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양성을 포괄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이며, 같은 크기의 작품〈 초록색 털〉은 모체 속 개체를 초록빛 자연과 일치시킨다. 모든 욕망이 충족되는 전능한 모체 속에서 바깥을 두려워하는 작품〈 털이 좋아〉는 털 자체는 명확히 보이지 않지만 부드러운 보호막으로서의 모체를 연상시킨다. 이 모태적 시공 속에는 생멸하는 존재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자궁으로부터 집까지 여성의 영역은 육체적, 물질적,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장소이다. 그러나 모성천국에 대한 생각은 일방적일 수 있다. 품고 보살펴야 하는 존재는 고달프다. 여성은 모성을 단지 아이를 안고 있는 무성(無性)의 천사 같은 존재로만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권력관계로 점철된 인간사의 사회적 모순을 편리하게 해결하는 방식 중의 하나가 한쪽 성에 자연적 조화와 통일을 기대하면서 영원한 휴식처를 갈구하는 것이다. 비역사적 타자로서의 그녀는 선천적으로 갖추어야 할 미덕이 기대되지만, 이러한 숭고한 가치는 곧잘 아전인수적으로 왜곡된다. 여성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인류를 낳는 존재이기에 굳이 예술이나 과학을 비롯한 창조 활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편협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꼭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이에게 적반하장으로 가해지는 불리한 조건은 여성, 예술가, 노동자의 존재에서 선명하다.
그들은 다수이면서도 소수자의 위치에 있다. 다수적 소수자임에도 불구하고 창조하고 생산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아름답다기보다는 기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주체 내부의 타자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여전히 성(욕)을 남성 중심적으로 이해했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거세된 듯 보이는 여성의 성 기관, 나아가 여성의 공간으로 간주된 집을 기괴함(unheimliche)의 원천으로 여겼다. (여성적)기괴함은 섬뜩하면서도 매력적이라는 양가감정을 일으킨다. 가장 일상적인 것 속에서 발견되는 비일상적인 감정은 경계 위에 있는 것이며, 금기와 위반, 정상과 이상, 성스러움과 혐오스러움 같은 상반되는 가치를 넘나든다. 그것은 크리스테바가 개념화한 ‘탈중심화된 주체(decentered subject)’와 ‘이행 대상(transi- tional object)’과 밀접하다. 경계를 뚫고 흘러내리는 것들은 육체적 차원에서든 심리적 차원에서든 제어되어야 할 금기지만, 동시에 카타르시스와 희열을 준다. 한계를 뚫고 터져 나오는 체액들은 오염과 정화를 동시에 야기한다. 가로질러지기 위해서만 설정된 경계 위에서 털은 다양한 은유로 확장된다. ‘어브젝션(abjection)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를 가진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힘》에 의하면, 비체(abjection, 卑體)는 경계상에 있는 것, 경계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비체는 애매모호하며, 어중간하며, 복합적이다.
비체는 본질적인 특성이 아니라, 경계와의 관계이며 경계지역 밖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그것은 구분 자체를 위협함으로써 정체성을 교란시킨다. 원형적 비체의 체험은 출생, 즉 염성순의 작품에도 선명한 출산의 이미지이다. 인간은 배설물 사이에서 태어난다. 배설물은 깨끗함과 더러움을 구별하는 질서에 의해 분류되고 관리되지만, 여전히 위협적이다. 가령 모성적 용기(容器)는 개체를 다시 빨아들일 수도 있는 두려운 것이다. 주체화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독립되지 못하면 비체에 삼켜진다. 염성순의 작품〈 여성 속의 남자〉에도 욕망과 삼키는 것의 관계가 나타난다. 탄생과 양육과 보호를 암시하는 자궁은 동시에 탐욕스러운 육식성 질(carnivorous vagina)이기도 하다. 욕망과 죽음은 한 몸의 두 얼굴일 것이다. 작품〈 알에서 나오다〉에서 몸의 실루엣과 체내의 상황이 공존하는데, 여기에는 어머니와의 태곳적 관계를 떠오르게 하는 태반의 이미지가 발견된다. 제 몸에 타자를 품을 수 있도록 하는 이 기관은 창조활동에 대한 오랜 비유의 터전이었다. 모체로부터의 분리는 육체적인 것을 넘어 정신적(상징적) 차원으로 이어진다.
모태로부터의 분리와 부성적 상징의 일체화로 압축될 수 있는 개체화(주체화) 과정은 소외의 연속이며 험난한 과정이다. 막 나온 태아보다는 남근처럼 보이는 모호한 형상은 나온 곳으로 들어가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것은 (성적) 욕망과 죽음의 관계를 떠오르게 한다. 예술적 창조 역시 늘 가까이에 있는 죽음과 더불어 채울 수 없는 욕망을 갈구하는 행위일 것이다. 염성순의 작품에 줄곧 나타나는 부글거리고 뭉글거리며 생성 소멸하는 유동적 형태는 경계를 넘기 위해서만 경계를 설정하며, ‘털’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직선적 요소는 2008년에 이상과 서정주의 시(詩)세계를 주제로 한 개인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가 이번 전시에서도〈 여성 속 남자〉와〈 초록색 털〉에서 발견되지만, 여전히 곡선적 요소가 압도적이다. 곡선적 요소는 계속 출렁거리면서 무엇이 되든 자연발생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염성순을 뛰어난 색채화가라고 규정해도 될 법한 이름붙일 수 없는 색채의 구사 역시 같은 맥락이다. 작업 과정에서의 이러한 예측불가성은 환희이자 고통이다. 양자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 예술은 자신으로부터 나왔음에도 낯설다. 작품이란 동일자의 복제도 분신도 아니다. 그것은 타자이다.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자신 속에 타자를 품는 모성처럼 그렇게 타자와 조우하는 것이다. 무엇이 생겨날지 가늠할 수 없는 화폭은 타자를 품고 있는 모체에 근접한다.
이성적이며 합리적이고 자유의지를 가진 자율적 개인이라는 인본주의적 이상만큼 염성순의 작품과 멀리 떨어진 것은 없다. 몸 자체가 동일자적 이성에 의해 타자로 간주되어왔다. 몸은 계층적으로 잘 질서 지워진 조직화된 유기체가 아니다. 그것은 ‘속도와 강도로서의 표면’, 즉 ‘기관 없는 몸’(들뢰즈와 가타리)이다. 염성순의 작품은 발생하는 배아의 이미지로 가득한데, 기관 없는 몸의 대표적인 예는 기능으로 성충이 되기 이전의 알(卵)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 천개의 고원》에서 인간을 가장 직접적으로 구속하는 세 개의 지층으로 유기체, 의미생성, 주체화를 든다. 저자들에 의하면 기관 없는 몸으로 유기체를 해체하는 것은 탈영토화를 향해 몸체를 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몸과 예술은 ‘욕망들의 연결접속, 흐름들의 접합접속, 강렬함들의 연속체’로서 진정한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물론 이번 전시는 그 어느때보다도 기관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비율과 맥락과 의미가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몸체에 충전된 강렬함은 계층화된 모든 형식을 변형시킨다. 유동적인 색채와 형태는 바로 끝없이 변신 중인 주체를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패임이나 구멍, 흩뿌려짐 등으로 나타난 수수께끼 같은 공간 역시 주체 내부의 거대한 미지의 공간들을 암시한다. 이곳에 타자가 또는 타자와 접속할 수 있는 장이다. 예술이란 결코 변할 수 없는 자신만의 진실을 표현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없이는 결코 고정시킬 수 없는 끝없는 변화의 흐름을 순간적이나마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
염성순은 1961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조선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베르사유 미대에서 수학했다. 1994년 경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을 시작으로 10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고 일민미술관, 제주항 여객터미널,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