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이수경
도자기 파편을 이어 붙여 작업하는 이수경의 개인전 <이수경, 내가 너였을 때>가 2월 10일부터 5월 17일까지 대구미술관에서 열린다. ‘주체에 대한 부정’을 키워드로 하는 이수경의 작업세계는 변화무쌍하고 종잡을 수 없는 유동성이 특징이다. 회화, 영상설치, 드로잉 등 250여 점의 작업을 통해 작가가 펼치는 다채로운 변주를 살펴보자.
임시적인 주체와 전생 퇴행
황인 미술비평
이수경의 이번 대구미술관 전시회는 개인전이 아닌 그룹전을 보는 듯하다. 한 작가가 짧은 주기에 변덕스러울 정도로 급격한 변신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작업과 작풍을 보여주는 경우는 이수경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다.
작품세계를 분석할 때 맨 먼저 동원되는 것이 환원작업이다. 그리하여 추출된 요체에서 작가의 특징적 성격을 도출한다. 이를 작가적 주체의 한 양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은 이수경의 작품세계 앞에서는 요령부득이 되고 만다.
모더니즘 이후, 대부분의 작업 행위는 작가 자신의 주체에 대한 확신을 암묵적인 전제로 하고 출발한다. 변화무쌍한 대상을 작가와 같은 장소성에서 현상적으로 다루거나, 대상을 장소성을 초월한 절대적인 균질공간으로 월경시켜 다루더라도 그 이면에는 확고한 주체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의 인정에는 강약의 차이가 없다. 그러한 주체가 있어 이와 대립항인 객체 사이의 역학관계를 부여하여 이 둘 사이의 긴장감을 유도한 건 근대주의의 성과다. 그런데 이러한 성과를 부정하고 주체 그 자체에 대해 의심을 내세우는 미술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이수경의 작업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변화와 굴곡이 많은 듯하지만 굳이 첫 개인전 <나와의 결혼>에서부터 이번 전시 <내가 너였을 때>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작업을 한마디의 키워드로 정의하자면 ‘주체에 대한 부정’이라 하겠다.
주체subject 란 ‘아래根底 에 놓인 것’이란 뜻이다. 시간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려는 현상을 담고 있으되 자신은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공간을 확보한 그릇이 주체다. 그런 만큼 주체는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 이것이 미술가의 작업에는 일관된 작풍으로 암시된다. 작품이 시종일관 일관성을 지닐수록 작가의 주체는 강화된다.
반대로 일관성을 상실한 주체, 변덕스럽게 변신을 거듭하는 주체는 적어도 근대주의에서는 병리적으로 취급된다. 주체와 주어에 대한 강박을 거부하고 술어적 세계를 더 강조했던 모노파에서조차 그 이면을 보면 작가는 작품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주체의 일관성을 유지하려 한다(이들 중 작풍의 변덕스러운 변신을 통해 주체마저 거부한 작가는 스가 기시오가 유일하다).
이수경은 초기작업 <나와의 결혼>(1992)에서 모더니즘 이후 확고하게 자리 잡은 주체의 지위에 반역을 도모했다. 나와 그의 결혼이 그러하듯 주체와 객체라는 대립항으로 분리된 상태가 결합하는 방식이 아닌, 임시적인 나라는 허술한 주체와 또 다른 임시적인 나라는 가상의 객체가 뒤엉켜 합체合體(결혼)하는 경지의 작업이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아메바처럼 자웅동체이던 것이 포유류처럼 자웅이 분리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화의 일반적인 방식이다. 자웅을 공간적으로 대응하는 개념으로 분리하여 이를 다시 구조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 결혼의 방식이다. 그러나 공간화를 거부하는 퇴행적인 자웅은 분리와 결합의 과정을 거절한다. 이수경의 작업은 초기부터 이런 낌새를 보였다.
신체적 자아, 심리적 자아 과정을 넘어서서 칸트가 언급한 대로 ‘선험적 의식’을 가진 자아는 본질적인 그릇으로서의 주체가 되어 객체와 완벽하게 대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간에 의해 수시로 변화하는 주체가 아니라 공간성을 확보한 주체로서 정의되는 과정은 근대주의의 특징인 시간과 장소의 공간화와 맥을 같이한다. 그리하여 주체와 대상Gegenstand, 마주보고 섬 사이의 위치성과 선형적인 방향성이 분명해졌다. 여기서 대상이라는 3인칭으로 나아가느냐 주체의 1인칭으로 남느냐는 작가 개인의 몫이고 또 개성의 몫이기도 하다. 근대주의 미술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성립하려 한다.
자기동의성의 상실
그런데 이수경은 근대주의의 토대와 기반을 계속 부정하려 한다. 퇴행이라고 할 수도 있고 병리라 할 수도 있다. 한편으론 주체의 강화에 대한 신념으로 가득 찬 근대주의에 대한 조롱일 수도, 새로운 시대정신을 열려는 돌파구이자 가능성일 수도 있다.
<파라다이스 호르몬전>(2008) 이후 나는 그녀의 작업을 1인칭과 3인칭의 관점에서 논한 적이 있다. 영기문靈氣文 을 연상케 하는 <불꽃> 연작을 1인칭 작업으로 그리고 그녀의 대표작처럼 알려진 <번역된 도자기> 연작을 3인칭 작업으로 분리해 보았다.
이번 전시의 큰 타이틀은 ‘내가 너였을 때’이다. 앞서 열거한 작업들 외에 <눈물>, <달의 이면>, <불꽃변주>, <이동식 사원>, <가장 멋진 조각상>, <순간이동연습용 그림>, <매일 드로잉>, <환상의 섬>, <휘황찬란 교방춤> 등 그동안 해온 다양한 시리즈의 작업이 대거 동원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이수경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업은 처음으로 선보이는 <전생퇴행그림> 연작이다.
작가는 최면을 통해 전생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전생을 그림으로써 여기서 종잡을 수 없는 여러 개의 주체가 나타난다. 주체는 자기동일성identity 을 가진 하나여야 하고 일관성을 가져야 하며 불변이어야 하는 것이 근대주의의 입장이다. 그런데 최면을 걸 때마다 다른 주체가 나타난다. 여자였다가 남자였다가, 높은 신분이었다가 비천한 신분으로. 노루가 되었다가 곰이 되었다가 혹은 무생물이 되기도 한다.
전생前生 은 술어적述語的 상태가 주체를 가장하고 드러난 모습이다. 술어적 상태가 주체를 대체하거나 압도할 때 본질적인 그릇으로서 완강한solid 근대주의적 주체는 유동적인liquid 분자 상태로 와해되고 만다. 이런 유동성 속에서는 나는 너가 될 수 있고 너는 내가 될 수 있다. 나라는 주체의 그릇이 깨어지고 그 조각마저 완전히 마모돼버려 허공만이 남은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분자화된 나와 너를 다 안고 있는 광대무변의 우주universe 라는 그릇이다. 우주에는 주체와 객체, 1인칭과 3인칭 혹은 2인칭 사이의 구별과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하나의 통uni-verse 으로 함께 존재할 뿐이다. 이는 나라는 주체를 우주의 근원적인 질료로 환원한 종교적인 경지다. 주체의 무한한 확장을 미덕으로 삼은 근대주의와는 반대되는 입장이다.
이수경은 ‘내가 너였을 때’라고 타이틀을 붙였다. 종교의 궁극적인 경지에서는 ‘너’를 나의 은유적인 의미에서의 거울로 여긴다. 너라고 하는 2인칭은 사실은 또 다른 모습을 한 나라고 하는 1인칭일 뿐이다.
여기서 너는 하나의 너가 아닌 무수한 숫자의 너다. 변화무쌍한 빛의 도움을 받아 거울을 통해 드러난 주체는 현상적이며 또한 술어적이다. 거울 속에서 현상적이며 술어적으로 드러난 무수한 너를 나로 받아들일 때 나라는 주체는 근대주의가 구축하려는 자기동일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자기동일성으로서의 주체는 하나여야 하는데 복수의 주체를 받아들이게 되니 전생이 성립한다. 복수의 주체란 다름아닌 주체의 여러 양상 즉 술어적 양태인 것이다. 전생이란 게 술어적 상태가 주체를 가장하여 드러난 모습 혹은 주어와 술어가 역전된 상태라고 한다면 그 전생은 나를 비추는 무수한 거울과 같은 너일 수가 있다. 그리하여 ‘내가 너였을 때’라는 타이틀은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녀가 ‘전생퇴행그림’을 그리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
이 수 경 Yee Sookyung
이수경은 1963년 태어났다.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한국을 비롯, 타이완, 브라질, 벨기에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국내외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지의 레지던스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