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이은우
작가 이은우의 작업은 사물의 기능과 형태나 미술과 디자인의 경계 측면에서 이야기된다. 그는 사물에 부여된 관념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사물이 다른 사물과 맺는 관계에 주목한다. 그 관계항 속에서 물건을 변형시키면서 일반적인 물건 새로운 의미와 일상의 모습을 교차시켜 나간다. 새로운 세대의 물건 고안자, 이은우를 만나본다.
물건들의 역사
이병희 독립큐레이터
여기 새로 등장한 물건들이 있다. 우선 이들은 미술이라는 시스템에 의해 등록됐다. 한 물건의 이름은 ‘사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물건은 비록 ‘사각’이라고 하지만, 사각에 고정되지 않으므로, 차라리 사각의 파생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푸른 사각형>, 2014) 또 다른 물건은 원통에서 고안됐지만, ‘반복과 접합 그리고 배치’라는 부제를 붙이고 싶을 정도로, 여기서 ‘원’이라는 것은 하나의 참조, 혹은 클리셰에 불과하다(〈녹색 원〉, 2014). 재현을 거부하는 듯한 순수-노란색 원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일렬로 나열된 스테인리스 스틸 파이프의 좌측 중앙에 배치되자 그 재현의 거부라는 추상적 역할은 사라지고, 이 배열이 야기하는 속도감과 시각적 균질감을 방해, 혹은 차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물건 3〉, 2014). 기존 형태를 참조하는 작업은 또 있다. 수평 균일하게 나열된 철판들은 분해와 조립이라는 반복기능 자체에만 몰두하는 모듈로서 존재할 것 같지만, 이 기능을 방해하는 오렌지 색 원추 때문에 이것은 아마도 잠시 한때, 영원히 버티는 조각으로 존재할까를 고민했던 것 같다(〈물건 2〉, 2014). 이런 반복 배열은 당연히 어떤 속도감을 야기하고, 나아가 물리학적 법칙에 의해서, 당연히 시간성을 환기시킨다. 대부분 3차원에 존재해야 하는 이 물건들은 반복 배열, 분해 조립 운동을 하는 시공간-참조물이다.
재현이냐 아니냐, 쓸모가 있냐, 순수 미적 대상이냐 등의 이분법적 경계를 깨뜨리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전략으로 불린 ‘차용’ 혹은 ‘키치’였다. 물론, 이 모더니즘의 아우세대격 물건들은 이런 포스트-행위로써 선배세대의 시도들을 맥락에 ‘등록’시키는 아주 충실한 기호놀이를 했다. 그 기호 놀이가 맥이 빠진 것은 ‘상품’으로서의 물건들이 여기저기에서 마구 쏟아져 나오고, 전지구적으로 유통되고, 소비되고, 향유되면서부터다. 대다수의 물건은 현재, 등록과 폐기를 쉴 새 없이 반복하는 소모전에 처해 있다.
현대 물건들의 짧은 역사를 생각해보자. 신자유주의 시대의 물건들은 1980년대경 전지구적 대량생산의 메커니즘으로 본격 진입했다. 전지구적 대형마트 체인점들에서도 생산라인과 마찬가지로, 넘쳐나는 이 갖가지 대량생산 물건들을 배열하고 판매하기 위하여 규모 있는 배열과 수납, 저장, 배달과 조립 같은 일련의 자동적인 시스템들을 고안해냈다. 소비자의 삶의 패턴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런 일률성, 자동성은 일정 정도 폭력적이다. 즉, 전지구적 경쟁에서 엘리트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효율적으로 일들을 해치워야 하며 여기에서 물건들은 효율성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쓸모없는 물건이 된다. 아니 나아가 나쁜 물건이 된다. 왜냐면 효율적이지 않고, 일을 방해하며, 심지어 사색하게 하므로.
다른 물건들이 있다. 소위 디자인용품, 수공예품, 예술작품 등과 같은 것이다. 이런 물건들은 일종의 저작권물이다. 전지구적 대량생산 물건들에 비하자면, 대부분은 한정된 수량으로 생산되는 소수의 엘리트 물건, 혹은 소수의 사적인 물건들이다. 이 물건들을 선호하는 자들은 이것을 딱히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해서 구매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복합적인 욕망을 교차 투영시킨다. 가령 예쁘다, 오래 간직하고 싶다,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 같다, 제작자의 손길이 느껴진다, 뭔가 유일한 것을 갖고 있다는 느낌에 자아가 숭고해지는 것 같다 등 여타의 개인적인 욕망들이 투영될 여지를 반영한다. 이 소수의 저작권, 혹은 엘리트 물건들과 대량생산물과 비슷한 점이 있다면, 등록된 물건이라는 것이다. 다른 점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차원에서 취향이 반영된 문화생산물이라는 점이다.
물건의 약사에서, 인간사로 논의를 돌려보자. 얼마 전에 파리에서 한 언론사에 대한 총기사건이 벌어졌다. 프랑스의 젊은 청년들이 언론인과 노인 삽화가를 죽인 일이었다. 발단은 성스러운 인물에 대한 각기 다른 표현방식과 그것의 소비에 있었다. 하나는 매우 천박하게 조롱함으로써 그 아우라를 발가벗기는 스타일을 대량생산해내는 시스템 속에서의 소비. 다른 하나는 역사적으로 해온 습관 그대로 성스러운 영역을 보존하려는 숭고의 논리. 물론 이런 성스러운 것 혹은 숭고한 어떤 유일성과 천박한 대량의 복제 사이에는 항상 갈등이 있어왔다. 엘리트주의와 대중주의, 아트와 상용품(대량생산), 전통과 현대(키치), 남자와 여자(출산이라는 복제) 혹은 이성애중심주의와 LGBTIQ lmnop(성소수자 인권단체) 등의 사이에서처럼.
현대에 이르러 이런 갈등들은, 물론 새롭지 않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이 갈등 사이에서 배태된 세대들이 자행하는 폭력의 잔인함 냉소적 강렬함이다. 아주 오래된 역사적인 갈등 속에서 왜 총으로 해당 대상을 매우 잔인하게 일일이 쏴 죽이는 사건을 파생시키기에 이르렀냐는 것에, 그토록 노력한 어떤 휴머니즘적,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예술적 기타 등등의 노력은 도대체 뭐였냐는 질문에 이르는 것이다. 노력과 애증의 결과로 겨우 낳은 자식세대가, 어째서 그들의 할아버지 세대를 처단하기에 이른 것인가.
물건들의 위계질서
물건들 사이에도 위계질서와 갈등이 있다. 대량생산물이라는 어떤 천박함과 예술작품이라는 어떤 숭고함 사이에 놓여있는 차이들은 그것의 생산 메커니즘과 소비-소유 메커니즘, 그리고 엘리트주의 속에서의 서술과 단순 사용 매뉴얼에 이르기까지 그 차이들은 잔인할 만큼 극단적으로 차별화된다. 오늘날의 인간사가 그렇듯이, 그 물건들의 위계질서는 상품들의 위계질서로 대체됐을 뿐 갈등의 메커니즘 자체는 불완전한 역사가 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어떤 물건이 감정이 있거나, 적어도 기억장치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언젠가 물건들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애도하며,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획일적인 대량생산물의 글로벌한 유통과 소비, 숭고한 예술작품들의 전지구적인 키치화와 나아가 새로운 특정 예술-상품으로의 재생산. 이 둘 사이 교배에 의해서 태어난 새 세대의 물건들이 적어도 인간계와는 달리 뭔가 극단적인 액팅아웃을 하지 않는 것은 약간 다행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결코 순수 온화한 존재들일 수는 없다. 때로 그들은 매우 공격적이고 직접적이다. 동시에 때로 방어적이며, 때로 거부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처한 맥락 자체가, 유사-역사, 유사-메커니즘이라는 (가상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이들은 전 세대처럼 ‘그것이 아니오’라는 모더니즘적 히스테리 반응을 모른다. 즉, 히스테리적 증상이 없는 한, 극단적인 액팅아웃도 생기질 않는 것이다. 그것이 폭력적이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일단, 지금의 물건들이 하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는 ‘소비 혹은 소모’, 다른 하나는 ‘그럴수도 있겠죠’ 라고 하고는 딴 짓 하기.
근-현대에 적어도 한 번쯤 역사는 반복됐다. 1960~1970년대를 거쳐 반성된 움직임은 1980~1990년대를 거치면서 ‘포스트’ 혹은 ‘유사’ 혹은 ‘차용’의 메커니즘으로 반복됐다. 이제 역사는 그 포스트-역사를 참조하는 듯하다. 참조란 행위는 역사로부터의 어떤 거리감, 즉 객관성이 어느 정도 생겼고, 그것을 다른 차원으로 변형시킬 준비가 됐다는 증상적 행위다. 이 참조란 행위는 쉽게 관심을 돌리는 행위라고 하겠다. 사실 역사에서, 관심의 몰두 혹은 집중과 분산 사이에서 갈등했던 히스테리적인 반응이 사이코패스나 히키코모리와 같은 질병적 상태를 더 많이 잉태했기에, 현시점에서의 관심 돌리기, 환기 역할은 중요하다. 물론 새 세대의 물건들이 새로운 페티시의 재영토화할지, 아니면 거부와 그것의 반복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히스테리적 반응의 반복이 될지, 혹은 실로 취향의 차원에서 관심 밖의 어떤 차원이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 새로운 미술공간에서 먼저 등록된 물건들을 예로 들어보자. 이들은 모더니즘적 숭고함과 포스트모더니즘적 키치 사이에서, 순수미술형태와 용도 사이에, 형태와 색깔과 배열 사이에 있다(존재한다). 그런데 이 물건들은 이 거부와 동경, 쓸모와 특수성 사이에서 존재하는 어떤 in-between의 존재감을 만끽하는 듯하다. 이들은 단단해보이고, 견고해보이며, 더욱 강해지고, 더욱 날렵해지고, 메커니즘적으로 시스티믹해지려는 듯하다. 물건에도 욕망이 있다면, 이런 in-between적인 상황에서 교배되고 태어나 이 세상이 놓였을 때 그들의 유전자를 무관심하게 대상화시키는 ‘object’가 되려는 게 아닐까. 즉, 이들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근친상간적 교배의 산물임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인하지 않는다. 적어도 억압으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가 생긴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물건 고안자의 이름은 이은우. 디자인 툴을 사용하여 오브제를 구상하고, 업체에 프린팅을 맞긴다. 물론 제작을 맞긴다고 해야겠지만, 왠지 지금은 ‘프린팅’이란 말을 쓰고 싶다. 아마도 이 제작자는 앞으로도 어떤 특정 물건들을 참조, 변형시키고 역사적, 일상적 여타의 물건들이 환기시키는 기존의 아우라를 끊임없이 교차-통풍시켜 나갈 것으로 보인다. 보다 자세한 제작과정이나 전시 장면, 평면작업에서 오브제 작업으로의 변화과정, 레디메이드 설치 과정과 공간작업, 그리고 미술사적인 참조 등은 제작자의 홈페이지를 참조하라. 나는 최근 이 제작자의 오브제 작업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했다. 나는 변화에 있어서 과거를 소급해서 서술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그보다는 실제로 단절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이은우의 최근 작업이 명쾌한 어떤 출발선으로 보인다. 이들은 부모세대와 말끔하게 단절하고, 영리하게 앞으로도 한동안은 반복, 재생산되면서 스스로를 속도감있게 참조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
이 은 우 Lee Eunu
1982년 출생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예술사와 동 대학원 전문사를 졸업했다. 2009년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린 개인전을 시작으로 2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2005년부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오는 3월에 아트선재센터 라운지에서 전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