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정현
정현의 작품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 연민이 서려있다. 강렬한 표현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면을 드러내는 정현이 10월 15일부터 11월 9일까지 학고재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이번 전시에서는 재료가 가진 특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조각과 드로잉 신작을 함께 선보인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짊어진 무게와 오랜 시간이 걸려 완성되는 ‘아픔 후의 성숙’이 그의 작업에 어떻게 반영됐을까.
소진된 물질들의 에코그래피
강수미 미학, 동덕여대 교수
6톤의 무쇠로 무지막지하게 만든 검은공과 1g이 채 안 되는 콜타르 용액은 어디서 만나는가? 몸체 전체가 쩍쩍 갈라져 그 틈새마다 검은 기름때로 눅진한 낡은 침목(枕木)과 바늘 한 점 꽂을 데 없이 단단한 흑색 석탄덩어리는 또 어디서 접점을 갖는가? 그것들 모두가 여타 소소한 사물들보다 자체의 강력한 물질적 속성을 외관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아니면 그것을 마주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로부터 제각각 다르지만 지각의 강도 면에서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질량, 밀도, 부피, 색채, 형태를 보게 된다는 점에서? 관점에 따라 다양한 관계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 정현의 경우에 한정하면 그것들은 조각의 지평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 넘치는 강렬함과 표현성을 내장한 물질들은 정현의 창작세계에서 ‘인간’이라는 근원적이고 현실적인 예술 주제 (기의)를 가시화하는 모티프(기표)로써 접점을 형성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조각에서 인간의 몸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의 드로잉에서 인간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는 쪽 또한 나이다. 여기 감상자로서 나는 그의 작품들이 내뿜는 막대한 물질적 존재감, 언어를 희박하게 만드는 시각적 표현력, 관객과의 즉물적(literal) 조우를 유도하는 설치의 힘을 인간적인 의미나 맥락으로 약화시키고 싶지 않다. 이를테면 국내 굴지의 철강회사에서 만들어 사용한 일명 ‘파쇄공’이 10여 년 간 25m 높이에서 수직 낙하돼 쇠의 불순물을 정제하는 동안 16톤에서 8톤으로 소진된 과정을 인간 시련의 역사와 유비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 수십 년간 기차 하중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견뎌온 선로의 버팀목을 삶의 무게에 짓눌릴 수밖에 없는 인간 운명에 대한 존재론적 비유로 해석하거나, 검붉게 녹슨 철근들이 얽히고설킨 형상을 인생의 신산(辛酸)한 속성과 유비시켜 논하기를 원치 않는다. 통상 그런 해석이나 논리는 여차하면 센티멘털리즘으로 변질돼 사람들에게 상투적 위로만 남기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나의 비평 방향과는 상관없이, 혹은 그런 차원에 앞서서 작가는 애초부터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작품을 했을 수 있다. 다르게는, 인간과 인간형상의 면대면 관계 및 교감에 자기 작업의 가치를 설정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작가는 오래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이 시대의 실존상, 뻥 뚫리고 찢겨지고 일그러진 절박한 인간의 순간순간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려고 한다.” 1992년《 월간미술》에 기고한 작가의 글에서 발췌한 이 문장은 조각가 정현이 둔중한 진흙덩이를 각목으로 퍽퍽 쳐내고, 딱딱한 석탄덩이를 끌로 깍깍 파 들어가고, 찐득한 콜타르를 종이 위에 쫙쫙 그어나가는 촉각적 표현법으로 무엇을 가시화하고, 어디에 도달하고자 했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 그것은 문맥상 여지가 없듯,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시각적으로 수사(修辭)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휴머니즘적 미술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니 질척거리는 감상주의가 두려워 그의 미술에서 인간을 피하려 한 나는 틀렸다.
물질과 인간의 정밀 조영(照影/造營)
그런데 정현의 조각이 인간을 은유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좋다고 느낀 것일까? 그의 작품들이 감상자의 휴머니즘적 정서를 어루만지므로 감동적인 것인가? 둘 다 맞다 해도, 그것으로 충분한가? 이제까지 작가 자신은 물론 여러 논자들이 그의 작업에서 거의 예외 없이 인간을 향한 가치를 발견했거나, 반대로 인간적 가치를 통해 그의 미적 세계를 정의했다. 하지만 결코 감추거나 위축시킬 수 없는 정현 조각의 어떤 면모는 그 같은 순환논법과 순치된 인문주의로는 밝혀낼 수 없어 보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유는 사물/대상의 존재(objecthood) 자체, 행위(performance) 자체, 사물의 질서(order of thing) 자체가 정현의 미술을 결정화하는 절대적 속성 중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인간중심주의의 의미망으로 포착할 수 없는 객체다. 어떻게 우리가 아스팔트 길닦이에 쓰는 아스콘의 질적 상태를, 기찻길 침목들에 가해진 압력의 강도를, 녹슬고 삭고 붉은 부스럼을 일으키는 금속의 시간과 생태를 인간적으로 전유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 물질들이 정현이라는 미술가의 개입을 통해 산맥처럼 강인한 인간 육체의 누운 모습을 연상시키는 조각이 되고, 대지 위에 두 다리로 버티고 선 인간 군상을 암시하는 설치작품이 되고, 자코메티의 그것처럼 바짝 마른 남자 입상을 환기시키더라도 말이다.
물론 이런 논의는 작가의 미술이 그간 어떻게 전개돼왔는지를 살펴봐야 균형을 이룰 것이다.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정현을 ‘올해의 작가’로 선정하고 개인전 개최와 함께 도록을 발간했다. 거기 글을 쓴 학예사 박수진은 작가의 작업세계에 대해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는 인체의 역동성이 표현상의 중심을 이루었다면, 1990년대 중반부터는 재료와 도구가 중심이 되면서 제작과정상의 우연성이 드러난다. 특히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는 재료의 물질성이 더욱 부각되는 시기”라고 설명한다. 나는 이러한 시기 구분에 동의한다. 하지만 2014년 현재 작가의 최근작을 고려하면, 그 변화의 핵심을 좀 더 구체적으로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정현은 마닐라삼에 석고를 묻혀 골조를 만들고 그 위에 콜타르를 착색한 인체 조각에 매진하던 초기, 예술의 이름 아래 질료를 통치해 인간을 형상화한 것이 맞다. 하지만 점차 물질들의 본래 성질과 우연하고 가변적인 외적 조건에 자신의 예술적 의도와 표현 방식을 반향(echo)해가는 식으로 이행했다. 즉 작가의 조형적 목적에 물질들을 종속시켜 시각적으로든 의미상으로든 인간과 닮은 형상을 빚어내는 데서, 물질 자체가 발산하는 특성 및 주변 맥락에 작가의 의식과 감각이 메아리치듯 반응하는 식의 작업으로 나아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얼마 전 17번째 개인전에 내놓은 ‘8톤의 파쇄공’에 이르러 정현의 조각은 한 사물의 존재부터 주어진 질서까지, 물 (物) 자체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제시하는 미술의 완성형에 거의 도달한 것 같다. 인간 형태적으로(anthropomorphic) 전유되거나 인간중심적 의미로 해석되기 전에 물질이 가진 자체의 속성과 외관, 그리고 그 물질이 온몸으로 겪은 전(全)역사를 긍정하는 미술이 그것이다. 이 미술은 그럼 비인간적인가? 이 미술에는 인간이 부재한가?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몸을 닮은 그의 1980~90년대 조각은 물론 격렬한 감정의 인간 얼굴을 연상시키는 요 근래의 드로잉들과 마찬가지로, 정현의 최근 조각에 인간은 근본 축으로 내재한다. 예컨대 파쇄공 조각처럼 물 자체인 작품에도 말이다. 다만 관계의 방식이 달라졌다.
이전 작품들이 말하자면 물질의 물질성을 녹여내 인간이라는 의미를 상징하고 표현하고 추상하는 데 창작 의의를 둔 것이라면, 현재의 작품은 물질에 대한 인간의 즉각적이면서 즉물적인 반향을 목표로 한다. 이때 반향의 첫 인간은 그 물질과 조우하고 거기서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한 작가 자신이다. 하지만 그 물질이 일종의 ‘발견된 오브제’로서 미술작품으로 전시되었을 때 불특정 다수의 감상자가 얼마든지 그 인간에 해당할 수 있다. 그/녀는 거대한 크기와 무게감, 단단함, 그러면서도 긴 세월 강물에 잘 깎인 조약돌처럼 매끈함과 군더더기 없음을 갖춘 검은 파쇄공과 대면해 그 객체가 발현하는 객체성에 신경감응하며 특정한 상을 그리게 된다. 그 상을 우리는 감상자 주체의 주관에 따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 단정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10년간 셀 수 없이 많은 횟수로 공중 낙하하면서 물리적으로 마모된 거대한 무쇠 공은 사람들에게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동시에 간단히 말로 할 수 없는 응축된 통증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상상력을 발휘해 의미를 그렇게 각색하는 것이 아니라(우리는 그렇게 착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 쇠공의 지금 여기 상태에 감상자가 감응해서 부지불식간에 드는 판단이다. 그 판단의 근거는 보는 이의 주관과 심리에 있지 않고 대상의 질적, 물리적 상태로부터 발현돼, 보는 이의 지각과 의식에 현상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정현의 몇몇 조각에 에코그래피(echography, 照影)라는 용어를 적용하고 싶다.
에코그래피는 의학에서 ‘초음파 검사법’ 또는 ‘초음파 조영술’ 등으로 불리는 진단법인데, 쉬운 예로 태아의 초음파 사진처럼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신체 내부의 상태를 고주파를 이용한 반향그래프(echo-graph)로 알아내는 방식이다. 데리다는 이를 철학적 논쟁에 도입해 인간과 텔레비전 사이의 상호작용을 내재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그와 비슷하게 나는 에코그래피의 방식이 우선 작가 정현과 그가 주목한 현실의 물질들 사이에 작동했고, 나아가 잠재적 관객의 미적 경험과 물 자체로 제시된 그 물질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유추해본다. 작가가 절반으로 마멸된 파쇄공, 해체된 침목, 부러진 철근 마디를 두고 “잘 겪은 시련은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러니까 그 아름다움은 의인화된 것이 아니라 정현이라는 인간의 눈과 피부에 투영된 물질의 질적, 외형적 상태다. 그것은 우리 앞에 일시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고유의 내력으로 그렇게 존재하게 된 것이며, 우리가 그렇게 여기는 것 같아도 사실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미의 주체와 객체 관계를 이렇게 역전시키고 복합화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정현의 최근 작업은 ‘인간’을 다른 지각의 조영술로 새롭게 조영(造營)하는 중이라는 비평이 개시될 수 있을 것이다. ●
정현은 1956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조소과와 파리국립미술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1992년 원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 후 서울, 도쿄, 베이징, 프랑스 등에서 17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그룹전 및 기획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금호미술관 외 다수의 기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으며 2014년 제28회 김세중조각상 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